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위폐 제작 작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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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내용은 잘 숙지하고 있지?》
“터빈의 소음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며 목표 지점을 돌아가는 것, 그리고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하면 너와 반대 방향에서 최대 속도로 접근.”
아직도 가속이 진행되는 중이었는지, 아서의 내부에서 중력 가속도를 온몸으로 참아내는 사일러스는 온몸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단거리에서 순간적인 가속이라면 샤하나즈의 로크 그리고 에라실의 스펜서의 조금도 미치지 못했지만 가속할 수 있는 거리가 충분한 개활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출력할 수 있는 최고 속도와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가속 장비를 착용한 아서가 8번 전대의 그 누구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우월했다.
아서의 주변에서 원뿔 형태로 충격파를 발생시키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속이 멈춰 사일러스는 몸에 힘을 약간 빼고 밀린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후! 이렇게 마음껏 달려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상쾌해서 날아갈 것 같아! 너도 기분 좋지 않아?》
잔뜩 들뜬 아서와는 달리 사일러스의 표정은 목표 지점을 크게 돌며 발생하는 미세한 중력 가속도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쾌적함이나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 때문에 좋은 기분 다 망칠 것 같은데. 아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너하고 어울리지도 못해서 나도 심심했단 말이야. 그리고 나도 너 말고 나하고 비슷한 여자애하고 수다도 떨고 싶어. 에이다를 빼면 우리 전대에 있는 애들은 전부 남자잖아. 거기에 한 명은 발음도 어색한 아기고.》
“그렇다고 정확하지도 않은 얘기를 진짜인 것처럼 털어놓으면 어쩌자고!”
《원래 대화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너도 아예 싫지는 않잖아? 서로 감응하는 사이에 어설프게 숨기려고 하지 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이지만 알고 있어,》
아서가 키득거리자 사일러스는 머리를 헤집으며 터빈 소리마저 덮어버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좀 적당히 해! 어째서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놀려먹지 못해서 안달인 거야!”
《그거야 네가 너무 착하니까 그렇지. 나의 작은 사일러스.》
일반적인 상황에서 누군가 그런 대화를 더 듣기 힘들었다면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보였겠지만, 그 상황에 끼어든 건 헛기침이 아닌 늘어지는 하품이었다.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하는 게 보기 좋기는 한데, 이제 움직여야 해. 수송 부대가 멈췄어,》
리암의 지시에 사일러스는 아서의 진행 방향을 조금 변경했다.
미세한 변경이었지만 중력 가속도는 그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고, 다시 온몸에 힘을 주는 사일러스는 폐를 쥐어짜며 대답했다.
“우리 이동 궤적 정도는 볼 수 있겠지? 신호만 기다리고 있을게.”
《30초 후에 방향 틀어. 네 속도를 유지한 상태로 한계 수준까지 꺾으면 아마...... 나하고 170° 떨어진 곳에서 접근할 거야. 노리는 목표는 진행 방향 기준 좌측에 있는 2번대 수호자야.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지. 그건 나에게 맡겨.》
방향 전환을 위해 살짝 감속을 한 아서는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커티스를 대신해 문장을 끝마쳤다.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는 사일러스의 박자에 맞춰 아서는 일정한 박자로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사일러스가 눈을 감고 전신에 힘을 다시 주니 그를 대신해서 나머지 숫자를 세었다.
《10.....9.....8.....》
“후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그런 사일러스의 모습에 아서는 조금은 음흉할 정도로 웃었다.
《귀여워라. 다들 왜 괴롭히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간다니까. 3......2......1》
“흡!”
아서의 초읽기가 끝나자 사일러스는 숨까지 참으며 온몸을 경직시켰다.
지금까지의 가속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속도로 인하여 사일러스의 얼굴이 아래로 늘어지며, 피가 빠져나가 조금씩 창백해졌다.
