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트리아지
* * *
고도가 낮아지던 비행선이 바닥에 닿을 때 쯤, 밤이 끝나 점차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안전하다고는 했지만 그리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한 눈에 봐도 피폐한 것이 보이는 레티시아와 에라실이 사일러스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선의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으며 거대한 원뿔은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그 웅장함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는지 잠시 할 말을 잃은 레티시아는 살짝 더듬거리며 아이샤에게 물었다.
“그, 그래서 이게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찾던 거야?”
“맞으면서 틀려. 에버니저가 아카이브를 찾는 것은 맞지만, 찾으려고 하는 건 수백 개가 넘는 아카이브 중 하나였으니까. 이게 그 아카이브일 확률은 거의 없겠지.”
“0은 아니라는 거잖아?”
모두가 아카이브를 눈앞에 두고 망설이는 사이, 에라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원뿔의 아래에 있는 구멍으로 뛰어 들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기에 레티시아마저도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당황한 사일러스는 리암에게 레티시아의 부축을 맡기곤 그 뒤를 쫒았다.
얼핏 보기에는 에라실이 끝없이 아래로 떨지는 구멍으로 몸을 던진 것처럼 보였지만, 리암이 처음 발견한 구멍보다 몇 배는 더 넓어진 구멍의 안에는 벽면을 따라 아래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 나선 계단이 있었다.
아래에선 계단을 내려가던 에라실이 당황한 사일러스를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었다.
“뭐야? 그렇게 무서워하다가 누가 먼저 가니까 그때서야 들어오는 거야?”
“아니, 걱정 되서 온 사람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그건 쓸데없이 걱정해서 온 사람이 호구지. 언제까지 그렇게 속고만 살 거야?”
그러나 웃고 있는 에라실의 표정이 순간 구겨지더니 그는 난간에 기댄 몸을 벽면 쪽으로 던졌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구멍의 아래에서 총성이 울러 펴지며 에라실이 기댔던 난간에 탄환이 박히며 박살났다.
“대체 너희는 누구야. 뭔데 남이 사는 곳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떠오르는 발판을 타고 천천히 올라온 남자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에라실에게 복열 산탄총을 겨눴다.
짧게 자른 머리에 손에 딱 맞는 가죽 장갑 위에 사슬로 만든 장갑을 착용하고, 기름때가 잔뜩 묻은 옷은 온갖 종류의 공구들이 끼워진 벨트로 고정해 둔 그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에라실을 위아래로 쏘아 보았다.
“혹시 기사냐?”
“그쪽은 의사고?”
금방이라도 사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세를 다리에 힘을 주는 에라실은 사일러스에게 물러나라는 눈빛을 줬지만, 그보다 먼저 눈치를 챈 남자가 총구를 돌려 사일러스를 겨누었다.
뒤로 물러나려는 사일러스는 총이 겨눠지자 그 자리에서 양 손을 들었고, 그 남자는 그에게 에라실의 옆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에라실은 소매를 뒤져보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마지막 남은 폭탄을 쓸 수는 없었다.
결국 사일러스까지 에라실의 옆으로 오자 남자는 총을 고쳐잡으며 다시 대답했다.
“의사 맞아.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냐? 분명 막스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을 텐데.”
“그 수호자는 내가 개박살 냈어. 처음 보는 거라서 좀 당황했거든.”
이번에는 리암에 아카이브의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사일러스 때와는 달리 개박살냈다는 말에 그 남자는 경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리암은 아카이브에 들어올 때부터 들고 있던 수호자의 장갑 파편을 방패삼아 산탄을 전부 막아냈다.
“일단 사과는 할게. 그렇지만 커티스도 좀 많이 놀랐거든.”
“뭐, 그건 고치면 되니까 일단은 넘어갈게. 근데 이렇게 기사들이 한꺼번에 오는 걸 봐선 로샨에서 온 것 같은데. 맞냐?”
리암에게 총이 먹히지 않자, 그 남자는 총구를 돌려 에라실과 사일러스를 인질삼아 물었다.
“아니. 그냥 방랑기사야. 그보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서.”
방랑 기사라는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남자는 총을 내렸고, 발판 한 쪽에 있는 석재 레버를 잡아당겨 지상까지 올라왔다.
