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16화 (16/50)

〈 16화 〉 위폐 제작 작전 ­ 3

* * *

처음에 사일러스는 티페레트가 합류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서 일어난 검은 수호자의 모습은 티페레트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다른 수호자들보다 곡선이 많아 인간에 가까운 모습은 여전했지만, 조금 여성적인 느낌이 드는 티페레트와는 달리 그들이 앞에 나타난 검은 수호자는 남성적인 형태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아서는 물론 심지어 부대원이 파괴당한 5번 전대 수호자마저도 자리에 멈춰 섰다.

《대체 저게 뭐야? 티페레트는 아닌데? 커티스, 보고 있어?》

아서의 물음에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커티스는 아서가 다시 묻기 전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어가는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확실히 티페레트는 아니야. 확실하진 않지만 샤하나즈가 말했던 그 검은 수호자일지도. 아니면 또 다른 세피로트일지도 모르지.》

잠시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던 검은 수호자는 이내 미끄러지듯 움직여 넋을 잃고 서있는 5번 번대 수호자의 목을 붙잡아 이를 무기라도 되는 것 마냥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5번 전대 수호자의 복부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고, 검은 수호자가 이를 한쪽으로 이를 집어 던지자 한 박자 늦은 포성이 울러 퍼졌다.

《말도 안 돼. 그걸 예측했다고?》

이전까지는 잠에 취한 몽롱한 목소리였던 커티스는 잠이 깬 사람마냥 또렷한 목소리로 당황함을 토해냈다.

《나를 세피로트와 착각하면 안 되지. 나는 엄연히 호드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에 아서는 곧바로 양쪽 팔뚝의 가속 장비를 분리시키고 유일한 무장인 칼날을 세웠다.

가속 상태의 기습이 아닌 근접한 상태의 백병전을 대비한 것인지 팔뚝과 수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아예 주먹을 팔뚝의 안쪽으로 수납시키고 손을 칼날로 대체한 것을 본 호드는 전투 의지가 없다는 듯 양 손을 들었다.

《진정해. 이런 말도 있잖아?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지? 아니, 그 전에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아서는 언제라도 가속할 수 있도록 종아리에 남은 터빈의 회전은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노리는 것은 눈앞의 아서만 있는 것이 아닌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자신을 겨누는 커티스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 호드는 양 손을 든 상태로 커티스와 자신 사이에 아서가 들어오도록 천천히 자리를 바꿨다.

《움직이지 마! 물어본 질문에 대답하라고!》

《다들 진정하자고? 나는 아직 싸우려고 온 건 아니야. 싸우고 싶지도 않고.》

《네가 사일러스의 위협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어?》

허나 아서의 질문은 확신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는지 한 순간에 종아리 터빈의 출력을 올린 아서는 호드의 가슴을 노리고 그대로 몸을 가속시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호드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려는 아서의 칼날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뒤로 밀려나기는 했어도 가슴은 멀쩡한 호드의 양손은 희붉게 달아올라 그 손에 잡힌 아서의 칼날 또한 달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진 그 칼날을 찢어냈다.

한 순간에 무기를 잃은 아서가 뒤로 물러나니 호드는 가볍게 손을 털며 희붉게 달아올랐던 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그야 티페레트가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까. 아카이브와 같이 우리 이름이 있는 수호자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거든.》

호드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너희가 아카이브를 찾으려는 것도, 이 곳에 온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지. 그리고 알고 있으니 도우려고 하는 거야. 우리도 너희와 같이 형제를 도와야 하거든.》

《로샨에 있는 아카이브 안에 또 다른 수호자가 있다는 뜻이겠네.》

커티스가 호드의 문장을 완성하니 그는 고개를 살짝 벋어 아서의 어깨 넘어 커티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르네?》

《그렇다면 로샨을 무너트린다는 목적은 동일하다는 거야?》

《그래. 우리로는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이런 방식도 어떠한 의미가 있는 방식이겠지. 싸움이라는 건 단순히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안에서 무너트리는 것도 꽤나 중요하잖아?》