발끝으로 몰리는 피를 다시 올려보내기 위해 사일러스는 다리와 복부의 근육을 쥐어짜며 어떻게든 피를 위로 올려보냈고, 호흡마다 얼굴과 같이 늘어지는 횡격막을 억지로 끌어와 공기를 끌어들였다.
《조금만 버텨! 금방 끝날 거야!》
사일러스가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서는 그를 격려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그런 고통에 몰아넣는 사일러스를 따라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자신이 조금만 더 버티면 사일러스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지만 희미하게 커티스의 목소리가 들리니 사일러스는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꺾은 아서의 진행방향을 원래대로 바로잡았고, 고개를 흔들어 식은땀을 털어내며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았다.
머리에 피가 다시 순환하며 희미하던 소리도 다시 명확히 전해졌다.
《마지막 확인이야. 목표는?》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에 있는 2번 전대 수호자.》”
사일러스와 아서.
둘이 하나와 같이 똑같은 대답을 하자 커티스는 침묵으로 긍정의 뜻을 전했다.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을 땐 보이지 않던 수송 부대의 모습은 점점 사일러스의 시야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 호흡도 제대로 돌리지 못했지만, 양손에 잔뜩 힘을 준 사일러스는 고개를 치켜들고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자신을 향해 겨눠진 포신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에 있는 2번 전대 수호자! 베는데 집중해! 공격 회피는 내가 할게!”
아서는 팔뚝에 부착된 배기구의 방향이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다른 수호자라면 기관포나 90mm 철갑탄이 탑재되어 있겠지만, 아서의 팔뚝은 가속 장비를 장착하기 위해 남아있는 화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속장비를 이용해 상식 밖의 속도를 내는 수호자는 그 자체가 탄환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서가 손목을 살짝 꺾자 가속장비를 위해 약간 전개되어 있던 팔뚝의 장갑이 완전히 전개되며 팔뚝의 뼈대에 붙어있는 칼날이 팔뚝과 수직으로 펼쳐졌다.
정면에서 돌진하는 수호자는 자신을 쏴달라는 과녁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사일러스가 몸에 힘을 주며 호흡을 하는 순간마다 아서는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철갑탄의 사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그런 사일러스의 집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아서는 그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일러스와 같이 자신의 몸도 찢겨 나갈 것 같았지만 아서는 그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동시에 속도가 느려지지 않도록 가속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서와 2번 전대의 수호자가 접촉하는 순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상온에 한나절 방치한 버터를 칼로 자르는 것처럼 수호자를 반으로 베어버린 영향으로 급격하게 감속한 아서의 몸에서 또다시 충격파가 발생하며 잔해까지 날려버린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반대쪽에서 감속하는 아서를 겨누던 2번 전대 수호자의 흉부 장갑이 완전히 관통되며 그대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5번 전대의 수호자는 수호자를 베었던 방향 그대로 도망가는 아서를 노리고 사격을 개시했지만, 이미 탄환과 맞먹는 속도로 멀어지는 아서에게 이런 철갑탄은 어린아이가 던진 조약돌이나 다름없었다.
방금 전 2번 전대의 흉부 장갑을 꿰뚫은 철갑탄의 발사음을 아서가 들었을 땐, 이미 남아있는 5번 전대 수호자 한 대도 커티스에게 저격당해 쓰러졌다.
《나머지 한 대는 엄폐물 뒤에 숨었어.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전부 끝냈으니 나는 좀 쉴게.》
커티스의 하품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아서는 약간 으르렁거렸다.
그런 아서를 바로 잡은 것은 가속과 감속의 반복으로 상태가 엉망이 되어 헛구역질하는 사일러스였다.
“집중해! 아직 안 끝났어!”
《아, 알았어!》
입안에는 솟구치는, 위장을 간질이는 신 침을 흘리면서도 아직 정신을 놓지 않은 사일러스는 팔을 앞으로 뻗은 상태로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대 강제로 몸을 감속시켰다.
