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자칭) 흑룡의 루시 (2)
* * *
지루한 제국역사와 쓰지도 못하는 마나의 이해같은 것들을 배우고 나서야.
겨우겨우 지루한 아카데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베드히로! 여기야!"
음.
아니구나
분홍머리에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쓴 여자.
이왕이면 혼자 찾아보고 싶은데, 아까 이거 내가 가져가서 조사해보면 안되냐고 물어보니까 발작을 하더라.
"그러고보니까 이름이 뭐냐? 야 라고 하기도 뭐하네."
"응? 내 이름?"
어딘가 맹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피식 웃더니
"푸후후 내 [진명]을 알고싶은게냐? 뭐...나의 동료인 그대라면 알려줘도 되겠지..."
한쪽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 반대쪽 팔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괴상한 포즈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루시. 아드리아 루시야!"
"아드리아?"
"루시라고 불러!"
"어 그래..."
"그건 그렇고...몇시에 갈까?! 역시 자정?!"
"자정은 왜? 특별한 뭔가가 있는거야?"
아무리 오타쿠라고 해도, 흑마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기본적인 상식은 나보다 많겠지.
"아니! 그냥 멋있잖아"
내가 게슴츠레 물어보니, 루시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 뭐!"
"그래도 자정이면 적당하네."
다행히 오늘은 금요일.
오늘 뭔가 개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충분히 쉴 수 있을것이다.
"그럼 결정이야! 너 어디 도망가거나 그러면 안된다?"
"내가 왜 도망가겠냐."
"그, 그런애들이 있단말이야...약속 안지키는 못된 녀석들...!"
루시는 왜인지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갈갈 갈아댔다.
솔직히, 나도 그 흑마력이 느껴지는 구슬만 아니였으면 도망쳤겠지...
"나는 약속 안지키는 나쁜새끼 아니거든?"
"그, 그렇구나...!"
루시는 정말 놀라운것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그, 그럼 오늘 11시에 A동 기숙사로 와줘...!"
"허어? 내가 왜 거기로 가냐?"
참고로 A동은 그 귀족이나 왕족의 지원을 잔뜩 받았다는 기숙사다.
높으신 분이나, 엄청나게 부유한 상인의 자제들이 있는 곳
그 다음이 중간인 B동 마지막이 나같은 거지 평민이 있는 C동이다.
C동 뒤에 있는 산으로 가는데 왜 내가 A동 기숙사까지 가야하는거지?
"그, 그치만..."
눈치같은것을 안봐서 교관한테도 대들었던 루시가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밤의 시온은 너무 무섭다구..."
"...너 흑마법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 자기 몸에 흑룡이 봉인되었다며."
"그, 그치만 귀신은 무섭다구...!"
이게 물이 무서운 물고기랑 뭐가 달라?
"하아 알겠어."
지구의 미세먼지 가득한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곳은 인공섬이다보니 공기가 시원하고 맑았다.
밤에 운동하는 이들을 위해 꽤나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원이나 시설들과는 달리, 건물 밖으로 나와 도로같은 곳으로 가면 꽤나 공기가 음산했다.
가로등도 듬성듬성 나있는게 더 기분나빳고...
"그래! 꼭 와야해...! 너 안오면"
그리 말하던 루시가 엄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뜨는 표정.
무섭다기보단 그냥 귀엽다.
"내가 내일 찾아갈거야...!"
"왜 내 기숙사로 안오고?"
"그, 그건..."
자존심 강한 자칭 흑마법사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그래. 그럼 11시까지 앞으로 나오면 되는거지?"
"응!"
밝게 웃으며 대답한 루시가 이내 손바닥을 흔들며 와다다 뛰어갔다.
"아...음...베, 베드?"
그 모습을 빤히 보고있으니 뒤에서 옆집 누나처럼 다정해보이는 목소리가 들렀다.
"아, 아하하...베...드..라고 해도 되는걸까?"
히로인 레아가 뒤에서 내 눈치를 보고있었다.
"아. 왜그래?"
"오, 오늘 저 애랑 약속이 있는거야...? 밤에? 단 둘이? 남자랑 여자랑?"
뭔가 어감이 이상하지만..
"그렇지?"
"호, 혹시 오늘 밤에 나랑 약속 하지 않을래...?"
갑자기 레아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여신같은 외모의 여자애가 나를 부르는 것은 꽤나 익숙하지 않은것이라 약간 얼타고 있으니
"아! 물론 나만 아니라 에르시아랑 루카스도 있어."
"아 그렇군."
괜히 기대했네.
'....?'
