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호드 2
* * *
곧바로 포구의 방향을 돌린 커티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철갑탄을 발사했지만, 커티스의 철갑탄은 방패에 미세한 흠집도 남기지 못했다.
어떻게든 레티시아와 스펜서를 지원하기 위해 위치를 바꿔 사격 방향을 바꿔 보았지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두 쌍의 방패는 커티스에게 미세한 사각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건 반칙인데.》
“전투에 반칙이 어디 있어. 내가 어떻게든 틈을 찾아볼 테니까 너는 기동에 집중해.”
투덜거리는 커티스를 다그친 리암은 방패의 뒤에서 4개의 팔 중 하나가 변형되는 것을 보곤 콕핏트 안에서 전투자극제를 꺼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안면이 마비될 정도로 쓴 맛과 향이 입 안에 가득 찼지만, 그 덕에 전투로 인해 무뎌진 집중을 강제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레티시아 누나가 샤하나즈부터 화긴하래여! 스펜서는 안토늘 데리고 안전한 고스로 이탈 준비하고!》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발레리안은 다시 신체의 출력을 올리며 커티스를 쫓으려는 호드를 덮쳤다.
다른 수호자보다 2m정도는 큰 발레리안이 자신의 중량을 이용해 덮쳤으니 호드가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 쌍의 방패로 몸을 지탱해 중량을 버텨낸 호드는 역으로 발레리안을 밀쳐냈다.
《아직도 똑같은 방법이 통할 것 같아?》
발레리안의 주먹을 정면에서 주먹으로 받아친 호드는 곧바로 아래쪽의 팔을 이용해 발레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호드가 팔을 잡아당기자 발레리안의 중심이 앞으로 쏠렸고, 그와 동시에 변형된 팔에서 돋아난 예리한 칼날이 발레리안의 장갑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악!》
《어린아이!》
이를 막기 위해 스펜서가 달려들었지만, 이미 기동 한계에 도달한 어설픈 움직임으로는 접근조차 무리였다.
다친 짐승과 같이 달려들던 스펜서는 호드가 휘두른 방패에 맞아 뒤로 튕겨나갔고, 그러는 와중에도 칼날은 발레리안의 기체에 점점 깊게 파고드는 중이었다.
아직 쓰지 않은 손을 이용해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중량도 실리지 않고 팔 힘으로만 휘두른 주먹은 호드가 남아있는 손으로 문제없이 받아냈다.
이런 교착상태로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라는 생각에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던 레티시아는 결단을 내렸다.
“조금 손상을 입어도 어쩔 수 없어! 어떻게든 벗어나!”
《아라써여!》
그와 함께 호드에게 붙잡힌 오른손이 압력을 이겨내며 천천히 변형을 시작했다.
붙잡힌 팔뚝의 천천히 장갑이 전개되며 손바닥에 대구경 포구가 연결되고, 약실에는 폭발성 탄환이 장전 되었다.
《누나, 그래도 이거 마니 아플텐.....》
“난 괜찮으니까, 너부터 걱정해!”
분노가 섞이기 시작한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발레리안의 팔뚝에 내장된 약실의 탄환이 점화되었다.
주먹이 붙잡혀 포구가 노출되지도 않은 상태로 폭발성 탄환을 발사하니 두 명을 강제로 떨어트리고도 남을 정도의 폭발이 주먹 안에서 발생했고, 오른손이 너덜너덜해진 발레리안은 폭발에 휩쓸려 내던져지듯 튕겨 나왔다.
《누나......》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발레리안의 손이 걸레짝이 된 것처럼 경련하는 레티시아의 오른손 또한 으깨진 것 같은 고통이 타고 올라왔지만, 그녀는 발레리안 몸에 박힌 칼날을 뽑아내며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일갈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호드는 발레리안을 마무리 짓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고, 아직 일어나지도 못한 발레리안에게 호드가 팔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오자 멀리서 굉음과 함께 아서가 호드의 측면을 노리고 돌진해왔다.
《도망쳐 발레리안! 지금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팔뚝의 칼날을 앞세운 아서는 호드를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살짝 몸을 움직인 호드는 정면으로 아서와 충돌했다.
한참을 밀려났지만, 결국 맨몸으로 음속을 넘는 아서와 충돌을 받아낸 호드는 당황하는 아서를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고, 다시는 움직일 수 없도록 다리를 방패로 찍었다.
경량화를 위해 다른 수호자에 비해 장갑이 약했던 아서는 방패로 찍은 것만으로 장갑은 물론 다리 자체가 비틀렸고, 발레리안은 망가진 오른손을 억지로 뭉쳐 주먹을 쥐며 일어났다.
