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에르시아는 수심이 깊다 (3)
* * *
그 뒤 꾸역꾸역 점심을 먹은 뒤 천문부로 걸어갔다.
아직 불길하기만 한 구교사...
루시와 레아를 어떻게 잘 떼어놓고 혼자 외로이 구교사로 가는길
샤샥!
누군가가 나를 따라온다.
심안을 사용한 심상세계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나무 뒤에 에르시아가 숨어있다.
'.....'
어쨋든, 저 뒤에 심안을 감고 뒤를 바라보니 평범한 거리가 보인다.
몇몇 생도들이 햇볕을 쬐며 히히덕거리며 걸어가는 아주 평범한 모습.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저 나무 뒤에 에르시아가 숨어서 나를 훔쳐보고 있으니까.
다시 구교사를 향해 먼 길을 걸어갔다.
엘프답게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걸어갔다.
중간중간 심안을 떠서 바라보니, 계속 따라오더라.
뒤를 돌아보면 조연다운 스피드로 홱 숨어버린다.
넓고도 넓은 시온 아카데미의 외각.
어두운 잎을 가지고 있는 산에 파묻힌 그곳에 구교사가 있었다.
"쉐엣"
아침에 와도 어둡고 무섭구나.
구교사 안으로 들어가니, 전과 같은 괴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가지 전과 다른게 있다면 내 뒤에 쫓아오는 에르시아겠지.
그녀는 이 구교사가 꽤나 불쾌한지 고개를 홱홱 돌려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계단을 올라 5층. 천문부 부실로 올라가니
"......"
"안녕"
검은머리 수석 엘린이 있었다.
먼지 풀풀날리는 이 공간속에 꾸역꾸역 들어와 앉아있는 그녀.
점심시간에 밥 먹자마자 교실로 들어와서 멍때리더니, 이제는 이곳이 그녀의 아지트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엘린과 지금의 엘린은 다른점이 있다.
"너 그거 뭐냐?"
"게임..."
엘린의 작은 머리에는 커다란 헤드셋이 껴져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게임기가 들려있었다.
띠로링!
"아. 죽었어 바알."
그러면서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엘린이 구교사에 있는것도, 그녀의 머리에 달려있는 보라색 별무늬가 있는 헤드셋도 그녀의 손에서 울리고 있는 게임도 이해가 안된다.
"콜록 콜록"
킁!
언제나 덤덤한 표정인 수석 엘린이 거하게 코를 먹으신다.
드르륵.
"하하! 찾았어요. 설마 이런곳이 있을 줄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이내 와다다 뛰어온 에르시아가 들어오더니, 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뾰로롱.
"운이 좋아..."
덤덤한 표정이지만, 저 무표정에서 신나 죽겠다는 것이 느껴진다.
"콜록!"
엘린의 앞에 있는 책상을 한번 손가락으로 훑으니, 먼지가 뭉텅이로 묻어나온다.
"....에르시아?"
"네. 베드히로."
"청소 도와줄래?"
"......"
엘린을 어딘가 오묘한 눈으로 보던 에르시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정령에게 부탁한다면 금방 되겠지.
"엘린아. 잠깐 나가있어본나."
끄덕 끄덕.
이내 엘린이 느릿하게 엉덩이를 들고선 교실 밖으로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면서도 게임기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는 모습...
"닉스, 실피드, 살라만더. 부탁해요."
그녀의 말에 바람과 물의 정령이 튀어나와 교실 안을 청소한다.
먼지 투성이인 교실을 물이 휩쓸고 나간다면, 그 위를 불꽃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말린다.
물과 불을 합쳐 뜨거워진 물을 곳곳에 뿌려 회전시킨 뒤 완전히 교실을 탈바꿈 시켜주는 그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청소가 끝났다.
"오오..."
정령 개쩌는구만.
드르륵
청소가 끝나자 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엘린이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교실에 앉는다.
5개밖에 없는 책상과 의자중 하나를 차지해 앉는 그녀.
띠리링!!
"....!!!"
순간 게임기에서 울러퍼지는 거창한 소리에, 엘린의 몸이 바르르 떨린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의자를 깔고앉는 엉덩이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와 에르시아.
