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급변 (1)
* * *
"흐아...이거 힘들어..."
본격적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니, 루시가 칭얼거렸다.
"조금만 참아라. 금방이니까."
우리가 발견한 그것은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것이 아니였다.
아마 몇십분만 올라간다면 도착하겠지.
"그건 그렇고 산은 처음 올라가보네...! 아침 산이 예쁘대."
"어 그래?"
"나중에 아침에도 와보자."
"알겠어."
루시가 재잘재잘 말을 걸었지만, 나는 제대로 대답해줄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질감...그리고 불길함
그리고 산을 타기 시작한지 한시간정도가 되고 나서야 루시도 이상함을 느꼇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저, 저기 베드히로..."
공포에 젖은 눈을 한 루시가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워, 원래 이렇게 안나왔던건가? 길을 잘못 들은거겠지?"
"...아니야"
나는 즉시 심상세계를 소환해내 앞에 있는 스산한 산에 투영시켰다.
그리고 나타나는 또 하나의 어두운 세상...
'역시...'
히로인 레아와, 루카스와 에르시아.
그 세명이 밤에 가자고 한 산은 이곳이 틀림 없었다.
레아는 C동 기숙사에 살았으니 쉬이 발견했을 수 있었겠지.
내 심상세계에 비춰보이는 세상과, 지금 내 현실의 세상은 달랐다.
마치, 무언가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나와 루시는 같은 공간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던 것이다.
"루시. 너는 집에 돌아..."
"아니! 싫어! 절~대 싫어! 이 길을 나 혼자 가라고? 혹시 돌아버린거니?"
"......"
돌아버렸다니 말이 심하네..
나는 그녀에게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루시. 누군가가 그 구슬을 찾은 것 같아."
"무, 뭐?"
"이 앞에 결계가 쳐져있어. 우린 계속 같은길을 돌아다닌거고..."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나는 들어갈게. 안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행들을 방해해야 하는데, 루시가 있으면 귀찮아진다.
"와! 그럼 나도 들어가면 되겠다."
"뭠마? 그게 왜 그렇게 돼."
"그치만. 베드히로는 엄청난 흑마술사잖아! 같이 가면! 나도 안위험해!"
내가 있으니까 자기는 무적일것이라...
그녀의 머릿속에 내가 어떤 이미지인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는게 참으로 단순하구나.
"이, 이건 비밀인데 베드히로"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내밀어 내 귀에 속삭였다.
"나 사실 어릴때 퇴마사를 할지 흑마법사를 할지 고민했었어..."
"아. 그러냐?"
"그 저주받은 물건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거잖아? 당장 들어가보자! 퇴마와 흑마법이 공존하는 초특급 비밀 마법사 루시! 오늘부터 1일이야!"
"....."
순간 결계 안으로 혼자 쏘옥 들어갈까 했지만, 루시가 내 소매를 꽈악 잡고있었다.
순수한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지만, 내 더러운 생각즈음은 알고있다는 듯이...
'.......'
"일단 들어가보자."
"이거이거, 오른팔의 붕대를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아, 아니 안대를 풀어야 하나? 지금은 컬러 렌즈 안꼇는데..."
나는 루시의 작디작은 혼잣말을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재빨리 들어가 상황이라도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정 안된다면...'
조연들과 마찬가지로 루시도 무력화시켜야만 하리라.
산을 두르고 있는 결계에 손을 올리고 영력을 불어넣으니, 결계가 잠시 뚫리는 것이 보였다.
"열렸어. 이제 들어가면 돼."
"알겠어...!"
나와 루시는 그 결계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눈 앞이 돌아갔다.
"쯧"
눈치없이 술자리에 들어갔을때 인싸들이 나에게 술을 잔뜩 먹였을때와 같은 기분.
그야말로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구아아악..."
루시가 바닥에 엎드려 구아악 소리를 내었지만...다행히도 입에서 나오는건 없었다.
여자의 환상이 깨질 것 같았는데 다행이군.
나는 루시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
처음 왔던 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우리는 지금 논밭의 흙길에 있었고, 내 앞에는 또 하나의 어두운 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산의 입구에는 무너져가는 돌로 된 기둥문이 있었고, 그곳에는 불길한 빨간 부석들이 덕지덕지 붙어져 있었다.
"흐미 무서버라..."
루시가 이상한 말투를 쓰며 내 옆에 붙었지만...
나는 거의 산채로 죽어있었다.
존나 무섭네...
"일단 가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밖으로 못나갈테니까..."
"......"
