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90. 우리 둘만 있는 데로.
* * *
일요일 오후 한시
지애는 정우를 내려준 후 차를 몰아 소희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지애는 조금 전 지하주차장에서의 일을 후회했다.
그저 외로울 때 생각만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왠지 자신이 자꾸만 정우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정우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잠시 신호를 정지했을 때였다.
지애는 핸드폰을 열어 정우의 번호를 지웠다.
지우지 않았다간 자신이 정우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방에서 외로이 있을 집에서 과연 며칠이나 연락하지 않고 버틸지 자신이 없었다.
내친 김에 통화내역이며 메신저까지도 삭제해 버렸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제는 자신이 정우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우가 연락을 해오면 어쩔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럴 일은 없을거야.’
지애는 애써 의문을 부정하며 머리속에서 지웠다.
주먹을 쥔 손이 핸들을 콩콩 쳐댔다.
정우에게 마지막에 좀 더 단호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막상 모든 것을 다 지우니 어딘가 아쉽기도 했다.
요즘따라 유난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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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일요일 오후 세시
정우는 병원 휴게실의 의자에 앉아서 세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나가 금방 오지 않자 정우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우는 지애의 차에서 내릴 때를 회상했다.
지애의 말대로라면 금요일에나 돌아올 거였다.
그리고 지애는 둘의 인연이 여기까지임을 다시 한번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비록 어제만큼 단호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지애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다소 아쉽긴 했지만, 여기서 끝나는 게 차라리 옳을 거였다.
아마도 지애는 정우가 소희와 깊은 관계라는 것 까지는 모를 터였다
더 이상 꼬리가 길어지기 전에 끝나는 게 맞았다.
지애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앞으로도 소희와의 관계를 한동안은 감춰야 할 듯했다.
정우는 지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깐 일어나서 병원 복도를 거닐었다.
불과 이틀전만 해도 자신이 입원해 있던 곳이었다.
하룻밤 묵은 것에 불과했지만, 병원의 모든 장소들이 눈에 익었다.
병실도, 간호사실의 데스크도.
여러 장소를 둘러보는 정우는 그 이틀 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어느새 정우의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꽤나 부푼 녀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운 나머지 정우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페니스를 잡아 눌렀다.
몇 분이 지나도록 세나는 오지 않았다.
정우는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환자나 보호자들이었다.
그저 휴게실 중앙의 TV를 보거나, 아니면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병실에 누워만 있는 게 갑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나를 휴게실에서 만나다니.
병원 1층에서 세나에게 전화한 정우가 병실로 찾아간다고 하니 세나는 한사코 거부했다.
나란히 입원한 여사님들의 뒷담화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9층 계단에서 만나는 것도 거절했다.
휴일 낮 시간은 그 곳은 비밀의 장소가 아니었다.
또한 세나로서는 휴일 낮에 그 곳을 다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9층계단으로 향하는 걸 누군가 보게 된다면 세나만의 쉼터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었다.
밖으로도 나오기 어려웠기에 세나가 고른 곳은 바로 이 곳, 휴게실이었다.
넓찍하고 쾌적하며, 개방적인 공간이었다.
혹시 몰라 정우는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기도 했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세나가 워낙 예측을 하기 힘든 타입이어서 준비는 해둬야 했다.
하지만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통화한 순간 정우는 이내 그 마음은 잊었다.
오늘은 그저 음료수와 과자부스러기나 먹다가 집에 가면 될 듯했다.
이윽고 문에서 조그맣고 예쁘장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세나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옅게나마 화장한 게 눈에 띄었다.
눈에 띄는 귀걸이에 네일까지도.
세나는 정우를 보자 반가워하며 정우에게 다가왔다.
“환자가 화장해도 되요?”
“너 오는데 예쁘게 보여야지.”
“굳이 안 해도 예뻐 보여요.”
“어쭈? 너 안 보던 새에 좀 늘었다?”
세나는 기분 좋아 보였다.
말하는 동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정우는 오늘은 세나가 짜증내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나갔다 왔다더니, 오늘도 그냥 밖에서 보지 그랬어요.”