"...베드히로님."
"뭐가."
"설명. 해주실 수 있을까요?"
입은 웃고있지만, 눈은 웃고있지 않다.
"이곳은 캠퍼스지도에도 없던 곳인데...여긴 뭐고 엘린양은 여기 왜 있는걸까요?"
"......."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저번에 내가 동아리 만들었다는거."
"....?"
"부실이 여기밖에 없다더라."
"네에?"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요?
라고 하고싶은 것 같았지만...저 앞에 게임기를 두드리는 엘린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뾰롱!
"....하아 그럼 전 가볼게요."
"....그래."
에르시아는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찾아와서 뭐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지만, 조연님은 다 뜻이 있겠지.
"아."
그러고 있으니, 엘린이 짧은 탄식을 한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
어두운 눈이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엘린도 조연이였구나...
내가 왜 아니라고 생각한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조연으로써의 모든걸 갖추고 있다.
반에서 특별한 존재이며 루카스와 에르시아를 뛰어넘는 실력.
게다가,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니 꽤나 이쁘다.
모든 사람을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레아 옆에 둬도 선방할 외견.
"바알."
"어, 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야. 게임 마저 해."
내 말에 엘린은 고개를 내려 다시 게임기를 두들겼다.
'...돌아가자.'
소설의 설정이 깊게 관여된 구교사에서, 어째서 알리시아가 이 교실을 추천했는지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전과는 달리 구교사에 있는 불길한 검은 기운도 잘 안보였고.
"우리 동아리 뭐하는거야?"
그렇게 나가려고 하니, 엘린이 물어본다.
"하늘과 신에 대해 배우는거지."
알리시아가 말했다.
마왕이 나온다면 신의 화신체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그렇다면, 마왕이 나타난 시기 이후에 세계의 활동이 활발해지겠지.
"...잘 할거라 믿어."
"오냐."
천문부는 지식을 위해 만든것이 아니다.
아카데미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을것이고, 이 동아리는 조연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더 수월하게 그들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구현]의 힘이 필요하다.
구교사 사건 이후로 나는 구현이라는 권능을 재조명했다.
저번에 인과율을 활성화 시킨 뒤로, 악성향을 가진 '놈'이 구현이라는 권능을 꽤나 재미있게 활용했었으니까.
영력을 쏟아부어 권능 사용제한을 느슨하게만든다거나, 구교사의 괴현상에 간섭하여 공간을 뒤틀어버려 도망가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심상세계 속에 있는 내 몸을 만져 저주를 해주시키고, 구교사에 봉인된 귀신들을 풀어내는 등등...
원래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한 일들을 하였다.
끝없이 시련을 주다보면, 서로 친해지겠지.
조연들은 힘들다고 물러나는 종족이 아니니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조연들과 친밀해져야해...'
"하아..."
그러기에는, 조연인 에르시아가 나를 너무 싫어하는 것 같다.
"갈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게임기를 두드리는 엘린에게 인사하며 텔레포트로 구교사를 빠져나왔다.
띠링.
그렇게 걷고 있으니 내 전화기에 알림이 울린다.
[루시]
베드히로!
듣고이써?
나 도오ㅏ져어
".....?"
왜.
에루ㅛ;아가
"??"
뭔가 일이 일어난건 확실한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어딘데.
A동 기숙사!
이건 잘만 대답하는구만.
나는 A동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중간에 운행하는 트램을 타고 텔레포트 몇번 사용하니 금방 도착하더라.
"와 씨..."
여기서도 빈부격차가 나오나?
A동 기숙사는 꽤나 화려했다.
밝은 분위기면서도 간간히 있는 목재와 조명덕분에 따뜻한 기분이 든다.
C동 기숙사가 안쓰는 자재를 재활용했다면, 이곳은 진짜 좋은 것들만 고르고 골라 만든 것 같다.
'...위도 보이는구만.'
심안을 뜨니, 내 주변으로 검은색 상자같은 것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는 그 무엇이든 훔쳐볼 수 있었다.