방패를 무기로 쓰는 동안 생긴 틈을 놓치지 않은 커티스는 미세한 틈을 노려 방아쇠를 당겼고, 발레리안의 주먹을 받아치려는 호드의 손 중 하나가 철갑탄에 맞으며 튕겨 나갔다.
그러자 가볍게 혀를 찬 호드는 방패를 돌려 발레리안의 주먹을 막아냈고, 반대쪽 두 팔을 하나로 합쳐 거대한 총열을 만들어 냈다.
《리암? 이거 별로 느낌이 안 좋은데.》
커티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입에 머금은 전투 자극제를 삼킨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사격은 여기까지야. 이제부터 회피는 내가 할게. 혹시 모르는 불멸자를 경계해줘.”
커티스가 포를 내리기가 무섭게 그의 발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스치기만 하더라도 치명타라는 것을 직감한 리암은 사선이 닿지 않을 호드의 뒤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리암이 회피에 집중하는 동안 커티스는 그를 대신해 호드에게 지속적으로 철갑탄을 퍼부었고, 그 사이 스펜서가 사슬포로 발레리안을 막아내는 호드의 방패에 고정시켰다.
사슬을 되감자 스펜서는 순식간에 호드와 거리를 좁혔고 발레리안과 커티스가 방패를 잡아두는 동안 다리가 망가져 움직이지 못하는 아서를 호드의 밑에서 빼냈다.
스펜서가 사슬포에서 사슬을 분리하는 것까지 확인한 리암은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커티스! 성형작약탄!”
《두 발 뿐이니까 신중하게 쏘라고!》
리암의 긴장이 높아진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인지 더 이상 늘어지는 하품도 하지 않는 커티스는 빠릿빠릿하게 리암의 명령을 받아들였고, 그 즉시 커티스의 약실에 새로운 탄환이 장전되었다.
호드의 팔이 닿지 않는 각도라고 생각했지만, 커티스가 성형 작약탄을 조준하고 있으니 호드의 팔이 기괴하게 꺾이며 등 뒤의 커티스를 조준했다.
《조심해!》
“나도 알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유효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탄환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리암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찰나의 틈도 없이 두 수호자의 포구가 불이 뿜었다.
마지막 순간에 커티스가 몸을 틀어 가슴에 직격하는 탄도의 탄환은 왼쪽 아래의 흉곽을 날려버렸고, 두 발 모두 정확히 일치하는 지점에 맞아 한 발이 방패를 뚫으면 나머지 하나는 호드에게 직격하도록 의도했던 성형 작약탄은 모두 방패에 막혔다.
금속제트가 방패에 구멍을 뚫으며 호드에게 닿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호드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크컥.... 아아악.....! 커티스, 왜 그런 거야!”
《기사를 지키는 건....... 수호자의 의무야......! 그냥 죽게 둘 수는 없잖아......!》
피를 토하는 리암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커티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스펜서는 여전히 커티스를 겨눈 포구에 달려들었고, 그 중간에 분리했던 자신의 팔을 박아 넣었다.
《끝까지 귀찮게 하네. 그냥 티페레트를 내놓으라고!》
팔을 흔들어 스펜서를 떨쳐낸 호드는 방패로 그를 후려쳐 그를 날려 보내곤 포신을 돌려 쓰러진 스펜서를 겨눴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아예 호드를 힘으로 집어 들었다.
《절대 안 대여!》
《그러면 그 의지와 함께 죽던지!》
순식간에 보랏빛을 띨 정도로 달아오른 호드의 팔이 자신을 붙잡은 발레리안의 팔을 내려치니 장갑이 희붉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린 한쪽 팔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다시 기동을 시작한 아서가 팔뚝의 칼날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칼날이 호드의 팔에 닿으니 녹는 것도 모자라 증발해서 자취를 감췄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그러니까 티페레트를 내놓으라고.》
넘어진 발레리안을 짓밟고, 양쪽 어깨를 방패로 눌러 움직임까지 봉쇄시킨 호드는 그렇게 달아오른 팔을 발레리안의 흉부 장갑에 가져다댔다.
발레리안의 흉부 장갑이 달궈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녹아내린 장갑이 주변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나오지 않으면 이 녀석의 엔진은 산채로 타버릴 걸. 서로가 그렇게 중요하면 빨리 불러와.》
《절대......안 대여...... 누나도.....안 댄다고 했고.......》
《성능하고는 안 어울리는 마음가짐이네.》
그의 말 그대로 발레리안과 레티시아가, 아니 그 자리에 있는 8번 전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전인 상태에서도 이 상황을 파훼할 방법이 없는데, 기동도 간신히 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체인이 달아오른 호드의 팔에 감기며 그를 잡아당겼다.
