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는 누나-87화 (88/98)

〈 87화 〉 87. 지애의 변덕

* * *

일요일 정오 무렵

지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지애는 방금 전까지 이번 금요일에 이사올 집에 있다가 나가던 참이었다.

가구를 비롯한 세간살이들을 들일 자리를 확인하러 온 거였다.

꽤나 넓은 곳이라서 지금 자신의 짐을 들이긴 충분했지만, 이삿날 인부들을 우왕좌왕하지 않게 하려면 미리 와서 봐두어야 했다.

집을 둘러보러 왔을 때도 본 터이지만, 홀로 고즈넉히 내려다 보는 전망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때문에 잠시 둘러보러 온 빈 집에서 지애는 전망에 취한 채 꽤나 시간을 보낸 터였다.

사실은 전망을 내려다보며 누군가에 대한 설레임을 달랜 거였지만.

동시에 죄책감으로 인해 그 설레임을 받아들여도 될 지를 고민한 거였지만.

그 상대방이 정우라는 건 지애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샌가부터 지애는 홀로 있을 때면 자꾸만 정우를 떠올리게 되었다.

지애는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을 채근하고 있었다.

정우와는 이제 그만둬야 할 거였다.

소희의 남자친구인 정우와 더 이상 관계가 깊어지면 안될 거였다.

다행히, 정우는 지애 자신이 정우와 소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면 지금 끝내도 그나마 수습이 가능할 거였다.

훗날 정우와 소희가 깊은 사이란게 밝혀지더라도, 자신은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니.

그 순간이 된다면 아마도 정우는 무척이나 겸연쩍어 할 거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정우에게 서로 없었던 일로 하자고 다시 한번 더 확인시켜주면 될 거였다.

정우는 착한 아이이기에, 지애는 자신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차에서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자고 이미 못 박아 둔 터였다

정우도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지애는 핸드폰을 들어 정우의 번호를 바라봤다.

어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후 차에서 받은 번호였다.

무안한 나머지 말을 돌리다보니 이사에 관한 대화가 나오게 되어 자연스럽게 받은 번호였다.

차라리 번호조차 모른다면 마음 편할 것을.

지애는 삭제버튼을 찾았다.

버튼만 누르면 정우의 전화번호는 삭제될 거였다.

손가락이 잠시 삭제버튼 위에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차마 핸드폰을 터치하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있던 지애는 핸드폰 화면을 메인으로 옮겨 버렸다.

삭제하는게 내키지 않았다.

삭제는 언제든 하면 될 일이었다.

지애는 사촌언니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볼 것도 다 봤고, 더 있어봐야 쓸데없는 생각만 할 것 같았다.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로 다가서다 보니 문득 비상구가 보였다.

비상구 바깥의 계단이 궁금해져서 내다보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내 집이 꼭대기층인데?’

위 층에 또 뭔가 있나 의아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아마도 옥상이나 기계실 따위가 있을 거였다.

지애는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올라가보진 않았다.

살면서 그 계단으로 올라가 볼 일이 얼마나 될까.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지애는 하강버튼을 눌렀다.

마침 엘리베이터는 올라오고 있었다.

지하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10층에 잠시 멈춰서더니 곧 올라왔다.

잠시 기다리던 지애는 탑승해서 차가 있는 지하 1층을 눌렀다.

은은한 향이 풍겨왔다.

고급 아파트라 그런지 꽤나 고급스런 향이었다.

아마도 방금 탔다가 내린 사람이 뿌린 향이나 또는 화장품을 터였다.

[10층입니다.]

올라올 때도 10층에 섰었는데, 내려가는 길에도 10층에 서다니.

특이한 일이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같은 사람일 수도 있었고, 또는 옆집 사람일 수도 있으니.

문일 열릴 때만 해도 지애는 누가 탈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문이 열렸는데도 엘리베이터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자 의아했다.

분명히 누가 서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바깥에서 분명히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지애는 아마도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대화하느라 엘리베이터를 못 타고 있나 보다 싶었다.

마침 사촌언니의 집에 가는 게 급한 일도 아니었다.

지애는 바깥의 사람들이 탈 수 있도록 OPEN 단추를 누르고 기다려줬다.

그러나 밖의 사람은 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애는 차마 그냥 문이 닫히게 하고 내려가버릴 수가 없었다.

한걸음 앞으로 나가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봤다.

아마도 향후 이웃이 될 수도 있을 사람들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탈지 의사를 물어보려던 순간,

지애의 눈에 남자의 익숙한 옆얼굴이 들어왔다.

바로 정우였다.

정우는 명품 가방을 잡고 있었고, 정우의 손 위를 여자가 잡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꽤나 귀여운 여자였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30대중반이나 될까, 그러나 무척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정우과 여자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놀란 지애가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아마도 정우는 자신을 못 봤을 거였다.

