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4화 (4/50)

〈 4화 〉 누명

* * *

조금이라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철갑탄으로 콕핏트를 꿰뚫을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샤하나즈의 수호자가 격납고에 도착했다.

《내리지 마, 샤하나즈. 내 안에 타고 시간을 벌다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거라고.》

“설명하면 다들 이해 할 거야. 그러니까 해치 열어 로크.”

《이게 그걸로 끝날 것 같아? 지금 당장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그딴 말이나 하고 있냐고!》

“그래서 0번 전대를 따돌릴 방법은 있고?”

샤하나즈의 일침에 로크는 입을 다물었다.

에버니저 전대장이 샤하나즈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만일 네가 우리 가문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너는 여기가 아니라 0번 전대에 있어야 할 인재다.’

기본적으로 빛의 도시, 로샨의 수호자 전대는 단순히 불멸자들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것 말고도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다.

방금과 같은 거대한, 혹은 이질적인 불멸자를 처리하는 1번 전대.

보급을 담당하는 위성 도시를 세울 곳을 찾고, 전초기지를 만드는 2번 전대.

새로운 장비나 개조를 실험하는 3번 전대.

파괴된 수호자를 현장에서 회수하는 4번 전대.

로샨의 보급을 담당하는 위성 도시를 관리하는 5번 전대.

도시 내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6번 전대.

로샨의 보수와 건설을 담당하는 7번 전대.

공식적인 역할은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좌천하는 자들을 수용하는 8번 전대까지.

그리고 0번 전대의 역할은 각 전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호자와 기사를 뽑아 1번 전대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긴급 상황이나 범죄를 저지르는 다른 수호자를 제압하는 역할이었다.

아무리 샤하나즈가 뛰어나다 한들, 그와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0번 전대의 수호자들을 상대로는 거의 승산이 없었다.

결국 로크는 샤하나즈의 말에 따라 해치를 열었다.

해치에서 내린 그가 수호자의 손에 서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니, 0번 전대의 전대장인 머큐리 루모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총기를 든 위병들이 함께 했지만, 조금도 걸릴 것이 없는 샤하나즈는 정해진 의례를 따라 그에게 경례를 했다.

“8번 전대 소속 기사, 샤하나즈 모토르. 보고드립니다. 방금 전......”

허나 자신의 결백한만을 믿고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던 샤하나즈의 복부에 머큐리의 잔혹한 발길질이 깊숙이 꽂혔다.

“컥.....!”

“살인자가 입을 열지 마라. 이미 확고한 증거가 있는데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거지?”

“오......해입니다...... 방금 전 7번 전대의 수호자는.....”

“입을 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미 속을 뒤집어놓은 발길질에 샤하나즈는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머큐리의 발길질이 그의 턱에 직격하자 사하나즈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샤하나즈가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자 로크가 자체적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예상이라도 하듯, 0번 전대의 수호자들이 샤하나즈의 수호자를 총구로 누르며 위협했다.

“너 같은 놈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 드디어 그 더러운 핏줄의 본색을 드러내는군.”

“......!”

무언가 반론을 하곤 싶었지만 울렁이는 뱃속과 쇠 비린 맛이 가득한 입으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겨우 호흡을 이어가는 그를 다른 위병 두 명이 옆에서 붙들어 강제로 일으켰다.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 내가 즉결 처분하도록 하지.”

다른 위병에게 총을 건네받은 머큐리는 양쪽으로 붙들려 간신히 선 샤하나즈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러자 그 사이를 에버니저의 수호자의 손이 가로막았다.

《머큐리 전대장님.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걸요?》

아직도 수호자의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에버니저 대신 에이다가 머큐리에게 따졌다.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에버니저. 지금 네 전대원이 행한 범죄는 도시에 대한 위협이다.”

《모든 것은 4번 전대의 분석이 끝나고 난 뒤에 볼 일이죠. 그 이전에 확실한 것은 샤하나즈는 지금 누명을 썼다는 것이죠. 저와 에버니저 모두가 봤으니까요.》

“검은......수호자...... 분명한 적의를 가진..... 검은 수호자가 있었습니다...... 그 수호자가 거대한 불멸자를 만들고..... 7번 전대를.....”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샤하나즈는 한쪽으로 피를 뱉으며 간신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간신히 꺼낸 샤하나즈의 목소리는 위병이 그의 어깨 관절을 꺾자 비명소리와 함께 묻혔고, 머큐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지. 다른 모든 요소가 동일할 때 가장 단순한 설명이 최선이라고. 무엇보다 그런 헛소리가 통하지 않는 증거도 있지.”

