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에르시아는 수심이 깊다 (1)
* * *
언제나처럼 가장 일찍 도착한 에르시아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최근 자신을 심란하게 만드는 남자.
'바알 베드히로...'
대련으로 인한 순위를 공개했을때 자신은 당당히 3위에 들어갔다.
당연히 1위를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루카스와 엘린이라는 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역시 세상엔 제가 모르는일이 많네요...'
가문에 갇히다싶이 하며 엄격한 교육을 받고 괴로운 훈련을 참아냈다.
사람들은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고, 그런 내가 노력까지 하니 그 누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긴 루카스와 엘린보다 더 의문인 남자.
바알 베드히로는 도대체 누구일까.
재능의 칸이 누락되어 있고, 입학하기 전의 정보조차 없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천재라는 자신도 텔레포트를 익히기 위해 수십년은 공부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는건...
'그 불길한 기운은 뭘까...?'
베드히로에게 느껴지는 암울한 기운.
흑마법이라도 익혔으면 진작에 예민한 교관님들이 눈치챘을 것이리라.
하지만 교관님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 과거부터 악과 싸우며 대대로 선신들의 사랑을 받아온 앤젤라 가문의 사람.
그리고 그 피가 가장 짙게 묻어있는 자신은 교관들보다 먼저 그의 몸 속 깊은곳에 있는 깊은 어둠을 찾아냈다.
'밝혀내야해...'
정의를 지키고 악을 몰아낸다.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
때문에 순위가 발표난 그날 자연스럽게 그에게 찾아갔다.
옆에 있는 루카스와 레아 덕분에 그와 어색하지 않게 추궁...대화할 수 있었다.
아니, 실제로는 어색했지만 잘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알 베드히로는 입을 꾹 다물며 대답을 회피할 뿐이였다.
마계의 마족들과 몬스터들이 점점 위협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소식을 가문에게서 들었다.
아마 내가 살아있는 세대에는 필시 무언가가 일어나겠지...
'증명해야 돼...'
앤젤라 가문의 특성상, 혈연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가주가 될 수 있는게 아니다.
선한 이들, 그중에 능력이 있는 이들이 경쟁을 하고 심사에 거쳐서 가주가 되니까.
그렇기에 엘프인 자신이 앤젤라의 성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고.
'바알 베드히로의 비밀을 밝혀낸다면...'
큰 점수를 딸 수 있으리라.
비록 점수따위 따지 못해도 악을 밝혀내는데 의의가 있다.
"찾아낼거예요..."
"안녕 에르시아."
"히, 헥!"
주먹을 앙 쥐며 떨고있으니 옆에서 등교한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집중하고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고, 그때문에 바보같은 비명소리를 질렀다.
앞을 보니 보기 드문 수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이름이...세레스였지?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느끼며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세레스양."
외로웠던 자신은 정말 진지한 친구라는게 뭔지 모른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속마음을 숙이고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해준다.
"후후...오늘은 날씨가 좋네?"
"하하...그렇네요"
아무 의미없는 대화나 나누고있으니, 반 생도들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에르시아는 들어오는도중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모든 생도들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쉴새없이 뒷문을 바라보고, 즐겁지 않은 상황에 미소를 짓는것은 고역이였지만...해야한다.
자신은 앤젤라니까.
"안녕하세요 엘린양?"
끄덕.
"하하..."
어색하고 어딘가 무서운 수석에게 인사를 한 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근처에 있던 학우들이 저마다 대화를 하고 있었기에,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잠시 쉬게 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안면근육이 아프다.
그렇게 쉬고있으니..
드르륵..
뒷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왔다...!'
무심코 볼을 주물럭거릴 정도로 귀여운 루시라는 영애분의 이마를 밀어내고 들어온 베드히로는, 그대로 무표정으로 들어와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하하...그게 정말인가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에르시아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던 내용에 대해 공감해주며 몸을 돌렸다.
공감해준 생도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야 바알 베드히로가 더 자세히 보였으니까.
하암...
반에 들어오자마자 하품을 하며 책상에 엎드리는 남자...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저렇게 태평하게 있으니 어딘가 얄밉다.