“아냐. 나 외출하다 잘못해서 걸리면 나이롱 환자라면서 퇴원 당할 수 있어. 어제는 어쩔 수 없어서 나갔다 온거구.”
정우는 궁금해졌다.
금요일 새벽, 세나는 가게에 볼 일이 있어서 다녀올거라고 말했었다.
“카페 친구랑 트러블 생겼다던 건 잘 되었어요?”
“응 뭐, 일단.”
세나가 얼버무리는 게, 답을 피하려는 듯 보였다.
세나의 불편해하는 표정을 보자 정우의 머리에 뭔가 스쳤다.
“혹시 그 친구가, 남자.. 친구에요?”
“뭐래. 그런 거 아니야.”
세나는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세나의 모습은 정우에게 또 다른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정우는 어느새 혼자서 결론을 짓고 있었다.
퇴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갔다 올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아마도 남자문제가 아닐까.
그런거라면 그 친구 역시 자신만큼이나 특별한 관계가 아닐런지.
“되게 잘 생긴 사람인가 보죠?”
정우는 세나의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왠지 서운했다.
그 동안은 자신은 세나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만나러 왔다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세나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는 지금은 세나가 왠지 사랑스럽기만 했다.
자신과 몇 번이나 섹스를 나눴던 세나였다.
세나와의 모든 관계는 달콤하고 황홀하기만 했었다.
막상 자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로 인해 서운한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걔 여자야.”
세나의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정우의 질투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정우는 은근히 기분 좋아졌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표정을 바꾸자니 무안했다.
정우는 뾰로퉁한 척하며 물었다.
“그럼 뭐가 그렇게 중요했어요?”
세나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정우에게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굳이 설명하기가 구질구질해서 안하려던 건데, 궁금해하니 말해 줄께. 나랑 동업하는 친구인데, 성격이 좀 까칠해.”
정우는 놀랐다.
세나가 까칠하다고 느낄 정도라면 어떤 여자이길래.
“누나보다 더요?”
“까분다. 내가 만만하지 이제?”
세나가 째려봤다.
그러나 정우는 웃었다.
적어도 남자 문제가 아니란 건 확인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문제만 아니라면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가게에 직원이 둘 있는데, 걔가 괴롭히는 바람에 한 명은 그만 둔다고 했던 거구, 또 다른 한 명도 너무 힘들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다녀온 거구.”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관둔다는 애는 못 잡았구. 다른 애는 일단 설득해서 남긴 거지.”
“그게 성아라는 사람이에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목요일 밤에 9층 계단에서 통화할 때 이름만 들었어요.
사실 간호사실 데스크 아래에 엎드려 숨어 있을 때도 성아라는 이름의 사람으로부터 세나에게 전화가 걸려온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우는 굳이 그 일까지 세나에게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맞아. 걔가 힘들어 하는 걸 내가 설득한 애야.”
“도대체 어떻길래요?”
“나도 몰라. 애들을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고 하네. 원래는 내가 있어서 걔를 막아 줬었는데, 요즘 내가 입원해서 오래 비우니 애들이 더 많이 힘들었나봐.”
“저런? 어떡해요?”
“글쎄. 보험사랑 얘기해서 빨리 퇴원해야지. 성아로는 부족하니 사람도 하나 뽑구. 너 알바할래?”
“네? 저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세나의 눈동자가 대각선 위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정우는 웃음이 났다.
“아냐, 너 하지마. 안 되겠어.”
정우는 발끈했다.
원래 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하지 말라고 하니 더 관심이 생겼다.
무시 당하는 것 같아 반발심에 물어봤다.
“하랬다가 하지 말랬다가 왜 그래요?”
“처음엔 별 생각없이 말했었던 건데, 생각해보니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요? 저 이래봬도 군대에서 일도 잘 했어요.”
“그래서가 아니야.“
“그럼요?”
세나는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나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정우는 잠시 생각했다.
세나의 협박에 못 이겨 관계를 유지하는 건 맞지만, 사실 세나를 좋아하는 건 맞았다.