머큐리가 가볍게 손짓하자 4번대 전대의 기사가 누군가를 부축하며 다가왔다.

한쪽이 완전히 피로 물든 7번대 소속의 기사는 바닥에 피를 흘리며 반쯤 끌려왔고, 한껏 피를 토하다가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희가...... 처리한 불멸자를 두고..... 샤하나즈가......자기가 처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짓 보고는....처벌대상이라고 하니......목격자만..... 없다면 된다며.....저희를 공격했습니다...... 90mm 철갑탄을 이용해서....... 저는 마지막으로 공격당해......간신히 피했지만......”

“거기까지. 무리해서 증거 할 필요는 없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니.”

머큐리의 부탁에 피를 토하던 기사는 말을 멈추고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호흡을 이어갔다.

그러나 위병에게 제압당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샤하나즈와 눈이 마주치니 그를 조롱하듯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수호자를 움직여 그를 그대로 으깨버리고 싶었지만, 그와 같은 심정인 로크가 살짝 움직이니 곧바로 총구가 그의 장갑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건 저와 에버니저가 본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부들거리는 샤하나즈의 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에이다는 곧바로 증언에 반박했다.

“네가 샤하나즈를 방어할 이유는 충분하지. 그러니 신뢰성도 없고. 알겠다면 손을 치워라 에버니저. 그렇지 않다면 너 또한 공범으로 처벌될 거다.”

그러나 에버니저의 수호자는 여전히 손을 치우는 대신 팔뚝에서 기관포를 꺼내 머큐리를 겨누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에버니저의 수호자로 쏠렸고, 샤하나즈의 수호자에게 겨누었던 총구 또한 함께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에이다가 짧게 이어진 침묵을 깼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전대장의 권한으로 선각자 가문 급 재판을 요청하죠. 만약 샤하나즈가 죄가 없다면 당신이 전대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거에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것이지?”

《싫다면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죽던가요. 저와 에버니저 모두 샤하나즈의 무죄에 목숨을 걸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빨리 결정하시죠?》

가만히 에이다의 발언을 곱씹던 머큐리는 결국 총을 내렸고, 이를 확인한 에버니저의 수호자 또한 기관포를 다시 팔뚝에 수납했다.

“좋아. 일단은 샤하나즈를 구치소에 구금하도록. 나는 가주들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지.”

《이제 나머지 0번 전대 수호자들도 다들 돌아가시죠?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고, 밖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에버니저의 수호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구를 쳐내며 손짓했다.

아무리 다른 전대의 전대장이라도 전대장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다들 무기를 내리고 해산했다.

그러는 와중 여전히 위병에게 제압당한 샤하나즈를 보곤 에버니저의 수호자는 그 근처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물론 수호자의 크기를 고려한다면 가볍게 튕긴 손가락의 충격으로 샤하나즈를 끌고가려던 두 위병은 그대로 귀를 붙잡고 쓰러졌다.

《그리고 아직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샤하나즈는 죄인이 아니니 그 인도는 우리 8번 전대에서 담당하도록 할게요.》

“그건 인정할 수 없어. 모든 건 우리 0번 전대가 처리한다.”

《딴 곳으로 빼 돌릴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추가적인 인질은 여기 있잖아요? 다들 기사는 기사니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거니 쓸데없는 걱정은 마시죠.》

에버니저의 수호자는 에버니저가 탑승한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도 의심을 떨치지 못했는지 머큐리는 여전히 자신과 샤하나즈 사이를 막는 에버니저의 수호자를 노려보았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에버니저는 기다렸다는 듯 머큐리의 뒤를 보며 손짓했다.

머큐리가 뒤를 돌아보자 이미 사일러스가 도착해 있었다.

완벽하게 출격 준비를 마치고 숨을 헐떡이는 사일러스와는 달리 평소와 같은 모습의 리암은 그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전대장님? 방금 격납고에 비상 신호가 들어왔는데, 이건 뭔 상황이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표정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사일러스와 달리 리암은 고개만 천천히 저었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잖아. 어쩐지 우리 격납고만 난리더라.......”

사일러스는 무릎을 짚은 것도 모자라서 자리에 주저앉았고, 리암은 그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머큐리를 발견하곤 곧바로 정자세로 경례했다.

“8번 전대 소속 기사, 사일러스 모토르, 보고 드립니다!”

“8번 전대 소속 기사, 리암 일라르, 보고 드립니다!”

