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세피로트의 나무
* * *
시야가 바뀌자 샤하나즈는 더 이상 티페레트에 탑승해 있지 않았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나무 한 그루가 그를 비치고 있었고, 그 나무 앞에는 누군가 그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대체 뭐야? 여기는 또 어디고?”
“너야말로 이 곳에 왜 있는 거야? 여긴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역광으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샤하나즈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피가 흐르는 샤하나즈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알겠다. 너 엔진이구나? 그래서 넌 누구한테 탄 거야?”
“아니, 그것보다 여기가 어디고 넌 누구인지 설명하는 게 먼저 아니야? 나는 방금까지 티페레트에 타서 한참 싸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여기에 도착해 있단 말이야. 지금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 것 맞아?”
샤하나즈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 그는 살며시 다가와 샤하나즈와 어깨동무를 하고 가볍게 그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몰라. 이 곳은 아예 다른 시간과 분리된 공간이거든. 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순간이 1초 후일수도 있고 1주일 후가 될 수도 있어.”
“아니, 그러면 이런 시간이 없다는 거잖아!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반대로 말하면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든지 상관없다는 거지.”
샤하나즈의 등을 경쾌한 ‘팡’소리가 날 정도로 친 남자는 다시 나무로 가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샤하나즈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당장 난리를 피운다고 하더라도 나갈 방법도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옆에서 바라본 그 남자는 샤하나즈와 똑같은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전신에는 숫자를 센 것 마냥 4개의 평행한 선들을 긴 선 하나가 가로지르는 모양의 흉터가 온전한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덮여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 통성명이나 하자고. 내 이름은 나시르.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이야. 뭐, 관리라고 해 봤자 그냥 죽치고 시간이나 때우는 게 전부지만.”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마친 나시르는 샤하나즈의 소개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곳에서 1초라도 빨리 나가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샤하나즈는 초조하게 손가락 관절들을 꺾으며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나시르가 살짝 몸을 숙여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샤하나즈 모토르. 그보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고개를 들며 자신 있게 대답하려던 나시르는 대답하려고 열었던 입을 닫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고는 눈가를 찌푸리며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을 뒤지기라도 하는 것 마냥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러니까...... 여기는 그거였어. 내가 만든 수호자들의 무기를 관리하기 만든 공간이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고!”
“잠깐만 기다려봐. 나도 여기에 사람이 온지 너무 오래 돼서 잊어버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수호자의 무기를 관리하고...... 엔진의 목적을 감정하는 곳이었지. 맞아. 그거였어.”
“그러니까 어떻게 돌아 가냐고!”
샤하나즈가 잔뜩 짜증을 냈지만, 여전히 생각에 빠져있는 나시르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 그래. 너는 무슨 마음가짐으로 엔진이 되겠다고 한 거야?”
“집어치우고 돌아갈 방법을 말 하라고! 여기를 관리하는 사람이면 알 것 아니야!”
“여기 들어올 수 있는 건 이름이 있는 수호자와 진심으로 감응해서 하나가 된 기사, 즉 엔진이 되겠다고 다짐한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이야. 내 판단에 따라서 넌 돌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살짝 표정이 섬뜩해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자 빛나는 나무의 껍질이 열리며 내부에서 눈짐작으로 몇 만개는 되어 보이는, 기계에 침식된 사람의 팔들이 고통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밖으로 뻗어 나왔다.
“저렇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다시 물어볼 게. 너는 무슨 마음가짐으로 엔진이 되겠다고 한 거야?”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 해. 더 해봤자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것 뿐 이니까.”
나시르는 머뭇거리는 샤하나즈에게 부담가지지 말라는 가벼운 말투로 웃었지만, 그 내용은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 대답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 다른 전대원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샤하나즈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며 대답했다.
“나는 복수하려고 엔진이 되기로 했어. 에버니저 전대장님의 복수를 위해 로샨을 무너트릴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나시르는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답. 거기에 또 다시 오답.”
그와 함께 나무의 안에서 검은 체인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묶어 나무의 안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을 한 두 번 본 줄 알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눈만 봐도 알 수 있단 말이지. 물론 복수 하고 싶겠지. 그런데 네가 진심으로 엔진이 되기로 결심해서 여기로 온 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잖아?”
