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13화 (13/50)

〈 13화 〉 댓가

* * *

“잘 선택 한 거야.”

스펜서의 뼈대에선 더 이상 푸른색 물질이 솟구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샤하나즈는 자신이 연 상자에서 안톤이 지시하는 부품들을 꺼내며 눈물을 삼켰다.

사람으로 친다면 완전히 분해된 사람들의 뼈나 장기이니 같은 수호자의 입장으로는 살짝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는지 티페레트는 작게 헛구역질 소리를 냈다.

《우욱..... 대체 이런걸 보고 어떻게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거야?》

“넌 이해 못 할거야. 너에게 나는 그저 엔진이겠지만, 로크와 나는 기사와 수호자였으니까. 기사의 무덤은 수호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나는 이해를 못하겠는데. 죽는 건 엔진인데 왜 나까지 죽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이해하지 못 할 거라고 한 거야.”

여전히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진 샤하나즈는 조금의 활기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가 기계적으로 안톤의 지시만 따라고 있으니 급한 부분은 다 처리한 것인지 나사를 다 조인 안톤이 허리를 펴며 남은 부품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런데 이 부품은 어디서 난거야? 양만 보면 수호자 2대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던데?”

“그거야 수호자 2대를 분해한 잔해니까 그렇지. 그 중 한 대는 우리 전대장님의 수호자, 에이다였고 나머지 한 대는 지금 티페레트에 타고 있는 샤하나즈의 수호자였던 로크였고.”

“한 기사가 두 수호자에 탄다고? 그거도 좀 이상한데? 혹시 저런 종류의 수호자는 전부 이질적인 것인가. 생각해보니 막스도 정상은 아니었지. 내가 수리하기는 했어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으니까.”

“그 이전에 네가 이 곳을 어떻게 찾았는지부터 물어봐야겠는데. 혹시 저 문은 네가 연거야?”

모두가 안톤의 또 다른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해 감시하는 동안, 혼자서 아카이브의 내부를 살피던 아이샤는 수호자들이 세워진 벽면에 있는 10m 수준의 거대한 아치형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아카이브 내부는 빛이 반사될 정도로 표면이 매끄럽게 깎인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내부의 어디에도 타일의 이음새나 균열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 얼핏 보면 문이 아닌 단순한 아치형 구조물로 오해할 법도 했다.

그러나 수호자들이 세워진 벽면에 가까이 가보면 문짝의 역할을 하는 아치형 안쪽은 다른 아카이브와 재질이 약간 다른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 강제로 이 문을 열었던 것인지 문짝에는 수없이 많은 균열이 있었고, 수호자에 가려져 보아지는 않았지만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구멍도 뚫려있었다.

그 질문에 스패너를 돌리던 손을 잠시 멈춘 안톤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짜증이 한가득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그건 또 왜. 구멍이 보기 흉해서 일부로 가려놓은 건데.”

“대답해. 네가 저렇게 한 거야?”

“뭔 소리야. 난 여기 와서 뭐 건드린 것도 없어. 여기는 내가 처음 왔을 때하고 달라진 건 내가 가져다 놓은 물건 뿐 이라고.”

안톤의 대답에 아이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었다.

“젠장. 그러면 여기도 아닌가 보네.”

“지금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이제 더 방해하지는 마. 사람으로 치면 수술중이라서 실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곧바로 수호자의 수리에 몰두하는 안톤과는 달리 누워있던 레티시아는 아이샤의 혼잣말에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지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아니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에버니저가 찾는 아카이브. 운이 좋아서 여기를 찾긴 했는데, 이건 못 찾은 거나 다름이 없어. 남은 것 하나도 없이 전부 다 털린 상태야.”

“......그러고 보니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찾으려던 건 뭐지? 밤을 영원히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했었잖아.”

문에 뚫린 구멍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아이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로운 태양. 이 밤을 끝낼 수 있는 새로운 태양이 아카이브 중 하나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어. 만약 우리가 정말 운이 나빴다면 이 아카이브에 있었는데 누군가 선수 친 걸지도 몰라.”