“그러면 한 번 보자고. 의사가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는 따라 줘야하니까. 근데 어떤 의사가 필요한 거냐? 수호자 아니면 사람? 둘 다 할 수는 있는데.....”
조금 느긋하게 물은 그 남자가 위로 올라와 아카이브 밖의 모습을 보자마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강렬한 두 단어였다.
“니미 씨발.”
허벅지에 피스톤이 박힌 레티시아를 시작으로 왼쪽 다리와 양팔이 박살난 세피로트인 막스,
화물칸 안에는 간이 다리를 달고 가슴을 철갑탄으로 꿰뚫린 발레리안. 전신의 장갑이 벗겨지고 상체와 하체가 뼈대 하나로 간신히 붙어있는 스펜서까지.
저번 밤에 움직였던 리암도 등에 이어진 120mm 포대도 정비중인 팔에 사슬을 이용해 억지로 묶어놓은 상태였고, 아서도 대부분의 장갑이 손상되어 있었고, 오른쪽 무릎관절의 피스톤이 부서진 상태였다.
“진심이냐 이 씨발 것들아. 사람 1명하고 수호자 4대? 거기에 막스까지 부숴먹었어?”
“그건 미안하니까 수리할 수는 있어?”
덤덤한 리암의 사과에 화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 남자는 어깨의 벨트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파이프를 꺼내 깊게 빨아들였다.
입과 코에서 푸른 연기를 뿜어낸 그는 한층 더 느릿해진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는 있지. 일단은 트리아지부터 하고.”
“트리아지?”
다시 파이프를 빨아 연기를 내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에게 물어본 레티시아를 노려보았다.
“환자 구분이잖아. 난 손이 두 개 뿐인데 이딴 식으로 몰려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둬야지.”
다시 파이프를 원래 자리에 끼워 넣은 그는 무언가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수호자들 사이를 거닐었다.
“초장거리 지원 사격용 수호자하고 중단거리 복합 전투용 수호자는 아직 괜찮아 보이고.....”
그는 커티스와 아서에 초록색으로 가위표를 크게 그리곤 세피로트로 이동했다.
세피로트에는 별다른 말없이 혀를 차며 붉은색 가위표를 쳤고, 화물칸에 들어가며 작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수호자를 슬쩍 보고 가위표를 치던 이전 이전과는 달리 발레리안과 스펜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모든 곳을 유심히 살폈고, 검은색과 붉은색 중 고민하다가 두 수호자 모두에게 검은 색 가위표를 그렸다.
“대체 저게 뭔 의미인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아?”
레티시아의 질문에 여전히 눈이 게슴츠레한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노란색으로 칠을 했고, 다시 푸른색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빨간 색은 지금 당장 처리해야하는 응급 환자. 노란색은 지금 당장 치료할 필요는 없는데 할 수 있다면 바로 해야 하는 환자. 초록색은 좀 방치해도 괜찮은 환자.”
“그런데 왜 발레리안하고 에라실은 검은 색인거야?”
“그건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환자야. 네 수호자면 안타깝지만 작별 인사나 하는 게 좋을 거야. 기적이 없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거든.”
리암의 질문에 사형선고로 대답한 그는 푸른 연기를 뿜어대며 다시 아카이브로 행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레티시아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완전히 버텨낼 수는 없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지금 무슨 소리야!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비행선에서 떨어진 로크와 에이다의 부품을 전부 회수해온 샤하나즈가 소리치자, 목숨보다 소중한 것처럼 티페레트의 양팔로 품고 있던 상자에서 잔해들이 몇 개 떨어져 내렸다.
이 모습에 그 남자는 뭔가 흥미로운 것이라도 본 것 마냥 거슴츠레하게 뜨던 눈을 크게 떴고, 그와 함께 다시 화물칸의 안으로 들어가 검은색으로 칠했던 가위표를 붉은 색으로 덧칠했다.
“당신 의사잖아! 의사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방금 너 덕분에 얘기가 달라졌어. 전부 다 살리고 싶다면 내 지시를 똑같이 따라.”
그는 아카이브로 내려가며 샤하나즈에게 붉은 색으로 표시한 수호자들을 가리켰다.
“일단 붉은 색으로 표시한 수호자들부터 여기로 데려와. 의술을 시작할 시간이다.”
아카이브의 아래로 내려가자 지하에는 수호자가 똑바로 서고도 남을 정도로 큰 공간이 있었다.