방금 정우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나름대로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정우를 보게 되다니.

두 사람은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정우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애는 계속 정우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우가 왜 자신의 아파트 10층에 있을까.

정우의 손을 잡고 서로 마주보고 있던 그 예쁜 여자는 누구일까.

혹시 정우가 말했던 여자친구가 소희가 아니라 저 사람인가?

아니면, 정우가 소희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우가 아닌데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정우로 착각한 건 아니었을까.

지애는 지하주차장 한 켠에 차를 세웠다.

너무나 궁금해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갈까? 아니면…’

지애는 손에 잡힌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핸드폰 화면에는 방금 전에 지우지 못한 정우의 번호가 떠 있었다.

지애는 어느새 전화를 걸어 볼지 여부를 고민하게 되었다.

‘정우라면 정우의 사생활인 거고, 정우가 아니라면 공연한 전화가 될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까 전에 번호를 지우는 게 나을 뻔 했다.

지애는 하염없이 핸드폰만 내려다봤다.

**********

현영은 자신의 실수로 정우의 손을 잡은 것 같아 몹시 민망했다.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향한 정우의 시선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괜찮습니다.”

정우는 바닥에 닿았던 가방 아래쪽을 툭툭 털더니 현영에게 건넸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품백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슬쩍 보였던 현영의 가슴은 꽤나 탐스러웠다.

하지만 가슴을 살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정우 입장에서도 사실 두 시간동안 한 건 나연과의 섹스 뿐인지라 현영에게 미안한 참이었다.

그러잖아도 다음 번부터는 꼭 열심히 공부를 가르치리라 뉘우치고 있었긴 했지만,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고 떳떳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저, 태연이 일인데요.”

현영의 입에서 과외 이야기가 아니라 나연의 동생 태연에 관한 말이 나왔다.

정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던 참인지라, 그게 뭐가 됐든 최선을 다해 상담에 임하리라.

하지만 현영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한대로 정우를 잡긴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다시 들어가는 걸 본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이의 자위행위’라고 정우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현영은 문이 닫히기만 바랬다.

“그게, 저…”

정우는 궁금했다.

나연의 일도 아닌 태연의 일이라면.

‘아, 혹시 어제 말씀하셨던 태연이의 과외 얘기인가?’

그러나 태연이 과외 건은 현영은 좀 더 생각해 보라고 한 건이었다.

어제 대화 나눈 걸 벌써 채근하려는 건지 의아했다.

뭐가 됐건, 지수와는 어제 밤에 이미 얘기가 끝난 터였다.

자신은 태연의 과외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현영이 망설이는 중에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더니 내려갔다.

지애는 이제는 마음이 놓였다.

지애가 막 말을 꺼내려는 참이었다.

정우가 침묵을 깨고 말해 왔다.

“혹시 태연이 과외 건이라면, 죄송합니다만 저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현영은 정우의 말에 가만히 바라봤다.

나연의 과외비만큼의 돈을 제시했었는데, 이 청년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였다.

그래, 이런 점도 자신이 정우를 신뢰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알았어요. 근데 그 얘길 하려던 게 아니라…”

현영은 여기서 태연의 자위행위에 관해서는 대화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역시나,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기엔 과한 소재였다.

그렇다고 집에 정우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시간과 장소를 바꿔서 만나는 게 좋을 듯 했다.

가능한한 빨리.

“선생님, 혹시 오늘 시간 어떠세요?”

현영의 마음이 급했다.

바지를 벗어 내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태연을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모르니.

“지금 잠시라면 되는데요? 집에 들어가시죠?”

“아니오, 집 말고 밖에서요.”

과외도 없는데 정우를 집에 들여 얘기하자니 나연도 태연도 신경쓰였다.

정우가 생각해보니 지금이 아니라면 오늘은 빠듯할 듯 싶었다.

세시에는 세나와, 저녁에는 소희와 약속이 있으니.

내일 오후 늦은 시간에 물리치료를 받고 나면 가능할 듯 싶었다.

“내일 오후 7시 쯤에는 될 거 같은데요?”

“그래요. 그러면 혹시 내일 제 샾으로 와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현영은 명함을 꺼내서 정우에게 줬다.

“네, 그럴께요.”

“내일 일곱시에요. 그럼 이만.”

현영은 가볍게 목례 후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안에서 솜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왕왕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우가 명함을 자세히보니 어제 나연과 함께 들렀던 네일샵의 건물이 적혀 있었다.

정우는 무슨 일이기에 밖에서 보자는 건지 궁금했다.

태연의 일인데 과외가 아니라니.

