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수호자의 기사, 기사의 엔진
* * *
《갑자기 무슨 생각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안 부를 것처럼 말했잖아.》
“생각을 바꿨어.”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애 때문에?》
“아니, 나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나 티페레트는 여전히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 네 존재 자체를 버리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했던 말을 생각하면 그것 말고는 정리가 안 되는데?》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너희 수호자는 이해 못 할 거야. 의미 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평온해진 샤하나즈는 자신의 손을 가볍게 만졌다.
“단순히 그 아이 때문이 아니야. 스스로 기사라고 칭하면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다른 가족이나 다름없는 전대원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내가 죽도록 역겨워진 거지.”
잠시 눈을 감은 샤하나즈는 고개를 들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이제 네가 그렇게 원하는 자유를 줄게. 이 일만 끝난다면 원하는 대로 나를 써도 좋아. 그저 내 가족에게는 다시는 다가가지 말아줘. 절대로.”
《그렇지만......》
“더 말 할게 뭐가 있다고 그래. 어차피 너한테는 좋은 이야기잖아.”
씁쓸하게 웃은 샤하나즈는 티페레트의 팔을 가볍게 움직였고, 팔뚝의 장갑이 전개되며 그 아래에 탑재된 기관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뒷일 생각할 것도 없이 미친 듯이 날뛰어보자고.”
천천히 가동하는 티페레트에게 불멸자가 달려들었지만. 순식간에 가속한 티페레트는 팔로 불멸자의 목을 후려쳐서 그대로 넘어뜨렸다.
불멸자가 일어나기도 전에 티페레트가 팔에 전개된 기관포들로 원래의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아버리니 6번 전대의 수호자는 곧바로 티페레트에게 철갑탄을 겨눴다.
《신원 불명의 기사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수호자에서 나와 투항해라! 반복한다! 지금 당장 수호자에서 나와 투항해라! 발포까지 10초의 유예시간을 주겠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순식간에 불멸자를 찢어발긴 검은 수호자에 겁을 먹은 것인지 티페레트를 겨눈 총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에 티페레트는 자리에 굳은 수호자에게 다가가 포구를 붙잡아 꺾었다.
“웃기지도 않네.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못 한 주제에. 하는 것 보면 방아쇠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뭐하자는 거야?”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6번 전대의 수호자가 경고한 사격은 티페레트의 사각을 정확히 꿰뚫었다.
대구경 탄환에 왼쪽 고관절을 관통당한 티페레트는 부품을 흩뿌리며 나가 떨어졌고, 그 사이 손상당한 포신을 제거하고 달궈진 칼날을 들이민 수호자가 다시 다가왔다.
《나라면 얌전히 나올 거야. 귀찮은 건 싫거든. 다음번은 어디가 좋을까? 머리? 아니면 기사가 들어있는 가슴? 너 정도라면 팔 다리 한두 개는 더 부술 의향도 있기는 한데.》
티페레트의 비명과 전신에 요동치는 고통을 뚫고, 제 3자의 목소리가 샤하나즈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아악! 아파! 대체 누구야!》
티페레트가 울부짖는 소리에 샤하나즈의 머릿속에 울렸던 젊은 여성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0번 전대, 원거리 지원 담당 엘레나. 원래는 주변 경계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위쪽에서 너를 보곤 발포 명령이 떨어졌거든. 시킨 일은 해야지.》
말을 마친 엘레나는 또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했지만,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었는지 6번 전대 수호자의 뒤로 불멸자가 달려들자 순식간에 2발을 연달아 발사했다.
엘레나의 포신에서 나온 초탄은 달려드는 불멸자의 오른쪽 어깨에 직격해 한 순간에 불멸자를 반으로 찢어 놓았고, 차탄은 그 불멸자를 보고 일어나기 위해 움직였던 티페레트의 손에 직격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박살나자 티페레트의 비명은 한층 더 커졌고, 비명을 참던 샤하나즈마저도 피를 토해냈다.
《말했잖아. 나라면 귀찮게 할 것 없이 바로 나올 거라고.》
《뭐야 대체! 어디서 쏘는 거냐고!》
티페레트가 계속해서 울부짖자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샤하나즈는 반쯤 눈이 뒤집힌 상태로 그녀의 애절한 투정을 일갈했다.