호드는 운송 부대가 옮기던 금속 괴들을 가볍게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 사이 거대한 포신을 원래대로 되돌린 커티스가 그들에게 도착했고, 호드는 그에게 인사라도 하는 것인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건 그렇고 저격 실력 엄청나던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우리 형제 사이에서도 없었어.》

《빈 말은 적당히 하고 우릴 찾아온 진짜 이유를 밝혀. 아무리 적의 적이라고 하더라도 인사치례로 들린 건 아닐 거잖아.》

커티스가 대포를 들이밀었지만, 호드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너희들 도우려고 들린 거였는데? 여기에 티페레트의 목숨도 걸려 있다면서? 그냥 동맹을 제안하려고 왔을 뿐이야. 사실 우리만으로는 로샨을 무너트리기는 어렵거든.》

《너희 같은 수호자가 하나가 아니라면 쉬운 일 아니야?》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는 10대 밖에 없어. 그 중에 깨어난 것은 나와 티페레트를 포함해서 4대 뿐이지. 그것만으로는 로샨의 병력을 무너트리기에는 부족해. 특히 그 0번 전대는 우리도 버거워.》

커티스가 자신을 위협하며 추궁하기 전 호드는 그에게 기다리라고 손짓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원래는 우리만으로 전부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티페레트가 깨어난 이후로 알게 된 정보를 도합해서 낸 결론이 그거야. 방금도 말했지만 아카이브와 같이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거든.》

호드의 해명에도 커티스와 리암은 아직도 생각을 이어가는지 포신을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아서가 그의 포신을 호드에게서 밀쳐냈고, 더 이상 그를 겨눌 수 없도록 그의 앞에 섰다.

허나 이번만큼은 사일러스와 같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일러스가 지친 틈을 타서 아서가 단독으로 움직인 것인지 움직임이 약간 어색했고, 당황한 사일러스는 아서를 다그쳤다.

“아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 저 녀석이 아직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잖아!”

《네가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는 거야. 너라면 내 판단을 믿어줄 수 있지?》

“너무 경솔한 판단이야! 아서, 자리에서 비켜!”

그러나 이미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사일러스는 자신에 반하는 아서의 제어권한을 완전히 가져올 수 없었는지 몇 번 몸을 움직이려 시도하다가 이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였다.

“젠장.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서! 내 말을 들으라고!”

《다 너를 위해서야. 미안해, 사일러스.》

그러는 와중 커티스는 생각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아서가 가로막고 있어서인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포신을 세워 완전히 거두었다.

《좋아. 일단은 너희들이 적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랑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 줄게.》

《그러면 우리가 동맹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허나 친근하게 다가오려는 호드와는 달리 커티스는 다가오는 그를 밀쳐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는 것이 아닌 이상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 대가를 요구할 생각은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샤하나즈를 넘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었는데, 빨라도 너무 빠른데.》

이미 그를 밀쳐낸 팔에 기관포를 전개시켰던 커티스는 다가오던 호드에게 탄막을 흩뿌리며 거리를 벌렸고, 충분히 거리를 벌리자 복열의 거포를 치켜들었다.

《협상 결렬이다.》

커티스가 다른 수호자에 비해 몇 배는 되는 속도로 철갑탄을 연사해대자 달아오른 양 팔을 치켜들어 기관포의 탄막을 막아내던 호드는 순식간에 연기에 휩싸였다.

자욱한 연기에 호드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드가 연기를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약간 투명해진 그의 양 팔에는 녹아내린 철갑탄들이 윤곽을 따라 흘러내렸고, 녹아내린 철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대부분이 회백색 연기로 증발하였다.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저 제안을 했을 뿐이지. 거절을 이렇게 격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어?》

《다시는 찾아오지 말란 경고지.》

조금 더 거리를 벌린 커티스는 이번에는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발사해서 수호자에 거대한 구멍을 낸 거포를 다시 전개시켰다.