“그러면 그 태양이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는 건 확실한데, 어느 아카이브에 있는지는 물론이고 그런 아카이브들이 어디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야?”

리암까지 대화에 끼어드니 더 이상 잡음을 참을 수 없던 안톤이 스패너로 리프트의 난간을 내려쳤다.

대화를 뒤덮고도 남는 굉음이 아카이브 내부에서 메아리치자 모두가 안톤을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대화를 멈췄어도 히스테리 수준으로 계속해서 난간을 내려쳐 금속 파이프로 만든 관이 찌그러질 정도가 되자 안톤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고함을 질렀다.

“아가리 좀 닥치라고! 수술중이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나가서 해!”

“방금 스펜서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감시도 하지 않고 놔두라고? 너라면 어둠 속에 아기를 던져놓고 안심할 수 있겠어?”

“아아악! 진짜!”

그러자 안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건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었어! 내가 저 놈이 죽어가는 수호자를 앞에 두고 밍기적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로 존나 과장해서 움직였을 뿐이지! 방금도 말하지만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예 즉사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는데 내가 왜 번거롭게 그러냐고 이 니미 씨발것들아!”

폐를 쥐어짜내 몸 안에 있는 모든 공기로 소리를 질렀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함을 지른 안톤은 숨을 헐떡이며 밖으로 향하는 발판을 가리켰다.

“당장 나가, 이 개좆 새끼들아! 수술 끝날 때 까지 나가 있으라고! 아니면 씨발 수술은 여기서 끝이야!”

안톤을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수술을 그만둔다는 발언을 들은 이상 선택권은 없었다.

수호자를 뒤로한 안톤이 계속해서 노려보자 리암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따라 아이샤가 불길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사일러스와 에라실은 여전히 안톤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레티시아가 일어나려하니 하는 수 없이 사일러스는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일어났고, 발판에 올라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안톤을 노려보는 에라실이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를 비웠다.

이제 아카이브 안에 티페레트만 남아있으니 안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수호자의 수리를 재개했다.

간혹 특정 부품을 언급하는 안톤의 지시를 제외하면 아카이브 안에 어색할 정도의 침묵만 돌고 있으니 이번에는 적적해진 안톤이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로크였던가? 여기 있는 부품이 네가 예전에 탔다는 수호자라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기사들은 입버릇처럼 기사의 무덤은 수호자라고 하잖아. 실제로 자신이 타는 수호자가 회생 불가 상태라면 기사로서 퇴역하는 것이 불문율이고.”

“누명을 써서 강제로 해체 당했어. 함께 있는 에이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누명이 너 때문에 씌워진 거냐? 왜 이 둘이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티페레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안톤이 일고 있어, 잠시 샤하나즈의 말문이 막히니, 안톤은 알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가로질렀던 가장 큰 벨트를 풀고 등을 가로 지른 지퍼를 열었다.

그의 등에는 마치 근육을 황동으로 만들어 조립해 놓은 것 같은 외골격이 피부와 동화되어 있었고,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접혀져있던 3쌍의 가늘고 긴 기계 팔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며 서로 다른 공구를 집어 들었다.

“수호자가 커서 이런 건 필요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사실 수호자를 수리하는 것도 상당히 상세한 작업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수호자의 영혼이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을 직접 들을 수도 있게 해주고.”

작은 기계 팔이 리프트 난간에 후크를 거니 안톤은 구멍이 뚫린 발레리안의 손상 부위에 직접 올라탔다.

“너 같은 경우는 좀 이질적이라서 다른 수호자처럼 완벽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충은 들리거든. 아무튼 그래서 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냐?”