12대의 각기 다른 수호자들이 경비병처럼 원형 돔의 한쪽 벽면에 일렬로 세워져 있었고, 다른 쪽에는 손상된 수호자를 세워둘 수 있는 기중기와 세워둔 수호자를 사람이 수리할 수 있도록 리프트가 마련된 거치대까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런 황야의 한가운데 수호자의 오버홀까지 진행할 수 있는, 거의 로샨에 있는 일라르 가문의 특수 격납고에 맞먹는 수준의 격납고가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중장갑 수호자부터 시작할 거야. 저건 저기 거치대에 세워두고, 근접 교란 특수임무용 수호자는 세워두면 안되니까 입식 거치대 대신 와식 거치대에 눕혀놔.”
“정말로 고칠 수 있는 것 맞지?”
샤하나즈의 의심 섞인 목소리에 리프트에 올라탄 그는 피식거렸다.
“이래 뵈도 일라르 가문에서 의사로 인정받았어. 안톤 일라르. 이 정도야 쉬운 일이지. 알아들었으면 그 상자나 열어.”
휴대용 절단기로 흉부 장갑에서 일그러진 장갑을 잘라내는 안톤은 샤하나즈가 가져왔던 상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굳었고,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하고 눈으로는 자신의 작업만 보는 상황에서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린 안톤은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내가 뭐 잘못 말했냐? 그거 하나가지고 왜 다들 그러는데?”
“설마 티페레트를 보고 고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저 잔해를 보고 고칠 수 있다고 한 거야?”
“그럼 뭘 바랬는데? 내가 무슨 뚝딱하면 고칠 수 있는 마술 망치라도 가진 줄 알았어? 이건 마법이 아니라고. 알았으면 빨리 부품이 들어있는 그 상자나 열어.”
무심하게 대답하는 안톤과 달리 모두들 티페레트만 힐끔힐끔 바라 볼 뿐이었다.
“저, 저기. 지금 당장 해야 하나? 조금 시간을 줄 수는 없어?”
“뭐, 사람이라면 그딴 변명은 안 통했겠지만, 수호자라면 죽지는 않을 거야. 대신 여기 깃든 영혼이 얼마나 버틸지는 나도 몰라. 그래도?”
“이.....일단은 레티시아 누나부터 좀 봐줘. 나는 생각을 좀 더 하고 올게.”
“빨리 결정해. 임시방편으로 조치는 해두겠지만 오래는 안 갈 거야.”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는지 샤하나즈가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있으니 티페레트가 코웃음을 쳤다.
《뭘 그렇게 고민해? 별것도 아닌 부품인데 그냥 넘기면 되잖아? 저 엔진들이 그렇게 중요하면 그냥 주면 그만 아니야?》
“그냥 부품이 아니야. 로크와 에이다라고. 나 때문에 저렇게 됐는데, 내가 그 몸을 함부로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참나. 마음대로 해. 따지는 것도 참 많네,》
서로 감응한 상태이니 샤하나즈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티페레트는 조금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는 와중 티페레트 근처에 있는 작업대로 온 안톤은 사슬로 만든 장갑과 가죽 장갑을 모두 벗은 뒤 손을 씻었고, 그와 함께 웅크린 티페레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얼핏 보기에는 마크하고 비슷한 부류인 것 같은데.”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데. 방금 전 그 수호자는 정체가 뭐야?》
지금까지 들었던 샤하나즈의 목소리가 아닌 티페레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톤은 조금 놀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몸으로 알고 있는지 손으로는 서랍을 뒤지고 있었지만, 시선은 티페레트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이내 생각이 깊어지자 손마저 완전히 멈췄다
“잠깐만. 지금 한 수호자에 영혼이 두 개 있는 거야? 이건 불가능 한데?”
《수호자의 영혼은 나야. 방금까지 주절대던 건 내 엔진이고. 조금 주도권이 오락가락 하다보니까 말하는 사람도 달라지는 거지.》
“그런 수호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다시 손을 움직인 안톤은 서랍에서 15cm의 단검과 양철 플라스크 2개를 꺼냈고, 작업대의 한쪽에 놓인 램프에 불을 붙여 단검을 불길에 살짝 달궜다.
“뭐,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널 봐야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한다는 점인가.”
