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5화 (5/50)

〈 5화 〉 티페레트

* * *

로샨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추방형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쫓겨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죽는다면 시체마저 남기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고, 살아남는다면 영원히 어둠을 두려워하며 살라는 뜻이었다.

추방된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루모르가 로샨이 세워진 아카이브를 찾았을 때와 같은 횃불 한 자루가 전부이다.

이것은 샤하나즈 또한 다를 것이 없었으며, 한계까지 조여진 구속구로 인해 피가 흐르고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샤하나즈는 이 횃불 한 자루만을 들고 절뚝이며 로샨에서 점점 멀어졌다.

만약 에버니저가 알아낸 대로 다른 아카이브가 존재한다면 루모르가 했던 것과 같이 다른 아카이브를 찾아내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샤하나즈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절망.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 주었던 에버니저와 로크가 이 세상에 없는 이상, 그는 기사가 되기 이전의 그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아아아악.....! 흐아아아아아악! 어째서! 어째서! 왜!”

지금 샤하나즈에게 피가 배어나오는 팔다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에버니저와 로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할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격통에 팔다리의 고통은 묻힌 지 오래였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갈 곳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샤하나즈의 정신으로는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하염없이 걷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에 손톱이 가슴의 살점에 파고들 때 까지 가슴을 쥐어짜며 절규하는 것을 반복할 뿐.

언제 닥쳐올지 알 수 없는 밤의 어둠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횃불마저 어느 순간부턴 손에 들려있지도 않았다.

복수를 바라고는 있지만, 로크가 없는 이상 로샨으로 돌아가는 것마저도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 올지 모를 밤을 기다리며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배어나온 피로 신발은 매 걸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거품을 물었다.

그렇게 피로 발자국을 남기며 문자 그대로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생기 없는 회갈색 황야를 걷고 있는 샤하나즈의 앞에 그보다 더 처참한 모습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피 인지 윤활유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짙고 끈적이는 검붉은 액체를 흘리는 그는 망가진 피스톤과 찌그러진 양철로 만들어진 왼다리를 간신히 끌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왼팔 또한 다리와 다를 것 없이 망가진 기계같이 보였고, 톱니가 삐걱대고 군데군데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샤하나즈를 발견하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자리에 쓰러진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샤하나즈의 발목을 붙잡았다.

“너...... 로샨 출신은 아닌 것 같군....... 맞나......?”

“이제는 추방당해서 의미도 없는 일이야. 넌 뭔데.”

힘없는 샤하나즈의 대답에 그는 눈을 찌푸렸지만, 팔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부서지며 튕겨 나오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자리를 뜨려는 샤하나즈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어차피 상관없겠네...... 일단 이거부터 받아.”

샤하나즈의 손목을 붙잡은 그는 부품이 튀어나오는 왼팔로 자신의 상의를 찢었다.

왼쪽 가슴에서는 계속해서 작은 배선이나 파이프 같은 것이 퍼지며 그의 몸을 금속과 기계로 침식해갔고, 이에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대신하는 장갑판을 강제로 뜯어냈다.

그가 강제로 신체와 이어진 부분을 뜯어내자 윤활유처럼 보이는 검은 빛 황록색 기름과 함께 피가 터져 나왔고, 당황한 샤하나즈는 황급히 터져 나오는 액체를 손으로 막았다.

“끄악.....! 끅.....윽....”

“지금 뭐하자는 거야? 죽으려는 거야?”

아무리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분이라도 고통은 여전한지, 남자는 쇳덩이가 섞인 검붉은 액체를 토해내며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출혈을 막는 샤하나즈의 손을 으스러트릴 듯 붙잡았다.

“한 번만 말 할 테니까 잘 들어! 이 톱니바퀴를 로샨에 있는 아이샤에게 전해! 그리고 절대! 절대로 목소리를 믿지 마!”