난 얼어붙어서 내 몸에 매달린 루시를 데리고 산 안으로 들어갔다.
터벅. 터벅.
산은 몹시 어둡고 조용했다.
그 흔한 부엉이 우는 소리도 곤충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숲과 풀도 존재하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
내가 걸어가면 나 자신의 몸이 앞으로 가는게 아니라, 숲이 나를 지나쳐 이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터벅...터벅...
나 혼자의 발소리밖에 안들리는 이 공간...
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헤엑 헤엑"
"......"
"얌마 안내리냐?"
도리도리
내 몸에 매달린 루시때문에 힘들어 뒤질 것 같았으니까.
가볍지만 사람 하나를 들고 걸어가는건 존나게 힘든거구나...
내가 본 로맨스 소설에서는 다리 부상당한 여자를 위해 마라톤을 하던데...
"베드히로는 안무서워...?"
나...?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런거 하나도 안무서"
꺄아아아악!!
"조, 조조조...존나 무셔!"
"히에에엑!! 비명소리야!! 비명소리야! 비, 비명! 끼, 끼, 끼!"
갑자기 숲 안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그 고막을 찢을듯한 비명소리는 메아리를 타고 쩌렁쩌렁 숲 안을 울렸다.
"끼, 끼이...끼이잉..."
지려버릴듯한 공포 탓에 루시는 한마리의 작고 연약한 원숭이가 되어버렸다.
"게에엑...."
"어? 야, 야아...! 기, 기절하지마!"
내가 루시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드니 그녀가 이내 입에서 흐른 침을 닦아냈다.
"크, 크크크....이, 이정도의 정신공격이라니 하지만 나 루시님에게는 안되지..."
꺄아아....!
하지만, 다시한번 들린 비명에 우리 둘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잠깐, 비명?'
다시한번 귀를 기울이니, 그 목소리가 레아의 것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따라와!"
"못따라가!"
"왜!"
"발이 얼었어!"
이런 젠장할...
루시를 버리고 달려갈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이 순두부같은 여린 맨탈을 가진 귀족 영애의 마음속에 영원한 트라우마를 줄지도 모른다.
"끄악"
나는 루시를 옆구리에 끼운 상태로 비명이 들린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비명을 어찌나 우렁차게 질러댔는지, 꽤나 한참을 뛰고 나서야 저 멀리서 조연님들이 보였다.
4m 크기의 작은 절벽을 내려가고 40m 거리에 있는 레아, 루카스, 에르시아...
그들은 도깨비같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3m 크기의 거대한 무언가...
쾅!!
녀석이 나무몽둥이를 휘두르니 나무 하나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미친...'
저런거 한방이라도 맞으면 즉사다.
하지만 조연들은 이미 오크정도는 잡아봤을 괴물일터...
"프라이어! 루카스님을 보호해!"
빛의 정령이 나가 루카스를 보호했고, 신성력을 모두 검에 쏟아부은 루카스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촤악!
크아아아악!
다리가 베인 녀석이였지만, 살점이 끓는듯 꿈틀거리며 급속도로 재생되었다.
"베, 베리어!"
퍽!
휘둘러지는 몽둥이에 맞은 루카스는 멀리 날아가 땅에 쳐박혔다.
에르시아와 자신이 펼친 보호막으로 크게 다친것 같지는 않았지만...확실한 데미지를 입었을터.
'일단 대기.'
녀석들을 지금 공격한다면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내가 안전하게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도, 도와줘야해...!"
루시가 그 모습을 보며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현혼!"
이내 히로인 레아가 만들어내는 영혼 뭉치.
심령술이라기보다는, 그냥 영력을 뭉텅이로 뽑아내는 단순한 기술이지만...
크아아악!
마나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그것은 거대한 도깨비를 저 멀리 밀쳐냈다.
그리고 그 위에 에르시아의 정령술이 꽂혀졌다.
"우린 그냥 여기 있을까?"
"그랭."
1학년중 2위와 3위를 기록하고있는 루카스와 에르시아였다.
레아 또한 주술이라는 낯선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무시당했지만...현혼이라는 기술을 개화하고 난 뒤에 주가가 올라가고 있었고.
이런곳은 보통 주인공이랑 오지 않나?
저 3명이 이렇게 동등하게 싸우다니...
의문을 느꼇지만, 오늘도 할 일은 없겠구나 하고 구석에 숨어있었다.
"우리는 쟤내가 정리할때까지 기다리..."
정신을 차리니, 내 옆구리에 매미마냥 달라붙은 루시가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왜 그러...?"
크르르르르...
어.
키아아아악!!!