하지만 내일 만나서 들으면 될 일이기에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선 정우는 하강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띠링띠링]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지애였다.

정우는 몹시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염려되었다.

지애를 생각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달콤했다.

그러나 언젠가 쓰디 쓸게 분명했다.

“여보세요?”

지애는 다짜고짜 물어왔다.

­ 정우야, 너 지금 어디니?

정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굳이 숨길 필요 없어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저요? 저 과외 마치고 집에 가려구요.”

­ 혹시 OO 아파트?

정우는 속으로 놀랐다.

‘이모가 어떻게 알지?’

하지만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과외하러 온 게, 죄 지은 것도 아니니.

“네, 맞아요.”

­ 그럼 혹시, OOO동?

­ 네, 맞아요.

지애는 잠시 멈칫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 건 정우가 맞은 거였다.

그리고 10층은 과외 때문에 간 거인 듯 하고, 아마도 그 여자는 학부형인 듯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이 닿아 있었던 건 조금 신경쓰였다.

현영은 여기서 전화를 끊으면 괜히 실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전화를 걸지 말지에 대해서는 꽤나 고민했지만, 정작 정우가 맞다고 하면 뭐라고 할 지에 대해서는 깜박 잊고 생각하지 못했던 현영이었다.

­ 너 지금 집에 가는 길이면 태워줄까? 나 여기 지하1층 주차장인데.

“이모가요? 왜 거기 계세요?”

정우는 정우대로 놀랐다.

지애가 이 곳으로 이사오는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 시간에 있다니.

게다가 자신이 집에 가려는 이 순간에 딱 맞춰서 전화로 확인까지 해 오다니.

­ 나 여기로 이사 오잖아. 방금 내려오다가 너 있는 거 본 거 같아서 전화해 봤어.

정우는 그제야 아까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춰 섰을 때 안에 있던게 지애인가보다 싶었다.

집에 가는 길은 걸어서 갈 수 있긴 했지만, 꽤나 걸어야 하는 지라 번거롭긴 했다.

게다가 지애와 막상 통화하게 되니 정우는 지애가 보고싶은 참이기도 했다.

“네. 지금 10층인데 내려 갈께요.”

엘리베이터는 곧 정우 앞에 멈춰 섰고, 정우는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으로 나서니 한 켠에 눈에 익은 검정색 세단이 비상깜박이를 켜고 있었다.

짙은 썬팅으로 인해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

차 안에 지애말고 소희나 소원이 타고 있을 지도 몰랐다.

어디로 탈지 주춤대는데, 지애가 창을 열고 말했다.

“조수석에 타.”

그 말은, 차 안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정우가 조수석에 타니 과연 다른 사람이 없었다.

정우를 기다리는 동안 , 지애는 이제는 다른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정우의 손을 잡고 있던 그 여자와는 어떤 관계일지.

정우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 먹고 있던 지애였지만, 어느새 질투심이 솟아 있었다.

소희야 어쩔 수 없지만, 소희가 아닌 다른 여자라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터에 정우가 차에 탄 거였다.

육중한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세상에 아무도 없이 둘만 있는 공간이었다.

바깥과 차단된, 오로지 둘 만의 공간.

지애는 쑥스러워 하며 물었다.

“근데, 방금 전 10층에서의 그 여자는 누군지 물어봐도 되니?”

“10층? 아아. 과외하는 애 어머니요.”

말하는 걸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지애가 타고 있던 게 맞은 듯 했다.

쑥스러워하는 지애의 모습은 왠지 귀여웠다.

어제 자신에게 비밀을 요구하던 엄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하기야 정우는 지애라면 쑥스러워하던, 엄숙하던, 언제나 아름다웠다.

어제 자신을 페니스를 흔들어 사정시켜 줄 때도 아름다웠던게 생각났다.

어제가 생각나서 그런지 페니스가 조금 커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우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지애는 말이 없었다.

뭔가 부족한 듯 보였다.

그제야 정우는 현영의 손이 자신에게 닿았던 게 생각났다.

지애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 순간 봤을 수도 있었다.

“혹시 아까 손 잡힌 거 때문이라면, 가방을 떨어뜨리셔서 제가 집어 드리려다가..”

지애가 정우를 바라봤다.

그윽한 눈빛. 그 눈은 힐난하는 눈이 아니었다.

지애의 왼손이 움직였다.

덜컥.

차 문이 잠기는 소리였다.

지애는 변덕을 부리기로 했다.

어쩌면 그 변덕은 정우에게 전화를 걸던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

이내 지애의 팔이 정우의 팔을 잡아 당겼다.

지애의 고개가 다가왔고, 그게 뭘 말하는 지 아는 정우 역시 지애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고, 이내 혀가 나와서 엉키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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