나시르는 샤하나즈를 끌고가는 체인을 손으로 잡아 그를 끌고 들어가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만약 네가 정말로 복수를 위해 엔진이 되기로 한 거면 이대로 놔뒀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넌 이곳에 오기 직전, 그 순간에 무엇을 위해 엔진이 되기로 결정한 거야?”
“난.......”
“이번에는 별로 시간이 없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걸?”
나시르가 체인을 잡고는 있어도 끌려가는 속도를 늦출 뿐, 샤하나즈는 여전히 나무의 안으로 끌려가는 중이었고 샤하나즈가 머뭇거리는 사이 나무에서 뻗어 나온 팔들은 그에게 닿을 정도였다.
“난 내 전대원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에저니저 전대장님과 에이다, 그리고 로크처럼 또 다시 잃고 싶지 않으니까!”
“정답.”
그러자 나시르는 나무에서 뻗어 나온 사슬을 끊고 샤하나즈를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또 다시 정답.”
끌려가지 않기 위해 온 몸의 힘을 썼던 샤하나즈가 바닥에 쓰러지자 미소를 지은 나시르는 그를 잡아 일으켜주었다.
“수호자는 이름 그대로 지키기 위한 도구야. 무기가 아니라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멍청이들이 오답을 냈는지 알아?”
그는 나무에서 뻗어 나온 손들을 훑어보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수호자를 무기로 생각하고, 본래의 목적은 안중에도 없으니. 아무리 감응을 깊게 한다고 해도 그런 멍청이들에게 내 수호자들을 맡길 수 없지.”
“그러면.......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나시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샤하나즈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에 손을 얹었고, 나시르의 손을 통해 빛나는 나무에서 내려온 푸른색 분진이 그의 가슴에 있는 톱니바퀴에 흘러 들어갔다.
“너는 모든 수호자의 아버지인 내 인정을 받은 엔진이야. 티페레트는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서 힘들겠지만, 너희 둘이 감응을 제대로 한다면 이제부터 잠긴 기능들을 해제할 수 있을 거야.”
“잠긴 기능이라면......”
나시르는 슬쩍 웃으며 어깻짓으로 뒤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내가 만든 최고의 무기. 세피로트의 나무.”
그리고는 샤하나즈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살에 파묻혀있는 톱니는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설계 되었는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천천히 돌아갔고, 이를 반 바퀴 돌린 나시르는 톱니바퀴 위에 손을 올렸다.
“한 번 네가 원하는 걸 지켜내 봐. 도구를 만들어낸 내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나시르가 그대로 톱니바퀴를 누르니 샤하나즈의 의식이 순식간에 멀어지며,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호드의 기계 팔이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중이었다.
《샤하나....즈..... 제발....... 나...... 무서워.......》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흐느끼는 티페레트의 목소리에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칼날을 붙잡았다.
“티페레트! 잠깐이면 돼! 잠깐만 이 팔 좀 막아봐!”
더 이상 칼날이 파고들지 않도록 칼날을 붙잡은 샤하나즈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신음소리를 내는 티페레트는 그의 말에 따라 경련하는 손을 들어 기계 팔들을 잡았다.
그러자 곧바로 호드가 어깨에 가져다 대었던 포를 발사해 오른팔이 어깨와 함께 날아갔지만, 샤하나즈에게는 그 짧은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샤하나즈는 칼날이 다시 가슴으로 파고들기 전, 나시르가 했던 것처럼 티페레트와 기계팔로 연결된 톱니바퀴를 있는 힘껏 돌렸다.
필요 이상의 힘이 가해져 이미 있던 상처가 벌어지며 가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은 그는 톱니바퀴를 돌린 뒤 주먹으로 이를 내려 쳤다.
그러자 무언가에 홀린 듯, 붕 뜬 목소리의 티페레트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엔진에 의한 기능 해제 승인. 세피로트의 나무를 전개합니다.》
그와 함께 티페레트의 등의 장갑에서 증기가 뿜어지며 장갑이 전개되었고, 호드와 똑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나무가 자라났다.