중심이 맞지 않아 아서는 뒤로 패대기쳐지듯 넘어졌지만 사일러스와 아서, 둘 다 짧은 신음소리만 내는 것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이미 자신이 노려지고 있는 것을 파악했는지 아서는 일어나지 않고 누운 그대로 다시 터빈을 가동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모든 것을 계획했던 리암마저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나타났다.
잠시 고민하던 레티시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었다.
수호자에 있을 때는 극한에 상황에 몰려 느낄 수 없던, 통각마저 자극하는 쓴 전투자극제의 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봉합한 부분은 어느 정도 아물어 다시 상처가 벌어질 수준은 아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여전했다.
그런 내용물을 들이키자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극적인 약물이 레티시아의 감각을 헤집어놓기 시작했고,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통각마저도 희미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안톤이 구해준 물건을 천으로 감싸 등에 짊어진 레티시아는 눈을 감고 양 손을 모았다.
“아버지, 지금 듣고 계신가요. 아버지 덕분에 우리 동생들이 모두 안전하게 빠져 나왔어요. 아버지 덕분에.......”
레티시아의 기도의 시작은 웃음이었지만, 이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댔다.
“아버지.......정말 죄송해요. 정말로...... 에버니저 전대장님...... 정말로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누가 본다면 정말로 다른 사람이 앞에 있을 것이라 착각될 정도로 처절하게 울부짖는 레티시아의 기도는 아이샤의 불기둥이 나타날 때 까지 이어졌다.
허나 불기둥이 허공에서 나타나기가 무섭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은 레티시아는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울부짖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표정을 정리했다.
자신의 어깨에 붙은 불꽃을 끌 시간도 없는지 아이샤는 비틀거리며 레티시아에게 다가갔다.
“리암과 사일러스가 작전을 시작했어. 우리도 움직여야 해.”
“잠깐.”
아이샤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다시 불타오르니 레티시아는 아이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네가 없으면 이 작전은 불가능해.”
“혹시 나만 먼저 이동시켜 줄 수 있어?”
레티시아와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아이샤는 황급히 어깨에 붙은 불꽃을 털어냈다.
“조금 어렵긴 해도 가능하긴 해. 그런데 그건 왜?”
“내가 먼저 출발해서 시선을 끌게. 암폴로 동상이 있는 건물 아무 곳에나 나를 보내고, 5분 후에 네가 보관소와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 네가 거푸집을 확보하면 내가 그쪽으로 합류한 다음 같이 빠져 나오는 거야.”
그녀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어지러워서 그런 것인지 레티시아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아이샤는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였다.
그리고 그 끄덕임이 멈추자 아이샤는 고개를 들어 의문으로 구겨진 표정을 지어 레티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죽겠다는 거야?”
“날 믿어. 그게 더 안전하니까.”
“안전하기는 무슨! 너를 미끼로 쓰라는 거잖아! 아직 다리가 다 회복되지도 않은 사람이 뭘 할 수 있다고!”
어처구니가 없는지 아이샤가 이마를 짚고 돌아서니 레티시아가 그녀를 잡아 자신과 억지로 마주보게 만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하던지 상관없어! 지금 당장 움직여야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나는 너희를 살리겠다고 에버니저와 약속을 했어! 그런데 왜 그걸 깨게 만드는 건데!”
“약속은 너만 한 게 아니야! 아버지와 약속한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너만 약속을 신경쓰는 것처럼 말하지 마!”
아이샤의 바로 앞에서 소리를 지른 레티시아는 자신이 무엇을 실수한 것 마냥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프에서 레티시아가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을 때보다 더 깊은 살의를 마주한 아이샤는 순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다시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온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줘.”
“그,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네가 죽어버리잖아......”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네가 전대장님과 약속을 깨버릴 일도, 네가 다치는 일도 없을 거야,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너도 내 동생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올 거야.”
마치 어린 아이를 위로하듯, 레티시아는 굳어버린 아이샤의 손을 꼭 쥐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섬세하게 그 손을 다독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런 살의를 보이다가 한순간에 자애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아이샤는 일단 복잡한 것은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곤 있었지만, 아이샤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공포뿐이었다.