그대로 베여버릴 것 같은 머큐리의 시선에 완전히 자세가 굳은 둘의 앞에 에버니저의 수호자가 조심스레 집어든 샤하나즈를 놓아두었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는 안 갈 텐데, 지금 당장 샤하나즈를 구치소로 데려가 줘. 나는 머큐리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네? 구치소요? 대체 뭔 일이 있던 거 에요?”

《설명할 시간 없어. 그리고 사일러스!》

꿈툴거리는 샤하나즈를 리암과 함께 부축하려던 사일러스는 에이다가 자신을 부르자 자리에 멈춰 섰다.

《샤하나즈를 데려가는 건 리암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수호자에 탑승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 에요? 지금 제 수호자는 정비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출격될 때 가해지는 충격도 제대로 못 버틸 거라고요.”

《탑승할 수 없다면 감응만 해도 충분해. 그냥 간단한 심부름 하나 한다고 생각해.》

자신이 아는 평소의 에이다와는 다른 다급한 목소리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리암이 먼저 샤하나즈를 부축해가니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정비중인 자신의 수호자로 달려갔다.

“지금 뭐하는 거지 에버니저?”

《이건 에버니저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거 에요. 조금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요.》

에이다는 평소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버니저. 수호자에서 내려라. 지금 당장.”

《제가 왜 같은 계급의 전대장에게 명령을 들어야하는 건가요? 명령을 하고 싶다면 더 윗 사람을 사람을 불러오던가요. 그런데, 그게 쉬우려나? 돌려 말하면 그건 윗사람에게 명령을 해야 하는 꼴인데. 0번 전대의 전대장이나 되는 분이 그런 기본적인 예의마저 어기겠어요?》

능글맞음과 조롱의 사이에서 선을 타는 에이다의 목소리에 머큐리의 팔에 힘줄이 올라왔다.

“그렇다면 재판에서보지 에버니저. 그 가짜 기사의 운명에 네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머큐리는 분을 삭히며 재판장으로 향했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에이다 안의 에버니저는 긴장으로 인해 멈추기 직전까지 얕아진 호흡을 심호흡하며 원래대로 되돌렸다.

과도한 고통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 기재였는지, 한참동안 의식이 없던 샤하나즈는 구치소의 바닥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고통과 구역질이 밀려와 배를 움켜잡고 헛구역질을 하니 철창 넘어 그를 지켜보던 리암이 작은 양철 플라스크로 철창을 두드렸다.

“너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뭔 짓을 하면 0번 전대하고 엮이는 거야?”

“누명이에요..... 뭔가...... 이상한.... 아악!”

방금 전 팔이 꺾이며 인대가 끊어진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샤하나즈는 바닥을 짚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졌다.

“검은......수호......자.......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가 얼굴로 바닥을 밀어내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일어나려하니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던 리암은 철창 안으로 양철 플라스크를 그의 바로 앞까지 밀어 넣었다.

“일단 그거부터 마셔. 네가 뭔 일을 겪었는지는 그 다음에 들어보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왼팔로 플라스크를 잡은 샤하나즈는 이빨로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었다.

리암이 주는 것이니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바로 입에 가져다 댔지만, 후각을 넘어 통각까지 자극하는 쓴 냄새에 샤하나즈는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체 뭘....준 겁니까...?”

“쓰긴 해도 먹어. 전투 중에 심각한 수호자의 파손으로 인해 기사에게 가해지는 격통을 줄이기 위해 보급되는 약품이니까. 전투 자극제 비슷한 거지.”

여전히 그 냄새에 익숙해질 수 없는 지, 뚜껑을 연 것만으로 샤하나즈는 헛구역질을 이어나갔지만 결국 숨을 참고 내용물을 들이켰다.

마시는 동안의 헛구역질로 반 정도 넘쳐흐른 약을 닦아낸 샤하나즈의 호흡이 조금 안정되자, 리암은 그에게 다시 플라스크를 건네받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명을 썼어요. 검은 수호자가 7번 전대 수호자를 공격했는데, 그걸 제가 한 것이라 오해를 하더라고요.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한데......”

“아니, 말 안 해도 될 것 같네. 7번 전대 애들이 입을 맞췄고, 네가 하필 검은 머리를 한, 밤을 불러온 민족 출신이라 바로 살인자라고 낙인찍은 거잖아. 진짜 살인자가 아니라도 눈엣가시 같은 놈이니까 쫓아낼 명분도 생기고. 웃기는 일이지 너는 애당초 부모도 없었는데 머리카락 색 하나 보고 더러운 핏줄이니 뭐니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 아니야?”