세피로트의 나무가 등에 자라나자 칼날들이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도 잊어버릴 정도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마저도 뇌세포가 모조리 녹아버릴 정도로 밀려들어오는 정보에 묻혀버렸다.
머리로 느낄 수는 없어도 신체는 착실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숨이 멈춘 그는 피를 토해냈고, 반쯤 뒤집힌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고통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그의 의식을 붙잡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었다.
“반응 장갑 전개.......!”
《반응 장갑 전개.》
샤하나즈의 지시를 티페레트가 반복하자 나무의 표면이 흘러내리며 티페레트의 전신을 뒤덮었고, 한 층의 새로운 장갑이 전신을 뒤덮자 호드와 티페레트의 사이에선 즉시 폭발이 이어졌다.
방향성 폭발로 인해 호드가 뒤로 날아가며 티페레트의 몸에 박혔던 칼날 또한 빠져 나왔고, 그 자리를 뜯겨나간 해치와 함께 흘러내린 장갑이 흘러들어가 빈 공간을 매웠다.
“대 장갑 무장 출력......!”
《대 장갑 무장 출력 시작. 예상 시간 30초.》
“그러면 버틴다!”
이미 흘러내린 피로 얼굴은 물론이고 가슴까지도 피범벅이 되어있었지만, 샤하나즈는 아랑곳 하지 않고 티페레트를 움직여 달려오는 호드를 쳐냈다.
뒤로 밀려난 호드는 바로 포를 발사했지만 반응 장갑에 철갑탄이 부딪히자 비정상적으로 큰 폭발과 함께 탄환이 튕겨 나갔다.
폭발과 함께 밀려난 티페레트는 하나 남은 팔로 땅을 밀어내 자세를 바로 잡았고, 그와 동시에 자세를 낮춰 뒤 이어 날아오는 호드의 탄환을 피했다.
거의 바닥에 붙는 정도로 자세를 낮춘 티페레트는 그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며 점차 몸을 가속시켰고, 호드가 자신을 겨눴을 때 강제로 자신의 몸을 때려 반응 장갑을 폭발시켰다.
폭발로 티페레트가 공중으로 순식간에 솟구쳐 올랐지만, 호드가 포구의 방향을 바꿨을 땐 이미 그녀는 공중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그의 뒤에 착지했다.
“티페레트! 천공기!”
포가 닿지 않을 정도로 초 근접거리까지 다가간 샤하나즈가 소리를 지르자 티페레트는 그의 명령에 따라 왼손을 변형시켰다,
《정말로 이러기야?》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걸 지킬 뿐이야.”
그와 함께 티페레트의 천공기는 레티시아가 장갑을 부쉈던 명치 부분에 직격했고, 천공기에 의해 장갑이 뚫리자 호드는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티페레트! 얼마나 인간에게 감화 된 거냐! 이 엔진 때문이냐?!》
호드의 외침에도 티페레트는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호드는 포를 분리해 두 쌍의 팔로 되돌렸다.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티페레트가 다시 안쪽으로 파고들려하니 호드는 4개의 팔로 티페레트를 막아내곤 다른 두 팔로 손상된 부분을 다시 노리고 들어온 왼팔을 잡았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고!》
호드가 그대로 티페레트의 왼팔을 잡아당겨 뽑아냈지만, 이마저도 노린 것이었는지 티페레트는 호드의 발을 밟아 자신의 발을 그 위에 고정시켰다.
《무장 출력 완료. 교전을 개시합니다.》
티페레트의 등에 자라났던 나무가 다시 몸 안으로 되돌아가며 오른팔이 완전히 날아갔던 어깨에 새로운 팔을 장착했다.
어깨에 다리가 붙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한 팔은 낫과 같이 예리한 손가락들이 자리 잡았고, 손바닥의 한 가운데에는 크롬으로 도금된 것 같이 빛나는 원반이 붙어 있었다.
호드는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원반에 푸른빛이 도니 자석에 끌려가듯 호드가 끌려왔고 예리한 손가락들은 장갑의 사이에 파고들었다.
