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9화 (9/50)

〈 9화 〉 수호자 탈환 작전 ­ 3

* * *

선착장에 도착한 그 둘은 벽에 기대 몸을 숨겼다.

등대의 파손으로 인해서 두 수호자의 하역작업은 늦춰진 것으로 보였지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상자에 담긴 다른 물품의 하역작업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는 왔는데,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비행선을 탈취 하냐는 건데......”

“아직 사람이 있는 게 문제지. 뭔가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

“나는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말 했잖아? 여기까지만 오면 뭔가 떠오를 줄 알았지. 아니면 누나가 뭔가 해주거나.”

에라실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에라실의 태도에 화도 나지 않는지 레티시아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비행선은 고사하고 수호자를 탈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누나, 나 지금 정말 안 좋은 계획이 생각난 것 같아.”

“뭐가 되었든 무계획보다는 좋겠지. 설명 해봐.”

단검으로 바닥에 위에서 내려다 본 선착장을 간략하게 그리던 에라실은 또 다시 손을 멈췄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래. 나쁜 계획이 아니라 미친 계획이겠네. 들어도 화내지 않는다면 약속하면 설명해 줄게.”

“내가 화내는 것 본 적 있어? 동생한테 화를 낼 이유도 없고.”

레티시아가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미소를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었는지 에라실의 표정은 약간 굳었다.

그럼에도 다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생각을 더 할수록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다시 입을 멈췄다.

“좋아. 다시 생각하니까 이건 미친 계획이 아니네. 나쁘고 미친 계획이네.”

“이해하니까 계속 해보라니까. 뭘 생각하던지 나는 널 도와줄 테니까.”

“누나, 내가 8번 전대로 오기 전에는 3번 전대에 있던 건 알고 있지?”

“그렇지. 그 이전에는 일라르 가문의 일원으로 장비의 개발과 실험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렇지. 그 시설 저 비행선 작업에는 나도 참여한 적이 있어서 설계 결함을 하나 알고 있어. 결함이라고 하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에라실은 자신이 그린 대강 그린 선착장에서 비행선을 의미하는 타원을 단검으로 콕콕 찔렀다.

“저 비행선의 주 엔진은 전쟁 이후에 설계된 걸 쓰는데, 비행선은 전쟁 이전에 설계된 걸 개량해서 써서 보조 엔진은 그대로 사용한다는 거야.”

“그 말은......”

에라실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을 조절하는 보조 엔진은 여전히 전쟁 이전의 가연성 연료를 쓰거든. 아침의 파편을 쓰는 엔진은 비싸고 작게 만드는 건 더 힘드니까. 그리고 정박 시에는 연료의 주유가 필요하지.”

에라실은 소매에서 폭탄 하나를 꺼냈고, 벽 넘어 선착장과 자신이 바닥에 그린 선착장을 비교했다.

“그리고 내가 노리는 건...... 그 연료를 보관하는 곳이지.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거야.”

“그걸로 시선을 끌겠다는 거야?”

“지금은 대부분 비어서 크게는 아니지만 불이 좀 날거야. 거기에 몇 명이 불에 붙을지도 모르겠지. 그래서 나쁘고 미친 계획이라고 한 거야.”

그러나 레티시아의 허락을 받으려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폭탄을 벽에 쳐서 점화시킨 에라실은 곧바로 연료가 보관된 곳으로 이를 던졌다.

“에라실!”

“뛸 준비 해. 몸에 불이 붙기 전에 수호자에 타야지 안전할 테니까.”

“넌 정말......!”

폭발과 함께 불에 붙은 연료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하니 에라실과 레티시아는 곧바로 비행선을 향해 뛰었다.

하역 작업을 하던 인부들은 갑작스런 폭발에 당황에 몸이 굳거나 화재로부터 도망치느라 그 사이를 뛰는 두 명을 눈치 챌 수도 없었고, 간혹 눈치를 채도 레티시아가 곧바로 이를 제압했다.

“그래서 그런데 이 비행선 조종할 줄은 알아?”

“할 줄은 알아! 혼자서는 좀 힘들지만. 아무튼 누나는 화물칸으로 가서 문 닫고 발레리안하고 스펜서부터 확인해! 문 옆에 래버만 당기면 될 거야!”