안톤이 단검을 들고 레티시아에게 접근하자 리암과 사일러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는 에라실이 소매 안에서 수호자 안에서 꺼냈던 권총을 꺼내 안톤의 머리를 겨눴다.
그러나 에라실은 이러한 위협을 아예 신경 쓰지도 않는지 리암과 사일러스를 옆으로 밀어내며 레티시아에게 다가갔고, 그가 레티시아의 부상을 본격적으로 살피니 에라실이 아예 그의 뒷목에 총구를 들이 밀었다.
“무기를 버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자 안톤은 고개를 뒤로 떨어뜨리며 짜증인 한껏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내가 이걸 무기로 쓸 생각이었으면 독이나 똥 둘 중하나를 처발랐지. 아니면 그 이전에 총을 쓰거나. 왜 내가 번거롭게 불로 소독까지 했겠냐. 도와줄 거 아니라면 얌전히 쉬고나 있어.”
“그냥 박힌 것만 뽑아내면 그만인데 왜 칼이 필요한데?”
“너희가 이 누나를 소중히 여기는 건 충분히 알겠거든? 내가 빡쳐서 대충 하기 전에 적당히 하자? 어차피 나 없으면 수호자를 고치지도 못할 텐데 쏘지 못할 총은 들이밀지도 말고.”
어금니를 깨문 안톤은 단검을 들고 에라실을 노려보았다.
에라실은 여전히 권총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지만, 리암이 그의 권총에 손을 올려 총을 내리게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급할 건 없잖아. 아직은 두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 네가 좀 이성적인 것 같으니까 와서 좀 도와줘봐. 조수가 한 명쯤은 필요하거든.”
단검으로 피스톤이 박힌 부분의 옷을 찢어내 상처를 살피는 안톤은 리암을 불렀다.
그를 100%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판단했는지 리암은 에라실의 권총을 뺏어들곤 그의 곁으로 향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데?”
“네가 너희 누나 좀 누르고 있어. 동맥 근처에 박혀서 빼는 중에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동맥이 긁히면 바로 피가 솟구칠 테니까.”
“수호자에 진통제가 있는데....”
“전투자극제는 혈압하고 맥박을 올려서 못 써. 출혈이 너무 많아질 거야.”
“시키는 대로 해. 의사의 말은 들어야지.”
레티시아까지 그렇게 말하니 안톤의 반대쪽에 자리를 잡은 리암은 레티시아의 허벅지 위쪽과 무릎을 체중을 실어 눌렀다.
안톤은 피스톤이 박힌 부위에 플라스크의 내용물을 쏟아부었고, 단검을 이용해 피스톤이 박힌 부위의 양쪽을 살짝 절개했다.
“하나 둘 셋 세면 뽑을 거야. 좀 많이 아플 테니까 참아.”
레티시아에게 살짝 경고를 한 안톤이 피스톤을 잡자 깊게 숨을 들이쉰 레티시아는 준비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리암도 그에 맞춰 레티시아의 다리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하나!”
“꺄아악!”
경고와는 달리 안톤은 숫자를 세는 것과 동시에 레티시아의 다리에 박힌 피스톤을 뽑아냈다.
이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은 리암은 여전히 레티시아의 다리를 압박했고, 잠시 뒤 비명에 반응해 달려드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하라 손짓했다.
레티시아의 비명과 함께 뽑혀 나온 피가 잔뜩 묻은 피스톤을 한쪽으로 집어던진 안톤은 피스톤이 뽑혀 나온 부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그가 염려했던 동맥에 손상은 없던 것인지 솟구치는 출혈은 없었고, 조금 마음을 놓은 것인지 그는 다시 한 번 푸른색 파이프를 꺼내 연기를 들이마셨다.
“꼭 이렇게 해야 해?”
자신을 노려보는 리암의 질문에 안톤은 머금은 연기를 최대한 천천히 뱉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해서 힘을 주면 혈관의 위치가 미묘하게 바뀌거든.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두 번째 플라스크로 상처 부위를 한 번 씻어낸 안톤은 단검을 이용해 상처 주변에 흙먼지와 함께 말라 붙어버린 핏덩어리와 기름때를 능숙하게 벗겨냈다.
그 다음으로는 단검의 손잡이 부분의 열어 실과 바늘을 꺼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티시아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비명을 참아내긴 했지만 의지만으로는 통증을 완전히 버티기는 힘들었는지 레티시아는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움켜쥐었고, 그중의 하나는 근처에 있는 리암의 머리카락이었다.