만약 그 상태에서 잘못 열을 가했다가는 쿡 오프 현상으로 인해 바로 탄환이 발사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호드는 자신을 겨눈 포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달아오른 손을 식혔을 뿐이었다.

《그러면 다음에는 조금 더 그럴듯한 제안을 가지고 올게. 너희들처럼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리는 티페레트가 필요하거든.》

《절대 안 줄 거야. 그러니까 오늘 같은 도움은 사양할게.》

서로 무장은 거두었지만 여전히 긴장이 이어지는 중, 먼저 대치 상황을 끝낸 호드는 그는 아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눈을 마주치곤 서서히 푸른 색 분진으로 사라졌다.

모두가 호드가 말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서만큼은 그가 남긴 작별인사를 명확하게 들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악한 본성을,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수치스런 과거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야! 나는 짐승이 아니야!’

머큐리가 말한 모든 것을 속으로 끝없이 부정하는 동시에,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속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끝없이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베어내고, 피가 흩뿌려질수록 숨길 수 없는 황홀함은 그녀의 얼굴에 미소의 형태로 그대로 드러났다.

단검으로 잘라낸 머리를 걷어차서 자신에게 총을 겨눈 병사의 얼굴에 맞춘 레티시아는 그대로 두 머리를 장검으로 꿰뚫고 머리를 가르며 그대로 검을 뽑아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짐승이라 부르는 머큐리에게 도망가는 레티시아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짐승 말고는 없었다.

“어디로 도망가려는 거지? 이미 이 건물은 봉쇄 되었어. 이제는 이성까지도 없어진 건가?”

지금은 머큐리를 이길 방법이 없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이샤와 합류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머큐리를 떼어내야 했다.

그러나 8번 전대의 누구보다 머큐리를 잘 알고 있는 레티시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저 앞으로만 항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갈 뿐이었지만, 이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떻게 아이샤가 있는 곳까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아이샤가 아직 거푸집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혹은 거푸집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거푸집과 함께 이동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죽게 된다.

자신이 최대한 시선을 끌어 모든 병력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지만, 머큐리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큐리에게서 도망치다 로비로 다시 되돌아온 그녀는 방향을 돌려 벽화가 새겨진 거대한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벽에 손을 집어넣거나 발을 디딜 틈은 없었지만 벽에 검을 박는 것으로 지지할 곳을 해결한 그녀는 벽에 박은 검을 잡고 그대로 몸을 끌어올려 벽에 박힌 검 위로 양 발을 올렸고, 한 번 더 뛰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단검으로 자신이 밟았던 검을 뽑아 다시 손에 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곡예를 하는 것 같았고,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 순식간에 3층 위로 올라갔다.

“이제 그만하지. 네 녀석은 그냥 죽이기는 아까워.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너희 죄를 경감해 주지.”

“나는 가족을 배신할 생각이 없어. 죽더라도 너희를 위한 짐승으로 죽을 생각은 없어.”

레티시아가 머큐리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니 머큐리는 그녀에게 내려오라는 듯, 마치 들짐승에게 손짓하는 것 같이 살며시 손짓했다.

“나는 네게 이전처럼 돌아올 기회를 주는 거야. 수호자는 없더라도 넌 여전히 0번 전대의 기사의 자격이 있으니까.”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나는 짐승이 아니야! 지켜야할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고!”

“피에 목말라서 이런 학살을 저지른 주제에 아직도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건가?”

“아니야! 나는.......!”

“그런 변명은 내가 아니라 네 녀석과 함께 온 일행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머큐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로 향하자 눈빛이 떨리기 시작한 레티시아는 굳어버린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물건을 챙긴 할 말을 잃은 아이샤가 지금 보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뻥끗거리고 있었다.

“아마 네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네가 어떤 짐승이었는지는 모르고 있겠지. 과연 너를 가족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네 그 모습을 보고도 너를 가족이라 부를 것 같나?”

레티시아가 양 손의 검을 떨어트리고 아이샤에게 다가가려하니 겁에 질린 아이샤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 모습을 본 머큐리는 당연하다는 듯, 조소를 남기며 격벽에 기대었다.

