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각자의 빛을 찾아
* * *
“또라이 새끼. 진짜 가버렸네.”
지금까지 모두가 해왔던 경고를 무시한 샤하나즈가 티페레트에 탑승한 것을 본 안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거의 찰나나 다름이 없었고, 이에 그는 곧바로 돌아서서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아이샤가 가져온 장비들 위에 올라섰다.
“다들 주목! 지금부터 전원 내 지시를 따른다!”
안톤이 있는 힘껏 함성을 지르자 그의 목소리가 터널에 메아리쳤고, 그와 함께 터널 안에 울려 퍼지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침묵을 틈타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반박하기 전, 안톤은 반 박자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 어떤 미친 새끼인데 우리에게 명령을 하는 거냐고! 그런 사람을 위해 답을 주지. 난 의사다! 로샨에서 일라르의 이름을 받았던 선각자의 의사, 안톤 일라르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와 면식이 있던 사람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더욱 혼란스런 목소리를 냈지만, 이를 묵살하듯 안톤은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나는 너희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따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 이름은 도시에서 도망친 내게는 어떠한 의미도 없으니까. 지금 나는 의사 주제에 의술이 아니라 불가능한 기적을 바라는 병신 새끼니까!”
자신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자 안톤은 샤하나즈가 티페레트를 타고 출격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의술은 구할 수 있는 사람만 구할 뿐이다. 의사는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인 거다! 그런데 구할 수 없는 사람을 구하는 건 언제나 기적을 바라는 병신들 뿐 이었다! 이기든 지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나선 저 추방당한 기사처럼!”
그 말에 모두가 숙연해지며 주변이 조용해지자 안톤은 자신이 올라선 물품에서 조명을 꺼내 모두를 비췄다.
“빛은 여기 있다! 기적을 일으키는 건 고귀한 기사나 의사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의 몫 이었다! 대의는 필요 없다! 어차피 멍청이들이 두 손으로 쥘 수 있는 건 자신의 것들뿐이니까! 이건 모두의 싸움이 아니다! 철저하게 탐욕을 위한 개인의 싸움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위해 싸워라! 이기적으로 살아남아라!”
반응을 보려고 한 것도 아닌지, 안톤은 물자들에서 내려와 홀로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동기를 끌어내면 좋은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처럼 멍청하게 생각할 리가 없다고 판단해 혼자서라도 어둠 속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가 장비를 모두 착용할 동안 어떠한 함성이나 반응도 없어 그가 혼자 나가려고 하니,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너희를 멍청이라고 불러서 기분이라도 나쁘냐? 원래 부르려던 걸레나 빠는 병신 또라이 새끼들을 나름 순화한 건데.”
그 말에 어깨를 잡은 손에 좀 힘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 이상의 과격한 반응은 없었다. 그때가 돼서야 안톤이 고개를 돌려보니 피난한 사람 중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뭐라고 부르는지는 상관없어. 높으신 의사 양반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런 곳 싸지 와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어떤 사연이 있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봤자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구할 수 있는 건 구해봐야지.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으니까. 이왕 하는 것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을 따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도 면식 있는 의사 선생님인데, 말은 그렇게 해도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다들 한 마디씩 붙이며 안톤의 뒤를 따르니 그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옆으로 붙은 로제르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선생님은 결국 선생님이니까요. 지금까지 쌓아온 것도 있잖아요?”
“하여간, 진짜 병신들 밖에 없네.”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으로 욱신거리는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그는 로제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중 절반 정도는 치료 인원으로 돌려. 네가 트리아지 실시하고, 상황이 상황이니 초록색 환자들 도움 받아서 붉은색 환자 생명 유지시켜두고, 노란색 환자는 네가 응급 처치만 해둬. 만약 로샤나크가 온다면 검은색으로 처리한 환자를 살핀 뒤에 붉은색 환자 맡기고.”
“잠깐만요? 제, 제가요?”
“그래 너. 기적은 멍청이들이 만들어내지만, 의술은 너같이 똑똑한 애가 해야 하니까. 나도 일이 끝나면 바로 도울 거니까 걱정 말고. 잃는 걸 두려워해서 구할 수 있는 것 까지 잃지 마. 마음 단단히 먹어.”
