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29화 (29/50)

〈 29화 〉 유언, 그리고 작별

* * *

“......못하겠어......”

티페레트는 샤하나즈가 자신의 목에 올려둔 손을 거두었다.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죽을 사람에게 정을 줘서 뭐해.”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은 샤하나즈와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난 티페레트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못해! 못하겠다고!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는 어디 간 거야! 에버니저의 복수는? 로크의 복수는! 지금까지 그거 하나만 보고 악으로 버텨왔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포기하는 거냐고!”

여전히 눈을 감은 샤하나즈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의미 없는 내가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허황된 목표를 쫒으며 간신히 손에 쥔 것들마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거기에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에버니저 전대장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무 지쳤어...... 이제는 그냥 편히 쉬고 싶어.”

“그러면 가족이라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다 버릴 거야?”

“내가 없는 게 더 안전할 거야. 나만 없다면 저번처럼 호드와 같은 괴물에게 쫓길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네가 낸 결론이 이거야? 다 포기하고 내가 널 죽이길 바라는 것?”

“너야말로 얼마 전 까지는 나를 부품으로 먹어 치우려고 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샤하나즈가 천천히 일어나며 묻자, 손으로 눈가를 누르고 있던 티페레트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언제나 나를 싫어하고, 욕하는 사람만 죽여 왔는데 정작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니까.......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나는 나쁜 애여만 한단 말이야......”

울먹이는 티페레트는 눈가를 누른 손바닥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냈다.

“내가 나쁘니까, 모두가 나를 싫어해. 내가 나쁘니까, 모두가 나를 저주해. 내가 나쁘니까, 모두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아. 내가 나쁘니까....... 여기에 평생 혼자 남는 벌을 받는 거야........ 그렇게 믿어왔단 말이야.......”

거의 전신을 구겼다고 해도 될 정도로 몸을 웅크린 티페레트는 훌쩍이며 말을 흐렸다.

“외로웠구나.”

“아니야! 아니라고! 어차피 모든 사람은 날 싫어해! 너도 사실은 그렇잖아! 난 그렇게 만들어졌어! 뭘 해도 나는 혼자라고!”

“그러면 나는 왜 못 죽이는 거야?”

샤하나즈가 소리를 지르며 반박하는 티페레트에게 조용히 되묻자 눈가가 흠뻑 젖은 그녀는 씩씩거리며 샤하나즈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상한거야! 넌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나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근데 결국 나는 여기 있잖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네가 그러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무슨 잘못이 있어서 여기에 평생 갇혀서 잠깐이라도 나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데!”

눈을 질끈 감은 티페레트는 처절할 정도로 절규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허나 티페레트의 절규도 얼마 가지 못했고, 탈진해버린 티페레트는 귀를 틀어막은 채로 웅크려 훌쩍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 상태로 영원히 있어야 하잖아.”

티페레트의 훌쩍임이 약간 진정된 후, 샤하나즈가 묻자 티페레트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여기서 나가려면 누군가 죽어서 문을 만들어야 해. 그런데 그게 꼭 너일 필요는 없어.”

티페레트의 대답을 들은 샤하나즈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아니, 난 절대 안 할 거야.”

“그러면 어쩌려고. 네 말대로 여기에 영원히 있을 생각이야? 누군가는 나가야 할 것 아니야.”

“그렇지만 난.......!”

당황한 샤하나즈가 소리를 지르자 그에게 다가간 티페레트는 샤하나즈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입술을 깨물곤 무엇을 결심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얼마 전에는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 죽였으면서 이 정도도 못하겠다는 거야? 복수를 포기하고 싶어? 미안하게 됐네, 내가 봤을 때 네 소중한 것을 죽인 것은 전부 너니까!”

티페레트가 악의가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입을 열자,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문장이 박힌 것 마냥 가슴이 욱신거린 샤하나즈가 머리를 헤집던 손을 떼고 티페레트를 마주봤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에이다도, 로크도, 에버니저도 전부 네가 죽였다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네가 죽였다고! 지쳤다는 이유로 모든 걸 집어 던지고 눈앞에 있는 애새끼 하나 죽이지 못하는 네가 죽였다고!”

“다시 말해봐.”

“똑바로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하지 마. 그렇게 포기하고 싶으면 내가 널 죽여줄게. 그리고 널 위해서 그 가족이라고 하는 에버니저의 잔재도 완전히 청소해 줄게. 그러면 아예 미련도 안 남을 것 아니야? 물론 네 무능함으로 가족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후회는 남겠지. 내 일부가 되어서 별 의미도 없겠지만!”

