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클리포드
* * *
스펜서가 돌진한 곳에 커티스의 탄환이 충돌하자 봉인된 아카이브의 입구가 부서지며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비명소리로 착각될 법한 예리한 소리와 함께 아카이브의 외부에 꿈틀거리는 어둠이 커티스가 만들어낸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순간의 고요함을 깬 것은 불멸자의 괴성이었다.
“크워어어어어!”
오금이 저리는 괴성이 멈추자 거대한 팔이 부서진 아카이브의 입구에서 솟아나왔다.
아카이브에 꿈틀거리던 어둠을 두른 팔이 땅을 짚자, 15m는 족히 넘는 불멸자가 아카이브를 부수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수호자의 2배 이상 되는 크기에도 가장 먼저 아카이브에 달려들었던 스펜서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점을 뜯는 열기!》
아카이브의 표면에 매달렸던 스펜서는 순식간에 불멸자의 뒷목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한쪽 손은 이미 날이 붉게 달아오른 칼날로 변형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멸자의 몸에 꿈틀거리는 어둠이 조금씩 움직이며 작은 틈을 만들어냈다. 틈이 벌어지자 충혈 된 눈알 하나가 사각에서 달려드는 스펜서를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충혈 된 눈알은 순식간에 몸 안쪽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고, 깊어진 안와는 테투리에 예리한 치아들이 자라나며 거대한 구강으로 바뀌었다.
스펜서는 먹힐 것을 직감했는지 팔을 뻗어 다른 곳을 잡으려 했으나, 그가 팔을 뻗는 속도보다 구강이 커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삼켜지기 직전, 발레리안의 도움 닿기로 뛰어오른 아서가 스펜서를 붙잡았다.
《저건 대체 뭐야!》
그러는 순간까지도 어둠사이에서 생겨난 눈알은 스펜서와 아서를 끝까지 쫓고 있었다. 멀리서 이를 바라보던 리암은 불멸자의 이마를 노리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불멸자는 고개를 돌려 리암과 눈을 마주쳤다. 불멸자의 전신을 감싸는 어둠은 다시 머리에 응집되었고, 철판도 간단히 관통하는 120mm의 철갑탄은 어둠에 삼켜져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시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불멸자는 괴성을 지르며 커티스 방향으로 돌진했다. 발레리안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한참을 밀리고 나서야 커티스의 앞에서 불멸자를 멈출 수 있었다.
《피해여......! 얼마 못 버텨여.....!》
발레리안이 간신히 버티고 있으니 또 다시 불멸자의 몸을 감싼 어둠이 움직였고, 이번에는 손에 응집되어 예리한 비수와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체급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발레리안을 노리고 불멸자가 비수를 내려찍으려 하니 스펜서의 사슬포가 불멸자의 팔에 감겼다. 이마저도 불멸자가 팔에 살짝 힘을 주자 스펜서가 끌려왔다.
그 사이 발레리안은 방패를 들어 비수를 막아냈고, 커티스가 근거리에서 화력을 퍼붓고 나서야 틈이 생겨 발레리안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얼어붙는 엔진이 삐걱거린다!》
사슬포를 회수하는 스펜서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자신을 노리고 돌진하는 불멸자 덕에 다급한 것은 커티스와 리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중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커티스를 덮치려던 불멸자가 불길에 휩싸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가 나오든 막는다고? 그래서 이게 막는 거야?”
작은 태양과 같이 맹렬히 타오르는 아리아드네는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천천히 허공을 밟고 올라 커티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저게 뭔지 아는 것 같은 눈치인데?”
아리아드네는 얼어붙은 불멸자를 흘깃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어둠에 끌려들어간 수호자의 말로지. 사람이 밤에 끌려들어가 불사자가 되는 것처럼, 수호자도 밤에 잠식되면 불멸자가 되는 거야. 물론 그냥 불멸자보다 더욱 강하고 재앙과 같은 존재로 말이야. 우리는 저런 것을 클리포드라고 불렀지.”
《말도 안 돼. 어떻게 수호자가 저렇게 된다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는 듯, 쏘아붙이는 아서의 외침에 아리아드네는 불길과 같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수호자도 사람과 다를 것이 없어. 육체가 기계일 뿐이지 영혼이 있고 살아있는 존재니까. 특히 기사가 없다면 밤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지.”