《“정신차려!”》
입을 열자 자신의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티페레트의 목소리에 겹친 자신의 목소리가 수호자처럼 머릿속에만 메아리쳤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피로트의 나무를 전개할 거야! 조금만 버텨!”》
티페레트와 점점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 샤하나즈의 오른팔은 티페레트와 다를 것이 없이 형태도 없이 으스러져 있었다.
그 대신 샤하나즈와 티페레트를 연결해주는 기계 팔이 스스로 회전하며 그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회전시켜 눌렀다.
《엔진에 의한 기능 해제 승인. 세피로트의 나무를 전개합니다.》
방금까지 울먹이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지 순식간에 무미건조해진 티페레트의 목소리와 함께 티페레트의 등에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나무가 자라났다.
엘레나는 나무를 향해 쏜 탄환이 튕겨나가자 곧바로 조준을 돌려 티페레트의 몸을 노렸지만, 나무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티페레트를 고치처럼 감쌌다.
《세피로트 나무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대체 뭔.......》
처음에는 줄기 뿐 이었지만, 뻗어 나온 뿌리가 티페레트를 감싸자 줄기뿐이던 나무는 순식간에 가지가 뻗어 나오며 선명한 푸른빛의 무성한 나무를 이루었다.
그리고 샤하나즈가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가 있었다.
샤하나즈가 눈을 뜬 곳은 달궈진 금속으로 조명을 대신 한 것처럼 희미한 주황색 빛이 어둠을 미약하게 밝힐 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엔진의 내부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에는 끝없이 피스톤이 움직이고, 벨브에선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크랭크가 회전하며 축을 돌리고, 톱니바퀴와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동력을 전달했다.
그런 요란한 공간의 한 가운데, 전신이 속박된 한 소녀가 고개를 들어 샤하나즈를 불렀다.
“드디어 만나보네. 이렇게 보니까 진짜로 어색하네.”
마치 자신을 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소녀의 발언에 샤하나즈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물론 샤하나즈의 눈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단순히 그 발언 때문은 아니었다.
전신을 묶은 사슬은 족쇄에 연결되어 연약한 몸을 간신히 움직일 정도의 자유만 주었고, 얼굴에는 한쪽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리는 철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심지어 신체 이곳저곳에는 사슬이 연결 된 못이 박혀 조금만 움직이면 얼마 남지 않은 성한 부분마저도 찢겨나갈 것 같았다.
“네가 나를 본 적이 있다고?”
“당연하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질리도록 봤지. 그보다 이것 좀 풀어줄래?”
전신을 무겁게 억누르는 사슬을 철렁거린 아이는 한쪽의 눈으로 샤하나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를 정도로 단단히 몸을 속박한 사슬들에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풀어주고 싶어도 난 뭘 못해. 에라실이 여기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말 하지 말고 하는 척이라도 해 봐. 응원이나 농담이 아니라 너라면 할 수 있으니까.”
시니컬하게 지시하는 목소리에 샤하나즈는 조금 못미더웠지만, 아이에 몸을 묶은 사슬을 잡았다.
어느 사슬이 정확히 어디에 묶여있는지, 아니면 어디에 자물쇠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샤하나즈가 손을 댄 사슬은 힘없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인지 그가 손을 대는 족족 사슬을 떨어져 나갔고, 몸에 박힌 못과 얼굴을 가린 철가면을 제외하곤 아이를 속박하는 모든 구속구는 순식간에 풀렸다.
몸에 박힌 몸을 함부로 뽑을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샤하나즈가 아이의 얼굴을 가린 철가면까지 벗기니 아이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철가면의 안에 뭉쳐있던, 바닥까지 내려오는 흰 장발을 가볍게 풀어냈다.
“후, 고마워. 답답해 죽는 줄 알았거든.”
가면을 벗은 아이가 이제야 좀 후련하다는 것 마냥 편히 숨을 쉬니, 그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샤하나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너 티페레트냐?”
“뭐야,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 했어?”
샤하나즈가 사슬을 풀어준 손목과 몸을 이리 저리 만져보던 티페레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샤하나즈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가 말한대로 내가 티페레트 맞아. 평소에는 이렇게 속박되어서 한쪽 눈으로 보는 것 하고, 가면 밖으로 웅얼거리는 것 밖에 못하는 몸이지만, 근데 이렇게 올려다봐야 하니 진짜로 어색하네.”
대충 샤하나즈를 올려다보던 티페레트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발목을 살폈다.
