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중간고사 희망편 (5)
* * *
실내 대련장의 구석의 방을 차지한 우리.
하지만...훈련이 순조롭지 못했다.
왜냐하면
"히야압!"
팡!
"으응으응...베드는 때리는거 아니야. 때려도 내가 때려."
"아...응! 미안!"
나에게 달려오는 루시를 레아의 영력이 막는다.
팡!
루시에게 날라간 워터볼이 레아의 영력에 막힌다.
"으응...루시는 아가야...지켜줘야 해...소중해."
"......."
보다못한 내가 말했다.
"저기 레아야? 그렇게 다 막아버리면 훈련이 안되는데..."
"아앗...!"
그제야 깨달았다는듯 얼굴을 붉히는 레아.
"둘다 나 없는곳에서 맞고다니면 안되는걸..."
그러면서도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듯 말한다.
"있는곳에서 맞으면 상관 없다는거야?"
"있는곳에서 맞을 것 같으면 다 막을거야."
썩 믿음직스러운 말.
실제로 뒤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루시가 감격받은 표정을 한다.
하지만 히로인의 고고한 정신은, 안타깝게도 이런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이트 볼."
훈련에서 절대 다치지 않을, 루시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의 공격.
전에 엘린과 대련할때 사용한 폭탄머리같은 그것이다.
나는 그것을 두 팔에 현현시킨 뒤, 전투자세를 취했다.
"무투술도 좀 연습해보자. 전사들 엄청 빠르대?"
아무리 견제해도 뛰어난 생도들은 금방금방 붙었다.
그때문에 최소한의 무투술이나 검술은 배울 필요가 있어보였다.
"풉!"
".....왜웃어 임마."
그런 내 모습에 루시가, 아니, 루시들이 히히덕거린다.
"나 루시한테 근접저언...? 다른 누구도 아닌 베드히로가? 정말...농!담!두! 꺄르륵!"
"이, 이녀석이..."
꺄르륵 웃어대는 루시들로 인해 정신이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구도 아닌 루시가 저런 표정을 지을때마다 얄미워서 주먹이 바들바들 떨려온다.
"꺄앗! 귀여워 루시야!"
"에헹? 나, 나 귀여운거야?"
하지만 레아는 좋다는듯이 그 루시들 사이에 들어가 잔뜩 쓰다듬어댄다.
마치 동물원 안에 들어간 어린아이같은 모습.
그 모습이 왠지모르게 꼴받아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빨리 덤벼."
"파이어 펀치!"
파이어 펀치!
(생략)
파이어 펀치!
"쯧"
도술도 한계라는게 있다.
분신술을 많이 만들수록 개체 하나하나의 역량이 작아진다.
그리고, 마법으로 만든 불의 경우 개인의 힘에 따라 화력이 달라진다.
신비의 화염이라는 것의 한계 이상으로 화력을 올릴 수 없어도, 그 한계 안이라면 화력이 천지차이다.
불의 형태만 띄우고 있지 따뜻한 정도의 불길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루시의 파이어펀치는....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진짜 불이 닿자마자 환장할만한 격통이라면, 루시의 파이어 손바닥은 잡고있으면 5초 뒤에 앗뜨뜨! 하며 손을 땔 정도의 약한 화력.
때문에 루시는 약하다.
분명 약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내 앞에 있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삐이이이이....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의 시끄러운 루시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내 시야를 가득 매운 분홍머리의 귀여운 소녀들...
그것은 이내 광야의 까마귀떼들 처럼 나에게 달려들었다.
"테, 텔레포트!"
"야아! 그거 반칙이야! 마법 안쓰리고 했잖아! 약속 지켜!"
"조, 조용히 해!"
루시들을 피해 구석으로 달아나 레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헤..헤헹...히힣...."
"헛된 기대는 하지마. 레아는 이미 내 매력에 매료매료 됐거든?!"
레아가 루시들 사이에 파묻혀서 헤벌쭉한 미소를 짓고있다.
전에 보았던 40대 아저씨의 그 미소...
"레, 레아는 천사야...아니야..."
"푸훗...그런데 레아는 기분 좋아보이는걸...?"
분홍머리들에게 NTR당한 나는 나이트 볼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그와 함께 부풀어오르는 흑암...
"너는...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었다."
"크큭...그런다고 압도적인 차이를 넘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느냐?"
중2병 컨셉에 취해버린 루시가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붕대를 감은 오른팔이 파들파들 떨리는걸 보면 내 반응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것 같지만...
타닷!
저 웃음은 이내 울음으로 바뀔것이다.
"울어라 루시!"
"루시는 울지 않아!"
그렇게 수많은 루시들과 부딪혔다.
분홍머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나이트 볼로 인해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을테니,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데...
'얘 뭐이리 잘 튀어...?'
주먹질을 하는 무투가가 맞는지,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면 재빠른 다람쥐처럼 움직이며 피해낸다.
"그건 잔상!"
내 주먹이 휘둘러진 곳에는 흩날리는 분홍머리가 있었고,
펑!
"그건 분신!"
