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등가 교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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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로 들어서는 8명 사이에는 긴장만이 가득했다.
누군가 하나라도 긴장을 푸는 순간 한 명이 죽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카이브의 지하로 이어지는 리프트가 땅에 닿자 그 긴장감은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바닥은 매끄러운 돌이 아닌, 잔디가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디가 벽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부를 빽빽하게 채웠다.
나무의 사이사이에서는 푸른색 분진이 반딧불처럼 흩날리며 어두운 공간을 밝혔고, 모두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경에 할 말을 잃고 바라 볼 뿐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아카이브라고.....?”
“나, 나도 이런 건 상상하지 못했어....... 나, 나는 안톤이 있었던 곳처럼 ㄷ, 돌로 만든 곳일지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이 틀리자 아이샤마저 말을 더듬었다.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와중, 샤하나즈만큼은 양 팔로 조심스레 안은 짐을 풀밭에 내려놓고 자신의 윗옷을 벗었다.
“무슨 환상인지는 나중에 알아보자고. 지금은 수술이 먼저야.”
샤하나즈가 옷을 벗자 금속으로 된 피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고, 주변을 둘러보다 샤하나즈의 모습을 발견한 레티시아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샤하나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 몸은 어쩌다......”
그런 레티시아의 반응에도 샤하나즈는 무덤덤하게 자신의 몸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이거. 로샤나크의 말로는 내가 수호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이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겠지.”
“그러면 그걸 제거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그러자 샤하나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거 할 생각은 없어. 제거할 건 다른 거야.”
“맞아. 그러고 보니까 수술 내용을 바꾼다면서. 어떻게 바꾸는지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았잖아?”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는 안톤이 묻자, 샤하나즈는 자신이 안고 왔던 짐을 내려놓았다.
짐을 감싼 천을 풀자, 그 안에는 전신이 난도질당한 소녀의 시체가 있었고 샤하나즈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내 심장을 이 아이와 바꿔줘.”
8번 전대 전원이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장 먼저 생각을 정리한 사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물어봐도 될까? 네가 가끔 무모하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잖아.”
“내가 티페레트를 죽였어. 그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 뿐 이야.”
샤하나즈는 금속으로 변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로샤나크는 내가 수호자에 더 가깝다고 했지. 수호자가 움직인다는 건, 이 곳에 기사가 있다는 뜻이야. 이 안에는 여전히 나를 움직이는 엔진이 있다는 거라고. 그것만 다른 몸으로 옮길 수 있다면......”
샤하나즈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손으로 티페레트를 죽였어. 하나의 목숨을 바로잡기 위해선 또 다른 목숨을 걸어야지. 안 그래?”
“그래서 그게 통할거란 근거는?”
그러나 샤하나즈가 대답하기 전, 아리아드네가 손을 치켜들더니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녀의 팔에 문신이 떠오르자 가슴을 움켜쥔 샤하나즈의 전신도 동일하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문신이 새겨지며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겠네. 수술을 하려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뭔데 그걸 결정하는 거야?”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니까.”
아리아드네가 눈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하니 주먹을 쥔 레티시아는 그대로 아리아드네에게 달려들려 했고, 살의를 눈치 챈 사일러스가 그녀를 간신히 막아 세웠다.
“티페레트는 우리 해방군의 유일한 수호자였어. 그러니 그 녀석이 하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지. 만약 저 녀석이 말하는 게 맞으면 티페레트가 동화되기 전에 꺼내야해. 우린 아직 티페레트가 필요해.”
“고작 네 필요 때문에 샤하나즈의 목숨을 걸자는 거야?”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게.”
레티시아가 바로 옆까지 다가왔지만 아리아드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티페레트가 안에 남아있다면 침식은 계속 진행될 거야. 만약 저 녀석이 완전히 수호자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너희가 아는 샤하나즈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인격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리아드네는 살짝 시선을 돌려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런 확신이 있다면 내가 물러나도록 할게. 그게 아니라면 물러나.”
단호한 아리아드네의 선언에 할 말을 잃은 레티시아는 아이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솔직히 아리아드네의 의견에 찬성이야. 세피로트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올드 원인 우리도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샤하나즈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걸 따르는 게 맞을 것 같아.”
