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욕망의 거리 3
* * *
“.......틀리지는 않았어.”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아직도 몽롱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샤하나즈가 정신을 차리자 로제르가 자신의 가슴을 살피고 있었다.
언제 자신의 상의가 벗겨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다른 방향에서 나온 팔이 가슴을 눌러 그를 다시 눕혔다.
“아직 일어나지마. 아직 계속 보는 중이니까. 그거 말고 다른 건?”
“이물질이 가슴에 꽤 깊이 뿌리박힌 것 같아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심박이 느껴지는 걸 보니까 심장에 닿을 수준으로요.”
“그건 틀렸어. 내가 보기에는 아예 심벽의 일부가 되어 있거든.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박동은 안 전해질거야.”
자신의 몸을 가지고 강의라도 하는 것처럼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니 샤하나즈는 로제르의 손을 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저기 지금 뭐하는 거야......? 저 사람은 누구고......?”
“저 분이 로샤나크 님이야. 나도 왜 이렇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샤하나즈의 가슴을 살피는 로제르가 인상을 찌푸리자 로샤나크는 그녀를 재촉하듯 빠른 박자로 박수를 쳤다.
“자, 자. 의술의 핵심은 빠른 진단이야. 지금부터 10초 줄 테니까 그 사이에 핵심을 짚어봐.”
점점 박수의 박자가 빨라지니 촉진만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톱니를 잡고 돌리려하니 샤하나즈가 그 손을 쳐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멋대로 만지지 말라고!”
허나 그의 반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것인지 10초가 끝나기 전에 로제르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로샤나크에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꼭 이렇게 해야 하나요? 딱 봐도 이제 몸 절반이 금속이잖아요?”
“이제야 나오네. 완벽하지는 않지만 드디어 나하고 비슷한 대답이 나왔어.”
“저 녀석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 하는 짓만 봐도 아주 개새......”
있는 대로 욕을 하려던 안톤은 로제르가 있다는 것을 신경 쓴 것인지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욕을 삼키며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의견을 물어보려는 건 그거 때문이 아니라고.”
“아니, 나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얜 사람이 아니야. 지금 얘는 사람보다는 수호자에 더 가까운 몸이지.”
로제르가 자랑스럽기라도 한지 끌어안고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던 로샤나크는 아직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샤하나즈를 강제로 끌어올려 배의 장갑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솔직히 말 해봐. 너도 의사 활동하면서 문헌에서 읽은 적 있잖아. 수호자의 침식.”
“읽은 적이야 있지.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수호자의 침식은 일반적으로 가슴에서 시작해서 신체 말단으로 뻗어나가지, 저렇게 등이나 배에 먼저 형상이 나타나는 건 모른다고.”
“잠깐만.......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 알려줄 수 있어? 나는 하나도 이해가......”
안톤의 반론에 로샤나크가 느긋하게 파이프의 연기를 빨고 있으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샤하나즈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완전히 벗은 상의에 목에 두른 긴 장식띠로 간신히 가슴만 가린 로샤나크의 모습을 보자 샤하나즈는 잔뜩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로제르는 그녀가 가장 그 곳에서 가장 오래 일을 했다고 이야기 했었지만, 샤하나즈의 눈에 보인 로샤나크는 로제르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아니 대체 여긴 이런 사람밖에 없어? 제발 옷 좀 입으라고!”
“이거 재밌네. 재판장에서는 모두 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겠다고 눈에 살기를 품던 녀석이 여자 몸도 똑바로 못 바라보는 숙맥일 줄이야. 정말로 기사 맞아?”
“뭐?”
샤하나즈가 또 다시 당황하자 로샤나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그때는 미안해. 나도 솔직히 무죄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때는 내 자리를 유지하는 게 더 먼저였거든.”
그러곤 자신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는 아이샤를 강제로 잡아 당겨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그래도 애송이 올드 원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너희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8번 전대가 도망치는 것도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잠깐,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잘 지내고 있어? 그 녀석이 너처럼 애송이였을 때가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아이샤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리니 웃으며 푸른 연기를 뿜는 파이프를 입에 문 로샤나크는 아이샤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 다시 인사 할게. 이 도시 최초의 올드 원. 로샤나크 페이루즈야. 아이샤의 성인 페이루즈의 선조이지.”
“농담이지? 당신이 올드 원이라고? 지금 거짓말 하는 거지?”
로샤나크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이샤는 마치, 손에 칼이 들려있었다면 바로 그녀를 찌를 것만 같은 눈빛으로 로샤나크를 노려보았다.