손가락 아래의 피스톤이 순간적으로 연장되자 손가락들은 몸 안에 깊이 파고들었고, 동시에 관통된 장갑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며 천천히 녹아내렸다.
《내 씨앗까지 노리는 거냐고.....!》
호드는 세 쌍의 팔로 티페레트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이미 강제로 뜯어내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정도로 깊이 파고든 이후이기에 호드는 더 이상 싸울 방법이 없었다.
결국 혀를 찬 호드는 푸른색 분진으로 흩어지며 천천히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페레트의 손가락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밤이 끝나 점점 태양이 떠오르고 있으니 각자의 수호자의 해치에서 나온 사일러스, 에라실, 리암과 레티시아가 티페레트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파...... 우리...... 이긴 거야......?》
호드가 사라지자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온 티페레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샤하나즈는 대답이 없었다.
밖으로 나온 레티시아는 티페레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곤 다시 발레리안으로 향했다.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내 생각에 샤하나즈가 또 티페레트에 갇힌 것 같아! 완전히 침식되기 전에 꺼내야 해!”
세명에게 소리를 지른 레티시아는 호드에게 녹아내렸던 탓에 강제로 뜯어냈던 해치 안으로 뛰어들어 다시 발레리안과 자신을 연결했다.
기계 팔에 연결 된 원뿔이 가슴에 박히자마자 전신에 고통이 엄습했지만, 신음소리도 내지 않는 레티시아는 몸을 움직여 티페레트를 붙잡았다.
《조심해! 함부로 만지지 마!》
레티시아가 샤하나즈를 꺼내기 위해 해치에 손을 올리니 티페레트가 레티시아에게 경고했다.
해치를 뜯어내기 직전에 비명에 가까운 티페레트의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발레리안의 손을 멈췄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여? 저번에도 이러케 꺼내썻는데?》
고통을 참아내느라 입을 열지 못하는 테리시아가 자신에게 명령하기 전, 그녀의 생각을 대강 읽은 발레리안이 대신 묻자 티페레트는 그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도록 황급히 대답을 이어갔다.
《지금 전신에 반응 장갑이 활성화 되어 있어! 함부로 손댔다가는 폭발할거야!》
움직이지 않는 기체와 달리 티페레트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보다 긴박했고, 결국 발레리안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작동 안 시키면 대는 거자나요?》
《그러곤 싶은데, 샤하나즈가 작동시킨 거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엔진이 승인이 있어야 해제할 수 있다고! 그런데 샤하나즈가 지금 아무런 대답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러자 말이 없던 레티시아는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뜯어내야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데!”
《그러치만 저러케 경고 하는 걸 보면.......》
“아직 장갑이 튼튼하니 그 폭발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야! 내 말 들어 발레리안!”
“멈춰, 병신아!”
티페레트의 경고에도 무작정 해치를 열려고 한 레티시아를 막은 것은 사일러스와 아이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온 안톤 이었다.
“뭐야, 저게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타고 있던 수호자가 반 토막 났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수호자 안에서 혼잣말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안톤은 이를 들었는지 뒤에 널브러진 수호자의 반신을 슬쩍 흘겨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 그런데 반응 장갑이 있는데 그걸 억지로 뜯어내려는 건 무슨 배짱이야? 병신도 정도가 있지. 이건 완전 상병신이잖아?”
“뭣......”
“어떻게 네 말을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신경 꺼. 그보다 나도 의사 나부랭이인데, 환자부터 점검하자고. 일단 내가 점검할 수 있도록 저 녀석 좀 눕혀봐.”
당황하는 레티시아를 무시한 안톤은 상의를 벗으며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기계 팔들을 펼쳤다.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았지만, 도와준다는 말에 레티시아는 반응 장갑이 폭발하지 않도록 작동을 멈춘 티페레트를 조심스럽게 눕혔고, 안톤은 아이샤의 도움을 받아 불길과 함께 흉부 장갑 위로 이동했다.
“그래서 방금 전 그 녀석은 뭐야?”
《방금 전? 혹시 호드를 말 하는 거야?》
그 말에 황동으로 만든 확대경을 내리고 장갑 해체 작업에 들어가려던 안톤은 잠시 손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들어 티페레트의 머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이름도 있었어? 혹시 막스처럼 네가 붙인 이름은 아니겠지?”