운 좋게 때린다고 해도, 그것은 본체가 아니였다.
그렇게 나는 무아지경의 경지를 넘어선 전사처럼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들과 싸웠고...
싸웠...
싸웠....?
에엣...?
"베드!!"
"으헉!"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레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저 앞에서는 루시가 분신을 하나 소환해서 서로 싸우고 있었고...
내가 했던 것처럼 레아가 영력을 손과 다리에 둘러주었는지, 맞아도 안아픈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루시들의 결사항전을 빤히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베드 너 기절했어."
"......?"
"루시랑 싸우다가 기절했다구."
"......"
레아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레아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지...
그녀는 내가 믿을만하다고 몇번이나 말했었다.
길고 길은, 참지 못할 불행한 삶. 그중 처음으로 자신에게 진심을 다해 다가와준 사람이였다고.
나는 그녀처럼 불행한적도 없었고, 그녀처럼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준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레아가 어떤 감정인지 모른다.
하지만....하지만, 그런 자신을 구원해준 믿을만한 남자가 분홍머리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다면...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쩝쩝...
나는 괜히 레아에게 말했다.
"루시 쟤 쌔더라."
"응...."
대부분의 생도들이 떠나가 적막만이 자로잡힌 훈련장의 2층 구석 방...
그 적막속에 루시의 기합소리만 들려올 뿐이였다.
***
"헤헷...루시 2승! 베드히로 2패! 완전 완패!"
"야잇...!"
루시가 저번 대련에서 이긴 뒤 종종 나를 놀려댔다.
하지만, 분노한 내가 한번 더 대련을 하자고 할까봐 걱정됐는지 자제하는 편이였는데...
이제는 신나서 나를 놀려댄다.
이 무슨 정신공격...
"후우..."
참자...
분홍머리잖아...
분명 어딘가 이상할거야...
"헤헷. 레아야 빠이빠이"
"응 루시야 일찍 자~"
"응응!"
이내 루시가 와다다 달려가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찬거 먹지 말구! 이불 꼭 덮고! 양치도 해야해...!"
그런 루시를 향해 소리치는 레아.
"우리도 이제 가자. 트램 끊기겠다."
"흐흥...단 둘이 걸어가는것도 좋은걸?"
루시가 사라지자마자 달달한 모드가 된 레아가 나에게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평소의 눈빛이 아닌, 애정을 가득 담은 그윽한 눈빛.
『아, 안돼!』
그러자, 수백번은 뽑히고 죽은듯이 얌전히 있던 내 분신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 고통이 너에게 생명을 불어넣은걸까?
내 파트너뿐만 아니라 나도 엄청나게 피곤했기에 그런 레아를 잔뜩 경계했다.
"흐흣...왜 그렇게 경계하고 그래...츄릅..."
그런 내 모습에 오히려 입맛을 다시며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레아.
"하아...빨리 가자. 나 졸리다."
"푹 쉬어 베드..."
표정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는지 내 등을 자상하게 토닥여주는 레아.
그렇게 뒤돌아서 C동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려 하니
"잠깐만요."
".....?"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에르시아가 나타나있었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평소보다 창백해보이는 에르시아...
"왜?"
"왜, 왜라니...! 당신은 정말!"
황당하다는듯 나를 바라보는 에르시아에게 레아가 묻는다.
"에르시아...무슨 일 있어? 내가 상담해줄까?"
"아앗...아니에요 레아님...."
"레아님...?"
"아니, 레아양."
내가 의문스럽다는듯 반복하니, 말을 바꾸는 에르시아.
"레아양 여기 따뜻한 핫초코예요. 베드히로씨 하고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잠깐 빌려가도 될까요?"
"....왜?"
"아하...그게...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왜?"
"네?"
"저번에 베드가 에르시아 방으로 갔다고 한거랑 관계 있는거야?"
에르시아를 빤히 바라보는 레아.
이마에 식은땀이 뿅 하고 나타난 에르시아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나를 노려본다.
'말했나요?'
'나 아니야.'
"루시가 말해주던데..."
레아의 말에 이해했다는듯 아하 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에르시아.
그러면서도 헤실헤실 웃고다니는 루시가 얄미운지 입술을 삐죽였다.
"아하핳! 아니야. '우리' 베드 빌려가. 대신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돼...?"
"넵!"
군기있게 대답한 에르시아가 턱짓을 하며 나를 뒷편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에르시아의 살랑거리는 엉덩이를 뒤쫓아 걸어가니, 내 뒤에서 레아가 어두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빨리 돌아가야 돼.
"용건이 뭐야?"
"다, 당신은 그걸 몰라서...!"
괜히 다급해져서 물어보니, 에르시아가 경악한다.
그러면서 평소의 앤젤라 에르시아처럼 은빛 머리를 뒤로 넘기며 팔짱을 낀다.
날카로운 눈빛이였지만, 팔짱을 낌으로써 노골적으로 올라간 가슴덕분에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레아님께 손대지 마세요."
"어어?"
설마 레아랑 내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걸 알고있나...?
"저, 저한테 했던 것처럼 하지 말라구요."