“저기,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꼭 그렇게 상세하게 말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샤하나즈의 말을 흘려들은 리암은 플라스크에 남은 약을 전부 마시곤 벨트의 수납공간에 끼워 넣었다.

“그보다 로크는 어떻게 됐어요......?”

“몰라. 아마 격납고에 있겠지.”

약을 마시고 조금 몽롱해진 것인지, 리암은 철창에 기대어 몸을 이완시키며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리암이 살짝 눈을 감자 얼굴에 가죽 장갑이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달라붙었다.

“로크가 어떻게 됐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

금방이라도 출격을 할 것 같이 모든 준비를 마친 사일러스는 살쩍 헐떡이며 구치소에 도착했다.

얼굴에 정통으로 가죽 장갑을 맞았지만, 리암은 반 박자 늦게 얼굴에서 장갑을 떼어냈고 고개를 떨어트리듯 돌려 사일러스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이러기냐. 사일러스. 같잖은 않은 이야기로 내 얼굴에 이걸 집어던진 거면 격납고에 있는 황동관에 머리를 처박힐 각오해라.”

“로크는 죽었어. 이미 분해되어서 깃든 영혼까지 사라졌다고. 부품도 이미 다른 수호자 정비 라인에 사용 되었어.”

“네.....?”

아무리 약을 먹어서 살짝 몽롱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고 싶지 않았는지, 사일러스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되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크는 죽었다고! 알겠으면 샤하나즈 너도 준비해! 지금 당장 도시를 빠져 나가야해! 전대장님 명령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 에요! 로크가 죽다니! 아직 재판이 시작도 안했는데 거짓말 하지 말아요!”

“재판은 우리가 탈출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거짓말이에요! 로크가 왜 죽어요! 기사의 죄와 수호자는 별개잖아요!”

고통도 잊었는지 절박한 샤하나즈는 철창에 매달려 사일러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철창사이로 들어온 사일러스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직격했다.

샤하나즈가 싸늘한 돌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사일러스는 그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너는 아직도 재판을 믿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이건 8번 전대 전체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라고! 처음부터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야!”

“천천히 말 해봐. 대체 왜 우리 8번 전대를 몰아내려 하는 거지?”

이미 장갑을 착용하고, 대강 출격 준비를 마친 리암이 묻자 사일러스는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에이다가 알려줬어. 전대장님은 아카이브라는 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어.”

“아카이브라면 이 도시가 아침의 파편 없이도 빛을 낼 수 있는 이유잖아. 4명의 선각자 중 한명인 루모르가 횃불 하나만을 가지고 밤을 뚫고 나가 찾아냈다는 그거.”

“그래, 전대장님이 조사한 결과. 아카이브는 하나가 아니야. 이 세상에 수백, 수천 개가 있다는 거지.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는지 리암은 자신의 뺨을 때리며 약에서 깨어나려 노력했다.

“로샨이 가지는 독점성이 없어지는 거지. 만약 다른 아카이브를 찾아낸다면, 또 다른 빛의 도시가 생기고 그만큼 네 선각자 가문의 영향력 또한 약해질 테니까. 입막음을 하겠다는 거지. 처음부터 다 죽일 생각이다 이거네.”

“잠깐만, 그때 검은 수호자가 저보고 아카이브의 의지라고 했는데, 뭔가 알고 계신 것 없나요?”

“나도 정확한 건 몰라. 지금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그보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밖에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사일러스는 황급히 로켈에게 작은 노트를 던졌다.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아카이브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담긴 노트야. 나는 에이다가 내 수호자, 아서에게 내용을 전달했고, 리암은 내가 수호자인 커티스에게 내용을 전했으니까. 받지 못한 건 너 뿐이야.”

“그렇다면 저도 그냥 로크에게 전달하면......”

그러자 사일러스는 철창에 손을 집어넣어 샤하나즈의 멱살을 잡았다.

“로크는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 정신 차려! 그러다가 너까지 죽어버릴 거라고!”

“로크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요! 내가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을 리가......!”

이미 상황을 이해했던 샤하나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 이해했지만, 끝까지 부정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 때문인지 샤하나즈는 로크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로크는 없어! 이제 너만 남은 거라고! 결과가 정해진 재판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건 에버니저 전대장님을 무시할거야?”