《우리는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름이 있었어. 누군가 붙인 건 아니야.》
대답을 들은 안톤이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다시 해체 작업에 들어가니, 발레리안에서 해치만 연 레티시아가 그에게 직접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넌 어째서 무사한 거야? 혹시 너도 그 녀석과 한 패는 아니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의심스러운데. 검은 수호자를 가지고 있던 것도 그렇고, 그 녀석이 이쪽 위치를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지금 당장은 대답할 수 없었는지 해체 작업에 몰두하는 안톤 대신 그의 기계 팔 중 하나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등 뒤의 레티시아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를 믿을 수 없었는지 직접 권총을 꺼내 그를 겨눴고, 결국 장갑의 일부만 해체해 떼어낸 그는 표정을 구기며 뒤로 돌았다.
“아이 씨발. 그걸 못 기다려? 미친년이 따로 없네. 뭐하자는 거야?”
“네가 이전에 우리 수호자 목숨을 볼모로 돈을 요구 했던 걸 잊었다고 생각해? 네가 없더라도 내가 어떻게 해볼 거니까, 총 맞기 싫으면 대답이나 해.”
헛웃음을 친 안톤을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니미, 난 뭔 잘못이 있다고 이런 새끼들한테 걸린 거야?”
“대답하라고!”
레티시아가 리볼버의 공이치기를 잡아당기자 다시 손을 멈춘 안톤은 작게 욕을 하다가 조금 작업 속도를 늦추며 입을 열었다.
“난 기사가 아니라 의사야. 수호자하고 감응을 안 했으니까 그렇게 개작살이 났어도 고통 없이 멀쩡한 거야. 의사라면 그리고 씨발 그 호드라는 수호자가 이 곳에 찾아온 건 나하고 무슨 관련인데?”
“그건......”
작업을 이어가는 안톤은 말문이 막힌 레티시아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의심만 하지 말고 그 좆같은 대가리를 써서 생각을 좀 해. 너한테 동생이 소중하다 그런 건 다 알겠는데, 병신마냥 몸부터 움직이다가는 언제 진짜 병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안톤은 신경질적으로 해체한 장갑들을 한 쪽으로 집어 던지며 계속해서 장갑을 해체해 나갔고, 해치 부분의 장갑을 전부 떼어내자 피범벅이 된 샤하나즈의 모습이 보였다.
이를 레티시아가 본다면 또 일이 복잡해 질 것이라 판단한 안톤은 그녀가 볼 수 없도록 자신의 몸으로 샤하나즈를 가렸다.
손가락으로 그의 목을 짚어 맥박을 확인한 그는 희미한 맥박에 가볍게 혀를 차며 그의 가슴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 팔을 뽑았다.
샤하나즈와 연결이 끊기자 티페레트가 점차 푸른색 분진으로 흩어졌지만, 안톤은 자신의 기계 팔로 티페레트와 연결된 부분을 절단해내 샤하나즈를 끄집어냈다.
“너희들 중에 이 녀석하고 혈액형이 같은 사람 없어? 지금 당장 수혈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데?!”
용접기를 이용해 가슴의 상처를 지져 출혈을 막은 안톤은 끝까지 샤하나즈가 눈을 뜨지 않으니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그를 업은 채로 땅으로 내려왔다.
“출혈이 좀 심해서 혈압이 너무 약해. 없으면 전투 자극제라도 줘봐. 지금 당장 혈압을 끌어 올려야 하니까.”
그러자 사일러스가 자신의 팔을 걷으며 손을 들었다.
“내가 샤하나즈하고 혈액형이 같아.”
“준비가 끝나면 바로 수혈할 수 있게 넌 여기 누워있어. 그리고 너희는 내려가서 수혈도구 가져오고. 어디 있는지는 알지?”
딱히 자신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에라실을 부른 리암은 그의 부축을 받아 아카이브로 다시 내려갔고, 발레리안에서 내려온 레티시아는 황급히 샤하나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티페레트에는 이렇게 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은 없었잖아?”