있는 대로 말을 뱉은 티페레트가 샤하나즈에게 다가가자 초점이 흐려진 샤하나즈는 역으로 티페레트의 목을 잡아 바닥에 넘어트렸다.

“다시 말해봐! 다시 그 입을 나불거려보라고 이 망할 새끼야!”

그런 상황에서도 티페레트는 여전히 독기를 품은 눈으로 샤하나즈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렇게.......하는.......거야....... 살인자........처럼........”

티페레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샤하나즈는 여전히 우악스런 손으로 그녀의 목을 짓누르며 조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목을 붙잡은 티페레트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뜬 채로 굳은 충혈 된 눈은 생기가 사라지고, 목을 조르는 손에는 미세한 맥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샤하나즈는 여전히 손을 떼지 않았다.

그저 쌓아왔던 분노를 그 작은 몸에 쏟아 부을 뿐.

한참이 지나 티페레트의 몸이 완전히 식어 차가워질 때가 돼서야 이성을 되찾은 샤하나즈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목이 검게 보일 정도로 멍 자국이 남은 티페레트의 시체는 점차 벽의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고, 파이프와 배선들로 어지럽게 얽혀있던 벽이 천천히 벌어졌다.

벌어진 틈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이자 주먹을 쥐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샤하나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가 밖으로 나가기 전,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들리는 거지? 내가 처음 했던 말하고 같아서 못미덥겠지만, 이제는 속이려고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냥 듣고 나가줘.》

“티페레트?”

분명 자신이 죽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니 당황한 샤하나즈는 발걸음이 멈췄지만,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는지 티페레트의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리 녹음된 것인지 약간 시간이 지나자 티페레트의 목소리가 이어질 뿐이었다.

《일단 미리 사과부터 할게. 내가 말하는 게 좀 두서가 엉망일거야. 이런 식으로 누구한테 말을 전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미리 준비했던 유언 대신 그 자리에서 무작정 녹음하는 거니까.》

잠시 목을 가다듬는 티페레트의 목소리에 샤하나즈는 끝까지 듣고 갈 마음이라도 생긴 것인지 벽에 몸을 기대었다.

《숨길 것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 할게. 고마워. 나를 싫어했던 것도, 불쌍하게 여긴 것도, 그러면서 나를 믿었던 것도, 내 엔진이 되어 주었던 것도. 무엇보다 나를 부정해 준 것도. 전부 다 고마워.》

살짝 감정이 차오른 것인지 말문이 막힌 티페레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샤하나즈에게 남기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매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먹어오면서 나를 정당화 했어. 그렇게 내 부품으로 삼아서 짧은 자유를 누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 공간에 갇히고.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을 시간동안 이걸 반복했지. 아마 그 시간동안 너 같은 사람을 기다려온 걸지도 모르겠어. 세상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나를 부정해줄 사람을 말이야. 웃기지 않아?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길 부정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데 말이야.》

티페레트는 잠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되니까 네가 해줬던 말을 되돌려 주네. 넌 이제 자유야. 더 이상 내 엔진으로 얽매일 필요 없어. 세피로트의 나무도 있으니 내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도 문제없을 거야. 네 가족을 위협할만한 것도 없고, 싸우는 도중에 내가 더 이상 방해도 될 일도 없을 거야. 고맙다는 말은 할 필요 없어. 어차피 듣지도 못 할 거니까.》

잠시 목이 막힌듯, 숨을 억누른 티페레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잘 가. 친절한 살인자 그리고 내 마지막 기사.》

《나를 기억하지 말아줘.》

묵묵히 티페레트의 유언을 끝까지 들은 샤하나즈는 살짝 무거워진 마음을 품고 틈 속에 보이는 빛을 향해 나아갔지만, 그가 나가기 직전 울음소리와 함께 끝난 줄 알았던 티페레트의 희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도........ 죽는 건 무서워....... 난....... 난..... 어째서 이렇게 만들어 진거야.......?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싫단 말이야........! 죽으면....... 진짜로 혼자가........ 되는 거잖아.......... 영원히....... 갇히는 거잖아....... 무서워....... 나도........ 살고.......싶어........》

죽을 앞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목소리를 유지했던 방금 전과 달리, 티페레트는 처절할 정도로 펑펑 울며 오열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는 티페레트의 목소리는 이내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인지 순식간에 멈추며 고통스러운 신음이 대신했다.