검붉은 액체를 토하는 남자는 장갑을 뜯어낸 부분 아래에서 돌로 만들어진 톱니바퀴를 뽑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축이 들어갈 중앙에 마치 예리한 원뿔이 붙은 톱니바퀴를 뽑자 심장을 뜯어낸 것 마냥 피가 순간적으로 솟구쳤고, 얼떨결에 톱니바퀴를 받은 그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봐, 나한테 이걸 줘서 뭐하라고? 내 말을 못 들은 거야? 나는 빛의 도시로 돌아갈 수 없어. 너와 같은 신세라고.”

“절대.......절대 목소리를....믿지 마......티페레트를.....믿지.....마.......”

출혈로 인해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인지 그 남자는 넘어가는 숨으로 의문의 말을 남기곤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뒀다.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한 샤하나즈는 그의 눈을 감기곤 작게 실소했다.

“웃기지도 않네. 처음으로 생긴 목적지가 하필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로샨이라니.”

당연하지만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혹여나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부탁을 받았음에도 샤하나즈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고, 여전히 영혼도 목적지도 없는 발걸음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런 샤하나즈의 머릿속에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혹시 내 목소리가 들려?》

주변에 아무도 없었지만 목소리가 들리자 샤하나즈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이질적인 현상에도 샤하나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톱니바퀴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방금 전 그 사람이 말한 목소리인가?”

샤하나즈가 대답하자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곧바로 대답했다.

《아! 들리는 구나! 드디어 제대로 대화가 되는 사람을 찾았어! 다행이야! 지금까지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힘들었단 말이야.》

“넌 대체 뭐지? 이렇게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거는 건 마치.......”

수호자의 영혼 같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잠시 잊고 있던 로크가 떠올라 샤하나즈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또 다시 가슴이 아려오니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쥐었고, 그런 샤하나즈의 심정을 이해라도 하듯 여자 아이도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끄응...... 내가 뭔가 도와줄까?》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고작 목소리 하나 가지고 뭘 도와?”

《고작 목소리 뿐 이지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도 알고. 뭔지는 잘 모르지만 너 복수하고 싶은 거잖아?》

절대로 목소리를 믿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복수라는 단어에 샤하나즈의 이성이 잠시 정지했다.

에버니저와 로크를 죽인 로샨과 네 선각자 가문에 대한 복수.

혼자서는 불가능했지만, 돕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약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샤하나즈의 가슴속에 가득했던 절망은 희망이라는 불씨가 튀자마자 복수라는 불길로 거세게 타올랐고, 지금까지 걸어온 황야와 같이 생기 없던 샤하나즈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게 어딘데! 어디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말 해봐!”

갑작스레 돌변한 샤하나즈의 태도에 여자아이는 잠시 당황한 듯 말만 더듬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상심을 되찾았는지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저, 적당한 사람들이 있어! 내가 길을 안내 할게!》

살짝 두루뭉술한 여자아이의 대답에 살짝 의심이 생겨난 샤하나즈가 눈을 찌푸리자 여자아이는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들도 꽤 많고 수호자도 가지고 있고! 이렇게 감응을 깊게 하는 너라면 움직일 수 있는 수호자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아이샤한테 나를 데려가진 말아줘....... 아프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방금 그 사람도 로샨에 있는 아이샤에게 널 데려가라고 했었지. 아이샤는 대체 누구지?”

아이샤라는 이름이 나오자 겁을 먹은 건지 히익거리는 소리를 낸 아이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흐느끼듯 대답했다.

《나....나를 매번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매일 같이 나를 괴롭히고 실험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나도 겨우 도망쳐 나온 거란 말이야.......》

여전히 아이가 흐느끼니 샤하나즈는 거기까지만 하라는 듯, 톱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어차피 빛의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것 없어. 그보다 길부터 안내해. 그러니까.......네 이름이 뭐지?”