화물선에 타자마자 곧바로 조종석으로 향한 에라실은 레티시아에게 반대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륙 전 확인 절차 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곧바로 엔진에 시동을 건 에라실은 화물칸이 열렸다는 것을 경고하는 표시등이 꺼질 때 까지 기다렸다.

레티시아는 비행선에 대해 잘 모르니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전구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결국 참지 못한 에라실이 조종실에서 나오자 화물칸에서 달려오는 레티시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만약 아이샤가 붙잡은 수호자가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이 비행선은 끝장이라고! 지금 당장 문 닫아! 바로 출발할 거니까!”

이해할 수 없는 레티시아의 행동에 에라실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다시 조종석으로 가려 했지만,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비행선이 문제가 아니야. 네가 이걸 봐야 해.”

그녀의 말을 반쯤 무시했던 에라실은 억지로 조종석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체격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는지 그는 곧바로 중심을 잃고 레티시아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화물칸에 도착하자 두 대의 수호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물칸으로 끌려온 에라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레티시아가 인부들이 하역하던 상자 중 하나의 뚜껑을 열자 에라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런 에라실을 뒤로하고 레티시아는 대충 눕혀진 발레리안을 타고 올라 콕핏트를 열었다.

“나는 지금 당장 발레리안을 탈거야. 지금 밖으로 나간 것만 해도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하나라도 놓고 갈 수는 없어. 너는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이 비행선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화물을 챙겨줘.”

잠시 내용물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은 에라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리안의 옆에 있는 스펜서에 올라탔고, 두 수호자가 천천히 파손된 장갑의 파편들을 떨어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 예리한 원뿔이 박히자 다리와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레티시아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것은 신음소리가 아닌 친근감이 가득한 환영이었다.

“누나 왔어. 상태 점검 좀 부탁해, 발레리안.”

그러자 조금 시무룩한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오른쪽 다리는 오버호를 위해 임시 다리로 바꺼서 충격 흡수가 저녀 안 되여. 오른팔은 손상이 시매서 해체 했고, 남은 무장은 방패 하나가 전부에여.》

“움직일 수는 있고?”

《움지길 수는 있는데 전체적으로 손상이 시매서 장갑이 버텨도 제가 못 버틸 거 같아여.... 제송해요...... 제가 너무 야캐서......》

말하는 것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발음이 어리숙한 발레리안이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레티시아는 통증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지? 조금 힘들어도 누나가 부탁할게. 지금 도망칠 수는 없거든.”

《누나가 부타카면 어쩔 수 없져. 최대한 노려캐볼게여.》

천천히 일어난 발레리안은 조심스레 화물칸 밖으로 나왔다.

일반적인 수호자보다 2m 정도 더 크고, 전신에는 일반적인 장갑보다 2배 이상 두꺼운 장갑이 전신에 장착된 수호자가 밖으로 나오자 화재로 시작되었던 선착장의 혼란은 한층 더 가속되었다.

“레티시아, 지금 수호자에 탄 거지? 지금 내가 위치를 알려줄 테니까 비행선을 그쪽으로 돌려. 위치는.....”

《누나 말로는 지금 도망칠 때가 아니래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수호자를 영원히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샤하나즈는 어쩌려고!”

아이샤의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더 이상 표정을 꾸밀 수 없었는지,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샤하나즈 때문에 이러는 거야! 여기 있는 화물을 모두 확보해야 한다고! 뭐가 어떻게 되었던지 그 수호자를 해결하고 도시에서 지원이 오기 전에 빠져 나가야해!”

《누나......?》

발레리안이 당황하자 심호흡으로 간신히 고통을 억누른 그녀는 다시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괜찮으니까 아이샤에게 어디 있는지 물어봐. 지금 그 수호자를 처리할 거야.”

마치 처음으로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을 보는 아이처럼 한참동안 말이 없던 발레리안은 한쪽 다리를 끌며 천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지금 어디 계세여? 누나가 거기로 간데여. 다른 수호자를 처리해야 한다면서여.》

“그 손상을 입고 뭘 하려고?”

《저는 몰라여! 그래도 채선을 다할게여!》

이러한 상황에서도 발레리안이 명랑하게 대답하자 아이샤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쳤지만, 이내 멀리서 총성과 굉음이 대답과 함께 돌아왔다.

“나도 이제 한계야. 수호자의 위치는 보면 알거야. 그리고 내가 가지 않으면 샤하나즈가 죽을 거야.”