점점 더 인지 부조화가 심해지는지 샤하나즈가 입만 뻥끗 거리고 있으니, 리암이 샤하나즈의 멱살을 잡은 사일러스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만해, 사일러스. 수호자와 함께 죽는 것이 운명인 기사가 어떻게 수호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 너도 나도 저 입장이 되어본 적도 없잖아.”

“그렇지만 전대장님이......”

“그만.”

리암이 평소와 같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니 사일러스는 샤하나즈를 잡은 손을 놓았다.

“샤하나즈. 전대장님은 네가 살아남을 거라고 판단해서 그 노트를 준 걸 거야. 절대 포기하지 마. 로크가 없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기사야. 그리고 기사라면 신뢰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마.”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샤하나즈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남긴 리암은 자신의 장비를 정리하며 사일러스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 둘이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구를 가지고 온 0번 전대의 기사가 샤하나즈에게 구속구를 채우곤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선각자 가문급 재판이 열리는 도시의 최상층, 횃불을 든 루모르의 동상이 있는 재판소로 향하는 중, 샤하나즈는 아직도 로크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정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하니 감정이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가 되어 고통스럽고, 울부짖고 싶었지만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샤하나즈의 심정은 조금도 이해하지 않는지, 자리에 주저 않은 샤하나즈를 몇 번 걷어찬 기사는 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니 물건을 가져가듯 그를 무작정 끌고 갔다.

계단에 정강이가 쓸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먼 길을 걷고 나서야 샤하나즈는 루모르의 동상이 세워진 재판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좁은 통로가 그를 맞이했고, 이를 따라 그를 끌고 간 기사는 그를 원형홀의 중앙에 위치한,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구속 의자에 앉혔다.

법정의 의자는 처음부터 샤하나즈의 구속구 하나였던 것처럼 톱니가 맞물려 돌기 시작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샤하나즈를 전신을 비트는 수준으로 구속구를 조여 의자에 고정시키고 나서야, 마치 원형 홀의 중앙에 앉은 샤하나즈를 구덩이에 빠진 짐승과 같이 보일 정도로 높게 위치한 4개의 층에 사람들이 입장했다.

가장 아래층에는 흰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30명 정도가, 그 위에는 에버니저를 제외한 각 수호자 전대의 전대장이 자리를 잡았다.

그 윗층에는 3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각각 톱니가 금사로 수놓인 흰 로브를 뒤집어 쓴 일라르 가문의 가주, 전구가 금사로 수놓인 암폴로 가문의 가주, 그리고 장검이 금사로 수놓인 모토르 가문의 가주가 앉았다.

가장 위에는 자리가 하나 뿐 이었고, 그 자리에는 순백의 로브를 뒤집어 쓴 루모르 가문의 가주가 횃불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침묵을 깬 것은 루모르 가문의 가주였다.

“지금부터 신성한 아카이브와 4인의 선구자 그리고 영원한 빛의 이름으로 죄인, 샤하나즈 모토르의 재판을 시작한다. 죄목은 수호자의 파괴와 기사의 살해.......”

“나는 결백해! 내가 아니라 검은 수호자가 나와서 죽인 거라고! 그러니까 로크를 돌려줘! 내 로크를 아악!”

샤하나즈는 루모르 가문 가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지만, 톱니바퀴가 더욱 단단히 조이자 고통이 그의 입을 막았다.

허나 그가 끝까지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더라도 홀에 가득한 비웃음으 고려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모토르 가문의 가주가 가장 오랫동안 웃었고, 홀이 잠잠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모든 수호자는 모토르 가문에서만 만들어지는데, 아무도 모르는 수호자가 존재한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좀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로크나 에이다에게 물어봐! 검은 수호자를 본 건 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미안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7번 전대는 그런 걸 본적이 없고, 너 말고는 그 검은 수호자를 봤다는 사람은 없어. 에버니저도, 에이다도 더 이상 없거든.”

“뭐......?”

“네가 이 곳에 오기 전, 8번 전대의 수호자 둘이 무단으로 출격했다. 지금은 행방도 파악되지 않지. 그래서 그 죄를 전대장인 에버니저에게 물었다. 그 벌로 에버니저는 모토르라는 이름과 기사의 자격을 박탈했지.”

“에버니저는 수호자에서 내리는 것을 거부해서 에이다에 탑승한 상태로 분해되었다. 에버니저의 사망과 함께 에이다의 소멸 또한 확인 되었다.”

“.......”