어떻게든 레티시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이샤는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은 에버니저의 약속마저 뒤로한 채 레티시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몸에 붙었던 불이 레티시아에 옮겨붙자 아이샤는 가슴 속이 전부 불타버리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후회를 품기도 전에 레티시아는 이미 불기둥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야를 가리는 불기둥이 사라지자 레티시아는 곧바로 주변을 확인했다.
나름대로 그녀의 안전을 생각한 것이었는지 레티시아가 도착한 곳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복도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티시아는 미리 챙겨온 자신의 머리 전체를 감싸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곤, 안톤이 구해다 준 두 자루의 검을 들었다.
왼손에는 짧은 검을, 오른손에는 긴 검을 쥔 그녀는 손가락으로 날을 쓸어내리며 얼마나 예리한지 날을 살폈고, 전투자극제로 인해 무뎌진 통증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날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고, 검신을 타고 피 한 방울이 흘러내리니 방독면의 아래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났는데, 누구 있나?”
레티시아가 도착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는지, 경비병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고 그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레티시아는 그를 순식간에 덮쳐 뒤로 넘어진 경비병의 목에 검을 겨눴다.
침만 삼켜도 목이 베일 정도로 아슬아슬한 압력으로 경비병의 목을 누른 레티시아는 경비병이 완전히 굳어있자 살짝 손에 힘을 뺐다.
“뭐해? 소리 질러.”
“뭐.......?”
“있는 힘껏 소리 질러서 지원을 요청하라고,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압박하거나 조용히 처리했을 상황에서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를 하자 경비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소리를 안 지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경비병이 멀뚱거리고 있으니 레티시아는 다른 손에 들린 단검을 역수로 바꿔 쥐곤 자신의 다리로 누르고 있던 경비병의 손을 단검으로 내려찍었다.
“끄아악!”
“그래, 잘 할 수 있는데 왜 안 했어?”
사람을 찔러놓고 조금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 레티시아는 한 번 더 손을 내려찍어 손가락을 자르고는 비명을 지르는 경비병의 목에서 칼을 뗐다.
레티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비병은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신의 손을 붙잡고 비명을 질러댔고,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는지 레티시아는 살짝 쪼그려 앉아 경비병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 비명은 충분하니까 도망쳐서 지원을 불러. 손가락 좀 잘렸다고 못 뛰는 것도 아니잖아?”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지금의 상황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레티시아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경비병이 손가락이 잘린 손을 붙잡고 떨고만 있으니 그녀는 단검으로 경비병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상황 파악 못해?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5분 안에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놈이 여기 몰려오도록 만들란 말이야. 여길 제대로 못 지킬 거면 이런 거라도 제대로 하라고. 아니면 너부터 시작이니까.”
조롱이 가득 섞인 문장을 마지막으로 다시 검을 바로잡은 레티시아는 벌벌 떠는 경비병을 걷어찼다.
억센 발길질에 한참 밀려나 길게 핏자국을 남긴 경비병은 절박할 정도로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비명을 들은 것인지 주변에는 발소리가 점점 늘어났다.
레티시아는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발걸음 소리에 집중해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의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여전히 눈을 감은 그녀는 한 걸음씩 발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고, 계단에 도착하자 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이 평지를 밟으며 미세하게 바뀌자 눈을 뜨고 곧바로 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티시아의 기습에 가장 앞서서 이동하던 경비병은 그녀의 검이 어깨를 파고들어 반대쪽 옆구리로 빠져나오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하려고 했을 땐 이미 그의 몸은 비스듬하게 생겨난 단면을 따라 소름 끼치는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내렸다.