《알게써여. 지금 거기로 갈 테니까......》

그러나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모습과 약간 벗어난, 등이 약간 굽고 양 팔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수호자 하나가 비행선에서 튀어나면서 대화를 끊었다.

《빛나는 해부학 시간이다!》

지금의 상황.

아니, 어떤 상황이라도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문장이 울려 퍼지자 아이샤는 목소리에 당황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스펜서가 아직 가지 말래여. 샤하나즈는 괜찮으니까 저희끼리 수호자 하나만 처리하면 된데여.》

흉부장갑 포함한 거의 모든 장갑이 없어 골격 사이로 에라실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스펜서는 다리보다는 양 팔을 이용해 비행선 위로 올라간 뒤, 소음이 난 곳으로 뛰어내렸다.

발레리안도 이를 따라 방패를 내려놓고 그 위에 올라타서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래서 3명이서 뭘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티페레트가 안전한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매콤한 윤활유와 바삭거리는 철갑탄!》

스펜서의 대답은 여전히 말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말을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아이샤만이 아닌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발레리안 뿐이었다.

《자기는 알 수 있다고 해써여. 샤하나즈는 지금 조금 아프기는 해도 괜찮다고여.》

“스펜서의 직감이라면 맞겠지. 그러면 지금 당장 움직여. 아마 협공할 필요가 있을 거야. 에라실에게 반대쪽에서 노려보라고 전해줘.”

선착장의 아래까지 내려온 발레리안은 다시 방패를 들고 소음이 난 곳으로 향했다.

물론 사람은 그 고철로 된 숲 안에 숨을 수 있을지 몰라도 9m가까이 되는 발레리안이 숨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 즉시 적 수호자가 발레리안을 노리고 총구를 돌렸다.

“깡!”

방패로 공격을 막아내자 굉음과 함께 방패 내부 장갑에 균열이 생기니 레티시아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철갑타니에여! 이거는 방패로도 얼마 못 마가여!》

“처음부터 견제나 제압은 선택지에 아예 없었나보네.”

방패에 또 다른 균열이 생기니 앞으로 나아가던 발레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두꺼운 장갑과 방패 그리고 평균 이상의 출력은 정면에서 불멸자를 상대할 때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같은 수호자를 상대하는 경우는 그저 철갑탄으로 맞추기 쉬운 목표일 뿐 이었다.

《뇌관에 불을 붙이고 톱니바퀴를 싸질러라!》

발레리안이 고전하는 도중 스펜서는 뭔가 생각이라도 났는지 의문을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다시 선착장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어..... 그게 가능한가여?》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에서 무언가를 집어냈는지, 발레리안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 수호자를 한 방에 보낼 계회기요. 자기가 신호를 주면 아이샤씨가 수호자를 무꺼달라고 해써여. 저는 적 수호자를 자블 수 이쓸 정도로 접근하면 대고여.》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했다.

“이제 아침의 파편이 남은 게 없어서 불가능해. 방금이 마지막이었다고.”

“더 접근할 수도 없어! 두 발 정도만 더 맞으면 방패도 박살날 거라고! 네 상황은 너도 잘 알잖아 발레리안!”

두 명 모두 그 계획에는 준비가 되지 않는 듯 보였지만, 스펜서는 이미 계획을 시작했다.

《지옥에 호출을 넣어라!》

그와 함께 정박한 비행선을 고정한 앵커를 뜯은 스펜서는 그대로 주 엔진을 양 손으로 내려쳤다.

비행선을 공중에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내부에 들어있는 기체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침의 파편을 이용한 주 엔진이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주 엔진을 잃은 비행선은 서서히 그들의 위로 내려앉았다.

레티시아를 노리던 수호자는 자신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생기자 곧바로 위로 조준을 돌렸지만, 이미 거대한 비행선에 철갑탄만으로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아이샤! 1초!》

처음으로 이성적인 그의 발언과 함께 추락하는 비행선이 지면에 닿으려하니 이번에는 그가 보조 엔진으로 향했다.

부서지며 푸른 증기만 내뿜었던 주 엔진과는 달리 보조 엔진은 그가 내려치자 불길에 휩싸였다.

보조 엔진에서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비행선의 본체로 옮겨 붙었고, 이내 선착장에서 있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과 함께 불길이 솟구쳤다.