충고와 함께 로제르의 머리를 헤집는 수준으로 거칠게 쓰다듬은 안톤은 따라온 사람의 수를 세곤 15명 정도 선에서 끊어 로제르를 가리켰다.
“내가 따로 지시하지 않은 인원은 장비를 착용하고 나선다! 최우선 목표는 25번 구역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구출! 지금은 단체로 움직이지만, 구출할 사람이 발견되면 최소 3인 1조로 움직인다! 어둠에 끌려가지 않도록 조명과 무기는 확실히 점검해! 방금 전 내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건 너희들의 판단에 맡긴다!”
“밖에 있는 불멸자는......”
산탄총의 노리쇠를 잡아당겨 약실을 채운 안톤은 소리를 지르며 질문을 끊었다.
“그건 방금 나간 병신이 해결할 거다! 너희는 눈앞에 있는 불사자만 신경 써! 준비되는 인원부터 출발한다!”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친 2명은 먼저 밖으로 나서는 안톤의 뒤를 따랐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어둠속으로 뛰어드니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을 치며 마음을 가다듬은 로제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지금부터 트리아지를 실시합니다! 시간이 생명이니 점주 분들은 부상자들의 신원과 상태를 파악해 주세요! 움직일 수 있는 경상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지금은 중상인 분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지시를 받은 분들은 여기 가져온 장비에서 의료 물품을 꺼내와 주세요!”
지금까지는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한순간에 가르치고 지시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로제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여나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걱정과 달리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잠시 안톤이 뛰쳐나간 방향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어둠을 똑바로 등지곤 환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장거리 대응 무장 출력 완료. 교전을 개시합니다.”》
티페레트와 샤하나즈의 목소리가 섞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와 함께 티페레트를 감싼 고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페레트를 고치와 같이 감싸던 금속 나무뿌리들은 티페레트의 몸에 얽혀들어 손상된 곳을 채우며 한 층의 새로운 장갑이 되었고, 가지들은 한데모여 거대한 장궁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줄기가 티페레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가지로 만들어진 장궁은 그대로 왼쪽 손목과 일체화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조준경을 통해 지켜보고도 엘레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떻게 할까? 지금 쏠까?》
그러나 늘어지는 엘레나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기사인 키아라 모토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이쪽의 위치를 섣불리 노출할 수는 없어. 30mm 할로 포인트 아음속탄으로 탄환을 교체해. 저쪽으로 불멸자를 보내서 대응하는 걸 보고 쏜다.”
《하여간 신중하다니까.》
비행선의 출입을 위해 중층에 만든 선착장에 걸터앉은 엘레나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하완을 회전시켜 약실을 교체하자 키아라는 숨을 죽이며 신중하게 조준을 돌렸고, 조준선에 불멸자가 들어오자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내부에 장착된 소염장비로 인해 포구에선 총염도 발생하지 않았고, 포성 또한 어둠 사이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저 침묵 속에서 발사 된 탄환만 불멸자를 향해 날아가 가슴에 박혔을 뿐이었다.
관통이 아닌 저지를 위해 만들어진 할로 포인트 탄환은 불멸자에 가슴에 박혀 파편들로 쪼개졌고, 불멸자는 엘레나에게도 들릴 정도로 요란한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탄환 교체, 이번에는 같은 구경의 풀 메탈 재킷. 도탄 각도 계산을 부탁해.”
《진짜 귀찮게 하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키아라의 눈에는 푸른 선으로 예상 탄도가 그려졌고 그녀는 예상 탄도를 따라 천천히 조준을 옮겼다.
티페레트의 뒤에서 도탄 되어 불멸자에게 맞는 탄도가 눈에 보인 즉시 키아라는 방아쇠를 당겼고, 날뛰던 불멸자는 티페레트 쪽에서 도탄 된 탄환을 맞고 방향을 돌렸다.
《이제 된 거지? 나는 좀 쉰다.》
“150mm 강장철갑탄으로 탄환 교체. 한 방에 처리한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엘레나는 키아라가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지시하자 투덜거렸지만, 착실히 지시에 맞춰 자신의 하완을 돌렸다.