“못 믿겠다면 한 번 밖으로 도약해봐. 그 정도면 증거가 되지 않겠어?”
로샤나크가 말을 꺼내자마자 아이샤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불타오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지만 그와 동시에 파이프의 연기를 한껏 빨아들인 로샤나크의 팔 안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불기둥이 사라지자마자 아직도 옷에 불씨가 남은 아이샤를 다시 한쪽 팔로 끌어들인 그녀는 또 다시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내 후손이 아등바등 하는 걸 보면 귀여울 수밖에 없다니까.”
그러나 이러한 애정 표현이 조금도 달갑지 않은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샤는 적대적인 수준으로 그녀를 밀쳐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어떻게 이딴 일이 있을 수 있는 건데!”
“네 어리숙한 도약 정도면 목적지를 바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그리고 고작 그것 정도로 화낼 필요는 없잖아? 별 일도 아닌데.”
그런 아이샤의 태도에도 느긋하게 파이프를 물고 있던 로샤나크는 조금 진정하라는 듯, 아이샤에게 자신이 피우던 파이프를 건넸지만 아이샤는 이를 곧바로 쳐냈다.
“당신이라면 화가 안 나겠어? 지금까지 바로 옆에 올드 원이 있었는데 눈치 못 채고 있던 거잖아!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화가 안 나겠냐고! 나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다고! 그리고 당신도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 할 수가 있어?”
로샤나크가 바닥에 떨어진 파이프를 주우려 하니 아이샤는 파이프를 밟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책임하다니?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어떻게 올드 원이 되어서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을 수 있냐고! 지금 그것 때문에 에버니저가 죽은 것도 모르는 거야? 당신이 도왔다면 에버니저는 아직까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아이샤의 발에서 억지로 파이프를 빼낸 로샤나크는 파이프의 겉에 묻은 흙을 털어내곤 다시 입에 물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아니야?”
지금까지 약에 취한 사람마냥 푸근한 미소를 시종일관 유지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로샤나크의 눈매가 한 순간에 예리해졌다.
“올드 원에게 사명 따위는 없어. 우리는 선택받은 존재도 아니야.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삶이 더 긴 것뿐이지, 모두와 똑같이 의미 없이 살다가 죽는 거라고.”
그러나 순식간에 다시 표정이 누그러진 그녀는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일을 믿을 수 없는지 선 채로 얼어버린 로제르를 끌어안고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 일을 시작한 건 자극을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거의 내 삶의 목적이나 다름없지. 이 곳과 모든 아이들을 지키는 것. 세상이 어떻게 되던지는 별로 상관없어.”
“그러면 나는 왜 살려준 거야?”
묵묵히 모든 이야기를 듣던 샤하나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샤하나즈가 곁눈질로 흘깃거리고 있으니, 로샤나크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슬쩍 자신의 가슴을 가린 장식띠를 올려 보았다.
그러자 또 다시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붉어진 샤하나즈가 아예 눈을 질끈 감으니 그때가 돼서야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눈치 챈 거야?”
“아, 아이샤의 이동이 그렇게 정확한 건 아닌데,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아이샤는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거든. 티페레트의 거짓말에 속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말이야.”
“조금이지만 나도 에버니저하고 친분이 있거든. 그 녀석이 기사가 됐을 때, 선임들이 나한테 데리고 왔었는데 그때는 내가 현역이었거든 그래서......”
슬쩍 웃으며 로제르의 눈치를 본 로샤나크가 외설적인 손동작과 함께 말을 이어가니 샤하나즈는 곧바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딴 건 안 궁금해!”
“그리고 지금 중요하지도 않고. 이렇게 시간을 버리고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잖아.”
로제르 때문에 욕하지 않는 것을 의식하는지 살짝 말이 느려진 안톤까지 끼어들자 샤하나즈의 반응을 보며 웃던 로샤나크는 이야기를 멈추고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 그래. 시체를 구한다고 했지?”
“사후 경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걸로. 어떤 사람의 시체를 원하는지는 저 녀석에게 물어봐야겠지만.......”
“물어볼 것도 없어. 나는 구해 줄 생각 없으니까.”
안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은 로샤나크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러자 안톤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지만, 이내 혀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돈만 있으면 수호자도 구해주는데, 사람 시체 하나 못 구해준다고?”
“응. 사람 시체는 절대 취급 못해. 그건 단순히 시체의 문제가 아니거든.”