몸을 잡아당길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호드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며 발레리안의 흉부 장갑에서 손을 치웠다.
《그래, 이게 맞는 방법이었네. 이렇게 하니까 오잖아?》
《지금 뭐하는 거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 몰라?》
“알고......있으면.......너도.....같이 움직여......”
저항하는 티페레트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한계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샤하나즈는 비명을 지르듯 따지는 티페레트에게 간신히 대답했다.
그런 것을 모르는지 만신창이가 된 발레리안을 한쪽으로 차버린 호드는 그녀를 반기듯 손 들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래서 엔진은 뜯어낼 준비는 된 거지?》
《기다려봐!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무슨 소리야? 고작 엔진 하나 갈아 치운다고 네가 죽을 리가 없잖아?》
어이없다는 손짓을 한 호드는 움직이지 못하는 티페레트를 넘어트리고는 흉부장갑을 뜯어내려 했다.
《농담이 아니야! 그리고 네가 뜯어낸다고 해서 뜯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부품이 되어버렸다고!》
그 말에 호드의 손은 잠시 멈췄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엔진의 몸하고 하나가 돼서 빠져 나오질 못하고 있다고. 게다가 감응도 더럽게 깊게 돼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 상태에서 엔진을 뽑으면 내가 죽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어?》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호드는 손을 멈추지 않고 티페레트의 흉부장갑에 힘을 줘 해치를 강제로 뜯어냈다.
《웬만해서는 온전히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된다면 씨앗만이라도 가져가야지.》
갑작스런 고통으로 티페레트와 샤하나즈 사이의 교착 상태가 해소된 것인지 곧바로 호드의 손을 쳐낸 티페레트는 뜯겨나간 해치를 어설프게 끼워 맞추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씨앗을 회수해야지. 어차피 필요한 건 세계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씨앗 뿐 이니까.》
《세계수?》
호드는 손가락 관절을 풀며 한쪽 손을 팔뚝 안쪽으로 밀어 넣어 미세한 기계팔들을 꺼냈다.
《우리의 목적인 아카이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세계수를 다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세계수로 이 땅의 인간 모두를 어둠으로 끌고 가는 것.》
그와 함께 호드는 다시 한 번 샤하나즈를 노려 팔을 뻗었다.
자신의 가슴을 가린 티페레트는 황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여전히 꺽꺽이는 소리를 내며 호흡을 이어가는 샤하나즈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저게 무슨 소리야...... 세계수? 씨앗이 필요하다고?”
《나도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건 위험하다는 거지!》
티페레트는 어중간하게 대강 구실만 맞출 정도로 끼운 해치를 주먹으로 내려쳐 다시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조금 아플 뿐이야. 저번에 했을 때는 잠깐 비명을 지른 게 전부였으니까.》
《저번?》
《그래, 저번. 그때가 언제였더라.......》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문지르던 호드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고민을 끝냈다.
《맞아. 그때가 우리가 이 밤을 시작했을 때였지. 네가 그때 갑자기 사라져서 세계수가 사라져 버렸어. 그 때문에 여전히 빛이 남아서 인간들이 지금 남아 있지.》
“그 말은 저 검은 수호자가 밤을 시작했다는 거야......?”
《내가 듣기에는 그런 것 같은데. 물론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근데 하나는 확실한 건 있지 않아?》
“지금 당장 싸워야 하는 거지.”
둘의 의견이 일치하자 삐걱이며 어색하기만 하던 티페레트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누가 지시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것도 없이 기체 내부의 톱니바퀴를 가속시키며 몸을 푸르게 달궜다.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자유를 위해서.》
둘이 합을 맞춰 전투태세를 갖추니 어처구니가 없는 호드는 의미 불명의 손짓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제발 일을 복잡하게 하지 말자고. 수호자의 사명을 잊은 거야? 우리의 목표는 아카이브를 수호하는 거야. 그런데 넌 그 임무도 잊고 인간들하고 같이 아카이브나 쑤셔보러 다니는 거잖아? 케테르가 보면 뭐라고 하겠어?》
방패를 집어던진 호드는 위에 있는 두 쌍의 팔을 겹쳤다.
그러자 하나로 합쳐진 팔의 사이에선 포구와 함께 총검이 솟아 나왔고, 남아있는 두 팔로 이 총검을 든 호드는 가볍게 이를 던져 역수로 바꿔 잡았다.
경고도 없이 호드의 사격이 시작되었지만, 티페레트는 곧바로 위로 솟구쳐 탄환을 피하곤 허공을 발판삼아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호드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호드의 바로 앞에 발을 딛었을 때, 샤하나즈는 곧바로 몸을 숙여 호드의 칼날을 피했고 티페레트가 예리하게 변형시킨 손을 호드의 가슴을 노려 내질렀다.