“저기, 좀 빨리 끝내주면 안될까. 이거 나도 생각보다 아프거든.”
“완벽을 서두를 수는 없는 법이지. 조금 기다려. 상처가 커서 확실히 봉합해야 하니까.”
“그러면 탈모도 치료해 주나?”
두피에서 뿌득거리는 머리가 뜯겨나가는 중이었지만, 리암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톤은 얼굴만으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말을 했지만, 그의 머리채가 우악스런 레티시아의 손에 붙잡힌걸 보곤 살짝 바느질의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사람한테 우리 수호자를 맡겨도 되는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동맥 어쩌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해야 될 것처럼 말하더니 방금 보니까 대충 뽑잖아.”
“아니면 존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지. 내가 썩어 빠져도 의사는 의사라서 살릴 수 있는 누군가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보긴 싫거든.”
사일러스의 의심에 안톤은 단검을 이용해 봉합용 실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돕는 것도 저 녀석이 결정을 해야지 뭔가 하든 말든 하지. 지금은 부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해.”
이걸로 됐다는 듯, 안톤은 단검의 옆면으로 레티시아의 봉합 부위를 툭툭 치며 일어났다.
샤하나즈는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인지 티페레트가 여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니 안톤은 가볍게 혀를 차며 머리를 긁었다.
“이건 좀 중요한 질문인데, 이건 좀 확실히 하자. 너희는 서로를 얼마나 믿고 있어?”
“목숨만큼 소중한 동생들이지.”
“내 본능이 조금도 경고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지.”
“뻔히 읽을 수 있어서 더욱 더 신뢰할 수 있는 놈들이지.”
“조금 짓궂기는 해도 가족 그 자체야.”
모두의 각자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대답을 들은 안톤은 티페레트를 바라보았다.
샤하나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이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안톤은 휴대용 절단기를 꺼내곤 스팬서쪽으로 향했다.
“사람에게 동맥이 있다면 수호자에게는 아침의 파편에서 받은 힘을 전신으로 이동시키는 내부 기관들이 있지. 사람하고 똑같이 수호자의 목숨을 유지 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가 고민하는 것 같으니까 도움을 주겠다고.”
안톤은 휴대용 절단기로 스펜서의 상체와 하체를 연결시키는 뼈대에 크게 흠집을 냈고, 뼈대의 안쪽에서는 기체와 액체의 중간처럼 보이는 푸른 물질이 솟구쳐 나왔다.
에라실은 안톤이 스펜서에게 접근한 순간부터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라도 받았는지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에라실이 안톤을 붙잡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사람으로 치면 대동맥에 칼집을 낸 거니까 이 수호자는 아마 3분 안에 죽을 거야. 작별인사를 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에라실은 곧바로 소매 안쪽에서 단검을 꺼냈지만. 이를 얼굴에 박아 넣기도 전에 안톤은 다시 절단기로 스펜서의 뼈대를 겨눴다.
“걱정 마. 아직은 고칠 수 있으니까. 여기서 또 구멍이 뚫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지금 뭐하는 거야! 이딴 식으로 장난치는 걸 내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손상을 고칠 방법은 뼈대를 완전히 교체하는 것 뿐 이야.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충분한 부품이 있지.”
그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은 안톤이 가리킨 상자로 향했고, 그 다음으로는 스펜서의 비명을 들은 것인지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티페레트로 향했다.
“어차피 네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죽을 애들이야. 나는 네가 선택을 하기 편하게 그걸 앞당겼을 뿐이지. 이제 좀 마음을 정할 수 있겠어?”
“그..... 그렇지만......”
“가족 대신 이미 뒤진 고철을 선택했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선택은 네 자유니까. 어떻게 할 거야?”
이미 극한까지 선택을 강요당한 상황이었지만, 샤하나즈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로크가 자신에게 다시 말을 걸어올 것 같았고, 에이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런 로크를 놀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때 검은 수호자를 막기만 했어도 둘 다 이렇게 되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이런 선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그 둘의 시체를 어떻게 할지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수호자가 홀로 죽어가며 외로움과 격통에 고통 받아 지르는, 로크도 마지막 순간에 질렀을 이 비명이 끝나기 전에.
이제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