《티페레트.......》

훌쩍임이 섞여있는 티페레트의 대답에 샤하나즈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티페레트. 일단은 길을 좀 안내해 줘.”

티페레트의 지시를 따르며 한참 길을 걷고 있던 중,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샤하나즈는 손가락으로 톱니를 툭툭 쳤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방금 전 그 사람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너를 믿지 말라고 하는 말도 그렇고. 조금 신경 쓰이는데.”

《아~ 그거?》

샤하나즈가 묻자 티페레트는 기다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그 녀석하고 감응이 잘 안된 것도 있어. 내가 몇 번이고 하지 말라는 일을 그대로 해버려서 그렇게 되어버린 거지. 정말 죽도록 답답했다니까? 자기가 잘못 들어놓고 그걸 내 잘못으로 떠넘기니 어처구니가 없지. 그래도 너하고는 얘기가 잘 돼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서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니까?》

“......그렇다면 그 기계에 침식된 건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그렇게 된 건가?”

《그렇지!》

“그러면 그 하면 안 되는 것이 뭐지?”

《답답하다고 나를 가슴에 박아서 감응하려는 행동. 간단하지? 그래봤자 감응 안 되는 건 똑같은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무식하게 쓰는 물건이 아니라고!》

잠자코 티페레트가 떠벌리는 것을 듣고 있던 샤하나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넌 정체가 뭐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수호자의 영혼과 감응하는 느낌과 동일한데, 정작 영혼이 깃들 몸은 없는데. 이렇게 작은 물건에 영혼이 있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밤이 되기 전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대화는 이 정도만 하자고. 어때?》

말을 돌리는 티페레트의 태도에 샤하나즈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다.

티페레트가 무엇인지, 이 작은 톱니바퀴에 어떻게 수호자같이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밤을 넘기고, 복수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도시에서 쫓겨난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고, 걸음을 재촉할수록 구속구가 파고들었던 자리가 욱신거렸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피가 멎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할 때 즈음, 먼 곳에 희미하게 인공적인 건축물이 보였다.

《아, 그래! 이제 거의 다 됐어!》

“확실해?”

체력이 바닥난 뒤로는 정신력으로, 정신력이 바닥난 뒤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 하나만으로 몸을 이끌어온 샤하나즈는 이를 악물며 되물었다.

《확실해! 나도 한 때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으니까! 서둘러! 밤이 곧 올 거라고!》

샤하나즈가 잠시 통증이 올라오는 다리를 쉬기 위해 잠시 멈추니 티페레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샤하나즈는 자신의 손목을 재갈삼아 입에 물고 상처가 난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끄으윽.....!”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욱신거리는 정도의 다리의 통증은 뼈를 가르는 격통으로 변했고, 미약하던 출혈은 상처가 찢어지며 그의 발밑을 적셨다.

고통을 참기 위해 물었던 손목에도 이빨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지만, 샤하나즈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일시적인 격통은 잠시 동안 마취제와 같이 그의 통각을 마비시켰고, 그 짧은 시간동안 샤하나즈는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던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피를 흩뿌리며 멀리 보이는 건물을 향해 뛰는 사이, 하늘은 점차 암전되며 지상의 빛이 빠른 속도로 가려져갔다.

《서둘러! 조금만 더 가면 될 거라고!》

“나도 알아! 안다고!”

방금 전 마취제처럼 썼던 격통의 효과는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멈춰 서서 다시 상처를 내려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샤하나즈가 달리며 흩뿌린 피 냄새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뒤로 어둠속에서 나온 불사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하나 둘 늘어났다.

이제는 통증으로 정신까지 희미해졌지 샤하나즈는 앞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이 사라기지 직전, 멀리서 보이던 건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약하게 남은 시야에 보인 것은 티페레트가 말한 사람들이 아닌, 아무도 없는 폐허뿐이었다.

“뭐야..... 여기 사람들이 있다며?”

