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검은머리 수석 엘린 (1)
* * *
왜일까.
왜 내가 4위일까?
순위가 높은건 딱히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살고있는 기숙사도 만족스럽고.
문제는...
쟤가 4위야?
검술은 형편없던데...
마나를 찾을 수 없는 마법때문인가?
확실히 그건 성가실 것 같더군...심지어 마법도 즉시시전 같았어.
...한번 대련해보고 싶네
유령 취급당했던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
저 앞에서 루카스가 왜인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있는데 내 대각선 자리에 있던 히로인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특유의 입을 크게 벌리며 활짝 웃는 모습으로
"와아 베드히로야. 너 4위구나? 대단해..."
그녀는 그리 말하더니, 이내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한거야?"
지나가듯 묻는 것 같지만, 눈동자에서는 짙은 호기심이 들어있었다.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
"후훗 쉬는시간이니 다들 쉬렴~ 선생님은 이만!"
그 모습을 보던 알리시아가 이내 교실 밖으로 나갔고, 레아가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일어났다.
"칠판에 재능이 적혀있잖아! 그거 보면 되겠다~"
아니야.
안보는게 좋을 것 같아.
레아는 나에게 같이 보러가자~ 라고 말했지만, 나는 꿋꿋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주위에 남학생들이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는것도 꽤나 부담스러웠으니까.
"아니요. 안봐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같이 가자는 레아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 있으니, 은발 미소녀 에르시아가 내게 다가왔다.
"안녕? 베드히로."
옆에 루카스까지 데리고.
에르시아는 레아를 힐끔 보다가, 이내 내 두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칠듯이 부담스러운 시선.
"...재능이 공란이더라구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가 되물으니, 에르시아가 의심 가득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베드히로님은 재능이 없다고 표기되어 있어요."
"...베드히로?"
레아가 이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해.'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미친 외모를 가진 3인방에게 말했다.
"뭐...어쩌다보니"
"마나에 민감한 실피드와 닉스에게 물어보니...몸에 마나가 안보인다고 하더라구요"
"에이~ 그건 숨기고 있는게 아닐까?"
루카스가 말하니, 에르시아가 두 눈은 나에게 고정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몸에 안보인다고 하던데요?"
왜 청문회같은 분위기가 된거지?
하지만, 호기심 천국인 그녀들은 멈추지 않았다.
"베드히로씨.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제 정령들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을까요?"
웃는 표정이 어딘가 무섭다.
"와...정령들이 마나를 못느끼는데 텔레포트를 쓴거야? 근데 재능은 왜 없다고 표기되있을까?"
레아는 혼잣말을 하듯 고개를 올리고 손을 턱에 괴며 말했지만...두 눈동자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베드가 곤란해 하잖아?"
베드는 누구냐.
루카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베드. 우리 서로 잘 맞을 것 같지 않아?"
"어...?"
"혹시 대련 한번 더 해줄 수 있겠니?"
"....."
그 셋은 주연답게,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다보니, 다른 학생들도 수다떠는걸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3명이 함께 있기 때문이겠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그건 그렇고, 레아는 재능은 신기하네?"
칠판 위에 적혀있는 레아의 재능은 '주술' 이였다.
히로인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재능...
"아...응! 마법은 몰라도 주술은 처음이라 교수님들도 잘 모르시겠데..."
잘 넘겼다!
"그래서 나랑 베드히로는 잘 맞는게 아닐까? 둘다 마법이랑 다른 신비의 힘이니까!"
아니구나.
"하하...나는 그냥 마법을"
"텔레포트를요?"
변명을 하려하니, 에르시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운 외모에 저렇게 웃으니 잘 어울리지만...어딘가 무서웠다.
"텔레포트는 교수님들도 잘 쓰지 못하는 고위마법이라던데..."
그러고서는 가슴 아래에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게다가 마나의 흔적은 조금도 없구...."
"심지어 재능칸도 공란..."
두 눈을 감고 혼잣말 하던 그녀가 눈을 뜨더니,
"으흥?"