하체와 다른 방향으로 쓰러지는 그의 눈에는 그의 뒤를 따라오던 경비병을 덮치는 레티시아가 비쳤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경비병은 앞서가는 경비병이 순식간에 참살당하자 진압용 곤봉을 꺼내 들었지만, 허리춤에 패용한 곤봉을 목 높이까지 들어 올리기도 전에 직선거리로 파고든 레티시아의 단검이 목을 관통했다.
“비상! 비상! 제어실에 가장 가까운 경비병은 가서 비상경보를 울려라! 가주님을 보호해!”
두 명이 쓰러지는 동안 찰나동안 경비병은 소리를 지르며 제압용 곤봉을 꺼내들어 레티시아의 검을 막아냈다.
경비병은 그 상태로 힘겨루기를 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 생각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검신이 금속을 덧댄 곤봉을 타고 내려갈 수 있도록 살짝 손목을 비틀었다.
곤봉을 타고 내려간 검은 그대로 곤봉을 잡은 손가락을 모조리 베어냈고, 경비병이 비명을 지르며 곤봉을 떨어트리자 이전에 경비병의 목을 꿰뚫은 단검을 쥐었다.
이를 강제로 위로 잡아당겨 피거품을 물며 간신히 숨을 이어가던 경비병의 머리를 둘로 쪼갠 레티시아는 어떻게든 검을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치켜든 뭉뚝한 손과 함께 목을 완전히 베어버렸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지옥과 같은 피 웅덩이 속, 방독면을 쓴 레티시아가 작게 웃기 시작하니 건물의 조명이 붉게 변하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경보가 울리니 가주가 머무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승강기가 정지되고, 침입자의 탈출을 막기 위해 병력이 들어가기 위한 입구를 제외한 모든 외부의 통로가 격벽으로 막혔다.
제압용 곤봉을 든 경비병은 사살용 화기를 든 진압병이 대신했고, 이 모든 것을 통솔하는 것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6번 번대가 아닌 0번 전대였다.
레티시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모두의 눈을 피해 지상층으로 향했다.
불사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의 내부는 구석마저도 조명으로 밝게 빛났다.
그러나 조명만으로는 인간의 사각을 보완할 수 없었고 복도가 꺾어지는 곳이나 계단과 이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바다가 만들어졌다.
몇 명을 베었는지 세지도 않은 레티시아가 피범벅이 된 채로 지상층에 도착하자, 병력이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는 병력들이 그녀를 향해 총구를 들었다.
“투항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3초 안에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머리에 올려라!”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런 경고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다수의 침입자를 대비하여 병력의 출입구까지 격벽으로 봉쇄하는 레버였고, 이를 찾자마자 레티시아는 주머니에서 에라실이 만들어준 파이프 폭탄을 꺼내 들었다.
병력이 발포하기 전 이를 검으로 쳐내 공중으로 보낸 레티시아는 곧바로 몸을 낮춰 사선에서 벗어났고, 이후 강렬한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주변에 있는 모두의 시야를 앗아갔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하던 경비병과는 달리, 제대로 훈련이 되어있는 진압병들은 시야가 없어지니 서로 등을 맞대고 사방을 향해 지속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레티시아는 미리 봐둔 엄폐물의 뒤에서 자신이 돌격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렸다.
사라진 시야를 탄막으로 보완하던 이들은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하자 사격을 중지하곤 탄창을 교체했고, 그 순간 레티시아는 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아직 탄창에 탄약이 남은 병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설픈 탄막으로는 조준하기 힘든 각도로 파고드는 레티시아를 막아낼 수 없었다.
단 한순간 접근을 허용했을 뿐이었지만, 그 한 순간은 레티시아에게는 차고 넘쳤다.
서로 등을 맞댄 이들 중 한 명을 벤 레티시아가 사이로 파고들자 진압병들은 다시 그녀를 조준하기 위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지만, 그녀에게 총을 겨누지 않고 거리를 벌리려고 한 순간부터 모든 것은 끝난 것이었다.