몸을 가리던 사슬이 모두 풀려 티페레트의 몸을 가리는 것이라곤 늘어지는 머리칼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샤하나즈는 이전처럼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면 나를 여기로 불러낸 이유는 뭐야? 저번에는 나시르가 나를 이런 곳으로 불러냈는데. 너도 뭐 나를 시험하거나 이러려고 부른 거야?”
자신의 몸에 박힌 못을 만지며 표정을 찡그리던 티페레트는 나시르라는 이름에 얼굴을 한층 더 구기며 샤하나즈를 올려다보았다.
“나시르? 아,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 이름도 말하기 싫은 살인자 말이야? 그 살인자를 만난 거야? 그 작자가 뭐라고 했는데?”
“네가 제멋대로라는 말을 했었지. 제멋대로지만 제대로 감응만 하다면 모든 기능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하, 웃기네. 진짜 웃기지도 않아. 망할 놈. 나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놓고는......!”
울먹이는 티페레트가 말을 흐리며 작게 중얼거리니 샤하나즈는 살며시 티페레트의 근처에 다가갔다.
작게 훌쩍이던 티페레트는 샤하나즈가 다가오자 샤하나즈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트렸고, 가슴팍에 올라타 양 손으로 목을 짓눌렀다.
“그렇지만 이제 됐어! 너만 여기서 죽으면......! 너만 여기의 부품이 된다면 나는 자유야! 나는 다시 자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이와 함께 벽면과 바닥에서 천천히 사슬과 축들이 올라와 샤하나즈의 몸에 연결되었고, 기계처럼 변했던 그의 몸을 천천히 분해해 갔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묵묵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럴수록 눈을 붉힌 티페레트는 더욱 강하게 샤하나즈의 목을 졸랐지만, 샤하나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저항도 하지 않으니 눈가가 점점 젖어들었다.
샤하나즈의 얼굴에 눈물을 떨어트린 티페레트는 여전히 그의 목에 손을 올리곤 있었지만, 체중도 실리지 않았고, 손에는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왜......... 저항을 안 하는 거야? 예전처럼 날 욕하라고..... 날 싫어하라고....... 망할 애새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죽일 것 같이 저항해 달라고......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내가 널 죽일 수 있게 예전처럼, 다른 모든 사람처럼 나를 싫어하고 증오하란 말이야........”
“나도 몰라...... 미운 정이라도 들은 건지. 아니면 나에게 실망한 건지. 나는 그저 네가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상관없어. 이제 네가 싫지도 않고, 너를 죽이고 싶지도 않아.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네 엔진이자 수호자였고, 너도 내 엔진이자 수호자였으니까.”
그리곤 샤하나즈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무능한 내가 싫었는데, 정작 나와 하나인 너는 별로 싫지 않다니 조금 웃기네.”
“닥쳐!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널 속였어! 너를 이용하고, 죽이려고 했어! 그러나 당연히 나를 싫어해야 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를 증오해야 한다고!”
샤하나즈의 얼굴에 눈물을 떨어트리는 티페레트는 어떻게든 그의 목을 조르려 했지만, 티페레트 손아귀의 힘은 갈수록 약해져만 갔다.
“나를 미워하라고....... 지금까지 이렇게 했는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싫어하란 말이야.......”
“왜? 너한테 화를 낸 것도 결국 내가 무능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저 나한테 화를 내기 싫어서 너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한 거지.”
“닥쳐! 닥치라고! 빨리 나를 싫어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못 죽이잖아! 난 널 죽여서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거친 말과는 달리 티페레트의 손에서는 힘이 계속해서 빠져 나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보여주었던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샤하나즈의 목에서 손을 놓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세상 모두가 날 싫어한다고! 아빠도 내가 싫어서 나를 죽이고, 여기 가둔 거야! 그래서 나도 모두를 속이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먹어 치운 거야!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 밖에 없으니까! 세상 모두가 날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다들 부품으로 만든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겠지. 네 말대로 나도 네가 싫은 걸지도 몰라.”
샤하나즈의 대답에 티페레트의 울음은 멈췄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티페레트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필요했어. 어느 쪽이라도 너는 나를 완성시키는 존재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싫으니 나의 일부인 너도 싫어했던 것이겠지.”
여전히 티페레트를 똑바로 마주 본 샤하나즈는 티페레트를 그녀가 내려놓은 손을 잡아 자신의 목에 올렸다.
“너와 나의 시작은 내가 결정했어. 그러니 너와 나의 끝은 네가 결정해. 엔진과 기사. 어느 쪽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