“짐승이 쉴 곳은 어디에도 없어. 아무리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써도 본성은 똑같으니까. 네가 있을 곳은 너를 쓸 줄 아는 주인이 있는 곳이야.”

그런 레티시아가 자신을 돌아보자 머큐리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내려오라 손짓했다.

"0번 전대의 짐승. 레티시아 모토르."

허나 레티시아는 머큐리에게 고개를 돌리며 점차 불길에 휩싸이는 아이샤에게 손을 뻗었다.

둘을 감싼 불기둥이 사라지자마자 아이샤는 레티시아를 노려보았다.

“방금 그 사람이 말한 게 정말 사실이야?”

아이샤의 질문에 레티시아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리암은 네가 6번 전대라고 했었잖아. 설마 동생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던 거야?”

“이제 상관없잖아. 네가 안전하고 거푸집도 무사히 로샨에서 빼냈다면 그걸로 충분해.”

여전히 온 몸이 피범벅인 레티시아는 눈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한 아이샤는 로샨이 있을법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하나도 안 충분해! 너를 빼낸 건 순전히 에버니저와 약속을 해서 그런 거지, 너를 믿는 다는 건 아니야!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다른 8번 전대 대원들하고 같이 둘 수 있을 것 같아? 넌 대체 뭐냐고!”

“네가 아는 것 그대로야. 8번 전대의 기사. 레티시아 모토르.”

“내가 거기서 본건 그 사람 말 그대로 짐승이었어! 보관실까지 경비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거 네가 전부 죽인 거잖아! 문자 그대로 도살 해버렸잖아! 똑바로 말해! 네 정체가 뭐냐고!”

아이샤가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붙이니 고개를 숙인 레티시아는 소리를 지르는 아이샤를 향해 무게감 있는 발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아이샤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지만, 레티시아가 한 순간에 거리를 좁히자 꼼짝없이 붙잡혔고 레티시아는 그녀가 도망칠 수 없도록 우악스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꺄아아악! 이거 놔!”

사람의 손으로 잡은 것인데 유압 프레스기로 누르는 것처럼 관절이나 뼈가 으깨질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오자 불길에 휩싸이던 아이샤는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손을 떨어트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모든 건 너희를 위한 거였어. 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한 거야. 그러니 이번 알게된 건 다른 동생들에게 말하지 말아줘.”

“진실을 숨기겠다는 거야? 그러다 밝혀지면 어쩌려고? 나까지 죽일 생각이야?”

아이샤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자 레티시아는 잠잠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가족이 없자면 내가 있을 이유도 없어.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사라지는 것뿐일 거야.”

“자살하겠다고?”

조금은 당황한 아이샤의 질문에 레티시아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놓았다.

마치 커티스와 아서가 탈취한 철괴를 들고 온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레티시아는 황급히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이전에 부상을 입었던 부분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레티시아와 달리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던 아이샤는 레티시아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려 다가가니 멀리서 아서가 날아오는 것인지 달려오는 것인지 구분가지 않을 속도로 다가왔다.

그들의 근처로 다가온 아서는 곧바로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췄고, 그와 함께 해치가 열리며 비틀거리는 사일러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레티시아에게 달려갔다.

“누나 괜찮아?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난 괜찮아..... 그냥 상처가 터져서 피가 좀 났을 뿐이야. 그리고 나머지는 내 피가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니,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어? 상처 좀 봐봐.”

그 모습을 본 레티시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방금까지 사람을 그렇게 죽였던 사람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 혼자서 수레를 끌고 온 커티스에서 내린 리암은 레티시아를 슬쩍 곁눈질만 하더니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거푸집은 어떻게 되었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레티시아의 연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정신이 팔려있던 아이샤는 한참이 지나서야 리암을 돌아보았다.

아이샤의 늦은 반응보다 먼저 신경쓸 것이 있었는지 무언가 한참 고민하던 리암은 아이샤와 다를 것이 없이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일단 거푸집은 구했어, 이거 맞지?”