아리아드네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커티스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너희가 벌인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난 여기 저걸 영원히 묶어 둘 생각은 없어. 거기에 아침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8번 전대면 뭣하나 제대로 못하는 전대라고 들었.....”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문장을 끝마치기 전, 커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스펜서!》
클리포드를 보며 으르렁거리던 스펜서는 커티스쪽을 돌아보았다.
《이대로 듣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우리 8번 전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이 촛불한테 제대로 된 걸 알려주자고.》
그러자 공중을 향해 늑대처럼 울부짖은 스펜서는 전신에서 푸른 증기를 뿜어내며 점차 신체를 변형시켰다.
이미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팔은 한층 더 늘어나고, 하완의 뼈대가 팔꿈치를 뚫고 나왔고, 몸은 점차 뒤틀리기 시작하며 등이 굽고 정강이에는 새로운 관절이 생겨났다.
손가락 또한 손에서 한층 더 뻗어 나와 짐승의 발톱과 같이 날카롭게 변하며, 이제 인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스펜서가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자, 안면장갑이 쪼개지며 날카로운 치열과 같은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눈의 위아래가 갈라지며 세 쌍의 눈이 붉게 빛나자 스펜서는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GYAAAAAAOOOOOO!!!》
“저건 대체.......”
괴이한 모습에 스펜서의 살짝 놀란 아리아드네가 주춤거리자 클리포드를 감싼 불길이 사라졌다.
그러나 커티스를 향해 달려들던 클리포드의 손이 닿기도 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달려온 스펜서는 그대로 클리포드의 팔에 매달렸다.
굽어진 체형으로 인해 신장은 3배 정도 차이가 났지만, 갑작스럽게 팔에 달려든 스펜서로 인해 클리포드의 손은 커티스에게서 한참 벗어났다.
《!》
거품을 무는 것과 같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를 내는 스펜서는 클리포드의 팔에 발톱을 박아가며 얼굴을 향해 타고 올랐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잡으려는 클리포드의 손과 몸을 타고 몰려오는 어둠마저 피한 스펜서는 순식간에 클리포드의 목덜미에 도착했다.
그러나 목덜미에 도착한 스펜서의 주변으로는 이미 짙은 어둠이 포위하며 거대한 입을 만들어 냈다.
《안 돼! 이제는 못 피한다고! 내가......》
《아서! 너는 여기로 와!》
손아귀같이 뻗어 나온 입이 스펜서를 삼키려 했지만, 이미 조준을 마친 커티스는 스펜서를 도우려는 아서를 불러 세웠다.
아서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폭발과 함께 발에서 뻗어 나온 포구에서 폭연이 올라오는 스펜서가 입을 뚫고 튀어 올랐다.
스펜서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자신을 향해 뻗은 어둠 줄기를 하나 둘 철갑탄으로 쏴 맞추고 있으니 아서는 커티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 초마다 스펜서를 향해 클리포드 몸을 뒤덮은 어둠이 점점 모여들었고, 정면의 어둠이 희미해지자 곧바로 발레리안이 달려들었다.
《얼마나 나마써여?!》
육중한 타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의 발레리안이 묻자, 아서와 연결되어 장갑의 틈새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오는 커티스는 총구를 들어 올렸다.
《11초.》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
《잘 보고나 있어 촛불. 이게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8번 전대니까.》
커티스 장갑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점점 흐려졌지만, 약실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이 밝아졌다.
그와 함께 전신의 질량을 실은 발레리안의 주먹이 클리포드의 가슴에 적중했고, 장갑이 찌그러지자마자 클리포드의 뒤를 노리던 스펜서가 목덜미를 타고 앞으로 이동해 흉부 장갑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스펜서의 송곳니에 흉부 장갑이 뜯겨나가자 그 안에는 검은 덩어리가 심장과 같이 맥동하고 있었다.
《“비켜!”》
순식간에 어둠이 몰려들며 검은 덩어리를 감싸려 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리암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던 약실은 응축된 빛을 총구로 쏘아 보내며, 총탄이 순백색 궤적을 남기며 아직 어둠이 감싸지 못한 덩어리의 중심을 관통했다.