안톤이 그의 의문은 대답은 해 줬지만, 여전히 로크라는 주제는 그의 목에 종양처럼 걸려 숨을 쉬는 것마저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지만, 수리에 모든 집중을 쏟는 안톤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가 검은 수호자를 먼저 발견해서 다른 7번 전대 수호자를 파괴하는 일만 막았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본인이 검은 수호자를 타고 있으면서 그 검은 수호자가 뭔지 물어본 거냐?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않다고 생각해?”

헛웃음을 친 안톤은 샤하나즈가 화도 내기는거녕 아예 반응조차 없으니 슬쩍 고개를 들어 티페레트를 살펴보았다.

그러곤 한숨을 쉬며 한쪽 눈에 황동으로 만든 확대경을 쓰고 다시 손상 부위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그렇게 더러우면 최소한 네가 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도 해 줄까?”

샤하나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안톤은 처음부터 의사를 불어본 것이 아니었는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네 수호자였던 로크는 영혼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잠시라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

“뭐?”

“수호자의 영혼이 소멸되었어도 부품에는 그 의지가 희미하게 남아있지. 대부분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한가지 예외 사항에 해당된다면 부품은 다시 사용할 수 없어. 바로 수호자가 자신이 태운 기사에게 어떠한 악감정도 품지 않았던 경우야.”

손상된 부분을 샤하나즈가 주었던 부품으로 교체하여 조금씩 발레리안의 구멍을 메워가는 안톤은 자신의 기계 팔이 주는 공구로 나사를 조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 경우에 그 수호자의 부품은 그 기사와 연이 있는 기사의 수호자에만 쓸 수 있어. 친구거나 가족이거나 같은 전대거나. 그게 아니라면 부품 자체가 거부 반응을 일으켜서 수호자가 고장나버리거든. 수호자 전대를 유지하는 귀중한 자산인 수호자의 부품을 밖으로 방출한 것 보면 아마 너도 그렇다는 뜻이겠지. 네가 말한 에이다도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용접까지 마친 안톤은 확대경을 벗으며 다시 리프트로 올라왔다.

“그게 정말이야? 로크가..... 정말로?”

“내 의사 경험으로 따지면 그렇지. 아무튼 이제 내 손이 필요한 곳은 전부 끝났어. 나머지는 너희들 수리 실력으로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야. 수리를 마칠 때 까지는 이곳을 잠시 빌려주지.”

《잠깐만,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

안톤의 말을 곱씹고 있던 샤하나즈는 티페레트의 발언에 한참이 지나가고 나서야 반응했다.

“........뭐가 이상한데?”

《이상하잖아. 자기 아카이브를 지키는 수호자도 박살이 났는데, 아무런 대가도 없이 수리도 해주고 장소까지 빌려준다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뭔가 있는데?》

그러자 안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오해 하는 것 같네. 진짜로 빌려 줄 거야.”

그러나 그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물론 너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벽면에 서 있던 수호자들이 움직이며 티페레트의 양 팔을 붙잡았고, 그 중 한 대는 티페레트의 흉부 장갑 아래 틈에 천장에서 끌어내린 갈고리를 살짝 끼웠다.

도르레가 사슬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니 갈고리는 어렵지 않게 장갑의 아래로 파고들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부에 탑승한 샤하나즈를 관통하는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꺄아아악!》

“대가는 그 수호자로 받아야겠어. 꽤나 어려운 수술을 둘이나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안 그러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를 돕는 것 아니었어?”

“도와? 뭔 개소리냐? 나는 처음부터 너희를 그냥 도와준다는 말은 한 적 없어. 그냥 너희들이 절박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나한테 도움을 구한거지.”

그러자 정지한 줄 알았던 커티스가 천천히 일어나며 팔뚝 아래의 거포로 안톤을 겨누었다.

《역시 리암의 예상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움직이면 안되는 수호자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톤의 기계 팔이 그의 상의를 뚫고 나왔다.

