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23화 (23/50)

〈 23화 〉 욕망의 거리 ­ 2

* * *

《........즈!》

몽롱한 목소리가 샤하나즈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야......? 누구야......?”

《정신 차려! 지금 뭐한지도 모르겠어? 내가 죽이자고 할 때는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더니 이건 뭐하자는 거야?》

티페레트의 투정에 이성을 되찾은 샤하나즈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의 아래에는 루시안이 흉곽이 완전히 뜯겨나가 폐와 심장이 그대로 드러난 채로 죽어있었다.

주변에도 다른 기사 3명이 죽어 있었고, 이를 본 샤하나즈는 곧바로 두건을 벗어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망할! 나를 말렸어야지! 쓸데없이 떠들기만 하고 정작 필요할 때는 입 다물기야?!”

《안 말려? 네가 무시해 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전 광기에 차 사람을 산 채로 찢던 샤하나즈의 모습에 겁을 먹은 것인지,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물러나 자연스럽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인파로 인해 술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소녀가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기 위해 폴짝 거리며 뛰고 있었고, 샤하나즈는 잠시 멈춰 그 소녀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추방자가 도시에 침입했다!”

“젠장! 다 들켰네!”

6번 전대의 지시를 받은 경비병이 샤하나즈의 위치를 알리니 그들을 포함한 6번 전대 기사들까지 샤하나즈의 뒤를 쫓았고, 근처를 경계하던 수호자까지 그를 쫓아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로샤나크에 대해 알아낸 건 있겠지?”

숨 가쁘게 뛰는 샤하나즈가 묻자 그의 등에 업힌 소녀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말을 더듬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들 말로는 이 곳에서 가장 오래 일하셨던 분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이 곳을 관리하시고요. 25번 구역 한 가운데에 이 거리를 관리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소녀가 대강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샤하나즈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아이를 땅에 내려주었다.

“그 정도면 됐어! 너도 이제 도망가! 나하고 같이 있다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샤하나즈는 흘깃 뒤를 돌아보며 소녀가 골목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곧바로 소녀가 말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이었는지 구역 내부에 로샨의 최상층에서 사출된 수호자들이 하나 둘 배치되기 시작되었다.

조악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포탄마냥 사출 된 수호자들의 착륙에 버틸 리가 없었고, 6번 전대의 수호자들이 일어나는 곳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나 하나 잡겠다고 수호자까지 배치하다니 미친 거 아니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면 이렇게 경비가 살벌해 진거야?”

샤하나즈가 수호자를 피해 방향을 바꿨지만 그 방향에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눈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방아쇠를 당겼다.

경계를 극도로 세운 덕분인지 사선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물러나 바로 사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샤하나즈는 복부에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피만 묻어나지 말라고 기도하며 손을 확인했을 때, 손에 묻어난 것은 피가 아닌 끈적이는 검붉은 윤활유가 묻은 젖은 납 조각들이었다.

“뭐야 이거?”

샤하나즈가 옷을 걷어 욱신거리는 부위를 확인하자 금속으로 만든 나무껍질이 복부까지 뻗어있었고,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몸을 침식해가고 있었다.

탄환에 맞아 나무껍질이 벗겨진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금속층이 쌓이며 흘러내리던 검붉은 윤활유도 통증과 함께 완전히 멎었다.

손에 검붉은 윤활유가 묻으니 자신의 가슴에서 티페레트를 뽑아 자신에게 주었던 그 남자가 떠오른 것인지 샤하나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좋지 않은데. 이러다가 진짜.....”

《진짜 뭐?》

티페레트가 캐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은 샤하나즈는 인파 속으로 섞여들어 잠시 숨을 돌렸다.

사실 그는 아카이브에서 아이샤가 경고하기는 했어도 여차하면 티페레트를 타고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체감하니 여차한 상황이 닥쳤음에도 티페레트에 탈 수 없었다.

