〈 30화 〉 30. 9층 계단
* * *
병실을 나온 이후 세나는 계속 9층 계단을 떠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병실로 돌아갔을 터였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는 여사님들의 구설수가 몸서리치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설수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갑갑했다.
병실에 있기 보다는 야경을 보는 게 더 좋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우와 함께 서서 야경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우가 지금 뭘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 정우가 알 수도 없을 거였다.
무엇보다도, 정우가 세나 자신의 안부를 궁금해할지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만일 정우가 소희에게 빠져 있다면 세나와의 오늘 하룻동안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닌게 될 거였다.
그저 내일 퇴원하고 나면 신기한 추억으로 끝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정우와의 오늘 하루는 세나로서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거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는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오늘이 지나 정우가 퇴원하게 된다면 그 뒤로는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다면 정우 같은 애송이는 스킨쉽을 해주긴 커녕 쳐다도 보지 않았을 세나였다.
지금도 주변에는 귀엽고 예쁜 세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들이 넘쳐났다.
그런 남자들을 유혹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은 대부분 닳고 달은 남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험이 반복될 때마다 세나는 상처 받아왔었다.
하지만 정우를 겪게 된 지금은 정우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남자에 가까울 것 같았다.
외모도 마음에 들었고, 건강한데다, 성격까지 착하고 순했다.
그런 정우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졌다.
이대로 퇴원과 함께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친구라는 소희가 아직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대고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소희가 있어서 정우가 연락을 회피하든, 아니면 연락을 받다가 소희에게 걸리든, 뭐가 됐건 그 자체로도 망신이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세나는 용기를 내서 정우에게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옆에 아직 소희가 있을지도 몰라 문제를 일으킬 표현은 피하고 싶었다.
길게 적다가는 정우에게 매달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싫었다.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너무나 간결한 메시지였기에 세나의 진심은 숨겨져 있었다.
잘자
잠시 후 정우에게서 답이 왔다.
누나도.
정우로부터도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만큼이나 간결한 대답이 왔다.
같이 있을 때만 해도 눈치보며 존대를 해오던 정우가 아닌 것도 같았다.
왠지 소홀히 대답하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메시지에는 정우의 마음도, 소희가 옆에 있는지 여부도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세나의 고민이 이어졌다.
더 물어보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망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점 더 정우의 모습이 떠올라 애가 탔다
삼십분 정도 지났을까.
용기를 낸 세나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볼래?
오늘 하루 종일 정우에게 지시하는 투로 일관했던 세나로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정우로부터 답은 오지 않았다.
분명히 메시지를 읽은 건 맞는데 답이 오질 않자, 세나는 초조해졌다.
‘그 꼴보기 싫은 류소희가 아직도 옆에 있는 건가?’
‘나에게 관심은 있으면서 튕기려고 답을 안하는 건가, 애송이 주제에?’
‘아니면 나에 대한 관심이 그새 식어 버린 건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나는 초조함에 9층 계단에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결국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이제는 소희가 정우의 옆에 있건 없건 상관 없었다.
만일 소희가 자신의 연락을 문제 삼는다면, 자신도 맞불을 놔 버릴거였다.
아직까지도 환자인 정우 옆에 있는 ‘류소희 간호사’도 함께 책임지게 할 터였다.
나름대로 간절함을 담은 몇 마디 단어들이 세나의 여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보고 싶어. 기다릴께. 엘리베이터 반대쪽 계단. 9층.
메시지를 보내자 마자 문장 앞에 있던 '1'이 사라졌다.
분명히 정우가 확인한 것을 세나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답이 없다고 병실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 잠들면 이 밤이야 금방 지나갈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밤이 가버리면 정우도 멀어질 것만 같았다.
오늘 밤을 이렇게 흘려 보내기는 싫었다.
**********
세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 앞에 야경이 보이는 것을 보니 9층 계단인 듯했다.
메시지를 보낸 후 앉아서 기다리다가 벽에 기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던 것이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보니 몸에 뭔가가 둘러져 있었다.
병실에서 쓰는 하얀 시트였다.
그제야 옆을 보니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잠깐 조는 사이에 정우가 온 것이었다.
정우는 세나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요.”
정우는 세나의 메시지를 받고 한참을 있다가 잠이 오질 않아 와 본 거였다.
정우가 미소 짓는 이유는 방금 전 잠들어 있던 세나에게서 뜻 밖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잠든 세나는 깨어있을 때와는 달리 도발적이기보다는 귀여운 소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병실에서 나신으로 시트를 두르고 서 있을 때는 여신 같기도 했던 터라 다채로운 세나의 느낌이 놀라웠다.
“안 들어가고 뭐해요?”
아직 잠이 덜 깬 세나를 정우가 놀렸다.
간절히 기다리던 정우가 나타나자 세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표를 내지는 않았다.
“너 기다렸지. 왜 빨리 안 와?”
정우가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답도 없는데 왜 기다려요. 누나답지 않게.”
세나는 답하지 않았다.
기다리느라 애태운 티가 날까봐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말을 끊었던 정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잠이 다 깬 세나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센 척 했다.
“빨랑빨랑 다녀.”
정우는 계속 미소짓고 있었다.
방금 전의 소녀같던 표정의 세나가 이러는 건 조화롭지 않았다.