그러나 티페레트의 손은 호드 장갑의 표면만 긁으며 한쪽으로 빗겨나갔다.
호드 어깨의 포구가 안쪽으로 내려오니 티페레트는 곧바로 사선에서 벗어났고, 그의 어깨 아래로 빠져나와 등 뒤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티페레트! 철갑탄!”
《알았어!》
아직도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땅에 미끄러지는 와중 티페레트는 다시 손을 변형시켰고, 곧바로 포신을 휘두르며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호드의 뒤를 겨눴다.
뒤로 돌지는 않았지만, 호드 어깨의 포신이 등 뒤로 내려오며 티페레트의 철갑탄을 튕겨 냈다.
근거리에서 발사한 철갑탄마저 튕겨나가니 철갑탄이 의미없다 판단한 샤하나즈는 가볍게 혀를 차며 곧바로 손을 되돌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등 뒤로 내려온 포드의 포신은 티페레트를 따라 움직였고, 하는 수 없이 티페레트는 자신도 주체하기 힘든 속도로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무기는 없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저 녀석 같이 무기를 못 꺼내는 거냐고!”
《나도 몰라! 솔직히 나도 아직 내 몸을 잘 모른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속도가 속도다보니 호드의 틈을 노려 안쪽으로 파고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장갑을 뚫을 수 없어 유의미한 피해는 조금도 가할 수 없었다.
거기에 호드의 몸도 점점 달아오르며 티페레트의 속도에 따라오고 있어 시간이 지날 때 마다 파고들 수 있는 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점점 숨이 차오르는 중,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그건 네 일이야, 샤하나즈. 네가 해야 할 거야.》
“스펜서? 너 제대로 말 할 수 있었어?”
이전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아니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스펜서의 목소리로 들리자 샤하나즈는 호드를 봤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똑바로 들어! 나도 이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저 녀석이 세피로트의 나무를 열었을 때, 엔진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어! 네가 열어야 하는 거야!》
“나는 저 녀석보다 아는 게 더 없는데 어쩌라고?”
그러나 고통에 찬 짐승이 지를법한 괴성과 이어진 스펜서의 목소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누전되는 고통! 흘러내리는 강철!》
“망할! 저걸로 내가 어떻게 하라고! 티페레트, 뭔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있어?”
《나도 몰라! 모른다고!》
《알 필요도 없지.》
샤하나즈가 투덜거리는 사이 호드는 그들의 속도를 따라잡았고, 샤하나즈가 정신을 파는 사이 호드의 칼날이 티페레트의 흉부장갑으로 날아왔다.
이미 피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접근해 티페레트가 자세를 바꾼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고, 흉부 장갑의 표면을 파고 들어간 칼날은 티페레트가 억지로 끼워 넣은 해치를 뜯어냈다.
《똑바로 안 움직여? 지금 뭐하자는 거야?》
“영원히 도망 다닐 수는 없잖아! 언젠가는 잡힐 거라고! 너야말로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 해봐! 난 지금 그냥 네 부품이라고!”
《얼마 전 까지는 네가 기사라고 하던 사람이 잘도 그런 말을 하네! 그리고 몇 번을 말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억이 없어!》
그러는 와중에도 달아오른 호드의 몸은 점차 희게 바뀌더니 조금씩 푸른빛으로 변해갔고, 해치가 날아가니 그 열은 샤하나즈의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티페레트는 열린 해치로 들어오려는 호드의 기계 팔을 붙잡았지만, 그녀가 기계 팔을 붙잡아 멈추니 다른 손에 쥔 칼날이 티페레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갑작스런 격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티페레트에게 호드는 머리를 맞댈 정도로 가까이 눈을 마주쳤다.
《드디어 잡았네. 세피로트의 나무도 없이 이 정도를 버틴 것을 보면 그 엔진이 잘 맞기는 한가봐?》
분풀이를 하듯, 칼날을 더욱 깊이 박아 그대로 티페레트를 들어올린 호드는 어깨와 연결된 포구를 티페레트의 양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제..... 제발 뭔가 좀 해봐....... 이대로 죽긴..... 싫어.......》
샤하나즈는 어떻게 대답하려 했지만, 입으로 올라오는 혈액이 그의 대답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가 정신을 잃으니 티페레트의 팔에도 힘이 빠지며 그대로 호드의 기계 팔들이 샤하나즈에게 닿았고, 작은 칼날들이 그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 주변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계 팔이 그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잡자 샤하나즈의 시야에는 기계 팔이나 어둠이 아닌 빛나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