정말 아이샤의 경고대로 이번에 티페레트에 탄다면 정말로 인간인 상태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티페레트를 타지 않고 수호자를 피해 구역의 중앙까지 갈 수 있는지 고민하는 와중 사이렌이 울리며 거리를 밝히던 조명이 꺼졌다.

“이 미친놈들이 수호자도 모자라서......!”

아직 태양이 떠 있었지만 조명이 꺼지자 거리의 사람들은 혼비백산 흩어지며 다들 가장 가까운 건물로 피신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광원을 찾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들이 잠기자 몇몇 사람은 홍보를 위해 놓아둔 조명을 끌어안거나 수호자를 향해 뛰어갔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절규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일이야?》

“곧 밤이 오는데 로샨에서 이 곳으로 오는 빛의 공급을 끊었어! 나하고 같이 아예 전부 묻어버리겠다는 생각이야!”

다급한 것은 샤하나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기사에게 보급되는 최소한의 장비도 없어 밤을 넘길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든 어둠을 막을 빛을 찾아 거리를 뛰어 다녔지만 이미 모든 문은 굳게 걸어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빛의 공급이 끊긴 거리를 빠져 나가려하니 수호자가 있는 방향을 피해 달아난 곳은 이미 이런 상황을 대비해 조명을 착용한 기사들이 포위해오고 있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가만히 있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것인지 약간 빈정거리는 티페레트를 일갈한 샤하나즈는 숨 가쁘게 빛을 찾아 헤매었지만, 밤은 그가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명이 꺼진 거리에 짙은 어둠이 깔리지 혼란에 빠진 사람의 비명도, 절망하는 사람의 절규도 어둠 속으로 하나 둘 사라져갔다.

샤하나즈는 어떻게든 간판의 조명에 붙어 시간을 벌곤 있었지만, 이마저도 언제 어둠에 짓눌릴지 모를 일이었고 실제로도 그의 발치까지 불사자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혹시 몸이 이렇게 되었으니 포위망을 정면에서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도 했지만, 그가 고개를 내밀어 기사들을 확인하니 탄환 하나가 볼을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 총을 맞고도 욱신거리는 정도로 끝나는 복부와 달리 얼굴에 탄환이 스치자 입을 벌리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고, 목 아래까지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거기에 더해 그것으로 샤하나즈의 위치를 파악한 기사들은 샤하나즈가 기댄 조명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고, 빛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불사자들의 손이 가까워졌다.

“망할. 이제는 뒤처리는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이제는 남은 방법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샤하나즈가 가슴에 있는 톱니바퀴를 돌리려하니 그의 뒤에 있는 문이 열리며 가슴으로 향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느다란 팔이 끌어당기는 힘은 샤하나즈에게 있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샤하나즈는 마치 강제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자신을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샤하나즈가 들어오자 그를 잡아당긴 여성은 곧바로 문을 걸어 잠갔다.

“고마워. 덕분에......”

그러나 그를 잡아당긴 검은 생머리의 여성은 샤하나즈가 감사를 전하기도 전에 곧바로 옷을 벗어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보였다.

“워! 지금 뭐하는 거야?”

이런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샤하나즈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답답한 듯, 벗은 옷을 샤하나즈의 얼굴에 던지며 그를 침대로 넘어트렸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뭐 묻지도 말고 이걸로 얼굴 가린 다음 윗옷 벗어.”

“뭐?”

“빨리!”

자신의 몸에 물을 뿌린 그녀가 알아서 벗지 않는다면 옷을 찢어버릴 것 같이 소리치니 샤하나즈는 일단 시키는 대로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샤하나즈 위에 올라타 음란하다는 표현 말고는 묘사할 방법이 없는 움직임으로 허리를 흔들며 노골적으로 교성을 질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옷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샤하나즈는 얼마 전 호드와 싸웠을 때 보다 더 뛰는 심장박동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목에 심장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될 정도로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참아내고 있으니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멈췄다.