샤하나즈의 상태를 확인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넘어 황당해하는 레티시아가 안절부절 못하며 묻자, 그의 몸을 침착하게 살피던 안톤은 확신이 없는 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세피로트의 나무 때문이겠지. 물론 나도 문헌으로만 접했지 본 건 처음이야.”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아카이브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세피로트의 나무는 알고 있다고? 우리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불길과 함께 근처에 나타난 아이샤가 쏘아 붙이자 사일러스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톤은 이를 무시하고 확대경을 다시 착용해 샤하나즈의 신체를 더욱 유심히 살폈고, 레티시아가 살의마저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뒤통수를 후려치고 나서야 샤하나즈에게서 눈을 뗐다.
“니미 씨발. 뭐하자는 거야? 지금 내가 좆 빠지게 의사짓 하는 거 안 보여?”
“내 동생한테 손 떼. 네가 왜 세피로트의 나무를 왜 알고 있는 거야? 갈수록 의심스러운데?”
그런 레티시아의 태도에 신물이 나는지 머리를 헤집으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른 안톤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에게 권총을 겨눈 레티시아를 노려보았다.
“망할 의사로 훈련 받을 때 배웠으니까. 너희 기사는 수호자만 움직이면 끝이겠지만, 의사는 그런 것만으로는 존나 부족하거든?”
샤하나즈의 상의를 찢고 뒤집은 그는 샤하나즈의 등에 척추를 따라 길게 난 상처와 함께 광배근을 뒤덮은 나무껍질 무늬의 금속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세피로트의 나무가 맞네. 아마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 새끼가 다음번 수호자에 탔을 때, 다시는 못 볼걸?”
샤하나즈를 다시 눕힌 그는 팔꿈치 안쪽에서 혈관을 찾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의심스럽다고 나를 막다가 네 동생을 뒈지게 놔둘 거야? 아니면 이대로 내가 의사짓을 할 수 있게 놔둘 거야?”
“무슨 말이야. 죽다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목탄으로 만든 연필을 꺼낸 샤하나즈의 혈관이 있는 곳을 표시한 뒤, 사일러스에게도 같은 과정을 거쳐 혈관을 표시했다.
레티시아가 여전히 권총을 겨누고 있으니 아이샤가 권총을 든 그녀의 손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기계에 침식되어서 완전히 수호자의 부품이 되어 버리는 걸 말하는 거겠지. 티페레트에게 탄 기사들에게는 흔하게 있던 일이었어. 대부분은 완전히 동화되어서 사라져버렸고, 살아남은 일부도 신체가 기계에 영구적으로 침식되었어..... 솔직히 말하면 샤하나즈가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안톤은 보란 듯 샤하나즈의 가슴에 파묻힌 티페레트의 톱니바퀴를 두드렸다.
“이 톱니바퀴를 떼어 내야겠지. 세피로트의 나무는 양날의 검을 넘어서 아예 자루마저 없는 칼날이니까.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해야 돼.”
“그러면 최우선 목표는 아카이브로 가는 거겠네.”
사일러스가 말을 덧붙이자 안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보다 먼저 수술에 필요한 물건을 구해야해. 안 그러면 이 수호자가 죽어버릴 테니까. 그랬다가는 이 새끼에게 어떤 영향이 갈지 모르거든.”
“뭘 구해야 하는데? 내가 구해올게!”
그러나 안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건 나하고 저 불꽃 꼬마 그리고 이 녀석이 가져올 거니까 너는 네 동생들 데리고 먼저 수술 장소를 확보해.”
“어째서! 아이샤, 뭐라고 좀 해봐!”
허나 레티시아의 말을 무시한 아이샤는 안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샤하나즈가 정신을 차리는 대로 작업을 시작하자고.”
아카이브에서 돌아온 리암이 건넨 수혈도구를 받은 안톤은 사일러스의 팔에 바늘을 꽂고 다른 한 쪽은 샤하나즈에게 연결했다.
관을 통해 피가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 안톤은 아카이브 앞에 있는 망가진 비행선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새끼들하고 얽힌 거지. 이제는 돈도 못 받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