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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밤, 불사자 그리고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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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한 배낭을 맨, 아직 소년의 모습을 완전히 벗지 못한 한 남성이 작은 물줄기를 발견하곤 잠시 멈춰 섰다.
한참동안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잿빛 황야를 숨 돌릴 틈도 없이 가로지른 탓인지 그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목을 축이기 위해 물가에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손으로 뜬 물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 반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남자가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어니스트. 그 물에 입대지 마. 그럴 시간 없어.”
“시간도 충분한데 뭐가 문제에요, 랜돌프? 지금까지 시간은 제대로 보고 있었다고요.”
랜돌프가 목을 축이는 것을 막자 불만이 넘쳐흐르는 어니스트는 자리에 주저앉아 시계를 꺼냈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작게 울리는 시계는 하나만 있는 바늘이 검은 선에 닿기 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돌아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밤이 오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어요. 근데 이런 잠깐의 휴식도 안 된다는 거 에요?”
“랜돌프가 조금 말 주변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이게 단순히 시간문제가 아니야. 그거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맛이라도 볼래?”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어니스트의 뒤에서 조금은 느긋하게 걸어온,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어니스트와는 정반대로 연륜이 듬뿍 묻어나는 턱수염을 자랑하는 행크가 어니스트의 머리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찔렀다.
여전히 불만은 가득했지만, 느긋한 행크의 말에 따라 물을 살짝 찍어 입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에 찍은 정도로 미량이었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그 물을 거부하는 것인지 어니스트는 구역질을 하며 손가락이 닿은 곳에 다시 감각이 돌아올 때 까지 자신의 혀를 닦았다.
“씨발! 뭐야 이게!”
그런 어니스트의 모습을 보며 행크는 호쾌하게 웃었다.
“어허, 고운 말을 써야지. 이런 폐허의 모든 건 전쟁으로 인해서 오염됐어. 나라면 그거로 엉덩이도 안 씻을 거야.”
“노닥일 시간 없어. 빠르게 필요한 걸 챙기고, 돌아가야 한다고.”
그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랜돌프는 약간 절뚝이는 발걸음으로 앞서갔고, 이를 본 행크는 가볍게 혀를 차며 아직도 구역질하는 어니스트를 일으켰다.
“뭐, 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따르긴 해야지. 우리가 단순히 마실 나온 것은 아니니까. 어서 움직이자고.”
“그래서 정확히 뭘 찾으려는 거 에요? 뭐가 그렇게 급한 거고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래, 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고 있지?”
잠시 고민하던 어니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전쟁 이후잖아요? 전쟁 이전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라져 모든 빛이 사라지는 시간이 생겼고, 이것을 밤이라고 불렀잖아요? 근데 이거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래, 그 이후로 우리는 그 밤을 이겨낼 빛이 필요했지.”
잠시 주변을 둘러본 행크는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보여줬다.
“이게 뭐로 보여?”
“그냥 돌이요.”
어니스트의 대답에 행크는 작은 망치를 들어 손에 들린 돌멩이를 내려쳤다.
망치가 돌멩이에 닿자 그 돌은 미약한 푸른 섬광을 발하며 부서졌고, 그 자리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분진이 흩날렸다.
“이래도 그냥 돌처럼 보여?”
“그게 대체 뭐죠?”
행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에 발걸음이 멈춘 어니스트의 등을 떠밀며 말을 이어갔다.
“이게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야. 우리는 이런 것을 아침의 파편이라고 부르지. 우리 도시를 움직이고 무엇보다 밤을 이겨낼 빛을 밝힐 수 있는 연료가 되는 물건이야. 물론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만....”
어니스트가 푸른색 빛에 정신이 홀려 불평을 멈춘 동안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고, 행크는 앞을 보라는 듯 어니스트의 등을 힘차게 밀었다.
“밤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라면 빛을 밝히기에 충분히 순수한 파편들이 있지.”
어니스트가 정면으로 눈을 돌리자 지금까지 지나온 황야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풍경이 그를 기다렸다.
전쟁이라고 한다면 기록만이 겨우 남은 먼 과거의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방금까지 사람이 살았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법 했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직각으로 깔끔하게 세워진 벽에 빗물이 흐르도록 만든 배수로, 거기에 생기 없는 회갈색모래에 비현실적으로 나타난 탄탄한 거리까지.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곳에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대체......”
“전쟁으로 인해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고, 무사하더라도 전쟁 중 시작된 밤으로 인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떠난 도시들이 많지. 이것 또한 그 중 하나일 뿐이야.”
“둘 다 잡답은 그만하고 작업 시작해. 어니스트,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먼저 자리를 잡아 주변을 경계하는 랜돌프는 어니스트를 쏘아 붙였다.
아직도 행크의 노근한 목소리와 풍경에 반쯤 취해있던 어니스트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살폈다.
“돌아가야 하는 시간까지 40분 정도 남았어요. 그런데 대체 시간은 왜 계속 물어보는 거죠?”
“밤에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나?”
어니스트의 질문에 얼굴을 찡그린 랜돌프는 건물에 기대며 되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어니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위험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잘 됐네. 그냥 안 된다는 것만 알아두고, 가서 행크나 도와.”
쌀쌀맞게 대답한 랜돌프는 행크를 턱으로 대강 가리키며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뭔가 더 물어보곤 싶었지만 쌀쌀맞은 그의 태도에 어니스트는 하는 수 없이 커다란 가방을 고쳐 매곤 행크의 곁으로 향했다.
곡괭이로 건물의 바닥을 파낸 행크는 한쪽 눈에 황동으로 만들어진 확대경을 쓰곤 바닥에서 나온 잔해를 분류하는 중이었다.
“저기, 오른쪽에 놔둔 파편들부터 챙겨.”