나를 보며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이판사판으로 뻔뻔하게 나갔다.
"학생들이라 아직 부족해서 못느낀게 아닐까? 교수님들은..."
"길버트 교관님도 못느꼇다고 하시더라구요."
...설마 찾아갔었니?
"에이~ 시치미 떼지 마세요...저는 슬프답니다? 길버트 교관님은 전쟁에도 여러번 나간 영웅분이니까 변명하시려는건 아니시죠?"
루카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니 녀석은 이 광경을 재밌다는듯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그래도 불쌍하긴 하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너무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는데...
안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변명하기가 쉽지 않다.
말이 나올때마다 어버버 거렸으니까.
'모쏠 백수한테는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나...?'
어느새 죽이 맞게된 에르시아와 레아가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 둘은 말을 하다가도 나를 힐끔힐끔 보며 눈치를 주었다.
예를들면...
하하하. 가문에 있을때 마법사님이 텔레포트를 보여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나오는 마나의 파장이 얼마나 강한지...저 깜짝 놀랐답니다?
그 마법사님 굉장하시다...마법에 관한 재능도 아니시라면서? 아! 베드히로한테 하는 말은 아니야
후후후...그분은 노력 천재셨으니까요. 그런 분도 텔레포트를 사용하는데 15년이나 걸리셨다고 해요.
그러면서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빨리 우리 궁금증을 해결시켜라' 라는 사인을 보내댔다.
그 다음엔 몸에 마나가 정말 없는지 장난식을 물어보거나...
마법의 즉시 시전에 대해 넌지시 말하기도 했다.
"아! 베드, 그건 어떻게 한거야?"
"뭐, 뭐가."
"허공에서 바로 마법이 나온거."
에르시아는 곧바로 튀어나오며 말했다.
"마법으로 인한 자연계 공격은 생성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마나를 불이나 얼음, 물로 변환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왜 나를 빤히 보면서 말하는거지?
"근데 베드히로씨는 허공에서 아무런 준비동작도 없이 물방울이 나타나더라구요? 심지어 허공에서."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마법사들은 보통 물방울을 만들때 손 위에다가 만들어요. 그게 훨씬 쉬우니까요...그런데"
레아가 뒤를 이었다.
"베드히로는 손을 뻗는다거나 하는 동작도 없이 허공에서 순식간에 물질을 소환해냈잖아?"
내 영력
사기였구나.
레아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예 지금 보여주는건 어때?"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완전히 친해진 것 같은 레아와 에르시아가 협동해서 나를 압박해왔다.
영력이니 권능이니...
이 세상에는 전혀 없는 것들이였다.
내 적이 될 이들에게 밑천을 순순히 까발릴수는 없지.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입을 꾸욱 다물고 있으니...
♪
종이 쳤다.
쳇.
칫...
에르시아와 레아는 혀를 차며 자리로 이동했다.
그녀들의 눈빛에는 '너 다음에 보자.' 라는 말이 깃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하...베드. 힘내"
루카스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음.
3교시는 훈련장 수업이니까.
바로 옷 갈아입으려 도망치면 되겠다.
그렇게 2교시를 버티고 쉬는시간이 되자 마자 일어났다.
또 잡히면 성가시니까...
"아앗! 어, 어디가아...!"
원래 도망갈 생각은 없었지만...
끝나기 전부터 레아가 나를 힐끔힐끔 보았기에 서둘러 일어났다.
잡히면 또 청문회가 시작되리라.
*****
"저기..."
"응."
"뭐해?"
헥헥거리며 체력단련을 하다가, 구석에 앉아 홀로 쉬고있었다.
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서있고, 수석 엘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나는 갑작스레 변한 상황에 당황했다.
마치 기억이 통째로 없어진 기분...
'여긴 어디...나는 누구...'
"다시 쉬어야지."
잃어버린 기억의 마지막 부분을 찾아 다시 한번 구석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니, 무언가가 내 소매를 잡았다.
"이리 와. 다 끝나고 쉬어."
