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8.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
* * *
“베르?저기? 좀 움직여줄래?”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부르는 그녀
하지만 나는 평소와는 달리 그녀의 말에 따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는 왜 그러냐는 듯이 부르는 그녀
이미 옷을 모두 벗은 것인지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베르, 혹시 씻기 싫은거야?”
”……”
그녀의 물음에도 나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닫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상대는 고딩이다’
두 눈을 뜨고 싶다는 나의 이 더러운 본능을 씻어내기 위해 마치 불경을 외우듯이 중얼거리고 있는 나의 이성
물컹
그런 나의 몸에 닿는 이 낯선 감촉에 나는 깜짝 놀라 하마타면 눈을 뜰 뻔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낑낑대고 있는 그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베르…. 좀…. 움직여…”
아무리 말해도 내가 움직이지 않자 결국 힘으로라도 나를 끌고가기 위해 나를 껴안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나의 몸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몸 이곳저곳이 나의 몸에 스치며 그 부드러움을 뽐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개중에서도 대형견이라고 불리는 골든리트리버
작고 힘없는 소형견들과는 달리 내가 맘먹고 버틴다고 한다면 겨우 여고생 정도인 그녀의 힘으로는 절대 나를 끌고 갈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씻기 싫어도 씻어야지… 그러다가 병난다구”
질질질…
물론 어디 까지나 내가 맘먹고 버틴다는 전재이지만 말이다
***
쏴아아아아!!!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살짝 미지근할 것 같으면서도 따듯한 미온수가 나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어때? 뜨겁지는 않지?”
그런 나의 옆에서 나의 몸을 구석구석 씻겨주고 있는 그녀는 나를 씻기는 것이 어디가 그렇게 기쁘다는 것인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내 몸 구석구석을 씻기고 있었다
“흠… 사람이 쓰는 비누 써도 되려나”
‘크윽…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 차라리 죽여라!!!’
인간일 적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있어 다른 사람에게 씻겨진다는 감각은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지금 인간이었다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계속 버텼다가는 잘못하면 그녀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 못이기는 척 이곳에 들어오고 말았다
실제로도 대형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종종 개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도리여 다치고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다칠까 봐 들어오는 것이었다
절대, 절대 여고생의 알몸을 보고싶어서 들어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어디 불편한 곳 있어?”
“프르…”
“헤에~ 혹시 부끄러운거야?”
그러나 그런 나의 변명을 싸그리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을 보이면 씻기는 것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나에게 말을 거는 그녀
그럴 때마다 저런 짓굳은 말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오… 제발… 지금 너의 눈앞에 있는 개의 머릿속에는 25살먹은 남자가 살고 있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녀가 나의 몸을 모두 씻겼을 무렵
나는 결국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몸을 씻고 있었다
꼬우면 니들도 죽어서 댕댕이 되시던가
“내가 다 씻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나는 온몸을 비틀어 몸에 있는 물기들을 털어낸 뒤 나를 모두 씻기고는 드디어 씻기 시작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예쁜 피부 사이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잔 상처들
어딘가 산에서 구르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녀는 나를 씻기느라 아직도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음… 저기…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
그런 나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나를 바라보며 괜히 움츠려 들면서 자신의 몸을 가리는 척을 하는 그녀
확실히 그녀가 다른 고등학생정도는 가볍게 압살할 정도의 몸매를 가진 것은 확실하지만 자기 자신만큼 커다란 개와 매일같이 온몸이 털로 뒤덮힐 정도로 놀던 그녀가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가녀린 여자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흡…”
“어? 너 방금 비웃었지? 그렇지?”
그렇게 우리 둘 모두 샤워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와 서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그녀가 뒷정리를 하는 사이 나는 거실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대로 둘이서 씻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씻고 나오자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하늘의 모습
가을도 슬슬 끝날 무렵인 것인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나의 예상보다 많이 서늘했다
‘한 8시쯤은 됐으려나…’
다행히 그녀가 살고 있는 층은 꽤나 높은 편이였기 때문에 아파트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좀비 놈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일단 고개를 돌려 아파트의 불들이 켜져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 불을 키기에는 좀 애매한 시간인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지 못한 것인지 각동마다 불이 켜져있는 집은 기껏해야 10곳을 넘을까말까였다
‘대략 80%정도는 돌아오지 못한 건가… 이건 큰일인데…’
물론 어디까지나 이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기에 겨우 하루만에 한국인의 80%가 좀비가 됐다거나 하는 추측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지금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좀비가 돼서 돌아다닌다는 덧도 아니니깐 말이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좀비 놈들은 힘이 강하고 체력이 높지만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었다
딱히 운동을 한 것 같지 않은 여고생인 그녀가 간신히이긴 해도 도망칠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마 지금쯤 살아남은 사람들도 어딘가에 모여서 숨어있지 않을까
‘그래, 마치 아포칼립스 소설처럼 말이야’
“베르야, 밥 먹어”
“멍!!!”
그렇게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부엌에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그대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런 나를 보며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접시를 내려놓는 그녀
그곳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볶음밥이 담겨져 있었다
계란으로 코팅되어 황금빛으로 빛나는 밥알 사이사이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채소들과 햄의 모습,거기에 그런 조그마한 알갱이들 사이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듯 자리를 잡고 있는 새우까지
이미 한번 차갑게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레인지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열기를 얻은 볶음밥에서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사이로 달콤하고도 고소한 버터의 향기와 그런 특색 있는 식재료들의맛이 따로 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올리브 유의 향긋한 냄새가 올라와 집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그런 볶음밥을 담아주는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분명 그녀와 내가 집으로 막 들어왔을 때 식탁위에 올려져 있던 볶음밥이 아닌가?
‘이건 미래가 먹을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볶음밥을 주고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다음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으음…’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동안 지금 눈앞에 놓인 밥을 보고는 이것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입에서는 흘러내릴 정도로 침이 넘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뭔가 지금 이걸 먹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그렇게 어찌할지 몰라 그저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 와중
그녀의 방안에서 익숙한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제발…제발…”
그리고 들리는 그녀의 조그마한 목소리
무언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바램과는 달리 그저 하염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연결음
문 틈새로 들여다본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제길!!!”
퍽!!!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한 것인지 손에 든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마는 그녀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그녀의 울음에도 그저 바닥에 떨어진 채 전화를 연결하기 위한 연결음을 내고 있는 스마트폰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그저 웅크린 채 품 안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는 그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크흐…읍!? 베르!?”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챈 그녀가 황급하게 눈물을 닦고는 나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왜 그래? 밥이 부족해서 그래? 잠시만 기다…”
텁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손위에 나의 발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힘을 주어 누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으로 깔아뭉갠 것도 아닌 그저 손위에 나의 발을 가볍게 포갰을 뿐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나의 앞발을 보며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흐윽…으윽…”
결국 몇 초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는 다시 울기 시작하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의 품에 다가가 그녀가 편히 울 수 있도록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