몸 속에 있는 앤젤라의 마나를 태우니, 눈에 흰색 기운이 스쳐지나간다.
'....어떻게 저런'
앤젤라 가문으로써 성기사단들의 전투를 보조하거나 봉사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럴때마다 악한 기운을 품고 있는 마족이나 흑마법사들을 몇번 본적이 있었다.
그런 그들보다 훨씬 어두운, 말 그대로 심연같은 어둠을 몸속에 지니고 있는 자...
그 불길함은 너무 깊은 곳에 있었기에,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는게 이해가 되었다.
앤젤라 가문은 선신의 축복을 받으니까.
그 성을 가지는 이들은 그러한 축복을 일부 물려받을 수 있고,
그 축복 덕분에 악을 감지하는 기운은 성기사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마 천재인 자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겠지...
때문에 내가 해야한다.
나밖에 하지 못한다.
에르시아는 입을 헤 벌리며 바보같은 표정으로 멍때리는 그를 보며 다짐했다.
'내 라이벌은 당신이야...'
바알 베드히로.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교실에 들어오고 졸음에 견디고 있으니, 저 앞자리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평소에도 느끼고 있었던 시선이지만...기분탓이라고 무시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쟤 왜저래...?'
에르시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힐끔힐끔 보고있지만, 그 힐끔거릴때마다의 시선이 어찌나 살벌한지, 그녀의 귀까지 뾰족하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쉐엣...'
몬가...몬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강렬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책상에 얼굴을 박으니...
"헬↗로↗우↘~"
알리시아가 들어왔다.
제국의 아카데미 교관이라고 전부 엄격한게 아니다.
훈련이 고되고 책임이 무겁다보니, 풀어주려는 경향도 강하다.
뭐...그냥 귀족 자재들이 징징거리는걸 듣다못한 왕족과 귀족이 항의해서 그렇게 된 것 같지만.
어쨋든, 그런면에서 알리시아는 가장 인기 많은 선생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신연령이 우리와 비슷해 보였으니까.
"움?"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알리시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생각 안했다는듯 그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했다.
"베드히로야. 아픈건 다 나았니?"
아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성격인 알리시아는,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방긋 웃으며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와 함께 쏠리는 시선...
"네."
당황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무위이화를 사용하여 활성화 마법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으니까.
아직 아프기는 했지만...나를 외계인처럼 만들던 푸른 멍은 대부분 사라졌다.
알리시아도 그저 스쳐가듯 하던 이야기였던듯 별말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알리시아와 소란스러운 몇몇이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왕이나 귀족 몇몇은 격식을 차린답시고 단정한 자세로 있으며 '너희와 나는 달라.' 라는 분위기를 뿜어댔는데...
그러면서도 대화에 끼고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알리시아는 발랄한 성격뿐만 아니라 대화할때 호응도 좋고 외모도 예뻣으니까
그런 선생이 주도적으로 발랄하게 행동하니 분위기도 좋은거겠지.
다른 반은 서로 서열다툼이니 파벌이니 뭐니 하며 분위기 잡아서 힘들다고 하던데...
드르륵...
"레아 왔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레아가 밝게 인사한다.
레아야 안녕?
늦을뻔했잖아...!
레아가 전에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귀족이나 왕족이 평민 무시하는건 언제나 있었던 일이니 무시하고, 굳이 그들이 아니여도 시온 아카데미에는 평민도 꽤 많았으니까.
레아는 별 말 없이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베드으...안녕?"
"어, 어?"
"후후..."
알리시아가 모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조례를 하는중, 레아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다른 이들과 대화할때처럼 밝은 미소가 아닌, 유혹하는듯한 고혹적인 미소.
당황해서 어버버대니 웃으며 앞을 돌아본다.
내 옆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가 이 장면을 봤으면 무조건 이상한 소문이 났으리라.
그만큼 방금 레아의 미소는 또래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당황한 감정을 추스리고 다시 앞을 바라보니
"......"
에르시아가 살벌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을 감출 생각도 없는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에르시아.