《나를 믿은 거야? 하하핫! 역시 사람은 희망을 보여주면 너무 쉽게 속는다니까!》

마치 어린 아이의 잔혹함을 그대로 표현한 듯, 그 어떤 순간보다 밝게 웃는 티페레트는 그를 계속해서 비웃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야. 근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그런 사람들한테 안내해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모든 건 나를 믿은 네 잘못이라고.》

“이 망할 애새끼가!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건데!”

《그걸 그냥은 못 알려주지. 너라면 그 귀중한 정보를 그냥 알려줄 거야?》

불사자들은 이미 한계까지 움직여 간신히 건물의 벽에 몸을 기댄 샤하나즈를 어둠 속으로 잡아 당겼다.

샤하나즈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곤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나오는 손이 점점 늘어나며 어둠속으로 끌려드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그가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에 티페레트가 그에게 하나 제안을 했다.

《자, 살고 싶다면 톱니바퀴로 네 가슴을 찌르면 돼. 낮에 봤던 그 시체처럼 말이야. 내 엔진이 된다면 네 복수 정도는 도와줄게.》

“이런 개 같은! 이걸 노린 거였냐!”

《이제 알았어?》

마음만 같아서는 티페레트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복수를 다짐한 이상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속인 것과 손을 잡는 것은 죽는 것만큼 싫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샤하나즈는 마치 수호자와 감응할 때와 같이 자신의 가슴에 톱니바퀴의 원뿔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섬광과 함께 거대한 기계가 그가 있던 자리에 낙하하며 그 충격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이번 엔진은 좋은데? 이제야 제대로 된 부품이 들어온 기분이야.》

그가 눈을 뜨자 어느 새 자신은 그 수호자에 탑승한 상태였고, 조금은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이 온 몸을 감쌌다.

투박한 장갑으로 인해 직선의 느낌이 강했던 로크와는 달리 티페레트의 장갑은 신체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여성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팔뚝은 자신이 알던 수호자와 같이 무장이 탑재되어 있었는지 손목보다 3배 정도 두꺼웠지만, 이마저도 추가적으로 부착된 수납공간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로크와 달리 자연스러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 따위는 모두 잊게 할 정도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기체의 외장이 점차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검은 수호자...... 너였냐? 네가 모든 걸 시작한 거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샤하나즈의 의지와는 달리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티페레트는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고, 그와 함께 팔뚝의 장갑이 전개되며 그 안에 수납되어 있던 수십 정의 기관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쓰레기 같은 엔진만 만나서 갈아치우기 바빴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게 들어와서 기분이 꽤 좋단 말이지.》

해변가에 나온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 마냥, 티페레트는 장난스럽게 발길질을 하며 주변의 불사자들을 발로 차댔다.

《꺄하하! 진짜 몸이 너무 가벼워! 정말 최고의 엔진이야! 당분간은 갈아 치울 이유도 없겠어!》

그런 소란을 감지한 것인지 지면이 천천히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불멸자가 나타났지만, 이를 기다렸다는 듯 티페레트는 팔뚝에 전개했던 기관포를 그 방향으로 겨누었다.

“견제용 기관포만으로 불멸자를 상대하겠다는 거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천공기나 절단기는 없어? 철갑탄은? 젠장,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엔진은 엔진답게 닥치고 있어! 방해되니까!》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나라면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빨리 나를 따라 움직이라고!”

샤하나즈는 어떻게든 불멸자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려했지만,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와 완전히 독립된 존재처럼 일말의 지시도 듣지 않았다.

둘이 말싸움을 벌이는 사이 불멸자는 괴성을 지르며 티페레트에게 달려들었고,티페레트는 다른 쪽 팔에도 기관포를 전개해 양손을 이용해 사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멸자의 움직임을 제안하는 수준이었지만 총탄세례가 이어지자 티페레트에 닿을 때 즈음에는 질척이는 곤죽이 되어 어둠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봤지?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오랜만에 재미 좀 보려는데 방해하고 있어.》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야? 복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서......”