그와 함께 이전까지 쓰던 포신도 더욱 두꺼운 포신으로 교체되었고, 키아라는 정밀한 조준을 위해 이 포신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작게 흥얼거린 키아라는 티페레트를 향해 달려가는 불멸자를 천천히 따라갔다.
주변에 다른 불멸자도 보이긴 했지만, 자신의 임무가 아니니 조준할 가치는 없었다.
세피로트의 나무가 사라진 이후로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티페레트는 불멸자가 돌진해오자 곧바로 오른손을 왼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불멸자를 발로 차낸 티페레트는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손목에 가져다 댄 손을 당겼다.
활시위는 없었지만 티페레트가 손을 당기니 그 손가락 안에 희미한 철사들이 모이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활시위를 만들어냈고, 팔뚝 안쪽의 장갑이 얇게 떨어져 나오며 화살이 시위에 올라갔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불멸자의 가슴의 중앙에 정확히 박혔고, 나뭇가지와 같은 모양의 화살은 점점 갈라지더니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폭발해 불멸자의 신체를 산산조각 냈다.
이를 지켜본 엘레나는 아프겠다는 듯,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저기에 맞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거야?》
“어쩔 수 없지. 웬만해서는 직격으로 맞추고 싶지만, 장애물 하나 둘 정도는 같이 꿰뚫어도 될 테니까.”
《도와줄까?》
여전히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엘레나가 하품을 하며 묻자 키아라는 고개를 저으며 조준선에 집중했다.
“아니, 너는 다른 전대원에게 연락해. 근접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머큐리 전대장님에게도 연락하고.”
《언제나 같이 신중하네.》
대답을 받은 키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티페레트가 불사자를 밀어낸 방향, 각도 그리고 화살이 발사 된 방향까지.
머릿속에 있는 25번 구역의 지도와 맞춰 티페레트의 위치를 계산한 키아라는 숨을 참고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수호자가 느끼는 반동은 물론, 수호자 안쪽까지 전해져 몸을 직접 울리는 반동에 키아라는 조준경에서 눈을 뗐지만 그 순간 보이는 것은 방금 전 보았던 푸른 폭발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키아라가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동안, 엘레나는 대구경탄환이 관통하며 남긴 탄도를 통해 직격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몸을 돌려 피했다.
《설마는 무슨. 뭔 저런 놈이 다 있어?》
화살이 박힌 곳은 순식간에 화살과 같은 금속성 뿌리가 뒤덮으며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고, 이를 본 키아라 또한 눈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이동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중거리 무기로 교체해. 지원은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은 소식이 없어. 다들 이런 일에 출격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은데......》
허나 이들이 사각을 통해 피하기도 전, 티페레트의 화살에서 자라난 나무의 껍질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슬이 날아와 이들의 팔에 감겼다.
《수호자 재구축 완료. 근접 전투를 개시합니다.》
거대한 나무는 열린 껍질 안으로 천천히 말려들어갔고, 그와 함께 내부에서는 티페레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무가 완전히 사라지자 사슬을 잡은 티페레트는 완전한 모습으로 이들의 팔에 엮인 사슬을 잡아당기며 달려들었다.
티페레트는 살짝 몸을 낮춰 아직 무장을 교체하지 못한 엘레나의 포신을 어깨에 걸친 상태로 엘레나의 몸으로 파고들었고, 손을 변형시켜 희붉게 달궈진 검을 꺼냈다.
엘레나는 즉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팔에 엮인 사슬이 팔을 견인하듯 잡아당겨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끌려가는 신세였다.
서로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키아라가 어금니를 앙다물자 엘레나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돌려 티페레트와 등을 맞댔다.
사슬에 묶인 팔이 비틀리며 꺾였지만 그 운동량을 유지한 엘레나는 티페레트의 속도를 역으로 이용해 그녀를 내리 꽂았다.
“무기 교체!”
《아주 갈아버리자고.》
그 짧은 순간마저도 낭비할 수 없는지 엘레나는 티페레트를 바닥에 내리꽂는 동시에 거추장스런 포신을 분리하며 무기를 교체했고, 팔뚝의 장갑이 전개되며 그 내부의 약실이 모두 외부로 노출되었다.