《지그미에여!》

이를 신호로 발레리안은 방패를 집어던졌다.

폭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지만, 거대한 수호자가 달려오는 방향은 진동과 소리만으로 알아챌 수 있어 적 수호자는 곧바로 총구를 내렸다.

허나 철갑탄이 발사되기 직전 수호자의 몸에는 희미한 푸른 문자가 새겨지며 철갑탄은 발레리안의 가슴의 중앙에 있는 조종석을 약간 벗어난 곳을 관통했다.

《대체 뭐야 이건! 이 쓰레기 같은 8번 전대 기사에 고철 같은 수호자인데, 이렇게 거슬리게 하는 거냐!》

초탄은 빗나갔어도 차탄은 무조건 직격 시키겠다는 의지인지 포신을 휘둘러 시야를 가리는 화염과 연기를 흩어낸 수호자는 다시 발레리안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뒤로 스펜서가 달라붙어 그의 어깨 관절을 붙잡았다.

《이런 망할 놈들이!》

체격차이도 체격 차이였지만 스펜서는 이미 가동 한계에 도달했는지 몸을 제대로 붙들지도 못해 반쯤 흘러내렸고, 수호자가 어깨를 휘두르자 뒤로 날아가며 파편들을 흩뿌렸다.

장갑이 깨지는 것을 넘어 복부의 부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허리는 척추를 담당하는 뼈대 하나만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간신히 이어진 상황임에도 스펜서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오늘은 고기로 배부를 거다!》

“알아! 이 정도면 충분해!”

이미 발레리안은 포신보다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호자는 팔뚝을 변형시켜 칼날을 꺼냈다. 그러나 이 칼날이 붉게 달아오르기도 전에 달리는 속도를 유지한 발레리안의 주먹이 흉부 장갑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 거대한 중갑에서는 나올 수 없는 속도와 질량이 만들어낸 충격량은 장갑을 파고드는 것을 넘어 콕핏트가 있는 흉부와 머리를 함께 강제로 뜯어냈다.

《아아아악....!》

콕핏트가 완전히 으깨지며 피가 섞인 기름을 흩뿌리자 수호자의 영혼이 사라지는 비명이 모두의 머리에 메아리 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 죽음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발레리안..... 모두의 상태 점검 부탁해.......”

《스펜서는 대답이 없고 저는 아파여..... 누나는 갠차나여.....?》

지금 느껴지는 것이 수호자와 감응되어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몸이 다쳐서 느껴지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던 레티시아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가슴 쪽에 느껴지는 통증은 감응으로 인한 듯 했지만, 허벅지를 만졌을 때는 손에 한 가득 피가 묻어났다.

거기에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어도 허벅지에는 부서진 피스톤이 박힌 것도 만져졌다.

물론 출혈이 있기는 하지만 피스톤을 뽑아내지 않는 이상 심각한 출혈이 있는 것도 아닐테니 레티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아. 너는 움직일 수는 있어?”

《싸울 수는 업서도 움지길 수는 이쓸거가타여......》

“그러면 우리가 움직여야지. 일단 스펜서부터 챙기자. 그 다음 샤하나즈를 찾아보고......”

《상처에 소금을!》

또 다시 이어진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과 함께 몸이 반쯤 잘린 스펜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몸이 둘로 분리될 것 같았지만, 그 독특한 설계 덕분이었는지 유인원처럼 양 손으로 땅을 짚고 있으니 어느 정도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발레리안?”

《아, 자기는 갠찮고, 화무른 자기가 가져올 테니까 누나는 샤하나즈부터 챙기래여.》

팔까지 이용해서 간신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부상을 숨기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지만, 레티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라실과 스펜서가 걱정되긴 했지만, 이것은 샤하나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난장판이 있었다면 분명 로샨에서 지원이 올 텐데 화물을 챙기고 도망칠 때 까지 여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연히 저지했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 에라실에게 화물을 챙겨서 샤하나즈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전해줘.”

비틀거리는 발레리안이 샤하나즈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 앞으로 불기둥이 솟구치며 헐떡이는 아이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아니지, 서두르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와야 할 것 같아. 수호자가 지금 당장 필요해.”

《무슨 이린데 그러세여?》

“티페레트 안에 샤하나즈가 갇힌 것 같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지금 당장 샤하나즈를 분리해내야 하는데, 나는 뭘 못하겠어.”