기계 팔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당황한 모습은 사라졌지만. 사람과 수호자의 차이라는 좁힐 수 없는 우열관계는 바뀌지 않아 안톤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뭐야,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저렇게 있는 수호자들이 의심스럽다면서 아이샤의 도움을 받아서 나가자마자 다시 돌아왔지. 좀 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조준을 유지한 커티스는 슬쩍 주변을 살피며 다른 한쪽 팔의 기관포를 꺼내 갈고리와 연결된 천장의 도르레를 부쉈다.

“그래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거야?”

크게 하품소리를 낸 커티스는 잠시 리암과 대화를 하는지 움직임이 없다 고개를 저었다.

《리암의 말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더 귀찮아질 거라는데. 기사가 수호자를 버릴 리가 없는데, 수호자가 남아있는 걸 보면 수리한 수호자에 무언가 안전장치를 해놓은 거라면서. 너 수호자를 즉사시키는 법도 안다고 했으니까 그걸 썼겠지.》

“생각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네. 전부 다 맞아. 인간으로 치면 심장에 작게 폭탄 하나를 설치해 뒀지. 외부라면 장갑에 흠집도 안 나겠지만, 내부라면 뭐. 볼 것도 없지.”

그러자 커티스의 해치가 열리며 자신의 리암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원뿔을 뽑으며 다시 정지한 커티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커티스가 정지하며 안톤을 노린 거포 또한 내려갔지만, 콕핏트에서 나오는 리암의 손에는 내부에 있는 비상용 상자의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유로움을 유지하는 안톤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어차피......”

안톤이 말을 시작하기 전에 리암은 그의 말머리를 가차 없이 베었다.

“총은 겨누는 건 널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멍청한 짓을 하려고 하면 죽지 않고 많이 아프게 하려는 생각이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대화는 건너뛰고 결론으로 넘어가자.”

그의 가슴을 노리던 리암은 총을 내리는 듯 했지만, 내려가던 조준은 그의 고간에서 멈췄다.

“어찌 됐건 우리 8번 전대가 어떻게든 대가를 지불하지. 그 대신 샤하나즈가 아닌 다른 걸 골라야 할 거야”

“다른 애들 같이 간나새끼인지 알았는데, 너 꽤나 말도 잘 통하네? 눈치도 좋고?”

안톤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총을 겨누는 건 좀 그래도 너 참 마음에 들었어. 좋아. 그 제시 받을게.”

리암의 말을 들은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상처를 잡고 자리에 다시 넘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발레리안하고 스펜서, 그리고 샤하나즈의 목숨 값으로 5억 일리아스.”

“그 돈이면 수호자를 처음부터 만들고도 남는 돈이잖아? 미친 거 아니냐고!”

흥분한 사일러스와는 달리 에라실은 화물칸의 문에 걸터앉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구린 냄새가 났어. 스펜서를 가지고 위협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하는데.”

“구리든 뭐든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어. 그나마 다행인건 지불해야하는 기한은 없다는 점이야.”

모두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해결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5억 일리아스라는 비이성적인 금액을 구할 방법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각자 얼마나 가지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아이샤가 모두에게 물으니 에라실이 눈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 다들 주머니에 한 1억 일리아스 정도는 비상금있지? 한 전대를 3년 정도는 유지할 수 있는 돈이기는 하지만 기사라면 도시를 등쳐먹어서 그 정도는 들고 다녀야지. 안 그래?”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건데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야?”

“내가 이 사태를 한 번 현실적으로 해결해 줄까? 스펜서를 죽이려고 한 미친놈이 이제는 스펜서는 물론이고 발레리안하고 샤하나즈까지 죽이려고 한다는 거지! 정리 끝! 이것도 이해 못하겠어?”

“에라실!”

잔뜩 흥분한 에라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아이샤에게 다가가려하자 레티시아가 그를 막아 세웠다.

다리가 다쳤으니 몸으로 막아 세울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절도 있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라실은 자리에 멈춰 서서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

“화나는 건 이해하지만 진정해 에라실. 이래서는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어.”