“지금 일하는 중인데 뭐하시는 거죠?”

교성을 멈췄음에도 누군가를 유혹할 생각이라도 있는 건지 고혹적이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몸을 과시하듯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기에 추방자가 들어간 것을 봤는데. 거기 누가 있는 거지?”

샤하나즈를 쫓아 들어온 기사가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몸을 보이며 기사와 마주봤다.

“그래서 제 일을 방해하시겠다는 건가요?”

“더러운 일족의 창녀 주제에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 알겠으면 수색하게 비켜.”

그러고는 기사가 무작정 들어오려 하자 그녀는 고혹적인 헐떡임은 어디 갔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 한쪽에 체중을 실어 삐딱한 자세로 기사들을 노려봤다.

“아, 창녀 주제에. 그러는 너희는 뭐 잘난 거라도 있나?”

“지금 죽고 싶냐?”

안으로 들어와 샤하나즈가 얼굴을 가린 옷을 벗기려 하던 기사는 그녀의 도발에 바로 총구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도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사라면서 총도 제대로 못 쓰고. 그렇다고 다리 사이에 달린 총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게 뭔데? 여자도 제대로 못 타는걸 보면 그 잘난 수호자에 타서도 조루새끼마냥 2분이면 탈진하나봐?”

그 도발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침대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샤하나즈마저도 그건 좀 말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정도로 그녀는 기사의 자존심을 긁어댔다.

그리고 그 효과는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샤하나즈를 찾는 임무마저 잊었는지 그녀의 얼굴을 후려친 기사는 침대에 넘어진 그녀의 이마에 총구를 대었다.

“방금 했던 말 다시 말해봐 이 창녀야. 네 머리에 돈도 안 되는 구멍이 생겨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럼에도 그녀는 오히려 그런 기사를 비웃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래서 나를 쏘게? 그랬다가는 너희들 출입 기록이 전부 모토르 가문 쪽으로 올라갈 텐데, 그러면 너희 중 얼마나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너희가 기사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우리가 입을 닫아서 인거 몰라?”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댄 기사의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힘이 들어갔지만, 결국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분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이 빨개진 기사가 물러나니 한쪽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그녀는 문 밖에서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알겠으면 다들 꺼져. 안 그래도 흐름 끊겨서 기분 나쁜데, 지금 당장 안 나가면 너희들 기록이 바로 위로 올라갈 줄 알아라.”

최후통첩에 다들 웅성거리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의견 정도는 샤하나즈도 정리할 수 있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임무를 속행했다가 창관에 왔다는 사실이 들켜 기사 직위를 잃는 것 보다는 어둠 속에서 추방자를 놓친 것에 대한 질책을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물론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수가 의견을 정하니 나머지는 하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모두 물러나자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죽은 듯 누워있는 샤하나즈를 흔들었다.

“다 갔으니까 이제 일어나.”

“그래서 이제..... 아, 진짜!”

얼굴을 가린 옷을 치우고 일어난 샤하나즈는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알몸이 눈에 들어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샤하나즈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조금 음흉하게 웃은 그녀는 고개를 돌린 샤하나즈가 내민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일단 고마워. 고마운데, 부끄럽지도 않아?”

그녀가 옷을 입었음에도 샤하나즈는 여전히 얼굴이 새빨개져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반대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뛰어들어 고개를 돌린 샤하나즈의 옆에 앉았다.

“부끄러우면 처음부터 이런 일은 못 해 먹지. 그보다 넌 누구야?”

“아니,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런 짓을.......”

“그런 짓이 뭔데?”

여전히 그를 놀리고 싶은 것인지 짓궂게 웃은 그녀가 되묻자 샤하나즈는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아니, 말을 말자. 그보다 나도 똑같은 걸 묻고 싶은데. 넌 대체 누군데 날 도와준 거야?”