티페레트가 날뛴 반동인지 전신이 저려오는 샤하나즈는 불안한 호흡으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티페레트의 조소 뿐 이었다.

《내가 왜 알려줘야 해? 내가 거기 있는 이유는 엔진을 얻을 수 있어서였는데, 거기의 엔진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았단 말이야. 근데 이제 끝내주는 엔진을 얻었는데, 돌아갈 이유는 없지.》

“그렇게 하겠다 이거냐?”

티페레트에 조금 익숙해진 것인지 샤하나즈는 티페레트의 한쪽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탈출.”

티페레트가 저항이라도 하는 것인지 손가락은 제멋대로 꺾이고 움직임은 뻣뻣하기 그지없었지만, 결국 그 손은 흉부 장갑에 닿았다.

《잠깐?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넌 뭔데 이렇게까지 깊게 감응하는 거냐고!》

손가락이 틈을 파고들며 장갑을 억지로 뜯어내자 티페레트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너 미쳤어?! 아프잖아! 그만해!》

그러나 샤하나즈는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티페레트와 감응하는 중인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뜯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통증을 참아내고 있었고, 마침내 완전히 장갑을 뜯어낸 그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넌 필요 없어. 나는 내가 알아서 복수를 할 테니까, 너는 너 알아서 엔진을 찾아보라고.”

마지막으로 그가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까지 뽑으니 티페레트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그 사이 사햐나즈는 비틀거리며 뜯어낸 장갑을 통해 수호자 밖으로 몸을 던졌다.

《미, 미안해! 이러지 마! 이러면 너도 죽고 나도 어디로 못 간다고! 여기 갇혀있는 건 싫어!》

“엿이나 먹어.”

이미 마음을 정한 샤하나즈는 손에 들린 티페레트의 절박한 외침도 무시한 채로 남은 힘을 다해 톱니바퀴를 집어 던졌다.

물론 자신은 자신대로 부탁을 한다고 했지만, 수호자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계획에 없었다.

티페레트의 잔해가 천천히 사라지며 푸른빛을 내고 있으니 아직 주변에 불사자는 없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 같이 보였다.

로샨의 수호자의 조종석에는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약간의 식량과 무기, 그리고 한 번의 밤 정도는 넘길 수 있는 빛을 내는 전구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티페레트에 그런 것이 마련되어 있을 리도 없었다.

“젠장,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아직 해야 될 일이 많은데.....!”

수호자가 내는 빛이 점점 희미해지니 불사자들이 몰려들었고, 샤하나즈는 필사적으로 기어 사라지는 수호자의 잔해로 행햤다.

조금이라도 버티면 밤이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뭔가 이 난관을 이겨낼 방법이 생각날지도 몰랐다.

“젠장, 로크, 이럴 땐 매번 네 도움이 있었는데, 젠장.... 젠장!”

점점 희미해지는 빛에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제 몸을 다 비추지 못할 정도로 수호자의 빛의 희미해지자 불사자들이 그의 몸을 붙잡았다.

남은 잔해에 매달린 그는 발로 손을 차내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빛이 사라질수록 그를 붙잡는 손은 많아졌다.

그러는 중 한 손이 상처가 있는 다리를 붙잡았고, 이를 타고 올라오는 격통에 샤하나즈가 손을 놓으니 그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광원이 멀어지자마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그를 감쌌다.

전신을 누르는 그 어둠 속에선 그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가려는 손들이 그를 잡아 당겼다.

온 몸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힘에 어떻게든 저항해도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잡아당기는 힘은 강해질 뿐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이제는 희미한 빛마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공허함과 싸늘함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로크.......에버니저.....전대장님......죄송해요......”

샤하나즈는 폐에 남은 공기를 쥐어짜내 마지막 말을 뱉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 멀리서 조그마한 빛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