지금까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듯, 야이샤가 보여준 양손에는 찔리고 베인 상처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말에 방금까지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서두르려던 레티시아는 구멍이 뚫린 흉부를 손으로 틀어막곤 뛰기 시작했다.

정신만으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레티시아는 입술이 잘리기 직전까지 깨물며 비명조자 내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물론 이미 정신이 감응되어 있는 발레리안에게 고통을 숨기는 행동은 의미가 없었지만, 그녀의 뜻을 이해한 발레리안 또한 투정을 꾹 참고 그녀의 의지에 따랐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억누른 레티시아가 티페레트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비명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샤하나즈!”

기동을 정지한 티페레트는 오른팔과 왼다리가 잘리고, 남아있는 왼팔은 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앞에는 티페레트의 가슴에 총구를 겨눈 수호자가 있어 발레리안은 이를 막기 위해 달려갔지만, 멀쩡해 보이는 적 수호자는 흉부 장갑의 정중앙을 예리한 사슬 하나가 꿰뚫어 기동을 정지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곧바로 적 수호자를 한쪽으로 쳐낸 발레리안은 티페레트를 눕혔다.

샤하나즈의 반응을 보기 위해 흉부 장갑을 몇 번이고 두드려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게속 부르는데 바능이 업서여......》

“지금 당장 샤하나즈를 분리해 내야해! 강제로라도!”

아이샤는 다급하게 그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흉부 장갑에 손을 올린 레티시아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샤하나즈가 조금의 의식이 있는 상황이라면 장갑을 뜯어내며 느끼는 고통은 늑골을 그대로 뜯어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고통을 줄 것이었고, 이와 함께 산 채로 해체된 에버니저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뭐하는 거야? 지금 당장 뜯어내야한다고!”

“너는 수호자에 타본 적이 없어서 모를 텐데, 수호자에게 가하는 고통은 기사에게도 똑같이 전해져. 지금 하라는 건 살아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의 가슴을 뜯어내라는 거하고 다를 게 없다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샤하나즈가 사라질지도 몰라! 감응을 넘어서 완전히 동화되어버리기 전에 빨리!”

레티시아가 계속 망설이고 있으니 그 근처로 이동한 아이샤는 주변의 긴 잔해를 집어 들어 티페레트의 흉부 장갑 아래에 밀어 넣었다.

지렛대처럼 어떻게든 장갑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굳건히 닫힌 티페레트의 흉곽은 열리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머뭇거리던 레티시아는 있는 힘껏 티페레트의 흉부 장갑을 뜯어냈고, 그 안에는 부품처럼 기계와 연결된 샤하나즈가 있었다.

팔에 금속 파이프나 전선같이 보이는 것들이 연결되어 있어 레티시아는 다른 수호자들보다 더 크고 투박한 손으로 콕핏트의 주변을 으깨가며 샤하나즈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연결된 부분을 하나씩 끊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슴에 연결된 기계팔까지 끊어내니 티페레트의 잔해는 푸른 분진을 내며 천천히 증발했고 샤하나즈는 비명에 가까운 숨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샤하나즈? 정신이 좀 들어?”

“일단은. 그보다 누나가 발레리안을 되찾은 것 보니까 계획은 성공한 것 같네.”

“그래, 꼴은 이래도 일단 되찾은 게 중요하니까. 에라실도......잠깐만. 너 어떻게 내 말을 들은 거야?”

평소라면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것은 발레리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마치 샤하나즈가 자신의 말을 직접 들은 것처럼 대답했다.

거기에 샤하나즈의 대답도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수호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대답을 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그건 아마 내 탓일 거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샤하나즈를 나에게서 분리했는데도 이번에는 내가 샤하나즈의 부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레티시아만이 아닌지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고, 그 자리에는 티페레트의 톱니바퀴가 신체의 일부처럼 깊게 박혀 있었다.