본래는 포신에 탄약을 공급하는 약실들은 순식간에 짧은 총렬이 되었고, 엘레나는 이를 바닥에 꽂힌 티페레트에게 겨눴다.
다시 균형을 잡아 일어나긴 했지만, 이미 엘레나의 팔뚝의 약실들은 최대 속도로 회전했고 순식간에 보유한 탄약을 모조리 티페레트에게 쏟아냈다.
그러나 그녀가 탄약을 전부 쏟아내기도 전, 탄막을 뚫고나온 손이 그녀의 팔뚝을 잡아 비틀었다.
강제적으로 사격이 멈추자 전신을 뒤덮은 장갑이 꿈틀거리며 찢겨나간 부위를 채우는 티페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급속 자가 수복 “불멸 프로토콜” 종료. 전투를 재개합니다.》
그렇게 탄환을 쏟아 붇고도 고작 장갑만 깎아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지 엘레나는 할 말을 잃어 대응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모든 걸 지켜볼 뿐이었다.
《뭐 이딴......!》
그런 엘레나를 대신해 키아라는 티페레트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곤 붙잡힌 손을 억지로 빼냈다.
“정신 차려! 뭐가 되었든 일어난 건 일어난 거야! 지원은 어떻게 됐어?!”
그런 말을 하며 꺾여버린 약실을 분리해낸 키아라는 엘레나의 손목을 꺾으며 사슬톱으로 손을 교체시켰다.
엘레나 또한 키아라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곧바로 몸을 움직여 25번 구역이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 당장 받을 수 있는 지원은 25번 구역에 있는 수호자들 뿐이야! 그거 말곤 응답이 없어!》
말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키아라는 그 이상으로 엘레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근접전에 특화되지 않은 자신이 저런 괴물과 대적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에 이의는 없으니까.
착지하는 즉시 다른 기사들이 힘겹게 막아내던 불멸자를 잡아 사슬톱으로 순식간에 갈아버린 엘레나는 곧바로 티페레트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티페레트 또한 키아라와 같이 밖으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였지만, 수많은 저격을 통해 예리해진 키아라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티페레트의 전신을 덮은 나무껍질과 같은 장갑들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깃털과 같이 곤두섰고, 종아리의 추진기를 작동시켜 기체를 크게 회전시키자 칼날과 같은 수 만개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전원 엄폐물로......!》”
허나 키아라가 본다 하더라도 손상을 입은 엘레나는 이에 맞춰 반응할 수 없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말마나 다름이 없는 무의미한 외침 뿐 이었다.
우박처럼 쏟아진 파편들은 문자 그대로 지상을 갈아버렸고, 불멸자들은 물론 수호자마저도 장갑이 찢어발겨져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모든 것을 분쇄한 칼날의 폭풍이 지나가자 엘레나는 피를 토해내며 간신히 눈을 떴다.
치명상은 피해갔지만, 너무나 광범위한 손상을 입어 엘레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도움을 주변에 있는 수호자들은 기동이 정지해 있었다.
《엘.......레나.......!》
힘겹게 입을 연 키아라는 수호자를 움직이려 했지만, 엘레나도 간간히 신음소리만 낼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어둠 속에선 또 다른 불멸자가 나타났고, 괴성과 함께 여전히 움직이는 엘레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움직여 달라고.......!》
이미 무장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생각한 것인지 키아라는 억지로 엘레나를 기동시켰다.
그러나 수호자를 혼자 움직이려는 시도는 그녀의 부상만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 조금씩 움직이던 엘레나는 키아라가 또 다시 피를 토해내는 것과 동시에 기동을 정지했다.
불멸자가 점점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야는 흐려졌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판단한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달려오던 불멸자의 목에 화살이 한 자루 박히며 푸른 섬광과 함께 불멸자는 그 자리에서 폭발했고, 지면에 내려온 티페레트는 그저 엘레나를 한번 바라 볼 뿐, 그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다시는 나와 적대하지 마. 오늘 죽인 건 한 명으로 족하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경고와 함께 흐릿해진 키아라의 시선은 완전히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