그런데 밤에 히로인과 조연 둘이서 뭘 한다는거지?
"완전 재밌는거야...! 그 여자애도 우리랑 같이 오면...어떨까?"
"뭘 한다는건데?"
레아는 밤에 산에 간다는 말을 할려다가, 이내 그것은 담력훈련과 다를 거 없어보인다고 생각했다.
...여자애랑 약속이니까 좀더 낭만적인 곳에 갈텐데...
"아...음...그, 뭐 뭐랄까나~? 사, 사안? 사아안?"
"...아 그래..."
젠장.
베드의 표정이 나빠졌어...!
하지만, 여자아이와의 약속을 존중하고 싶지만 왠지 그러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말을 덧붙일려고 하니
"아. 미안...오늘 약속은 못뺄 것 같네."
차가운 얼굴의 그가, 시크하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아, 아앗..."
레아는 쓸쓸한 손을 그에게 내뻗을 뿐이였다.
***
밤 10시 30분
나는 슬슬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A동의 기숙사로 갔다.
시온의 외각에 있는 C동과는 달리 A동은 교내의 건물들 사이에 웅장하게 솟아나 있다.
그 안에 도서관과 훈련시설, 헬스장과 식사장까지...
미친, 빈부격차 나서 괜히 서러워진다.
"...무섭네."
C동은 산골짜기 안에 있는 학교같은 생김새였다.
기숙사라는 건물 두개와 앞에 운동장과 듬성듬성 나있는 공터들...
A동이 있는 시온 아카데미의 중심과는 빈부격차가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밤바람을 받으며 걸어갔다.
아직 10시 반이라 가로등이 켜져있고 꽤나 밝았지만...
루시를 데리고 오면 저 가로등 중 절반 이상이 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존나 무섭다.
"후우"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C동이 있는 구역 밖으로 나가니, 길게 뻗어나가는 4차선 도로가 있었다.
끝이 안보일정도로 뻗어나가는 도로에는 가로등들, 그리고 그 아래 지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중세시대와 어울리는 디자인의 트램이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지만, 저것 역시 밤 11시가 되면 운영을 종료한다.
밤이 되도 기숙사 밖은 자유롭게 나갈 수 있지만, 시온 섬의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하는 것.
나는 트램을 타고 루시가 기다리고 있을 A동으로 향했다.
"늦...어!"
"...아직 안늦었는데? 2분 빨리왔어."
"2분을 빨리온거라고...! 10분전에는 왔어야지! 평민주제에 정말"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신분드립같은건 조금도 통하지 않았기때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가자. 자정에 하자면서 너무 일찍 도착했네."
"이제 부지런히 걸어가야지!"
루시는 그리 말하며 발랄하게 걸어갔다.
팔을 크게 움직이고 발 앞쪽만 땅에 짓는 걸음.
콧노래까지 부르는걸 보면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흐흐흥~"
"야. 그런데 지금 가면 트램 운영 안하지 않냐?"
"응...? 그런데?"
문뜩 들은 궁금증에 물어보니, 루시가 무슨 당연한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자식 이거...
"아니, 다리아프게 무슨 C동까지 걸어가? 트램 타면 금방인데."
"근데 난 밖으로 나간 적 없는걸?"
"...뭐?"
"나, 나아! 시온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는건 처음이야!"
우리가 있는 거대한 인공섬 전체가 시온 아카데미인것은 아니다.
인공섬 한쪽에 시온 아카데미, 즉 학생들의 학업에 필요한 건물들과 A동 기숙사들이 몰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대학가 같은 곳을 빠져나가 정문을 빠져나가면, 아까 내가 말했던 4차선 도로가 나오고 트램을 운영한다.
그 밖에 거리에서 상점같은 것들도 있고...
물론 아카데미 안에도 편의점처럼 간편한 물품들을 판매하기에 구하기 어려운 물품이나 산책이 아닌이상 그곳에 가는 경우가 적다.
그리고 아카데미 부지를 나가서 트램을 타고 달려가야 C동 기숙사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든다면 거대한 마을 안에, 대학 부지가 있는 것.
"처음이라고...? 정문 밖으로 나간적 한번도 없었어?"
"응...! 밖으로 나가는 포탈은 아카데미 뒤쪽에 있는 홀에서도 이용할 수 있잖아."
"...내가 가는 C동까지 미행했다며"
"그, 그건...마법물품 대여해가지구 영상으로 본거야..."
미친, 드론인가?
이 세상에는 드론도 있었던 건가?
그런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물품을 대여하고 스토커짓까지 한 루시가 더 대단해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대여한거지?
