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는 누나-61화 (62/98)

〈 61화 〉 61. 욕망과 이성 사이의 지애

* * *

소희의 방.

오전 열시.

지애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낯선 환경이었다.

돌아보니 소희의 방이었고, 소희의 침대였다.

‘맞아. 언니네 집이지.’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었다.

새벽에 욕실에서 자위 행위 후 슬립과 속옷을 갈아입은 후 방에 와서 침대에 누웠던 게 기억이 났다.

오래간만에 푹 잔 듯 했다.

과음한 때문인지, 아니면 몇 년 만에 욕구를 분출해서인지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한건, 몸은 조금 찌뿌둥했으나 정신은 개운했다.

지애는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결에 들었던 정우의 속삭임

가슴을 움켜쥐던 야만스럽던 손길.

팬티 아래와 허벅지를 비비던 정우의 페니스.

그리고 사정을 막기 위해 잡았던 페니스의 그립감.

마침내 쏟아져 나와 손바닥에 가득 고였던 점액질의 액체.

욕실에서 스스로를 달래줄 때의 두근거림까지도 떠올랐다.

지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덮었다.

다만 두 손은 새벽의 욕조에서처럼 움직이지는 않았다.

두 손은 그 곳에서 스스로를 흥분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욕망을 자제시키기 위해 있었다..

지애는 이제는 이성을 찾고 있었다.

자신을 뒤덮은 게 정우라는 걸 깨닫자마자 물리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욕조에서 자신의 몸을 만지던 스스로의 손길을 멈추지 않은 것도,

정우를 떠올리며 흔들린 것도,

모두 다 후회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지애 자신은 정우를 특별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유혹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냥 피해자인데 지금 그걸 고민하는 사람이 자기 뿐일거라 억울했다.

게다가 정우는 나갈때까지도 자신을 소희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 이 일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하나 뿐이었다.

앞으로도 정우에게 밝힐 수 있을 지조차 불투명했다.

심지어 정우가 소희의 남자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점도 지애를 복잡하게 했다.

그 때문에 이 일을 밝혀도 되나 하는 것조차 지애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으니 억울함은 더욱 컸다.

침대에 누운 채 옆을 보는데 바닥에 놓인 정우의 보호대가 눈에 띄었다.

저 보호대는 정우가 새벽에 이 방을 다녀갔다는 유일한 증거물이기도 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고민스러웠다.

불현듯 지금이라도 누군가 갑자기 문을 연다면 보호대를 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오늘 새벽에도 문고리를 걸어 두지 않아 정우가 무단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지애는 흠칫 놀라 방문을 바라봤다.

다행히 문고리는 걸려 있었다.

지애는 그제야 샤워를 마치고 온 자기가 문고리를 확인하면서 잠궜던 게 기억났다.

두 번이나 뜻하지 않게 문이 열린 게 트라우마로 남았었나 보다.

아마 이후로는 문고리 잠그는 걸 잊지 않을 터였다.

지애는 잠에서 깼지만 이대로는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욕실에서부터 해답을 내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정우는 고사하고 사촌언니의 가족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터였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하고 넘어가야 하나.

만일 숨기고 넘어갔다가,

아마도 정우와 소희가 그 시간에 대해 잠깐이라도 대화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었을 때 사정을 한 상대방이 소희가 아니라 자신이란 걸 정우가 알게 될텐데,

그리고 정우는 나중에는 지애가 깬 것을 알고 있는데 어쩌나.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될 소희는 뭐라고 할까.

아니면 이걸 밝히고 정우를 혼내야 하나.

정우를 혼낸다면 어느 정도로 혼내야 하나.

추행으로 고소라도 해야 하나.

그리고 이 사실을 사촌 언니네 가족들과 공유를 해야 하나.

혹시 어쩌면 정우와 소희가 사귀고 있는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거라면 문제는 단순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둘은 사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분명히 정우는 소희가 당연히 새벽의 모든 행동에 동의할 거라고 기대하는 듯 했다.

정우의 그런 언행으로 봐서는 기존에도 둘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가 있는게 분명했다.

그 육체적인 관계가 어느 정도인 것이냐는 게 확실하지 않을 뿐.

생각이 그에 미치자 지애는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가 본능적으로 궁금해졌다.

그 궁금함이 호기심에서 나아가 질투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흠칫했다.

질투를 해선 안될 일이었다.

상대는 조카인 소희였다.

어려웠다.

답도 내지 못하는 일이 있었고, 궁금한 일도 있었다.

두 사안에 대해 머리와 심장이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 때였다.

거실에서 소희와 정우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애의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정우가 벌써 오다니.’

더 이상 결론을 미뤄둘 수 없었다.

지애는 마지 못해 결정을 해버렸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정우의 실수를 밝히고 책망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정우의 행동에 자신이 흔들리지도 않았음을 밝혀야 했다.

자신이 정우에게 여지를 준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야 했다.

지애는 급히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메이크업 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잠시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메이크업할 시간도 없었고, 메이크업한 모습을 보일 이유도 없었다.

정우가 뭐라고.

정우가 뭐길래 노메이크업 상태를 감추려 했단 말인가.

지애는 살짝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옆 얼굴을 보았다.

한창인 아이들과 비교한다면 몰라도, 아직 자신의 외모도 괜찮아 보였다.

왠지 정우가 자꾸만 신경이 써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실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

지애는 재빨리 문으로 다가섰다.