세나와의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었다.
“네. 좋아해요.”
세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좋아. 그러면 내가 정리해서 얘기해줄께. 대신 너 알바비는 내가 정한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됐고. 근데 너 질투했어 아까?”
뜬금없었다. 질투라니.
“무슨 소리에요?”
“아까 남자냐고 물어볼 때 너 표정 볼만했는데?”
정우는 그제서야 자신이 질투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망했다.
사실 세나 모르게 며칠간 몇 명의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였던가.
자신에게 세나를 질투할 자격이란 없을 거였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세나는 정우의 대답이 귀여워만 보였다.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이지만 이럴 때 사과하는 모습만큼은 사랑스러웠다.
세나는 정우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둘만 있는 데로 갈래?”
둘만 있는 데로 가서 할 일은 뻔했다.
세나의 속삭임이 정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귀에서 시작된 전율은 척추를 타고 내려가 페니스에까지 전해졌다.
페니스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요? 9층 계단?”
지난 이틀처럼 둘이 함께 할 병실도 없었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거였다.
때문에 정우로서는 9층 계단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 거긴 안된다니까 지금은.”
세나가 눈을 흘겼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세나의 볼도 조금은 홍조를 띈 것 같았다.
또 다시 달콤한 시간을 약속하는 듯한 세나의 미소에 정우의 페니스는 단단해져 갔다.
예상 못한 분위기로의 급반전으로 인해 정우의 가슴이 무척 설레어졌다.
“그럼, 어디로요?”
“따라와 봐.”
세나는 정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천진난만한 밝은 표정으로 정우를 이끄는 세나의 표정은 마치 장난꾸러기 같기도 했다.
정우는 세나에게 손을 잡힌 채 끌려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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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발치에서 누군가 이들을 보는 눈이 있었다.
휴게실에 잠시 볼 일이 있어 왔던 소희의 선배 간호사였다.
그녀는 휴게실 문을 벗어나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남자 같은데, 누구지?”
세나는 워낙 예쁘장하기에 여자로서 자신도 신경쓰이는 환자였다.
그런 세나에게 꽤나 괜찮은 남자 환자가 면회를 온 터라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띈 거였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세나와 자신과는 접점이 없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일 리 없었다.
데스크로 돌아온 그녀는 자료를 정리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퇴원환자들의 기록이 담긴 파일을 본 순간이었다.
“아 맞다! 송정우 환자!”
그녀는 세나와 함께 있던 게 정우라는 걸 깨달았다.
꽤나 준수했기에 간호사실 내에서 잠깐 이슈가 되다만 환자였다.
뭐 그저 수다꺼리에 불과하긴 했지만.
최세나와 송정우가 손을 잡고 있다니, 수다꺼리가 하나 더 생겨 있었다.
일단은 하던 일이 바빴다. 그녀는 하던 정리를 마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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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는 거에요?”
“잠깐 여기 기다있어 봐.”
복도 끝 모퉁이를 꺾은 곳이었다.
세나는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정우는 설마 세나가 복도 끝 이 곳을 말한 건가하는 생각에 실망스러웠다.
사람이 보이지 않을 뿐이니 이 곳은 그저 복도에 불과했다.
키스나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모르는 곳이었다.
‘역시 무리한 기대였을까.’
정우가 자신의 무리한 욕심을 반성하고 있을 때였다.
세나가 여자화장실에서 금새 나오더니 좌우를 살폈다.
세나는 정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빨리 와.”
정우는 놀란 눈으로 세나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세나는 정우를 여자화장실로 데려온 거였다.
세나는 정우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다.
여자화장실은 상당히 깨끗했다.
거의 호텔 수준으로 깔끔한 수준이었다.
세 개의 칸막이가 있었다.
세 곳 모두 문이 열린 채 비어 있었다.
세나는 세번쌔, 벽에 붙은 칸막이 안으로 정우를 이끌었다.
세나가 칸막이의 문을 잠궜다.
세나의 끈적한 눈이 정우를 바라봤다.
둘의 입술이 이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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