“........살......려........줘.......샤.......하......나.......즈..........”

간신히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다시 떠오른 것인지 샤하나즈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와......줘........”

그리고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같이 희미한 한 단어와 함께 그 고통스런 신음마저도 완전히 끊겼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했지만, 그 힘없는 티페레트의 목소리가 가슴에 박힌 것인지 자리에 주저앉은 샤하나즈는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이마를 벽에 찍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티페레트를 죽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자신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마저도 스스로 죽였다.

이제는 자기혐오가 신체마저 지배하는 것인지 역겨움에 피와 윤활유가 섞인 끈적끈적한 검붉은 점액을 한껏 토해낸 샤하나즈는 한참동안 흐느끼며 자리에 웅크렸다.

그러나 기억 속 흐릿하게 남아있던 목소리가 스쳐지나가자, 자신 가슴의 톱니바퀴를 만진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곤 빛을 향해 뛰쳐나갔다.

총성과 함께 섬광이 어둠을 꿰뚫었다.

“다들 움직여! 지원 사격은 내가 할 테니까 생존자를 발견하면 바로 바로 안전 지역으로 데려가고, 무장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

수호자의 잔해에서 기관포를 뜯어온 안톤은 구조 작업자들의 중앙에서 대구경 탄환을 발사하며 소리를 질렀다,

거의 포성에 가까운 총성이 울려 퍼질 때 마다 구조 작업자들에게 다가오는 불사자들의 신체가 육편이 되어 흩뿌려졌다.

그런 총성 사이에서 구조 작업자들은 잔해 사이에서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그 곳으로 향해 무작정 발을 옮겼다.

조금도 체계가 잡히지 않은 오합지졸의 구조 작전이었지만 이 일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련할 정도로 무작정 움직이며 손에 잡힌다면 탐욕스러울 정도로 잡아끄는, 그런 이기적이고 절박한 사람들의 작전이었다.

안톤이 부상자들을 옮기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지원하는 사이, 사람들이 왕래하는 빛의 사이를 비집고 몸이 불타는 아이샤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아?”

“몰라! 나도 깊게 생각은 안 했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지!”

기관포를 쏘며 귀가 먹먹해진 것인지 안톤은 바로 옆에 있는 아이샤의 질문에도 소리를 질러 대답했다.

“그보다 넌 왜 여기 있어! 그딴 상태로 나오면 죽거나 뒈질텐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 얌전히 안전한 곳에 처박혀 있어!”

“로샤나크..... 막아야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아이샤는 최후의 수단인 것 마냥 손에 꼭 쥐고있는 로샤나크의 파이프를 들어보였다.

그 이름이 나오자 안톤은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다시 조준을 바로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라면 걱정 마!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로 전부 조져버릴 새끼는 아니니까! 진짜 그럴 생각이었으면 우리 모두 이미 좆 되고도 남았거든! 내가 잘 알아!”

“만약 정말로 그럴 생각이라면?”

로샤나크에 대해 호언장담하는 안톤의 옆으로 어느 순간 나타난 로샤나크는 아이샤가 손에 쥐고 있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안톤은 곧바로 총구의 방향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지만, 가볍게 손을 휘두른 로샤나크는 손을 벌려 뭉개진 탄환을 떨어뜨렸다.

“난 진심으로 했던 말이야. 내 것이 남아있지 않은데, 다른 것도 남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니미. 그렇게 말하는 새끼가 아무것도 안하고, 약이나 빨면서 보기만 하겠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다니. 너희들이 그 장비들을 쓸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 것 같아? 난 현실적으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에 손을 쓰기 싫을 뿐이야.”

주변에 어둠이 가득했지만, 파이프의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로샤나크는 마치 모든 것이 보이는 것 마냥 주변을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 씁쓸하게 웃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건, 극한의 확률을 뚫은 재앙은 있어도, 극한의 확률을 뚫은 기적은 없다는 거지. 예를 들면 이 작은 어둠속에서 불멸자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하나 정도면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계속 나온다면 가망은 없지.”

“잠깐만, 계속?”

로샤나크의 한 마디에 안톤이 방아쇠 당기는 것을 멈추니, 그들의 앞에서 괴성과 함께 거대한 발이 내리 찍혔다.

