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는 누나-62화 (63/98)

〈 62화 〉 62. 우리 둘만 아는 비밀

* * *

토요일 오전.

소희의 집 거실.

“알았어.”

정우는 어쩔 수 없었다.

지애와 둘이 있게 되는 건 너무나도 어색하고 두려웠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지애와 함께 가서 도우라는 소희의 요청을 정우는 수락하고 말았다.

지은 죄가 있기에 정우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지애와 둘이 함께 있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욕을 먹게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모든 걸 체념하고 남은 밥을 그저 기계적으로 먹고 있었다.

정우는 지애가 수저를 놓고 일어서자 그제야 숨이 쉬어 지는 듯 했다.

그러나 넋이 나가있는 건 지애가 옆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정우는 지애가 욕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치 최후를 기다리는 도살장의 짐승 마냥 넋을 놓고 있었다.

“와, 이모 예쁘다.”

소희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지애가 어느새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고 나와 있었다.

세련된 스타일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가 지애의 바디라인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애의 날씬하면서도 적절히 굴곡있는 몸매가 원피스를 돋보이게 하는 거였다.

그 아래에 흐르는 날씬한 종아리는 덤이었다.

“괜찮아 보이니?”

지애가 소희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애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정우는 여전히 두려웠다.

정우는 저 미소가 자신에게도 유효하진 않을거라 생각했다.

자신과 눈을 마주 쳤을 때의 지애의 싸늘했던 표정과는 너무나도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이모 머리 그렇게 내리고 있으니까 정말 어려 보인다.”

소희의 말에 정우는 무심코 지애를 바라봤다.

지애는 메이크업도, 옷도 모두 다 달라졌지만, 헤어스타일만큼은 조금 전 식사때와 마찬가지로 내려트린 채였다.

길게 내린 머리칼이 등까지 닿고 있었다.

“그러니? 이따 봐서 올릴까 하는데.”

“그냥 그대로 있어도 예쁜데 이모?”

“고마워.”

소희에게 방긋 웃은 지애가 고개를 돌려 정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우 밥 다 먹었으면 갈까?”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사과할 건 사과하고, 책임질 건 책임져야 했다.

정우는 지애가 어떤 화를 내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지애에게도, 소희에게도 미안했을 뿐.

소희의 배웅을 받으며 지애와 정우가 현관문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엘리베이터가 바로 내려오고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금방 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정우로서는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다.

엘리베이터에는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정우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마침내 지하에 둘이 내리게 되자 정우가 입을 뗐다.

“죄송해요. 이모.”

지애가 잠시 정우를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둘이 있게 되면 정우가 사과해 올 거란 걸 알았지만, 막상 사과를 들으니 뭐라할지 난감했다.

화내기도 힘들었고, 사과를 그냥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지애는 대답을 보류했다.

고개를 돌리고서 대답없이 차를 향해 걸어서 갔다.

지애가 말없이 걷자 정우 역시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정우는 지애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더욱 몸둘 바를 몰라 할 뿐이었다.

차를 세운 곳까지는 꽤 오래 걸어가야 했다.

지애는 어제 저녁에 공연히 소원을 따라 나선 것 같았다.

원래 엊저녁만 해도 차를 지상의 가까운 곳에 세워두지 않았던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오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정우와 소희가 함께 형부의 차 안에 숨어있는 걸 알 일도 없었는데.

그걸 알지 못했다면, 어쩌면 지금 마음이 더 편할지도 모르는데.

조금 걷다 보니 저만치 지애의 차가 보이고 그 옆에는 형부의 차가 서 있었다.

음주로 인해 다른 직원의 차를 타고 골프장까지 갈 거라던 형부의 말이 생각났다.

“타렴.”

주차된 지애의 고급 세단에 두 사람이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 안은 따뜻하면서도 은은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나고 있었다.

그런 정우는 그런 걸 즐길 게제가 아니었다.

같은 밀폐된 차 안이라 해도 어제 소희와 함께 있었던 소희 아빠의 차와는 달랐다.

정우는 간신히 지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웠지만 차갑고 엄해 보였다.

어제 길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마냥 예뻐 보이기만 하던 이모가 아닌 듯했다.

정우는 다시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모”

사실 지애는 차에 타고 나서 조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막상 밀폐된 공간에 정우와 둘이 있게 되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정우를 데려 나온 건 결코 아니었다.

자신의 이성과는 다르게, 몸은 정우의 체취와 목소리에 반응하는 듯도 싶었다.

몇 년 동안이나 잠자던 자신을 깨운 상대가 아니었던가.

정우의 말이 이어졌다.

“새벽에는, 이모가 아닌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이모.”

지애는 그제야 대답을 했다.

정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아닌 줄 알았다면, 누군 줄 알았는데?”

정우의 생각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지애가 몹시 화난 게 틀림없었다.

화난 지애가 자신의 사과의 꼬투리를 잡아 또 다른 어려운 질문을 돌려보낸 것 같았다.

정우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새벽에 자신이 누나라고 호칭한 것 같았는데, 그걸 이모가 들었는 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침에 자신이 소희와 나눈 대화 역시 이모가 들었는 지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알고 있다면 숨기는게 더 화를 나게 할 거 였다.

그리고 모르고 있다면 지금 여기서 소희와의 관계를 밝혀서는 안 되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한편, 지애는 지애대로 공연한 걸 물은 듯 싶었다.

정우의 입에서 소희라는 말이 나온다면 자신의 선택지가 더 어려워질 거였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 실토한 정우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많이 취해 있었나 봐요. 예전 여자친구인 줄 알았어요.”