하지만 세나였기에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세나가 무심한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까 네 방에서 나오고 나서 좀 있다가부터.”
정우는 세나가 이 곳에서 자신을 꽤 오랫동안 기다린 듯해서 미안해졌다.
“오래 잤어요?”
세나가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봤다.
분명 밤10시가 된 건 확인했었는데, 지금은 10시 20분이니 적어도 15분 내외는 잔 것 같았다.
피곤이 꽤 사라져 있었다.
“잠깐 잠들었나봐. 뭘 이런 걸 갖구 왔어?”
세나가 시트를 떼내려 하자 정우가 팔로 누르며 시트를 다시 덮었다.
“혹시 누나 있으면 추워할까봐 가져온 거에요. 그냥 덮고 있어요. 감기 걸려요.”
세나가 정우를 잠시 바라봤다.
이런 배려도 할 줄 알다니 생각보다 속이 깊은 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없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
세나의 입술이 다가오더니 정우의 입술에 닿았다.
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후 입술을 뗀 세나가 말했다.
“고마워. 따뜻하네.”
세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도발적인 키스에도 정우는 가만히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스럽기도 했다.
혹시라도 정우의 입에서 작별인사라도 나올까 봐 염려되었다.
정우가 물었다.
“왜 보자고 한 거에요?”
정우 역시 생각이 복잡했다.
지금처럼 소희에게도 세나에게도 미안한 상황은 자신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별해야 한다면 오늘밤이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정우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진걸 본 세나가 일어서더니 창에 다가섰다.
“그냥. 여기 야경을 보여주고 싶었어.”
마침 정우도 마음이 아파 어려운 얘기를 하기 싫던 참이었다.
세나의 말에 그제야 도시의 야경을 인지한 정우는 감탄했다.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세나의 옆에 서며 창가에 다가섰다.
“병원에 이런 데가 있었네요. 누나 아니면 몰랐을 거에요.”
“괜찮지?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세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 때였다.
세나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적막을 깨트렸다.
세나가 전화를 받았다.
“성아니? (…) 잠깐은 괜찮아. (…) 며칠은 더 있어야 해. (…) 유라가 또? (…) 일단 알았어. 지금 바쁘니까 다시 통화하자.”
전화를 끊은 세나가 말했다.
“미안. 전화가 왔네.”
“괜찮아요.”
다시 적막이 흐르자 세나가 싫었는지 적막을 깨고 말했다.
미뤄뒀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싶었다.
“나한테 왜 세게 구냐고 했었지?”
정우가 낮에 한 질문이었다.
정우는 계속 궁금했던 질문에 대해 세나가 답해주려 하자 내심 기뻤다.
“네.”
세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원래는 나도 이러지 않았어. 어릴 때부터 내 작고 여린 모습에 날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지. 그런데 운 없게도 이것들이 하나같이 나쁜 남자, 아니 나쁜 놈들이었어. 결국 내 여린 성격을 이용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가지게 되면 사람이 변하더라구. 원래부터 걔네가 나쁜 놈들인건지 아니면 내가 빌미를 준 건지 몰라도. 그러다가 조그만 가게를 하나 운영하게 되었는데 겉만 보구서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힘든 적도 많았구. 뭐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다보니 네가 말한대로 세게 구는게 자연스러워졌나 봐.”
세나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정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들어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일까봐 어깨를 토닥이는 걸로 대신했다.
“걔네가 나쁜 놈들이었나 보네요. 누나가 빌미 준거 아니니 너무 맘에 담지 말아요.”
세나가 정우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다정하게 위로해 주는 정우에게 고마웠다.
“세게 구는 거 싫었니?”
정우도 미소로 답했다.
“아뇨. 잘 어울려요.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정우의 대답이 헤어짐을 의미하는 것 같아 세나의 마음이 아파왔다.
정우 역시 세나의 눈이 흔들리는 걸 봤다.
마음 아프지만 얘기가 나온 지금이 말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미안해요. 우리 이만 헤어…”
정우의 말을 막으려는 듯, 세나가 팔을 들어 정우의 고개를 당겼다.
세나의 입술이 다시 정우의 입술을 덮었다.
잠시 그대로 있던 세나가 입술을 뗐다.
“미안할 짓이라면 하지마.”
세나의 요구에 정우의 눈빛도 흔들렸다.
그 눈빛을 본 세나가 다시 정우에게 달려들었다.
세나의 입술이 정우의 입술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세나는 마치 정우의 입술을 열고 그 안의 육체와 정신을 모조리 빨아들이려는 듯했다.
그래도 정우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세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 이 밤이 아쉬웠다.
아쉬움에 정우를 한번 더 유혹하고 싶어졌다.
세나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하얀시트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세나는 정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셔츠 위로 이끌었다.
정우는 손끝에 닿는 세나의 부드러운 가슴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세나의 손이 바지 위로 오더니 페니스에 닿았다.
손은 쉬고 있던 페니스를 아래부터 위까지 쓸어 대면서 쓰다듬었다.
뜻밖의 시간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에 페니스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우의 입술도 열렸다.
두 사람의 혀가 부드럽게 얽히며 서로를 감쌌다.
“하고 싶어.”
애절했다.
세나의 말을 들어서일까.
정우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세나의 가슴을 움켜잡고 주물렀다.
이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마지막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그렇게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