“일단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색 정도는 볼 수 있으니까. 피는 안 이어졌어도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샤하나즈를 떠보려는 것인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샤하나즈에게 최대한 밀착한 그녀는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바닥에 있는 그의 상의를 집어 건넸다.

“로제르라고 해. 그래서 넌 누군데 이런 꼴이 났어?”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자신의 옷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던 샤하나즈는 손이 로제르의 몸에 닿자 달궈진 쇠를 만진 것 마냥 황급히 손을 떼었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다 마침내 옷을 잡은 샤하나즈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으며 키득거리는 로제르에게 대답했다.

“샤하나즈. 샤하나즈 모토르. 한때는 기사였는데, 도시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보는 것 같이 쫓기는 중이야.”

“그래서 쫓기는 중인데 왜 하필 이 구역에 온 거야? 다른 기사들이 득실거리는 건 물론이고, 경험도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 볼 일이 있거든.”

“왜, 죽기 전에 딱지는 떼고 싶어서?”

실실 웃는 로제르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끼워 넣고는 외설적인 손동작을 취했다.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거든?”

“다들 그렇게 말은 하더라. 처음이라고 창피할 것 없어. 나는 그것도 좋거든. 처음 하는 거면 내가 한 번은 무료로 해 줄게.”

입맛을 다시는 로제르가 기대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샤하나즈는 얼굴을 붉히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라고! 아니 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이러는 거야? 난 여기 찾을게 있어서 왔어! 안 그래도 내가 미쳐서 개판을 만든 바람에 1초라도 빨리 로샤나크를 찾아야 한다고! 근데 저 망할 수호자 때문에 갈 수도 없고, 빛도 끊겨서 이제 밤이 끝날 때 까지 여기 꼼짝없이 갇혔다고!”

여전히 부끄러운지 로제르를 똑바로 바라보진 못했지만 샤하나즈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 그를 바라보던 로제르는 얼굴에 가득하던 짓궂은 미소를 약간 거뒀다.

“혹시 로샤나크님하고 아는 사이야?”

“아니, 전혀. 그렇지만 내 일행 중 한 명이 로샤나크를 찾아오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알아낸 바로는 25번 구역 중앙에 그 사람이 있고.”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뜬 로제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하나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기사를 맨 손으로 찢어 죽였다는 사람이 너였구나?”

로제르가 자신을 알아보자 샤하나즈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손님을 죽인 건 미안해. 원래 그러면 안 됐는데, 내가 그때 눈이 좀 돌아갔어.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나 가늘게 뜬 그녀의 눈은 희미하게 위로 포물선을 그렸다.

“따라와. 내가 좀 도와 줄 수 있겠네.”

아직도 로제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샤하나즈가 그녀의 뒤를 따라 안쪽의 창고로 들어가니 그 곳에는 금고가 2개 놓여 있었다.

그 중 조금 더 많이 사용한 흔적이 있는 금고의 다이얼을 돌린 로제르가 금고를 여니 안에는 어떠한 것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연결된 땅굴이 있었다.

먼저 땅굴로 들어간 로제르는 망설이는 샤하나즈의 팔을 잡아끌고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여기에 이런 곳도 있어?”

“가끔 고지식한 윗분들이 이곳에 오는 기사들을 잡으려고 순찰을 돌 때가 있거든. 그럴 때 손님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만들어둔 탈출구야. 기사를 받으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거든.”

그런 로제르의 뒤를 따르는 뒷모습이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로제르가 보여줬던 나체가 떠오르는 것인지 샤하나즈는 여전히 앞을 주시하지 못했고 결국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로제르는 다시 음흉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기사를 맨손으로 찢어죽일 수는 있어도 앞을 보는 건 못하는 거야? 대체 얼마나 경험이 없는 거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닥쳐 줬으면 좋겠어.”

“그때 장난으로 말 했던 건데, 설마 진짜 경험이 없는 거야? 기사까지 됐으면서?”

