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80. 현영의 당부
* * *
토요일 밤
정우의 집
지수의 집에서 나와 집에 돌아온 정우는 샤워를 방금 끝낸 참이었다.
지수와의 두 번의 관계는 꽤나 자극적이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 윤미와 발가벗은 채 마주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수가 잘 수습해 준 덕분에 그런대로 무난히 잘 돌아올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소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정우야, 잘자. 답문이랑 전화는 안 해도 돼. 소원이가 옆에 있어. 난 이만 잘께. 내일 저녁에 봐.
원래 정우는 샤워 후 개운한 상태에서 소희와 통화하기 위해 연락을 미루었던 거였다.
그런데 소희로부터 연락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왔으니 따로 연락할 수 없었다.
정우가 수건으로 머리를 비비며 소파에 앉으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소희인가 싶어서 봤더니 번호만 뜰 뿐 이름이 뜨지 않았다.
야심한 밤에 모르는 번호라니.
정우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 하며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왜 연락 안 해?
세나였다.
간만에 연락온 세나가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짜증을 부리는 모습에 본인도 화날 법 했건만 정우는 반갑기만 했다.
오히려 세나다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그럴 사정이 있었어요.”
정우는 어제 저녁에 소희의 요구로 인해 세나의 번호는 물론 SNS 마저도 삭제했던 것이다.
때문에 세나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이름이 뜨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번호가 없으니 정우가 세나에게 연락할래야 연락할 수가 없었다.
사정은 무슨 사정?
“뭐, 그냥 이런 저런 일이 있었어요.”
정우는 구체적인 사유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차해 보였다.
그리고 혹시 소희의 요구로 세나의 번호를 지웠었다는 걸 세나가 알게 되면 공연히 자극하게 될 소지도 있었다.
그저 지금 전화온 세나의 번호를 잘 외워둬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걸 알지 못하니 세나는 세나대로 연락을 하지 않는 정우에게 뿔이 난 거였다.
혹시 정우가 자신을 잊은건 아닌가, 또는 함부로 생각하는건 아닌가 고민스러웠었다.
그랬기에 정우에게 몇 번을 망설이다 전화한 참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정우가 반가워하자 세나의 짜증과 염려는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세나는 어느새 정우를 깊이 좋아하게 된 거였다.
“어제 오전에 보고 헤어졌으니 우리 하루 못 봤네요. 오늘 외출한다더니 잘 해결되었어요?”
뭐, 나도 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 그럭저럭 해결되었어. 지금은 병원이야.
정우는 세나가 어디 있을지 궁금했다.
문득 세나와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던 9층 계단이 떠올랐다.
“병원 어디? 9층 계단요?”
세나만의 비밀공간이던 그 곳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둘이 몸을 섞던 그 때가 떠올랐다.
정우는 페니스가 슬그머니 일어서는게 느껴졌다.
병실에서 정우의 핸드폰을 밖으로 던지겠노라며 협박할 때의 세나의 눈부신 나신도 함께 떠올랐다.
응, 기억하네? 바로 거기야.
정우는 지금이라도 가보고 싶었다.
9층계단에서 야경을 내려다 보면서 세나와 안고 싶었다.
“아, 가고 싶다.”
올래, 지금?
마침 세나도 정우를 원해 오고 있었다.
정우는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진심으로 가고 싶었다.
가서 세나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갔다가는 내일 아침 과외에 지장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연의 과외를 맡았으니 책임감있게 행동해야 했다.
“미안해요. 가고 싶지만, 내일 아침에 과외가 있어요. 게다가 첫 수업이라.”
과외? 몰랐네?
“갑자기 하게 되었어요. 용돈도 바닥나구 해서요.”
어머. 그럼 진작 얘기하지. 우리 가게 알바도 필요한데.
“알바도 뽑아요?”
그럼. 너 정도 훈남이면 언제든 환영하지.
“하하, 고마워요. 생각해 볼께요.”
만난지 3일째라서 그런지 정우에게는 여유마저 생기고 있었다.
정우는 슬슬 졸렸다.
목요일부터 3일간 여러 명의 여인들을 상대로 강행군한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졸려요. 저 내일 몇시에 가요?”
오후 세시쯤 괜찮아?
시간은 괜찮았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세시면 식사시간이 지난 때였다.
“좀 더 일찍 봐서 식사 같이 안하구요?”
병실에 여사님들 많아서 같이 밥 먹기도 곤란해.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도 눈치 보이구. 그냥 밥 먹구 와.
정우는 그렇게 약속을 잡고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은 아마도 커피라도 사들고 가서 휴게실 같은 곳에서 담소나 나눠야 할 것 같았다.
9층 계단 같은 곳을 찾아서 그저께 밤처럼 살을 섞기에는 대낮이라 곤란할 거였다.
세나에게 면회간 걸 소희가 알지 못하게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세나의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어제와 그제보다는 자신에게는 한층 부드러워진게 느껴졌다.
정우는 만족스러워 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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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9시 50분경
나연의 집
정우는 과외를 위해 나연의 집 앞에 도착한 터였다.