거미의 얼굴에 인간의 육체를 한 2m 크기의 괴물이 내 뒤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쾅!!
뼈라는게 없어보이는 육중한 팔이 채찍쩌럼 내리꽂아졌다.
하지만, 나는 진작에 루시를 들고 텔레포트를 한 뒤였다.
[영력 : 25 / 40]
영력 15로 목숨 하나를 살렸지만...아니, 정확히는 둘을 살렸지만.
25밖에 없는 양을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강렬하지만 빨리 끝나는게 조루나 다름이 없구나.
내가 조루였다니...
그런 절망감에 빠져있으니, 좌중을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고 있던 괴물이..
"어어!"
조연 3인방에게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흑창'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의 형상을 한 그것이 내 앞에 소환되었고
쐐애액!!
그대로 놈의 등판을 향해 쏘아졌다.
퍽!!
그대로 무방비한 놈의 등에 꽂히는 창.
저번에 흑마법서를 흡수한 뒤 영력과 흑마력을 결합한 공격은 강한 파괴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했다.
[영력 : 18 / 40]
영력 소모가 지랄같지만...
그래도 한놈 잡았
끼기기기긱...
"아 2페이즈."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춘 녀석의 살결에서 지네의 다리같은 것이 수백개는 돋아났다.
그리고 턱뼈가 뽑힌 사람처럼 입이 뱀처럼 벌려지더니, 그 안에서 거미줄같은 실을 잔뜩 쏟아내는데...
"조진 것 같은데?"
저 멀리 있는 방향을 보니, 조연 3인방도 2페이즈로 넘어간 지랄맞은 괴물에게 얻어터지고 있었다.
존나 아프겠네...
이젠 나도 저렇게 맞겠지...?
"위험한 순간, 주인공은 나타난다..."
"뭠마?"
그 순간 나는 존나 2페이즈가 있다는게 확인된 괴물새끼를 봤을때보다 더 놀랐다.
"루, 루시가 두명...!"
"크흐흐...이게 나의 재능...!"
붕대를 두른 팔의 손을 안대 위로 올리는 자세를 취한 루시가 외쳤다.
"분신술!"
키아아아아...
루시는 아직 더 혐오스럽게 변해가는 중인 괴물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혼탁한 어둠의 불길, 왜곡하는 진홍의 암흑, 절규하고, 발광하고,
파멸로 인도하는 등불, 삐걱이며, 무너지며, 요람 속에서 쇠망하노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여...갚지 못할 스스로의 죄를 알아라"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피어나는 진홍빛 불꽃
"저항하지 못할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도록 해라..."
루시 녀석 존나 쌘거 아니야?
불은 자연계에서 가히 최고급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증발시키고, 대지를 태우고, 하늘을 가리는 업화...우리 인간은 불(火)과 함께 진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불을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루시는 거의 대재앙 그 자체 아닐까?
루시의 분신으로 보이는 녀석이, 불꽃손을 내밀며 와다다 달려갔다.
"파이어 펀치!"
툭.
루시의 강력한 파이어 펀치가 녀석의 배꼽에 닿았지만...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펑!!!!
그 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그 자리에는 루시 '였던것'의 공기가 있을 뿐이였다.
루시는 대재앙 같은게 아니였다.
그냥 분홍머리의 망상충 오타쿠일뿐...
루시는 '소멸' 당해버린 자신의 분신을 보고, 그 모습에 자신을 대입시킨건지 하얗게 바랜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크, 크크크...베, 베드히로오...네 차례가 온 것 같다..."
"목소리좀 그만 떨어..."
"너도 떨고 있는걸?"
괴물새끼가 우리를 향해 돌진할듯한 자세를 취했다.
"야...! 어그로 빼게 분신 하나만 더 소환해봐!"
"내 소중한 분신을 그렇게 쓰지마...!"
루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력을 끓어올려 분신들을 소환해냈다.
총 5마리의 분신...
진짜 루시까지 포함하여 내 근처에는 6개의 분홍 머리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꿀밤을 통통통통통통 때려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지만...
크아아아악!!!
괴물이 달려오기 시작했기에, 그럴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괴물은 침침한 나보단 재미있는 분홍 머리에 홀린건지 루시의 분신에 강한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좋아...! 이틈에 도망치자!"
나는 사방으로 도망치는 루시들중 하나를 쫓아가는 괴물을 보다가,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응...! 빨리 도망쳐줘!"
그래도 괜찮겠지...내 옆구리에는 진짜 루시가 있으니
펑.
그때 내 옆구리에 있던 루시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