아직 흥분까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는지 씩씩거리는 호흡은 여전했지만, 반쯤 이성을 잃어 아이샤에게 이를 풀어내려 방금 전만큼은 아니었는지 그는 다시 화물칸 문에 걸터앉았다.

그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레티시아는 이번에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리암에게 향했다.

“그래서 리암, 뭔가 생각나는 건 없어?”

“뭔가 의심스러운 요소가 많아서 그거부터 생각 중이야.”

“일단 털어놔봐.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자 천천히 눈을 뜬 리암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이어갔다.

“왜 하필 돈은 요구한 거지? 일단 빛을 만드는 아침의 파편은 아카이브에 있어 필요가 없다고 쳐도 물이나 식량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어. 그런데도 생존에 직결된 이런 재화가 아니라 로샨 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지목했단 말이지.”

“로샨 말고도 다른 도시가 있다하니 거기서 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사일러스가 반박하자 아이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일리아스는 로샨 외부에서는 아예 통용되지 않아. 애당초 하나의 화폐를 사용될 정도로 집단이 안정되지도 않았거든. 리암이 말한 것처럼 대부분은 물과 식량을 가장 높게 쳐주고.”

“그래서 돈은 어떻게 할 건데!”

“에라실, 적당히 해!”

스펜서 때문인지 한창 신경이 날카로워진 에라실은 소리를 지르며 대화의 허리를 잘랐다.

“누나야말로 정신 차려! 어째서 그렇게 침착한 거야? 지금 발레리안도 미친놈한테 잡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화나지도 않아? 다들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나는 싸워서 스펜서를 되찾겠어!”

방금까지는 리암이 뭔가 방법을 생각해 줄 것이라 희망을 가지고 있어 레티시아 선에서 진정 시킬 수 있었지만, 리암 마저도 아무런 방법도 떠올리지 못하니 에라실은 곧바로 아카이브의 내부로 쳐들어가려 했다.

이미 리암이 수호자에 있는 폭탄을 설명한 이후였지만, 눈이 뒤집힌 에라실은 그마저도 고려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결국 사일러스가 직접 나서서 그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만해! 이제 그만하라고!”

“넌 수호자가 멀쩡하니 별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 이 덜떨어진 놈아! 날 막으려면 적어도 계획이라도 세워보라고!”

사일러스가 에라실보다 앞서는 체격으로 그를 찍어 누르니 그는 소매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리암!”

레티시아의 외침에 가만히 있던 리암이 권총으로 에라실의 단검을 쏴서 튕겨냈고, 사일러스에게 눌린 그의 얼굴에 직격으로 주먹을 내려 쳤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거야. 리암, 잠깐 재워둬.”

코피가 터져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어도 계속해서 에라실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리암은 잔혹하다는 수식어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주먹질을 이어갔다.

레티시아도 조금 과하다고는 생각이 되었지만 에라실의 행동은 그보다 더했기에 레티시아는 잠시 이를 묵인했다.

주변이 피범벅이 되었어도 리암은 계속해서 에라실의 얼굴을 내려쳤고, 결국 그가 정신을 잃자 그를 짊어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의사한테 가려고. 지금 있는 돈으로 이 자식 상처 정도는 봐 주겠지. 사일러스. 너 돈 가지고 있는 것 알고 있으니까 있는 대로 줘봐.”

당연한 듯, 손을 까딱이며 돈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 사일러스는 살짝 투덜거렸지만, 이내 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가지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근데 그거도 부족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빚이 5억 일리아스인데 거기서 한두 푼 더 얹는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겠어?”

가죽 지갑의 돈을 전부 손에 올린 그는 금액을 세었고, 동전 하나를 튕겨 사일러스에게 되돌려 주었다.

“일단 그건 가지고 있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 정도는 있으나 없으나 아니......”

여전히 투덜대던 사일러스는 동전을 받자 무언가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인지 입을 멈췄고, 잠시 동전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나 뭔가 계획이 생각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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