바야흐로 소희가 소원과 함께 잤었다는 말을 정우에게 하려는 참이었다.

더는 자는 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지애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한 손에는 정우의 보호대를 챙겨들고서.

**********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온 지애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치 않았다.

처음에는 나오자마자 정우를 혼을 낼까 했었다.

그러나 막상 정우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반대로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다.

혼을 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정우와 소희 사이에는 새벽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공유가 안된 듯했다.

다행이었다.

지애는 일단은 자신도 그 일을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그저 무표정하게 정우를 대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지애를 바라보는 정우의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아마도 이제야 새벽에 자신이 정액을 배출한 상대가 지애였던 것을 깨달은 거로 보였다.

정우의 눈이 지애의 손에 들린 보호대에 닿은 게 보였다.

한쪽 손을 뒤로 돌린 자세로 봐서는, 정우도 보호대가 없는 팔을 숨기려는게 분명했다.

정우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지애의 눈과 정우의 눈이 마주쳤다.

정우의 눈에 미안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죄책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지애가 차가워 보여서 그랬으리라.

지애는 일단 화는 누르기로 했다.

소희는 모르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직 두 사람의 대화는 새벽에 생긴 일까지는 닿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중단시킨다면, 그러면 새벽의 일은 자신과 정우만 알고 있는 일이 될 터였다.

일단은 감추고, 화는 나중에 내도 될 터 였다.

지애는 아무 말 없이 정우를 지나쳤다.

소희는 여전히 주방에서 상을 차리는 중이었고, 두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우를 스쳐 지나가며 지애는 그대로 자기가 가져 나온 보호대를 정우에게 살짝 건넸다.

보호대를 넘겨받은 정우는 여전히 당황스러워 했다.

지애는 그냥 정우를 무시하고는 주방으로 갔다.

“소희 일찍 일어났네?”

지애는 안부 인사 후 소희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여느 아침과 다름없을 평화로운 대화를.

거실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정우만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새벽에 자신이 덮친게 지애라면,

자신이 지애에게 사정을 한거라면.

소희가 자신에게 뭐라고 할까.

이유를 불문하고 소희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소희가 그 뒤에도 자신을 받아 줄까.

“정우야. 뭐해? 와서 식사해.”

소희가 부르자 정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식탁으로 다가온 정우가 지애를 보며 입을 열려 했다.

사과를 해야 했다.

사과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차마 지애를 볼 낯이 없었다.

그 때였다.

지애가 정우를 보면서 검지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술에 갖다댔다.

비밀로 하라는 의미였다.

신호를 알아들은 정우는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지애가 소희를 바라보니 소희는 여전히 상을 차리고 있었다.

“난 세수 좀. 부스스하니 니네 보기 민망하다 얘.”

“이모 무슨 소리야? 이쁘기만 하구만. 안 그래 정우야?”

“어? 응.”

정우는 소희가 동의를 구하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지애가 아름답다는 건 정우도 익히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놀라 있어서 그런 걸 생각할 게재가 아니었다.

넋이 나간 지금은 그저 소희가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소희가 차려준 식사를 먹는 동안에도 정우는 넋이 나가 있었다.

정우의 맞은 편에는 지애가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소희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우는 밥이 입으로 가는지 눈으로 가는지도 몰랐다.

소희가 자꾸만 눈치를 줬는데도 정우의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소희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뭘 또 가지러 가려는지 찬장으로 향했다.

사과를 할 타이밍이었다.

정우가 조용히 입을 뗐다.

소희는 못 들을 정도의 크기였다.

“죄송해요. 이모.”

국을 뜨던 지애가 고개를 들더니 입술에 다시 손가락을 갖다 댔다.

지애는 지금 여기서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화제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지애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정우는 다시 입을 닫았다.

“나중에 얘기해.”

지애가 숟가락을 내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후 소희가 돌아와 옆에 앉았다.

지애는 여전히 소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정우는 그저 아무 말 못하고 밥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지애가 와인 얘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우리 어제 많이 마셨네. 몇 병이나 마신거지?”

“글쎄? 한 열병? 열 한병?”

지애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형부가 아껴둔 양주까지. 너무 많이 먹었네. 내가 좀 사다 놔야겠다.”

“아빠가 낸다고 한건데 뭘.”

“아냐. 그래도 좀 사다 놔야지. 그래야 다음에 또 마실거 아냐? 나 식사하고 와인 샵에 좀 다녀올께.”

“몇 병이나 사게?”

“글쎄. 마실 만한 걸로 적어도 대여섯병?”

“인터넷으로 안 시키고? 무거울건데 나랑 같이가 이모.”

“지금 갈래. 무거워서 넌 도움 안될 거 같은데?”

소희가 정우를 바라봤다.

“그럼 정우가 같이 가서 이모 거들면 되겠네?”

정우는 갑자기 이름이 불려 놀랐다.

고개를 들어 소희를 바라봤다.

소희가 방긋 웃으면서 정우를 채근했다.

“너도 어제 많이 먹었잖아. 나 대신 이모 좀 도와주라.”

아무 것도 모르는 소희가 자신에게 지애를 수행하라고 하고 있었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지애는 조용히 컵의 물을 마시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애초에 와인을 사오겠다는 것 자체가 정우만 따로 불러내려던 거였다.

지애는 자신의 의도대로 대화가 풀린 거라 한 숨 돌리며 다음을 생각했다.

냉정한 와중에도, 아주 조금 두근거리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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