나는 에르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물음에 수치스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 에르시아.
다행히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어."
"아, 아니 그렇게 수긍해버리면 곤란한데..."
"....?"
이내 에르시아가 큰 숨을 쉬더니, 다짐한듯 결연한 눈빛으로 말한다.
"레, 레아님이랑...그...거 하는건...! 저예요!"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지며 말하는 에르시아.
하지만, 절대 양보 못한다는 결연한 다짐이 엿보인다.
그녀가 이렇게 변해버린건....
분명 아까 계단에서 올려다본 레아의 치명적인 엉덩이 때문이겠지.
나는 교실 맨 뒷자리에 혼자 앉는다.
그리고 내 대각선 자리에 레아가 앉아있고.
레아가 수업이 끝나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일어날때면, 내 시야의 그녀의 커다란 골반과 엉덩이 라인이 노골적으로 들어온다.
애플힙에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말랑말랑한 엉덩이 라인...
남녀 가릴것 없이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히로인이다.
여색을 하며 성욕이 강한 에르시아 입장에서는 침이 질질 흘러나올 것이리라.
주인공의 빈자리를 틈타 히로인을 따먹고자 하는 조연...
그리고 그 조연이 여자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는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 당신이 조금 도와줘야...레아님이...당신이랑만 다니려고 해요...제가 말 걸어도 잘 안다녀줘요..."
이내 시무륵하며 눈물을 글썽일듯 말하는 에르시아.
순간 루시를 뛰어넘는 불쌍함이 느껴지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친해지고 싶어요...첫사랑이라구요."
"일단 번호라도 교환하는게 어때?"
"연락은 하고있어요."
"....한번 보자."
내 말에 에르시아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같은 것을 보여준다.
[레아님♡]
자요...?
자는군요...
잘자요...
←아! 에르시아? 나 안자고 있어.
아앗...! 그렇군요!
사실 저도 안자고 있었답니다...^^
혹시 지금 배 고프시지는 않으신가요?
레아니ㅁ..양이 어디 아프지는 않을까...오늘은 어떤 못된 녀석이 우리 레아양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 새벽. 저와 함께 산책을 나가지 않으실래요?
제가 훈련도 도와드릴게요...! 저 이래뵈도 학년 3위에요!
예쁘게 입고 나와요 ㅎ
←어...어어...에르시아 타자 굉장히 빠르구나? 다시봤어 ㅎ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크윽!"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밀려들어온다.
문제는, 시간을 보면 매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가끔 수업시간 중에도 문자를 했다는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는 뭐야...?"
"여자들이 뻑! 간다구요...! 그랬어요...!"
"...누가."
"연애서적이요. 정기결제도 했답니다?"
한숨을 애써 참았다.
저렇게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하는데 기를 죽일수는 없으니까.
에르시아가 다른 이도 아닌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건, 분명 내가 그만큼 편해졌다는 거겠지
실제로 에르시아가 자신의 입으로 나에게 레아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거리낄 것도 없고.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에르시아가 연애와 관련된 일로 상담을 할 것이라는 것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애써 자위로 풀고있는데, 첫사랑의 아픔까지 더하면...그 스트레스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
심지어 레아는 여신같은 외모의 절벽 위의 꽃같은 존재.
당장 레아와 가까이 지낸다고 말할 수 있는 나도, 가끔씩 레아가 위에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이런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요...1학기가 끝나면 반도 나뉘는데...!"
솔직히, 성장하기 전인 레아가 에르시아가 있을 A반으로 갈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녀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지겠지.
느긋하게 하겠다고 하였지만, 벌써 1학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거라 생각하지 않을까?
"책임...져야죠..."
"엉?"
"저...그렇게...야한짓 해놓고...개, 개구리해놓고선...당신도 한번 제 말 들어야 해요."
"개구리...?"
에르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지 뭐."
조연이 스스로 가까워지겠다는데 거절할 것도 없다.
"아...! 그리고 저 당신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요."
"레아 때문에?"
내 말에 에르시아가 수줍은듯이 말한다.
"요, 요즘은 루시양도 꽤..."
"허어..."
중증이구만 이거.
"그리고 엘린양도 그곳에 들어갔다면서요? 정말...재주도 좋아가지고."
"엘린도 노리는거야?"
"수석 견제 할려고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더니, 이내 에르시아가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리고, 엘린양 좋죠...쿨한 흑발 미소녀...그 아이...침대에선 어떨까요?"
"허어어"
루시만 해도 정신이 사나운데, 레아도 에르시아도 최근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 같다.
서로 기괴한 성향에 눈을 뜨고 있는데...
이거 나때문이 아니겠지...?
"이만 갈게. 레아 기다리겠다."
"레아님 추우면 안되요...!"
더 이상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기에 자리를 떠났다.
"...늦었네 베드."
"어, 어."
그 뒤 레아에게 추궁당하며 C동 기숙사로 들어갔고, 남은 시간동안 레아, 루시 세명이서 훈련을 했다.
그렇게 실기시험...을 포함한 축제의 날이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