심연같이 어두운 눈을 한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뭐가?"
"대련."
대련이구나...
난 또 뭘 기대한걸까?
여자랑 눈만 마주쳐도 좋아하는 줄 아는 안쓰러운 생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나였나 보다.
"나말고는 루카스랑 하는게 어때?"
내 말에 엘린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바닥에 기절하듯 쓰러져있는 루카스와, 그의 주위를 둘러싼 소녀 무리가 있었다.
"...에르시아는?"
"아껴먹을거야."
음.
그렇구나.
"그러면 나는?"
"디저트."
우리 수석이 미친년이였구나.
새로 깨달은 지식이 내 머릿속에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엘린이 휘두르는 목검이 내 몸에 박힐테니까.
아까 얼굴만 아는 이들 몇몇이 와서 대련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지만...
다 거절했다.
심지어 미소녀 히로인 레아까지도.
그 업보를 이제 받아야 하는것인가?
이곳에 오고 존나 심심할 일이 없는 것 같다.
에르시아와 레아...샬롯에 엘린까지.
일평생 여자와는 손도 못잡아본 나였지만, 이곳에 오고 나서 부쩍 인기가 많아진 기분.
"올라와."
하지만, 샬롯을 제외하면 다른 여자들은 나를 팰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았다.
나를 볼때마다 대련대련 하는것을 보면.
"아니, 안할래."
"해야돼."
"....왜?"
엘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길버트가 학생들의 대련이나 훈련을 하는 이들을 지도해주고 있었다.
"한 사람당. 최소 한번. 꼭. 반드시"
'그리고 너는 나랑 해야돼.'
라고 엘린이 눈빛을 쏘아댔다.
그냥 레아랑 할걸...
수석 여자애는 너무 무섭다.
아마 루카스가 개거품을 물게 만든 사람도 엘린이겠지...
나는 최대한 머리를 짜내며 말했다.
"한사람당 한번이면, 맞는 애가 없어서 대련 못해본 친구랑 하는게 낫지 않을까? 너는 이미 여러번 했잖아."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
"너가 그럴 줄 알고. 내가 다 정리했어."
엘린이 손가락을 반대쪽으로 돌리니, 그곳에서는 학살의 현장이 있었다.
비록 진짜 죽는것은 아니지만, 저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5~6명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서로 바닥에 사이좋게 드러누워있었다.
쉬는건줄 알았는데...
내가 변명을 할 줄 알고 미리 애꿎은 학생들을 작업쳐놓는 잔혹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 하자."
엘린이 나에게 말했다.
이 순간...나는 에르시아가 대련을 하자고 해도 기쁘게 넵! 을 외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엘린의 파괴적인 면모를 본 학생들은, 그녀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였다.
정녕 나를 구해줄 S급 히어로는 없단말인가...?
"길버트 교관님."
"왜그러나?"
"대련. 하고싶어요. 바알 베드히로랑."
그녀의 말은 확인사살이였다.
내 머릿속을 달리고 있는 잔머리라는 녀석에 대한.
길버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바알 베드히로."
"네, 넵"
"나도 개인적으로 자네의 전투를 보고싶다만...엘린은 네 최고의 대련상대가 될거라 생각한다."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말로 하지 못해 표정으로 말하니까, 길버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오늘 못해도, 다음에 할 뿐이야. 이리 들어오도록 해."
이미 엘린은 목검을 쥐고 대련장 위에 올라가있었다.
그 걸크러쉬같은 면모에 끔찍한 체력훈련과 대련들로 인해 바닥을 기고 있던 생도들이 좀비처럼 스멀스멀 기어왔다.
바, 바알 베드히로다아...
엘린이랑 싸운대애...
텔레포트 보고싶다...고, 고위마법...
학생들의 작은 세상은 미쳐있었고, 그 안에 있는 학생들도 결국 미쳐버린건가.
그리고, 이제는 나도 물리적으로 미치게 될 것 같다.
결국, 나는 대련장 위에 올라 엘린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