그리고 가슴에 칼로 도려낸 것 같이 말끔한 구멍이 뚫리자 클리포드를 감싸던 어둠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허나 클리포드가 다시 움직일 기미가 보이자, 발레리안과 스펜서가 그대로 사지를 뜯어냈고 이내 완전히 어둠이 사라진 클리포드의 잔해는 녹슨 수호자의 모습으로 천천히 변해갔다.
아서가 커티스와 연결된 팔을 분리해내자, 녹아내릴 것처럼 달아오른 총구를 내린 커티스가 천천히 일어나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르지?》
“조금 흥미롭기는 한데, 별로 상관없어.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까.”
코웃음을 친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부터 아카이브는 내가 맡을게. 너희들에게 넘기기에는 너무 위험하거든.”
그와 함께 아리아드네와 네 기의 수호자에 불길이 천천히 치솟아 올랐다.
가장 먼저 수상함 낌새를 눈치 챈 리암은 곧바로 아리아드네를 향해 조준을 돌렸지만, 불길과 함께 사라진 그녀는 어느새 커티스의 포신 위에 올라와 있었다.
“걱정할 건 없어.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너희끼리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아!》
“약속? 난 그런 걸 한 적이 없는데. 그 이전에 너희가 나한테 제시 할 것도 없잖아.”
소리 지르는 아서를 바라보지도 않는 아리아드네는 눈을 감고 불길을 점점 키워갔다.
그리고 모든 수호자가 불길에 휩싸일 무렵, 새로운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역시, 매번 늦네. 한심하긴.”
불기둥을 본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혀를 찼을 뿐, 다시 눈을 감았지만 샤하나즈가 불기둥이 사라지기도 전에 뛰쳐나와 아리아드네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가 손을 뻗자 얼마 남지 않는 오른팔의 피부가 벗겨지며 노즐들이 드러났고, 이 노즐을 통해 아리아드네의 불길이 빨려 들어가며 점차 불길이 사그라졌다.
“뭣.....?”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시선을 돌렸을 때, 샤하나즈는 이미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온 이후였다.
“아니, 대답도 필요 없어. 그냥 죽어버려.”
이성을 잃은 것인지 눈동자가 거의 점으로 보이는 샤하나즈는 아리아드네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인지, 샤하나즈에게 붙잡힌 아리아드네는 어떻게든 불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불길을 일으키는 족족, 불씨마저도 샤하나즈의 팔에 빨려 들어갔고, 결국 아리아드네는 지팡이마저 떨어트리곤 샤하나즈의 손을 붙잡았다.
“컥.....커억.....컥.......!”
“감히...... 감히 내 가족한테 손을 대려고 해? 내가 그냥 들 줄 알아?”
정말로 아리아드네를 죽일 생각이었는지, 샤하나즈는 그녀의 목을 조르며 팔을 들어올렸다.
우아하게 불길로 된 계단을 걷던 아리아드네의 발이 비굴할 정도로 버둥거리며 샤하나즈의 몸을 걷어찼지만, 허망한 쇳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런 와중 불길과 함께 나타난 아이샤가 샤하나즈의 팔에 매달렸다.
“그만해, 그만! 이러다가 진짜 죽겠어!”
“방해하지 마! 나는 용서할 생각 없어!”
아이샤가 팔에 매달려도 샤하나즈의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리아드네의 발버둥은 점점 미약해졌다.
“용서할 것 없어! 지금은 아리아드네가 필요하다고! 너도 티페레트를 살리고 싶잖아!”
티페레트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멈칫한 샤하나즈는 아리아드네의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다.
포신 위에서 떨어지는 아리아드네를 커티스가 받아내자 잠시 움직임이 없던 아리아드네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일어났다.
“커억...! 끄윽........! 쿨럭....! 쿨럭.....!”
아이샤는 그런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 그녀가 떨어트린 지팡이를 건넸다.
“그러니까 도와 줄 수 있지? 언니.”
“난..... 배신자 동생을 둔 적 없어.......”
“그건 잠시 뒤로 밀어 두자. 서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아이샤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그녀가 건넨 지팡이를 잡고 위태롭게 일어났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내 도움을 바라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