여신같은 미모를 훔쳐보던 몇몇이 그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흥
그런 말을 한 것 같은 에르시아가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바라본다.
'뭐징...'
그렇게 조례가 끝나고 수업을 위해 반을 빠져나가 실험실로 이동했다.
"수업한 내용 다들 기억 나시죠? 오늘은 최하급 자양강장제를 만들거예요. 재료는 다 준비되어 있으니 다 만들었으면 샘플만 제출하시고 나가셔도 됩니다."
'약품제조수업'이라고 불리는 과목.
내 책상 앞에는 괴상한 것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이렇게 만든 포션에서 샘플만 내버려두고 나머지는 가져가도 된다는 소리가 반갑다.
그도 그럴게...
'골드가 부족해...!'
기초 지급해주는 골드가 부족하다.
평소에 뭐 할일 없나 빈둥거리거나 훈련만 해서 그런지 골드가 없다.
우수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지급해주는 골드가 많지만...나같은 이들은 여러 잡일들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영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육체의 에너지와 관계가 있었다.
어쩐지 자주 배가 고프길레 그냥 내 체질인줄 알았는데...
어제 귀찮아서 야식 안먹고 잤더니 영력이 조금밖에 안올랐더라.
이런 빈곤한 상황에서 기력 회복에 좋은 물약 하나 가져가셔 아껴먹으면,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
나는 메모장을 꺼내들었다.
마나수 15ml, 미르버섯, 캐리의 뿔가루....낙새풀 두잎...등등
'시발.'
정확한 양까지 적어뒀어야 했는데...!
심지어 수업중에 졸아가지고 몇개는 누락되어 있다.
"후우"
"왜? 베드."
한숨을 쉬고있으니, 내 옆자리를 재빠르게 꿰찬 레아가 말을 걸었다.
"응? 우리 베드, 나한테 말 안해줄거야?"
"....."
레아는 종종 이렇게 자신이 위에 있다는듯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발끈했겠지만....
"재료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
돈이...
돈이 부족하다.
아카데미에서 지급해주는 휴대폰과 비슷한 것을 보니, 잔고가 얼마 안남았다.
[7600G]
1G당 1원이라는 개같은 환율을 고려한다면, 나는 거지새끼나 다름 없다.
앞으로는 트램도 타지 못하고 걸어서 등교해야 할 지경
"아..정말~ 베드는 내가 없으면 안되는구나?"
"...알려주실겁니까?"
"싫어♡"
소악마가 되어버린 히로인이 나를 놀려댄다.
"하지만 정중하게 '부탁' 한다면 혹시...도와줄지도?"
"...너 말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겠다면?"
"흐흥...우리 베드, 우리반에서 나 말고 친구 없잖아~"
....!
날아오는 팩트폭행에 가슴이 아파온다.
루카스랑은 몇번 대화 해봤어!
라고 하려고 했지만...
루카스 그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하다.
"흐하핳♡ 그런 표정 하지 마~ 좋아. 도와줄게"
레아가 내 옆에 붙으니, 좋은 향기가 화악 몰려오고 레아의 거대한 가슴이 내 팔뚝에 닿는다.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니...
"으응?"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웃음을 치는게...
일부로 그러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당장 레아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여학우들 몇명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속닥대고 있다.
보통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뭉치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5명 정도가 쓰는 넓은 책상에 남자는 나밖에 없었다.
나를 잔뜩 노려보는 저 3명도 레아의 추종자겠지.
"후우...빨리 하자."
부담스러우니까.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레아의 도움을 받으며 슬슬 시작하려고 하니
툭.
나와 레아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꽤 큰 키에 아름다운 은빛 머리, 그리고 뾰족한 귀...
조연이신 앤젤라 에르시아였다.
레아와 루시와는 다른, 숲과 같은 향기가 화악 밀려왔다.
"에르시아...?"
레아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은 에르시아를 오묘한 눈빛으로 보니, 그녀가 담담하게 말한다.
"힘들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면서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본다.
어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장이니까요."
"......."
우리반에 반장이 있었어?
"어머 무슨 생각 하세요?"
"...아무것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