당장 저 앞에 한 여생도가 치마를 벗는...
"으아 집중력."
어쨋든, 엘레베이터가 아닌 텔레포트를 사용하여 한칸 한칸 올라가고 있으니
"으아앙! 베드히로!"
저 앞에 루시가 와다다 나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그 뒤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는 에르시아.
"자, 잠깐... 여기 여자 층이에요!"
미친.
"그, 그랬냐?"
누가 보기 전에 텔레포트를 사용하여 내려가려고 했지만, 루시의 태클같은 껴안음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려졌다.
"호에에...무서웠다구..."
그러고서는 나에게만 들릴 소리로 읊조리는 루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에르시아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서늘한 눈으로 다가온다.
"흐음...서로 껴안다니...꽤나 사이가 좋은걸까요?"
그러더니 비웃는듯한 표정을 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어쩌죠? 이 층은 여생도만 들어올 수 있는데...이곳에 들어온것도 모자라 여자와 껴안기나 하다니..."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뭔가 맞는말인데 그렇게 말하니 뭔가 이상하다.
내가 굉장히 잘못한 것 같은 기분.
뭐라도 해보라는 뜻에서 루시를 바라보지만, 루시는 에르시아의 눈치를 잔뜩 보며 바들바들 떨기만 하고 있다.
"흐음?"
에르시아또한 그 모습을 보았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서는, 굉장히 마음에 안든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역시 당신은 싫어요."
그 말과 함께, 바로 일르려 할 것처럼 뒤를 돌려고 한다.
"머, 멈춰!"
전생에 지구에 있었던 전설적인 무적의 단어.
멈춰를 시전하며
[매혹 (활성화)]
매혹의 이능을 활성화시켰다.
"....으흥?"
그와 동시에 나를 보며 흠칫하는 에르시아.
어딘가 볼이 조금 빨개진 것 같다.
"이, 이거...! 이거! 당신 나에게 무슨짓을 한거에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나는 또다시 50이라는 거액의 영력을 사용하였다.
"바로 보고흐으흑...!"
에르시아의 상태가 이상해진다.
자신의 몸을 감싸안으며 몸을 부르르 떠는 에르시아.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아닌, 내 등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떠는 루시에게 향하고 있었으니까.
"헤엑"
그 모습에 기겁하는 루시...
어느새 눈이 충혈된 에르시아가,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다가온다.
그 모습은 꽤나 무서운 것이여서, 나는 아까의 두배나 되는 100이라는 영력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
그와 동시에 바닥에 우뚝 서서 멈춰버린 에르시아.
"해, 해치웠나?"
"그런 것 같애...!"
그렇게 루시와 함께 에르시아를 잔뜩 노려보고 있으니
아하핳! 정말? 그 교관님 머리가 가발이라구?
우리 집이 상인길드라서 당연히 알고있지~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온다.
계단을 따라 조금씩 들려오는 여생도들의 목소리.
이 상황을 들킨다면, 어쨋든 좋은 꼴은 당하지 못할 것이다.
"야! 야야! 에르시아 니 방 어디야!"
내 말과 함께 에르시아가 손을 기계처럼 움직여 한 방향을 가리킨다.
타닷!
"....?! 무슨짓을...!"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을 향해 달려가, 곧장 텔레포트를 준비했다.
"안, 안돼요...! 아, 아니...야아!! 안된다고!"
에르시아가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지만, 저 멀리 여생도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당장 텔레포트로 두꺼운 철문을 뚫고 에르시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그녀의 침대맡에 있는 벽.
그곳에 레아를 포함한 몇몇 여자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도 몇개 붙어있는게, 꽤나 위험해보인다.
그러고보니, 아까 매혹을 사용했을때 왜인지 내가 아닌 루시를 힐끔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루시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고...
그런 모든것들이 아우러져 하나의 결과가 나왔다.
철컹!
"베, 베드히로!"
그와 함께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에르시아.
어느새 존칭까지 없어져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에르시아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고,
'미, 믿을수가 없어...!' 라는 표정을 짓고서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녀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어..."
"......"
"레즈였냐?"
내 말과 함께, 에르시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