한 명씩. 10명 가까이 되던 진압병들은 탄창을 교체하기도 전에 레티시아에 의해 몸이 잘려나가며 쓰러졌고, 마지막으로 한 명을 남긴 그녀는 공포에 질린 병사를 뒤로 한 채 레버를 당겼다.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격벽이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레티시아는 뒤로 돌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겨눈 진압병을 노려보았다.
“도망쳐. 다른 사람을 더 불러와.”
레티시아가 천천히 다가오니 진압병은 소총을 어깨에 바짝 견착하며 레티시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멈춰! 더 다가오지 마!”
경고보다는 공포에 질린 절규에 더 가까운 그의 목소리에 작게 그를 비웃은 레티시아는 끝까지 그를 향해 다가갔고, 진압병은 뒷걸음질 치며 방아쇠에 손가락만 올려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레티시아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장검으로 소총을 쳐내 절박함에 발사된 탄환이 빗나가게 했고, 곧바로 이어지는 단검으로 오른손을 잘라냈다.
“흐아아악!”
레티시아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진압병의 머리를 잡아당겨 눈을 마주쳤다.
“이제 2분 남았어. 이제 밖에서 도움은 오지 않으니 나를 잡고 싶다면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내. 뭘 지키고 있든지, 뭘 하든지 상관없으니까 전부 다 불러와.”
“역시 짐승은 바뀌지 않는구나.”
그런 레티시아의 뒤로 익숙하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협박을 이어가는 대신 진압병의 목을 깊게 그어 그 신체에 있는 모든 피를 쏟아냈다.
“짐승은 바뀌지. 그렇지만 이런 나를 되돌린 건 당신들이야.”
레티시아가 뒤로 돌며 검을 휘두르자 머큐리가 그 검을 받아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내 일만 본다면 여기에는 다시 올 일도 없을 테니까.”
한 자루의 검을 쓰는 머큐리와는 달리 두 자루의 검을 쓰는 레티시아는 검을 맞대고 있는 동안 곧바로 머큐리의 복부를 노리고 단검을 내질렀다.
이에 머큐리는 곧바로 양손으로 검을 잡아 레티시아의 장검을 밀쳐내곤 검을 크게 휘둘러 단검도 함께 튕겨낸 뒤 정석적인 자세로 되돌아갔다.
아무리 레티시아라도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는지 뒤로 밀려난 그녀는 역수로 바꿔 쥔 단검으로 바닥을 찍으며 넘어지는 몸을 유지했고, 이런 그녀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고 싶지 않았는지 머큐리는 그녀가 어중간한 자세였을 때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역수로 바꿔 쥔 장검을 팔꿈치에 붙인 레티시아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정확히 치명적인 곳을 노리는 머큐리의 검격을 한쪽으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레티시아에게 주도권은 없었고, 이번에는 간신히 일어선 레티시아의 목에 검이 날아들었다.
장검과 단검을 모두 이용해 이를 막아내긴 했지만, 이윽고 그녀의 목부에 발길질이 꽂히며 그녀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네 일이란 건 그냥 사람을 피를 보려고 한 건 아닌가? 그게 네 본성이었잖아.”
“나는....그런 적 없어......”
“나는 그 방독면의 아래를 잘 알고 있지.”
그러자 머큐리는 일어나는 레티시아의 얼굴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고, 가까스로 뒤로 물러난 레티시아의 방독면이 베이며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나왔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자신마저도 위험에 빠진 극한의 상황임에도 레티시아의 얼굴은 쾌락과 희열이 묻어나는 광기 넘지는 미소가 가득했다.
“너도 그 추악한 본성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가리려고 얼굴을 가리는 것이지.”
그에 레티시아는 피로 젖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억지로 거뒀다.
“아니야. 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네게 가족은 없어. 넌 그저 주인을 잃은 짐승일 뿐이지.”
“아니라고!”
“짐승은 짐승답게 행동해.”
검을 든 머큐리가 그녀를 조롱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상황에서 비명을 지른 레티시아는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자신이 단순히 피를 갈망하는 짐승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가족인 아이샤를 향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