벨을 누르려는데 문득 오늘 나연의 복장은 어떨지 궁금했다.
목요일에 처음 봤을 때는 몸에 밀착하는 트레이닝복이었고,
어제 카페에서 만났을 때는 타이트한 셔츠에 하의는 역시나 밀착하는 요가복이었다.
나연을 본 이틀 다 나연의 몸매가 두드러지는 차림으로 만나서인지 정우는 오늘도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우는 이내 과외교사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나연은 입시를 목전에 둔 재수생이었다.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차리려고 했다.
정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나연이 반가워하며 문을 열어줬다.
“오빠, 왔어?”
의외로 나연의 복장은 평범했다.
단정한 티셔츠에 펑퍼짐한 바지였다.
정우는 나연의 복장에 한편으로는 기대가 무너져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되기도 했다.
과외에 집중하기에는 그 편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정우가 들어가자 솜이도 달려 나왔다.
솜이는 꼬리를 흔들며 정우를 반겼다.
“선생님 오셨어요?”
나연의 새엄마 현영이 나오면서 정우에게 인사했다.
현영은 어제와는 달리 한껏 꾸민 채였다.
자그마하고 정숙해 보이기만 하던 현영이 화장을 하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과 귀여운 모습이 공존해 있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현영의 모습에
나연의 복장이 기대에 못 미쳤던 탓에 실망했던 것 이상으로
정우의 가슴 한켠에서 설레임이 솟아나려 할 지경이었다.
정우는 잠시 현영을 놀라서 바라봤다.
현영은 그런 정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따로 청했다.
“선생님, 수업 전에 잠깐 보실까요?”
현영은 정우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 안은 큰 책장과 대형 책상, 그리고 꽤나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독서용 스탠드가 하나 있었다.
평상시엔 사람이 쓰지 않는 방 같아 보였다.
정우가 방 안을 둘러보는데 현영이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과외비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과외비는 물론 선불이긴 했지만, 막상 돈을 받자 정우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강아지를 구해준 덕분에 엉겁결에 시작하게 된 과외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정우는 현금이 필요했으니까.
“우리 나연이 잘 부탁드려요. 솜이 구하시다가 다치신 것도 있다고 들어서 조금 더 넣었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볼 일이 있어서 좀 나갔다 올께요. 집에 태연이도 있을 테니 솜이가 귀찮게 하거나 할 염려는 없을 거에요.”
현영과 단 둘이서 방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점점 정우의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었다.
은은하고 향긋한 향이 풍겨왔다.
작고 예쁜건 몇 번이나 관계한 세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나에게 앙칼진 고양이 같은 면모가 있다면 현영에게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요정 같은 면모가 있었다.
현영 딴에는 사려깊게 설명한 거였지만, 정우는 솜이가 두 차례나 자신의 발에 마운팅을 하던 모습이 기억날 뿐이었다.
꽤나 망측했던 상황이 떠오르자 정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말씀 드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나연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다는 거.”
현영의 아름다운 모습과 목소리에 취해 있던 정우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현영은 그런 정우의 모습이 암묵적 동의라고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조심해 주세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네. 염려 마세요.”
정우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사실 마지막 현영의 당부가 정확히 어떤 말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워낙 두루뭉수리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영과 단 둘이 대화하느라 정우가 취해 있어서였기도 했다.
아마도 나연의 노출을 조심하라는 말 같았다.
뭐가 됐건 스탠다드한 과외만 하면 괜찮을 거였다.
거실에서 정우를 기다리던 나연이 정우를 방으로 이끌었다.
현영은 방으로 들어가는 나연과 정우의 뒷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가방을 챙겼다.
집을 비우는게 염려되긴 했다.
그러나 거기에 정우에게 별도의 당부까지 해둔데다, 태연이도 솜이도 있을테니 별일 있으랴 싶었다.
“얘들아, 엄마 나간다. 샵 좀 돌아보고 볼일 보고 돌아올께.”
태연의 방문이 열리더니 태연과 솜이가 달려나왔다.
둘 다 새엄마의 외출을 아쉬워하더니 현영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이내 태연의 방으로 돌아갔다.
정우는 나연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교재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나연과 책을 함께 볼 거였다.
그 정도는 어제 미리 익스큐즈가 되었던 부분이었다.
어제와 달리 책상에는 의자가 둘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태연의 방에서 여분의 의자를 하나 가져온 듯 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
정우는 책을 내려다 보며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나연이 필요한 부분을 잘 짚어내서 기초부터 시작하는게 중요할 듯 했다.
그러나 나연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책을 보기는커녕 한쪽 팔을 괴고 앉아서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빠, 근데 내가 왜 오늘 아침에 오라고 한 줄 알아?”
수업에 진지한 정우와 달리 나연은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의외의 소리에 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연을 바라봤다.
나연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정우는 현영의 당부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부 자체가 잘못된 것이란 것도 곧 깨닫게 되었다.
바로 , 나연에 대해 현영이 알고 있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