당황한 샤하나즈가 톱니바퀴와 연결된 기계팔을 뜯어냈지만, 톱니바퀴는 여전히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마.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야.》

모두가, 심지어 티페레트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민하다 결국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일단 이해하는 건 나중에 하자고 치자. 그보다 비행선이 폭발한 상태에서 합류 지점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이야? 이제 곧 로샨에서 지원이 올 거라고.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전부 헛수고야,”

그 말에 반응하듯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모두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내가 티페레트를 다시 부를 게. 그거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거야”

《무리. 나도 내 몸에 대해서는 확실한 말은 할 수 없지만, 지금 안된다는 건 100% 확신 할 수 있어.》

티페레트의 거절도 거절이었지만, 아직도 부러진 피스톤이나 전선이 박혀있는 팔은 움직이지도 않았고, 이내 다리에도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보니까 오른팔하고 왼쪽 다리에는 감각도 없는 것 같네. 아직도 수호자에 탔을 때 반동이 남은 것 같아.》

“그러면 누나하고 에라실은 아이샤가 도망치게 해줘! 나는 추방형이라서 잡혀가더라도 로샨으로 가진 않을 거야! 그 사이에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샤하나즈. 기사의 무덤은 수호자야. 나는 발레리안을 버릴 생각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스펜서가 한쪽에 방패를 끌며 가까이 오자 에라실의 목소리가 샤하나즈의 머릿속에 울렸다.

언제나 비정상적인 말만 이어가던 스펜서에게 에라실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놀라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심각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다들 도망치라고! 에버니저 전대장님은 어떻게 보려고!”

“그건 만나고 나서 생각해야지.”

“아이샤! 억지로 해도 좋으니까 다들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해!”

《거 참 눈물겨운 동료애네.》

에라실이 했다면 조금 찝찝해도 웃을만한 비아냥거림이었지만, 티페레트가 이러한 말을 하니 어떻게 화풀이도 할 수 없는 샤하나즈는 비명을 질렀다.

비행선이 그들의 앞에 착륙하자 거의 부서지기 직전인 발레리안이 움직이지 못하는 샤하나즈를 지키려는 듯 비행선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하고 도망가! 그건 그냥 개죽음이라고!”

“누나의 소명을 다하는 거지. 이런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저도 갠차나여. 누나가 갠찬다고 하면 저도 할 수 이쓸거에여.》

“제발! 에버니저 전대장님을 잃은 것도 이미 버티기 힘들다고!”

샤하나즈는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자신을 지키려는 발레리안의 뒷모습에서 에이다가 겹쳐 보이는 것인지 눈물이 차오르며 앞이 흐려졌다.

에버니저 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눈 앞에서 누나와 같은 전대원을 잃을 상황이었다.

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티페레트는 협조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의 눈에 비행선에서 내린 수호자 두 대가 다가왔다.

“도망쳐! 제발!”

그러나 비극적인 포성이나 발레리안의 비명 대신 너무나도 익숙한 두 명의 목소리가 그의 절규에 대답했다.

“잠깐 왜 샤하나즈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거야? 수호자에 탄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뭔지는 몰라도 도망칠 필요는 없겠네. 그보다 다들 개판이네.”

그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발레리안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고, 눈물로 가려진 샤하나즈의 시야에는 사일러스와 리암의 수호자인 아서와 커티스가 주저앉은 발레리안을 일으켰다.

“아리아드네가 알려줬어. 너희를 구하려면 비행선을 하나쯤 납치하는 게 좋을 거라고.”

“아리아드네?”

그러자 아이샤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와 같은 올드 원이야. 나보다 더 강하고, 나를 더럽게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지.”

“나는 왜 그 사람이 너를 도와줬는지 보다, 너희가 왜 이렇게 개판으로 싸웠는지가 더 궁금한데.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여기에 있어야 할 비행선을 날려 먹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화물칸에 발레리안을 수용한 리암은 세프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에라실이 자신이 끌고 왔던 방패를 그의 앞에 들이밀었고, 그의 옆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마저도 할 말을 잃었다.

“이거 지금.......”

“로크의 잔해야. 에이다의 잔해까지 있어.”

“로크? 지금 로크라고 했어?!”

“그래, 그것 때문에 비행선을 바로 탈취할 수 없던 거였어. 하나라도 빠트릴 수 없었거든.”

여전히 부품만을 바라보는 샤하나즈와는 달리 리암은 그 방패를 가지고 조심스레 화물칸에 실었다.

“뭐가 됐던지 좋아. 얼마 지나면 우리가 비행선을 탈취 했다는 걸 알 테니까 일단 먼저 움직이고 생각하자고. 뭔가 하려면 우리 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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