아이샤는 배낭에서 약 50cm정도 높이의 석고로 만든 커다란 원기둥을 꺼냈다.

위 아래로 부착된 금속으로 만든 잠금 장치를 풀자 석고로 만든 원기둥은 세로로 나눠졌고, 그 내부에는 쇳물을 한 번 붓는 것으로 100개 정도의 얇은 동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암이 한참동안 거푸집만 살펴보고 있으니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아이샤는 손톱을 살짝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어?”

그러나 리암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또 다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거푸집을 닫고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 할 거야. 10000일리아스 짜리 동전을 만드는 거푸집이니 이거면 다른 거푸집을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빠르면 2주 정도면 5억 일리아스 정도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이걸 다 구하기는 했는데, 이제 이걸 어떻게 해방군에 보낼 거야? 여기에서 작업할 수는 없잖아?”

그런 둘 사이에 살짝 절뚝거리는 레티시아가 다가왔다.

아이샤는 최대한 그녀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단순히 질문을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샤는 자신을 향한 레티시아의 살의가 담긴 시선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방금까지는 지금까지 본 것을 말 하면 자신이 자살하겠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지금 아이샤가 몸으로 느끼는 것은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자신이 이전에 봤던 시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리암에게 대답하려 했지만, 공포감이 그녀의 혀를 마비시킨 것인지 아이샤는 입을 뻥끗거리다 간신히 목소리를 흘려냈다.

“아, 아리아드네에게 이 곳의 위치를 전했어...... 아마 알아서 가져 갈 거야......”

“5억 일리아스가 필요하다는 말도 전했고?”

아이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또 너희에게 말해야 될 중요할 내용이 있어.”

아이샤가 그런 말을 꺼내자 레티시아가 그녀에게 한 발짝 접근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샤는 잠깐 굳었지만 이내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가방의 안에서 말린 종이뭉치를 하나 꺼냈다.

펼친 종이의 안에는 알 수 없는 문자를 찍은 탁본이 있었다.

“이게 뭐지?”

“로샨 안에 있는 아카이브를 찍은 탁본으로 보여. 그리고 여기 적힌 건......”

“다른 아카이브에 관련된 정보인가?”

얼굴을 찌푸린 리암이 던진 말에 놀란 아이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반응을 보이자 리암은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가 저 물건을 확보할 때, 호드라는 이름을 가진 검은 수호자가 나타났어. 그때 했던 말이 모든 아카이브가 연결된 것처럼 이름이 있는 모든 수호자는 연결되어 있다는 거였어.”

사일러스가 리암 대신 대답을 하자 리암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집으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얌전히 머리를 정리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샤하나즈를 지키기 위해선 샤하나즈를 버려야 해. 그게 우리와 샤하나즈 모두 다 안전한 길이야.”

그러자 사일러스가 리암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과정을 거치면 아카이브에서 얻은 정보를 보고나서 그런 결론을 내는 건데!”

“진정해 사일러스. 리암이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던 것 아니겠어?”

레티시아는 그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지만, 사일러스는 여전히 붙잡은 옷을 놓지 않았다.

“생각은 무슨 생각! 가족을 버리자는 게 어딜 봐서 생각이 있는 말인데!”

그러자 이제까지 무덤덤하게 대답했던 리암은 똑같이 사일러스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야말로 현실적으로 생각해! 너라면 그 호드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샤하나즈에게 티페레트가 붙어있는 이상 저런 애들은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알거야. 그리고 샤하나즈가 탄 티페레트를 노리고 오겠지. 그걸 막을 수 있을 것 같냐고! 지금 그 녀석들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샤하나즈 자체의 위치는 모른다는 거야! 그냥 놔두면 적어도 녀석들에게 공격은 안 당하겠지만, 우리와 함께 다니면 샤하나즈는 물론 우리까지 위험해진다고!”

그런 말을 한 자신도 혼란스러운지 사일러스를 밀쳐낸 리암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짚었다.

“나도 이것 말고는 더 좋은 생각이 안 나. 나도 샤하나즈를 도울 방법을 모르겠다고.......”