로제르가 외설적인 손짓과 함께 자신을 계속 놀리자 샤하나즈는 넘어진 그를 일으키기 위해 잡은 손을 한쪽으로 쳐냈다.

“장난은 적당히 하고 여긴 대체 어디까지 연결되는 거야?”

“로샤나크님이 있는 도심의 중앙으로. 아무리 창관 밀집 지역을 관리하는 사람이라 해도 로샤나크님은 로샨의 의원 중 한 명이니까 기사가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잖아? 도망치는 게 끝이 아니라 문제를 삼을 요소도 제거해야하니까. 다시 말해 이 도시 전체가 로샤나크님의 도움을 받는 중이야.”

그 말이 단순한 과장은 아닌 것인지 어느 정도 통로를 지나가니 샤하나즈가 지나왔던 땅굴과 같은 통로가 수없이 합류하는 하나의 거대한 터널에 도착했다.

먼저 터널로 내려와 허리를 편 로제르는 주변에 정신이 팔린 샤하나즈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따라와,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네 이야기는 내가 로샤나크님에게 잘 설명할게.”

그런 손길마저도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손을 쳐내고 직접 옷을 턴 샤하나즈는 여전히 웃는 그녀의 뒤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쫓았다.

“그보다 그 몸은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흉터가 많은 건 둘째 치고, 완전 쇳덩이던데?”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기도 해. 이걸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 진행되는 걸 막아야 하거든.”

샤하나즈가 가슴의 톱니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자 곰곰이 듣던 로제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나마 여기 말고 다른 구역에서 제대로 된 의사를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네.”

“여기 제대로 된 의사가 있다고?”

샤하나즈의 질문에 로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너희 기사만큼 몸 관리를 잘 해야 돼. 특히 성병 같은 건 가게를 위협하는 것도 모자라서 목숨도 위험해지니까. 그러니 어느 곳보다도 제대로 된 의사가 중요하지.”

그러나 터널의 끝에 도착한 로제르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가로막곤 샤하나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여기 누가 의사를 찾으러 와? 솔직히 말해봐. 그것도 다 핑계지? 솔직히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

샤하나즈의 얼굴은 여전히 붉어졌지만 그런 그녀의 장난에 질렸는지 샤하나즈는 짜증을 내며 그녀를 한쪽으로 밀쳐냈다.

“야, 저 사람은 어떠냐? 네가 죽이라면 죽여줄 수 있는데.”

사다리를 오르는 샤하나즈는 살짝 진심을 섞어 티페레트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제안이 별로 성에 차지 않는 것인지 뜨듯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음, 별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잘 안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까지는 쫓아가서 죽이자고 재촉하던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샤하나즈는 가볍게 혀를 찼다.

“쓸데없이 까다롭기는.”

“빨리 올라가.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알 것 없어. 근데 여기 위에 로샤나크가 있는 게 맞아?”

그를 따라 사다리를 오르던 로제르는 어깨를 으쓱였고, 샤하나즈는 작게 욕을 하며 사다리 끝에 있는 바닥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로제르와 거리를 벌리고 싶었던 것인지 황급하게 올라가던 샤하나즈는 책상 아래에 정수리를 정통으로 부딪쳤고, 그가 머리를 감싼 채로 문턱에 걸쳐있으니 로제르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샤하나즈의 머리에서 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지자, 방에서 이루어지던 대화가 잠시 멈췄고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온 것 같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연기를 내뿜는 파이프를 문 여성이 쪼그려 앉아 책상 아래서 정수리를 문지르는 샤하나즈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

“뭐?”

“추가 입막음 비용은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냐고. 어지간히 급하니까 이 통로를 쓴 것 아니야?”

다짜고짜 돈 얘기가 나오니 당황한 샤하나즈가 정수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그를 내려다보던 여성은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그의 얼굴에 내뱉었다.