모두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가운데, 유일하게 똑바로 서있는 로샤나크는 위를 흘깃 바라보곤 일어나는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런 개씨발! 너야말로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안톤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로샤나크는 무심하게 파이프를 빨아들일 뿐이었다.

“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기사들 초소를 습격할 때 까지는 뭔가 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미 너무 망가졌어. 그리고 난 이미 망가진 거에 손 댈 생각은 없고.”

“그래서 손가락만 빨다가 나중에 다 조져버리겠다는 거냐?”

“반 정도는.”

로샤나크가 싸늘한 눈으로 대답하자 안톤은 욕설과 함께 기관포를 내려놓았다.

“전원 대피! 이 구역에 불멸자가 나왔어! 안전 구역까지 후퇴해!”

“그렇지만 아직.......”

“야이 개좆새끼들아! 나도 아직 구조할 사람이 남아서 좆 된 건 알아! 근데 지금 상황에서는 니미럴 구조는 둘째 치고 너희까지 뒈진다고! 알겠으면 빨리 도망쳐 씨발것들아!”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안톤은 결국 참았던 욕을 쏟아냈다.

수호자의 기관포는 불사자에게 있어서는 과잉 화력이었지만, 불멸자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안톤이 욕설을 중얼거리는 동안 비틀거리던 아이샤는 로샤나크가 피우는 파이프를 가로채려했지만, 로샤나크가 가볍게 밀어내니 튕겨져 나갔다.

“그때는 네가 힘을 쓸 수 있는지 보려고 일부러 봐 준건데, 또 당할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이걸 쓴다고 해도 그런 몸으로 뭘 하려고? 죽을 생각이야?”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샤는 힘겹게 다시 일어나 로샤나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샤나크가 눈가에 살짝 힘을 주니 아이샤의 전신에 푸른 문자가 새겨지며 그 자세 그대로 허공에 고정되었다.

“내가 방금도 말 했잖아. 기적은 없다고. 귀찮게 하지 않으면 아침이 밝았을 때 목숨은 살려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아이샤를 묶은 로샤나크가 점점 다가오는 불멸자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안톤은 다시 기관포를 다시 들었다.

어둠 속에서 빛이 움직이는 것을 살펴보며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확인한 안톤은 그 반대방향으로 뛰며 불멸자를 향해 기관포를 난사했다.

섬광과 총성에 불멸자는 물론 불사자마저도 안톤에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매번 입에 달고 다니는 욕설마저도 머금은 안톤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한 번 울려 퍼질 때 마다 불사자들이 찢겨나갔지만, 안톤의 난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불멸자는 착실하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씨발! 이런 상황에서도 의사의 본분 따위나 생각나냐! 이 좆같은 대가리는 아주 노예근성이 뿌리 박혀 있어!”

계속된 난사에 한계까지 달아오른 기관포의 총열이 찢어지고, 탄약은 전부 소진되었지만 안톤은 찢어진 기관포의 총열을 자신을 붙잡는 불사자의 몸에 박아 넣었다.

짙은 어둠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음에도 안톤은 달궈진 기관포의 총렬을 빛 삼아 불사자들을 처치해 나갔다.

뒤에서 불사자가 자신을 붙잡자 망가진 안톤의 기계 팔이 튀어나오며 생기 없는 몸뚱이를 밀어냈고, 이내 불사자에 박혀 빠지지 않는 기관포를 집어 던진 안톤이 꺼내든 산탄총이 불을 뿜었다.

이제 빛이라곤 없었지만 안톤은 거의 무의식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는 것이 보이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불멸자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희미해지는 시야에서 불멸자의 발이 내려오는 것을 본 안톤은 불사자들 사이에 파묻혀 위로 산탄총을 겨눴지만, 방아쇠를 당겼을 때 더 이상 고막을 울리는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씨발..... 씨발........! 니미럴 개좆씨발.....!”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기던 안톤은 산탄총을 양손으로 잡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불사자들을 쳐냈지만, 어둠속에서 밀려드는 불사자들은 점점 어둠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더 이상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안톤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빛이 아닌 어둠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나 불멸자와 어둠이 완전히 안톤을 삼켜버리기 전, 한 줄기의 빛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왔다.

작살이나 다름이 없는 거대한 화살에 정통으로 맞은 불멸자는 땅에 처박혀 눈부신 빛과 함께 불타올랐고, 그와 함께 안톤을 파묻은 불사자 무리 또한 함께 불타올랐다.