“그건 티페레트를 뽑아내면 그만인 일이잖아.”

커티스가 가져온 철괴 위에 거대한 불기둥이 나타나며 막다른 길에 부딪혀 자포자기하는 리암의 흐느낌에 대답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기둥은 한 순간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그 한가운데에는 지팡이를 짚은 선명한 흑발의 여성이 모두들 내려다보고 있었다.

펄럭이는 소매 한 쪽만으로도 평범한 옷을 한 벌 정도 만들 수 있을 듯 보이는 기능성을 깡그리 무시한 옷을 입은 그녀는 입에 문 담뱃대에 가볍게 연기를 내뿜었고, 그녀의 손 안에서 담뱃대는 작게 불기둥을 만들며 그녀의 손에서 사라졌다.

지팡이를 짚으며 내려오려는 그녀가 허공에 발을 딛자 그녀의 발밑에 희미한 불씨들이 모여들며 그녀의 발을 지탱했고, 그녀는 마치 허공에 계단이라도 있는 것 마냥 여유롭게 지면까지 내려왔다.

“아리아드네. 딱 맞춰서 왔네.”

아이샤가 그녀를 노려보자, 아리아드네는 그녀를 곁눈질로도 바라보지 않고 성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무리 네 존재 자체가 보기 싫어도 위폐를 만들 수 있는 자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거푸집은 어디에 있어?”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는 아리아드네는 아이샤에게 손만 내밀었고, 아이샤가 가방에서 거푸집을 꺼내자 아리아드네는 이를 낚아내려 했다.

그러나 아이샤는 바로 손을 치워 그녀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눈가를 찌푸린 그녀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샤를 노려봤다.

“뭐하자는 거야? 나를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방금 전에 했던 티페레트를 떼어 낸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네가 잘 알아내 봐. 나는 여기서 자제만 받으면 끝이니까.”

아리아드네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아이샤는 다시 한 번 뒤로 물러나 그녀의 손을 피했고, 이에 아리아드네는 살짝 손을 돌려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아이샤의 발밑에 불길이 솟구치며 그녀의 전신을 속박했고, 경멸하는 눈으로 아이샤를 내려다본 아리아드네는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샤의 손의 거푸집에 손을 뻗었다.

허나 그녀가 거푸집을 잡기 전, 레티시아가 끼어들어 그녀의 손목과 손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해봐, 아예 손목을 뜯어버릴 테니까.”

“넌 뭔데 얘 편을 드는 거야? 제대로 아는 애도 아니잖아?”

레티시아의 몸에도 아이샤와 똑같이 불길이 솟구쳤지만, 레티시아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고 점점 힘이 들어가며 손목이 비틀리니 아리아드네는 안색을 바꾸며 치켜든 손가락을 거두었다.

두 명을 감싼 불길이 사라지자 손목을 잡은 레티시아의 손에도 힘이 조금 빠졌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티페레트를 어떻게 하면 떼어낼 수 있는 거지? 샤하나즈의 가슴에는 이미 티페레트가 깊이 동화되어서 제거할 수 없어. 근데 네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꼭 떼어낼 방법이 있는 것 같던데.”

“그건 이 모자란 녀석에게 물어봐. 고대의 존재의 기술로 붙은 것이니 그걸 제거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힘과 지식이 있는 올드 원 뿐이니까.”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 아리아드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아이샤의 손에서 거푸집을 낚아챘다.

“약속은 약속이니 5억 일리아스는 최대한 빨리 보내주지. 그 이상의 도움은 내게 바라지 마.”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더 자세하게 알려줘!”

다급하게 아리아드네의 뒤를 쫓는 아이샤를 무시한 그녀는 수호자 2대가 끌고 온 철괴 들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며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제대로 된 올드 원이 되고 싶다면 알아서 해결해. 그런 것도 못 하면서 올드 원이라는 이름을 쓸 생각도 하지 마. 역겨우니까.”

자신을 쫓아오는 아이샤를 지팡이로 쳐낸 아리아드네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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