루시는 신기하다는 듯 정문 밖의 거대한 도로를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있는 상점들은 반 이상이 문을 닫았지만...그것조차 루시에게는 새로운 것 같았다.
"모험하는 기분이야...!"
"그렇게 궁금하면 밖으로 나와보지 그랬냐?"
"밖에 혼자 나가면 무섭잖아...! 아침에는 나 할거 하기도 바쁘다구!"
"주말은...?"
"주말은 자야돼..."
나는 평생 이 분홍머리 오타쿠를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무서우면 친구랑 나가면..."
아.
아앗...!
말을 꺼내는 중 왠지모를 위화감이 느껴졌고,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끝내 말은 튀어나가있었다.
그리고 앞을 보니 입술이 댓발 튀어나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발을 땅에 문지르고있는 루시.
"나..나는 친구가 없"
"아. 뭐 그럴수도 있지. 이번에 가면 되는거잖아?"
"그, 그래...! 그런거야! 나, 나도 이제 밖에 나갈 치, 친구...맞지?"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대답해주었다.
"그럼."
"응! 나도 친구가 생겼는걸! 이제 반에 들어와서 자는척 안해도 되고! 다른애들 떠들때 엿들으면서 몰래 웃지 않아도 되고! 쉬는시간에 괜히 복도로 나가서 공고문같은거 안봐도 돼!
이, 이제는 밥도 같이 먹을거야...! 하교도 같이 해야돼! 주, 준비물 없으면 이제 몰래 울지 않아도 돼...!"
"크흑!"
"어, 뭐, 뭐야! 너 왜그래! 어, 어디 아픈거야...?"
"아니야 임마...!"
귀여운 외모에 분홍머리인것 만으로도 또래 아이들에게 얕잡아 보였을텐데...
거기다가 안대에 오른팔 붕대까지 한 4차원 아이는 친구를 사귀는게 어렵겠지.
하나하나 말하는 것에 루시의 인생이 담겨있었고, 그 서글픈 어절에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뻔 했다.
너 정말 레전드구나...
"후우 다른반이니까 쉬는시간은 몰라도, 점심 혼자먹기 싫으면 말해라 나도 혼자 먹으니까."
"아, 알게써!"
왠지 루시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렇게 대화하니, 도로의 가로등의 절반정도가 꺼졌고, 거리는 훨씬 어두워졌다.
이제는 그 위를 지나가는 학생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C동까지의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기에, 심심한 나는 밤바람을 받으며 루시와 대화했다.
"그럼 밥 같은건 어디서 먹었어?"
"하, 학식으로..."
...설마 식사장에서 먹은거니?
"호, 혼자 먹으면 껄끄럽다며...왜 눈칫밥 먹었어?"
"그, 그치마안..."
옆에서 보이는 루시의 눈망울이 또르르 구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 먹음 외로운걸..."
"크흡!"
"또, 또 왜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꿧다.
"그래서, 거기 산으로 가면 뭐하게?"
"당연히 그 불길한 어둠을 찾아내야지. 내 몸속에 잠들은 어둠의 비밀을 깨울 단서인걸!"
서글픈 감정을 순식간에 회복한 루시가 발랄하게 외쳤다.
"으흥흥~"
그러면서 예의 그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걸어가더라.
"밤바람은 좋네! 여기는 처음와보는데 뭔가 예쁜 분위기가 있어...! 역시 다른 사람이랑 와서 그런가?"
우리는 트렘이 지나가지 않는 도로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루시는 뻥 뚫린 공간을 걸어가는 것이 꽤나 기분좋은 것 같다.
"하늘에 별이 있고~ 밤바람은 시원하고 이곳은 뻥 뚫려있어...! 자주 오면 좋을 것 같아."
"그러냐?"
"그래!"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니, 드디어 C동의 기숙사로 도착했다.
"오오...! 역시 두 눈으로 보니까 달라...! 산골 마을에 온 것 같아...! 킁킁! 풀냄새"
루시가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드히로! 저것봐. 귀뚜라미야~ 너희들은 저 아이들이 우는 소리 들으면서 잔다며? 저, 저기는 고, 곱등이히힉!"
"에잇! 저리가!"
나는 다가오는 루시의 분홍색 머리통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이제부터 조용히 있어. 다른 애들은 자고있을테니까."
"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어둠은 은밀하게 있어야 한다는 거지?"
"...어 그래."
루시는 샤삭! 소리를 입으로 내며 나무 뒤나 벽 뒤에 숨으며 고개를 빼꼼빼꼼 내밀었다.
"잠입수사하는 것 같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