로샤나크가 단호하게 나오자 이번에는 살짝 감정을 가라앉힌 아이샤가 조용히 덧붙였다.
“어떻게 안 될까? 이쪽도 비슷하게 목숨이 걸린 문제거든. 그렇지 않으면 우린 계속 검은 수호자들에게 쫓겨 다닐 거야. 얼마 전에는 그것 하나 때문에 전부 죽을 뻔 했고.”
“이 업계에선 소문 한 번 잘못 돌면 끝장이야. 그러니까 내가 믿을 수 있는 안톤을 불러서 다들 검사도 시키고, 아픈 애들도 봐주는 거지. 창관 안에서 누가 병에 걸렸다는 소문만 나돌아도 치명적인데, 시체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걸로 장사는 끝났지. 그리고 딱히 내 도움이 없어도 시체는 주변에 많잖아?”
파이프에서 나오는 연기의 색이 눈에 띌 정도로 옅어지자, 로샤나크는 자신이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곤 파이프의 앞쪽을 비틀어 분리한 뒤, 책상에서 꺼낸 작은 함 안에 들어있는 고운 모래를 살짝 채워 넣었다.
파이프를 다시 결합하니 순간 푸른 색 섬광이 번쩍였고, 그 파이프를 빨아들인 로샤나크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선명하고 짙은 푸른색 연기를 뿜어냈다.
“무엇보다 너희 8번 전대 때문에 경비가 점점 심해지는 중이었는데, 최상층에서 피바다가 벌어지고 나서는 아예 최고 수준까지 치솟아서 당분간 그런 쪽 물건은 못 구해줘. 13번 구역의 살인광 이후로 사람 하나 잡겠다고 수호자까지 출격시키는 거면 말 다했지.”
최상층의 피바다라는 말에 아이샤는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로샤나크의 대답에 안톤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지로 삼킨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뿐이었고, 두 사람이 말을 잃으니 마지막으로 샤하나즈가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게. 만약 수호자의 침식이 끝까지 퍼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최상의 경우, 장기 부전으로 죽어. 뼈나 근육 정도면 몰라도 수호자의 부품으로는 인간의 장기를 대체할 수 없으니까.”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 로샤나크는 고개를 돌린 샤하나즈를 유심히 살피곤 살짝 혀를 찼다.
“흠..... 근데 일반적으로는 팔 하나가 침식이 되면 팔이 수호자처럼 변형되고, 그대로 심장을 침식해서 사람을 죽이거든. 그에 비해 너는 복근에 광배근까지 침식이 진행되었는데도 살아있는 걸 보면 죽지는 않을 거야. 다시 말해 최악의 경우라는 거지.”
그녀의 설명에 샤하나즈는 처음에 자신에게 티페레트를 건네주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확실히 로샤나크의 설명대로 처음 톱니를 건네주었던 사람은 반신이 수호자처럼 피스톤과 톱니바퀴로 움직였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자신의 몸은 금속으로 만든 나무껍질처럼 보일 뿐, 이질적인 부품은 없었다.
“죽는 게 최상의 경우라면, 최악의 경우는 뭐야?”
“아마 수호자에 영원히 갇히겠지. 지금은 네 안에 수호자의 영혼이 갇혀 있지만, 그 이후로는 수호자 안에 네 영혼이 갇히게 될 거야. 수호자의 부품인 엔진으로 수호자가 정지할 때까지 말이야.”
《뭐야? 문제가 아니라 좋은 거였잖아! 그러면 그냥 가자! 이제 세피로트의 나무도 있으니까 이제 호드 같은 애들한테도 애먹을 것 없잖아?》
로샤나크의 말을 들은 티페레트가 밝은 목소리로 제안하자 샤하나즈는 가슴에 박힌 톱니를 후려쳤다.
물론 자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닌 티페레트를 조용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신체 깊이 박힌 톱니를 후려치니 장기를 찢는 격동이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이제 샤하나즈까지 고통으로 입을 닫자 3명 모두 침묵을 유지했고, 잠시 기다리던 로샤나크는 볼 일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으니 지금까지는 대화에 묻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밖에서부터 흘러 들어왔다.
희미하게 들리던 총성이 점점 다가올수록, 터널과 연결 된 책상 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로샤나크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하니 책상 아래에서 누군가 황급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로샤나크님!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해요!”
그러나 이 경고마저도 너무 늦은 것인지, 로샤나크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도 전 순식간에 포성이 가까워지더니 넘어지는 수호자에 그들이 있는 방은 산산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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