그녀가 뱉은 푸른 연기를 들이마시자 머리의 통증이 사라지는 동시에 시야가 왜곡되었고, 다리에 힘이 빠져 사다리 아래로 떨어지려는 사하나즈를 아래에 있던 로제르가 억지로 밀어 올렸다.

“손님은 아니고 로샤나크님한테 볼 일이 있어서 데려왔어요! 무거우니까 일단 좀 받아 줘요!”

그 말에 그 여성과 대화하던 인물이 일어나며 익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거기 있는 놈, 검은 머리에 목덜미에 금속으로 만든 나무껍질 같은 게 보이냐?”

샤하나즈 얼굴에 연기를 뱉은 로샤나크는 샤하나즈의 옷을 걷어 등을 확인하곤 안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 씨발 새끼. 내가 어려운 걸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일을 이따위로 망쳐놓네?”

걸음소리만으로도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표현하는 안톤은 책상으로 걸어와 샤하나즈의 머리채와 옷을 잡고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약에 취한 것인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샤하나즈를 대충 집어던진 안톤은 그의 배를 걷어찼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샤하나즈와 달리 자신의 발만 아픈 것인지 한쪽 발로 뛰며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 개좆새끼야! 사람하나 찾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리고 오기 전에는 뭐, 추방자라서 들키면 바로 쳐형이라고 지랄하던 씨발놈이 정작 오니까 아주 잡아달라고 지랄을 하고 있네! 그것도 기사를 넷이나 죽이고 하나는 맨 손으로 걸레를 만들어 놨더만!”

한참동안 욕을 퍼붓던 안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로제르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만으로 망했다는 문장을 묘사했다.

“아..... 씨발......”

“선생님......?”

안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 로제르가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 안락의자에 샤하나즈를 눕힌 로샤나크는 충격을 받은 로제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놀랄 것 없어. 내 동기시절부터 저랬던 녀석이었거든. 저 녀석이 감정이 격해지면 입이 좀 험해지거든.”

“아니, 어차피 여기 왕진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보다 내가 요구한 건 구해 줄 수 있겠어?”

안락의자에 눕힌 샤하나즈의 상의를 능숙하게 벗긴 로샤나크는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유심히 살펴보곤 안톤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 해봐. 너 자신이 없어서 내 의견도 받으려고 온 거지? 고작 시체 한 구를 너 혼자 못 구할 리가 없잖아.”

안톤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긋이 손가락을 톱니바퀴 위에 올려본 로샤나크는 다시 한 번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곤 혼란스러워 보이는 로제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자신의 양 옆과 뒤를 살피던 로제르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저요?”

“그래,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여기 와서 한 번 봐봐. 네 의견도 좀 필요하거든.”

“저, 저는 이런 것 잘 몰라요. 별로 도움도 안 될 테고.......”

말을 더듬거리며 손사래 친 로제르는 그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려 했으나, 로샤나크가 아예 몸을 돌려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자 책상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세 그대로 멈췄다.

“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사가 되겠다면서 안톤한테 수업도 받았잖아? 이 방에서 우리 둘을 제외 한다면 가장 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건 너 아니겠어?”

“그, 그거야 여기는 두 분을 제외하면 저 밖에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건 아니지. 이제 한 명이 더 올 테니까.”

로샤나크가 파이프를 물고 살짝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로제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로샤나크가 살짝 눈가에 힘을 주며 연기를 내뿜자 허공에서 희미하게 불꽃이 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불기둥이 실내에서 맹렬히 타올랐다.

화들짝 놀란 로제르는 불을 피해 벽에 붙었고, 아무것도 불태우지 않은 불길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 자리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아이샤가 있었다.

“아니, 이건 무슨 일이야? 여기는 어디고?”

그러나 실내에서 불기둥이 솟구친 것도, 그 불기둥 안에서 사람이 나타난 것도 익숙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푸른 연기를 들이마신 로샤나크는 로제르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자, 내 말이 맞지? 그러면 이제 여기 와서 네 의견을 좀 말 해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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