말도 안되는 거짓이었다.

그렇다고 사실을 대답할 수도 없었다.

자신과 소희가 육체적으로도 어느 정도 가까워진 걸 이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정우는 소희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야만 했다.

지애는 정우의 답이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분명히 정우의 상대는 소희였다.

그러나 정황상 자신을 욕보이려고 의도한 게 아니란 걸 알았기에 반은 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지애의 시선은 옆으로 향해 있었다.

시선이 닿은 창문 너머에 형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에서 어제 밤 둘이 함께 숨어 있었던 걸 내가 뻔히 아는데.’

지애는 정우가 거짓으로 대답하는 게 괘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희의 이름이 정우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게 다행스러웠다.

정우가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우문현답 같았다.

그냥 이대로 정우와 자신 둘만 정리하면 이 일이 끝날 수 있었다.

정우가 생각한 상대방이 소희라는 걸,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정우가 알고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우가 소희를 지켜주려 한다는 것도 느껴졌다.

듬직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아쉬웠고, 소희가 부러웠다.

캐 묻는 건 여기까지여야 했다.

마지 못해 믿어주는 척 했다.

“아무리 여자친구라고 해도.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그런 짓을 하다니. 데이트폭력이라는 말도 못들어봤니?”

지애는 뭐라도 얘기해야 했다.

그냥 가슴이나 만졌다 하더라도 비난 받을 수 있는 행동었다.

그런데 정우는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에 페니스를 부비고 사정까지 해버린 거였다.

인생의 선배로서 잘못을 지적하고 결론을 내줘야 할 것 같았다.

다음 주면 이 동네로 이사를 올 참인데, 정우와 서먹한 상태에서 마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다신 안 그럴께요.”

정우는 풀이 죽어 있었다.

정우가 예의 바르고 성실한 건 지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저렇게까지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럴 일도 없을 거였다.

앞으로는 그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을 테니까.

목 뒤가 갑갑해진 지애가 두 손으로 뒷목을 쓸어 올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두 손이 긴 생머리를 움켜쥐자 뒷목이 드러났다.

지애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발그레한 반점이 드러났다.

“아, 이모. 상처... 나게 한 것도 죄송해요.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정우는 지애의 움직임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옮겼다.

정우의 눈에 새벽에 남긴 키스마크의 흔적이 보였다.

정우가 다시 한 번 놀랐다.

키스마크가 사라질 때까지 지애는 두고두고 자신을 원망할 터였다.

지애가 아침부터 헤어를 계속 내리고 있는 이유는 사실 키스마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저녁에 없던 키스마크가 뒷목에 있는 걸 누구에게도 보일 수는 없었다.

단 한 사람, 가해자인 정우만 빼고.

지애는 정우에게 고의적으로 보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정우의 사과를 피할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오해를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걸 여자의 몸에.”

자신은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심리였다.

낙인을 찍는 행위는 가학적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가슴을 가혹하게 움켜쥐던 정우의 가학적인 손길에는 반응했던 지애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이대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정우도 시인하고 있으니.

정우를 상대로 소송을 걸 것도, 그렇다고 자신을 책임지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오늘 새벽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거다?”

이대로 이 일을 묻는게 좋을 듯 했다.

지애는 정우에게 입단속을 했다.

정우 역시 그러기를 바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차의 시동이 걸리고 차는 주차장을 떠났다.

지애도, 정우도 이제야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지상으로 나오게 되자 지애가 차창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 내음이 상쾌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은 모른 채 각자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지애가 와인을 사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었다.

와인은 핑계였을 뿐, 정우와 대화를 하고 싶은게 본래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정우와 대화는 마쳤으니, 이제는 와인을 사야 했다.

처음 지애가 향했던 와인샵은 아직 오픈을 안하고 있었다.

지애는 할 수 없이 백화점으로 향했다.

좀 비싸긴 하지만, 그나마 무난하게 좋은 와인을 고를 수 있는 곳이었다.

지애는 와인코너에 가서 마음에 드는 걸로 한 세트를 샀다.

구매한 와인을 정우에게 맡겼다.

꽤 무거웠는데도 정우는 불평없이 잘 들었다.

듬직했다.

와인을 사고 나니 딱히 할 게 없었다.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사람이 꽤 있었다.

아직 둘 사이에 서먹한 기운이 감돌았다.

새벽에 정우가 지애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두 다리 사이에 사정을 한 터였다.

고작 말 몇 마디 나눴다고 금새 어색함이 풀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사람이 꽤 있었다.

지애가 먼저 빈 자리를 찾아 끝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정우가 따라갔다.

지애가 몸을 앞으로 돌렸다.

지애와 마주보고 있게 되는 모양새가 이상해진 정우 역시 몸을 돌렸다.

한 손에 무거운 와인세트를 든 채, 몸을 돌리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간신이 몸을 돌리고 서있는데 꾸역꾸역 타는 사람들로 인해 정우의 몸이 뒤로 밀렸다.

건장한 정우이지만, 사람들이 몸으로 밀어대니 방법이 없었다.

정우는 최대한 버티고 버텼다.

이모에게 닿는게 실례일거 같았다.

이모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지애가 정우의 양 팔을 잡았다.

그리고 정우의 등 뒤에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이 느껴졌다.

등을 누르는 그 느낌은.

바로 지애의 젖가슴이었다.

놀란 정우가 옆을 돌아봤다.

지애가 정우의 등에 가슴을 밀착한 채 뒤에서 기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지애의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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