주변이 밝아지자 어둠속으로 걸어가던 안톤은 헛웃음을 지으며 로샤나크를 돌아보았다.

“뭐야. 아무것도 안 한다면서, 결국은 움직이잖아.”

“아니, 내가 한 게 아닌데.”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본 것인지 로샤나크가 눈을 찌푸리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타오른 그 지점에 티페레트가 착지했다.

그 거대한 크기와 날아온 속도를 믿을 수 없을 정도 사뿐하게 착지한 티페레트는 방금 전 작살을 쏘았던 활을 접어 팔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그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다니. 그래서 그 녀석을 먹은 소감은 어때?”

로샤나크는 티페레트를 비웃었지만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며 어둠을 걷어내자 티페레트는 고개를 들어 로샤나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헛된 희망이라고 하지 마. 누군가는 망가진 것이라도 너처럼 부수지 못하고 안고 살아가니까.》

샤하나즈의 목소리로 대답한 티페레트는 순식간에 팔을 변형시켜 만들어낸 포구를 로샤나크에게 겨누었다.

그런 행동에 로샤나크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몸을 불태웠지만, 푸른 불길이 강선이 푸르게 빛나는 포구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니 표정을 굳히며 티페레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하네. 내가 알기로 이 도시가 파괴되는 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은 너인데. 그런 네가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나를 죽이겠다고?”

《그게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바란 것이었어. 단순히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 나는 그 의지를 따르고, 지킬 뿐이야.》

“그 애송이가 주운 자식이 많이도 자랐네. 지금까지 봐왔던 어중이떠중이 중에서 제일 기사 같은 말도 하고 말이야. 근데 나는 여전히 망가진 건 가지기 싫은데?”

자신의 몸을 분쇄하고도 남을 포구를 앞에 두고도 로샤나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답해봐. 에버니저의 아들. 말은 잘 하는데, 주변을 둘러봐. 내 것이 이렇게 부서졌는데 뭐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이미 불멸자가 나온 이 구역을 로샨에서 남겨둘 것 같아?”

그러자 잠시 침묵한 샤하나즈의 목소리는 이내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했다고 해. 내가 이 거리를 부쉈고, 불멸자를 만들어 냈다고. 세피로트의 나무를 이용해서 이 도시를 아예 부숴버리려고 했다고 증언해.》

그리고 티페레트의 가슴이 열리며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샤하나즈가 로샤나크의 앞으로 뛰어 내렸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건 익숙하니까.”

샤하나즈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자 로샤나크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렇게 한다고 쳐. 그런데 이곳이 망가진 건 달라질 것이 없잖아?”

그러나 그 질문에 샤하나즈가 대답하기 전, 대피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자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로샤나크의 뒤에서 무너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본 안톤은 비틀거리며 다가와 샤하나즈에게 반쯤 기댔다.

“너는 몰라도 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네 말대로 기적은 없었지만, 아직 희망은 있는 것 아니야?”

자신만만하게 말을 꺼냈지만, 이내 안톤은 몸을 떨며 헛구역질 하는 척 했다.

“으, 씨발. 내가 했지만 좆같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다들 누구처럼 망가졌다고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그런 안톤의 반응과는 달리 모두를 이끌고 나온 아이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샤가 자신을 노려보자 로샤나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입었던 옷을 벗어던졌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너희들 마음대로 해.”

로샤나크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잔해를 뒤지며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으니, 이제 두 명의 시선은 샤하나즈에게 향했다.

“안톤, 부탁할게 하나 있어.”

둘 중 누군가가 입을 열기 전, 티페레트가 푸른 분진으로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샤하나즈가 먼저 안톤을 불렀다.

“뭔데?”

“나한테 하려고 한 수술.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아이샤, 지금 당장 아카이브 쪽으로 이동해야 해.”

그러나 아이샤가 대답하기 전, 안톤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만 한 샤하나즈의 어깨를 붙잡았다.

“질문할 게 많기는 한데, 다 건너뛴다고 해도 시체는 어떻게 하려고? 로샤나크는 거기까지 도와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시체는 이미 정했어.”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잖아. 티페레트가......”

그러자 샤하나즈는 어깨를 붙잡은 안톤의 손을 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티페레트는 죽었어! 내가 죽였다고! 지금 내 목숨을 걸고 내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거니까 제발 좀 따라 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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