“알겠는데, 대체 랜돌프는 왜 저러는 거 에요? 자기 몸 하나 간수도 못 하는 것 같은데 무슨 호위로 나선다니......”
“랜돌프보다 자기 몸 간수를 잘 하는 사람은 없어. 티페레트는 워낙 영악한 녀석이거든.”
대답은 하더라도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는지 행크는 여전히 아침의 파편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티페...... 뭐요? 그건 또 뭐고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크의 대답에 가방에 파편들을 챙기던 어니스트는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태양이 사라지며 모든 것이 암흑에 잠겼다.
“어니스트! 분명 시간이 남았다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밤에 황동 확대경을 벗은 행크는 한순간에 그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갑작스럽게 변한 행크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어니스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밤이 시작된 건데! 거의 한 시간은 이르잖아! 네가 시계태엽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이게 뭐냐고!”
“저... 저는 분명......”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진지 알기나 하는 거야? 단순히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위험하게 됐다고! 네가 태엽을 제대로 감지 않은 탓에 말이야! 네 멍청함이 모두를 죽인 거라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몰아붙인 어니스트의 기도를 누르던 행크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랜돌프가 그의 얼굴을 후려치자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사이 어니스트는 행크의 손에서 빠져나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저 멍청이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게 생겼는데 그런 말이 나와? 아무리 오차가 있더라도 이렇게 밤에 고립되는 건 절대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불가능하건 뭐건 이미 밤은 찾아왔고, 우리의 목적은 아침의 파편을 도시로 가져가는 거야! 알겠어?! 알겠으면 준비나 해! 이런 비상 상황에 대비해서 내가 온 거니까!”
소리를 지르며 행크를 압도한 랜돌프는 자신의 반신을 감은 붕대를 뜯어냈다.
행크는 혀를 차며 주저앉아 헐떡이는 어니스트를 일으키곤 자신의 어깨에 설치된 백열전구를 켰다.
백열전구의 청백광 아래에 비친 랜돌프의 한쪽 팔은 황동으로 만든 유압 피스톤과 증기관, 그리고 톱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계와 같던 팔은 그가 주먹을 쥐자 톱니가 돌아가며 어깨의 증기배출구에서 짙은 증기가 뿜어냈다.
“가! 지금 당장 움직여!”
아직도 떨떠름한 어니스트에게 행크가 총렬을 짧게 자른 중절 복열 산탄총을 던져주었다.
행크 또한 피스톤이 달린 곡괭이를 들자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삼킨 랜돌프는 문을 기계장치로 된 주먹을 이용해 벽을 부쉈다.
무엇이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니스트는 앞서는 랜돌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창백한 손이 어니스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바닥에 굴러 전구가 깨진 어니스트는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가며 어둠을 향해 산탄총을 겨눴다.
허나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둠속에서 또 다른 손이 뒤에서 그의 목을 붙잡았다.
싸늘한 감촉에 몸부림치며 팔을 떼어낸 어니스트가 바닥에 쓰러지자 어둠 속에선 창백한 손들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어둠 속으로 잡아당겼다.
“일어나! 시간이 없다고!”
어니스트를 붙잡은 손들 곡괭이로 뜯어낸 행크는 어둠속에서 튀어나와 어니스트를 덮치려는 사람을 향해 곡괭이를 휘둘렀다.
마치 시체를 되살려놓은 듯, 창백한 피부의 사람의 가슴에 행크의 곡괭이가 박히고 증기가 터짐과 함께 피스톤이 발사되며 그대로 생기 없는 신체를 완전히 박살냈다.
“이제 왜 밤에 나오지 않는지 알겠어?!”
“대체 저게 뭐에요!”
“불사자들! 밤이 되면 되살아나는, 죽지도 않는 시체들이라고!”
그의 말을 증명해주듯, 행크가 이미 박살낸 신체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크는 이런 모습이 익숙했는지 따라오라며 먼저 앞장서서 곡괭이로 앞길을 막는 시체를 부수며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겁을 먹은 어니스트는 그저 행크의 등만 보고 쫓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선 그와 부딪혔다.
“이런 망할.”
그들의 앞에는 전구의 미약한 빛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불사자들이 벽을 이루어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윤곽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인해 보이진 않았지만, 지축이 울리며 거대한 무언가도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파죽지세로 나아가던 행크는 곡괭이를 쥔 채로 뒷걸음질 쳤다. 어니스트도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곤 있었지만, 다리처럼 손가락이 떨려 방아쇠에 손가락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멈추지 마! 티페레트가 길을 뚫을 거야!”
멈춰선 그들에게 랜돌프의 외침이 들렸고 하늘에서 강렬한 섬광이 떨어지며 지축을 울렸다.
어둠을 가르는 밝은 빛의 중심에는 알 수 없는 기계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었고, 미친 듯이 증기를 뿜기 시작하며 기계를 이루는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레이터에서는 7m에 달하는, 강철로 만들어진 피스톤과 톱니바퀴의 거인이 일어나 팔과 다리를 뻗었고, 철컥이는 소리를 내며 양 손목에 달린 수십 개의 총열을 회전시켰다.
《이전과 똑같은 엔진이네? 그래도 나쁠 건 없지.》
아기자기한 소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회전하던 총열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불사자들로 이루어졌던 벽은 한 순간에 피와 육편들로 갈려나가며 총탄의 세례를 따라 넓은 길이 만들어졌다.
《엔진이 먼저 가라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먼저 파편들부터 운반하래.》
강철의 거인은 행크와 어니스트를 바라보며 멀리서 보이는 빛을 향해 손짓했다.
고막을 찢어나갈 정도로 큰 총성과 섬광으로 인해 주변의 다른 불사자들이 달려들자 행크는 여전히 어니스트를 붙잡고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