아직 로크의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샤하나즈는 에버니저까지 죽었다는 소식에 말은커녕 숨 조자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기사가 수호자와 감응한 상태라면 수호자에 가해진 피해는 기사에게 고통으로 전해진다.

만약 에버니저가 수호자에 탑승한 상태로 분해되었다면 그건 살아있는 사람을 산채로 발골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간이라면 죽었을 상황에서도 고통을 느끼며 전신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에버니저는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뜻이었다.

이 의미도 없는 재판을 위해서 말이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너희들 모두 에버니저 전대장님 같은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라고! 이 빛의 도시를 내가 부숴버리겠어!”

샤하나즈가 날뛸수록 조여들어 결국 살을 파고든 구속구로 인해 의자의 아래에는 피웅덩이가 생겨났지만. 이성을 잃은 샤하나즈에게 고통 따위는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결국 뒤에서 보고 있던 위병이 목을 조르는 구속구를 추가하여 샤하나즈의 호흡까지 막으니 그는 겨우 날뛰는 것을 멈췄다.

“역시 태양을 파괴하고, 밤을 시작한 후손답네요. 존재 자체가 죄악이에요. 마음만 같아서는 에버니저에게 가중 처벌을 하고 싶을 정도군요.”

암폴로 가문의 가주가 고개를 저으며 샤하나즈를 노려보자 모토르 가문의 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시체도 도시 밖으로 폐기했잖아?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겠어?”

모토르 가문의 가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에 이성의 끈이 끊어진 샤하나즈는 다시 날뛰려 했지만, 거의 한계까지 막힌 호흡으로 인해 의식마저 희미해졌다.

“그러면 전대장들에게 묻도록 하지. 빛의 도시를 지키는 기사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하다. 저 자를 기사로 남겨 이 도시에 이득이 있다고 판단되는가?”

찬찬히 분위기를 살피던 루모르 가문의 가주가 묻자 머큐리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8번 전대는 거의 실적을 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전대의 실적을 가로 채려했죠. 그의 수호자를 분해한 것부터가 수호자보다는 부품으로서 더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머큐리가 시작을 끊자 다른 전대장들도 하나 둘 입을 열었다.

“실제로 8번 전대는 제대로 된 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저 어중이떠중이만 모여 있을 뿐이었죠.”

“별 실적도 없어서 정비 순서도 뒤로 밀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샤하나즈라면.... 감응 정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그 검은 수호자가 진짜 있었다고 한다면, 샤하나즈가 움직인게 아닐까 의심되네요. 7번 전대와 마찰이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살인자에게 뭘 바랍니까. 제 전대원을 죽였으니 마음만 같아서는 제가 직접 죽이고 싶을 뿐입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루모르 가문의 가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해당 죄인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생각하는 인원은 모두 거수를.”

시작은 첫 번째 층의 사람들로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을 들었다.

첫 번째 줄이 손을 들자 전대장들의 차례가 되었고, 그들 또한 다를 것이 없이 한 명도 빠짐없이 손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가주들의 차례였고, 당연하게도 3명 모두 손을 들었다.

모든 것을 확인한 루모르 가문의 가주는 단상을 횃대로 가볍게 쳤고, 모두가 손을 내렸다.

“그래서 가장 합당한 처벌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수호자의 파괴에 기사의 살해. 거기에 거짓말까지 더 하면 사형이지. 더 볼 것 있나?”

“저는 추방형에 한 표를 던지죠. 저 더러운 피가 이 도시에 남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 생각되는 군요.”

암폴로 가문의 가주의 발언에 모토르 가문의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녀석을 살려두겠다는 거야?”

“저는 저 더러운 피가 이 도시에 남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 생각되네요. 단순히 사형만으로는 부족해요. 이 도시에서 저 자의 흔적 자체를 아예 지워야 해요. 저 더러운 피가 이 도시 안에 흩뿌려진다면 당신의 가문에게도 죄를 묻도록 하죠. 게다가 저 자에게 이름을 준 건 모토르, 당신 가문 아닌가요?”

암폴로 가문의 가주가 말로 로브를 도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모토르 가문의 가주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의견이 갈리자 아직 입을 열지 않은 일라르 가문의 가주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암폴로 가문의 가주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정해졌군.”

횃불을 든 사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자를 파괴하고 기사를 살해한 죄를 물어 죄인에게서 모토르라는 이름을 박탈하며, 기사의 자격과 명예 또한 박탈한다. 그리고 죄인을 이 도시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그 누구도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는, 결과가 정해진 판결을 마지막으로 희미한 샤하나즈의 의식은 끊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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