그러자 눈을 감고 진중하게 고민하던 리암이 고개를 들었다.
“전문가 의견을 물어보고 싶은데. 생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리암이 묻자 고개를 뒤로 떨어뜨리고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힘없이 고개를 내려 리암과 눈을 마주쳤다.
“솔직히 말해 볼까?”
“말 해봐.”
“일단은 째봐야 뭘 확신할 수 있겠는데.”
레티시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안톤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애미! 누가 좋아서 니미럴 목숨 가지고 장난질 치는 줄 알아? 내가 이전에 확인했을 때하고 몸이 완전히 바뀌어서 모르겠다고!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뒤져도 반대했겠지, 근데 지금은 나도 몰라! 씨발 좆도 모른다고!”
“그러면 열어보면 되잖아.”
에라실의 발언에 안톤을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그게 뚝딱하고 되는 일인지 아냐?”
“나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네발로 풀밭을 기어 다니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냄새를 맡던 에라실은 쪼그려 앉아 우물거리던 풀을 뱉었다.
“샤하나즈가 목숨을 걸었으면 넌 응해줘야지. 안 그러냐?”
“난 목숨가지고 도박을 하지 않아. 내가 아무리 썩어빠졌어도 의사거든?”
그러자 에라실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고, 안톤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순식간에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마냥 뛰쳐나가 안톤을 덮치곤 소매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곤 누군가 막기도 전, 안톤의 목 바로 옆에 단검을 박아 넣곤 천천히 입을 벌렸다.
으르렁거리는 에라실의 입 안에는 일반인보다 1.5배 정도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거렸지만, 그는 안톤을 물어뜯는 대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네가 스펜서한테 한 일을 생각하면 똑같이 해버리고 싶거든? 근데 너한테 죽을 뻔 했던 샤하나즈가 널 믿고 목숨을 맡겼어. 근데 넌 거기서 같잖은 네 철학이나 내세우는 거야?”
안톤을 내려다보는 에라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침을 뚝뚝 흘렸다.
“그래서 나보고 별 소득도 없이 저 새끼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을 하라고? 누구보다 가족을 아낀다는 새끼들은 어디 갔냐?”
“아끼니까 그 사소한 확률에 걸겠다는 거잖아.”
리암은 안톤을 덮친 에라실을 옆으로 밀쳐냈다.
자신에게 리암이 손을 내밀었지만, 안톤은 이를 쳐내곤 혼자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래, 개좆새끼들아.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근데 누가 죽어도 내 탓은 하지 말라고.”
리암이 정지한 샤하나즈를 눕혀둔 동안, 안톤은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양철 상자를 꺼냈다.
그러나 그 상자를 가지고와 샤하나즈의 옆에 앉자 그의 가슴을 만진 안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그가 가방에서 수호자의 수리에 쓰이는 절단기를 가져오자 리암의 표정이 구겨졌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에라실하고 레티시아 누나가 없다고 막 나가자는 거야?”
“그래, 말 잘했네. 에라실이 그 3번 전대 출신이라 했었지? 지금 당장 불러와봐.”
“뭐?”
절단기를 몇 번 작동시켜 상태를 확인 안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샤하나즈의 몸만 살폈다.
“내부는 어떨지 몰라도, 외부는 완전히 수호자마냥 장갑이야. 아마 이건 네가 아니라 그 녀석이 돕는 게 더 나아.”
“이전에는 혼자서 수호자를 수리 했잖아. 근데 여기서 갑자기 도움이 필요하다고?”
리암이 계속 따지고 들자 안톤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윗옷을 벗어 던졌다.
이전에 섬세한 기계 팔들이 자리했던 곳에는 부서진 관절과 구멍에서 튀어나온 짤막한 철사만이 남아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희미한 푸른 증기를 뿜어냈다.
“일이 있어서 죄다 뜯어냈다. 나도 너희 같은 초짜 도움 받기 싫은데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그니까 당장 갔다 와라.”
리암은 그의 상태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숲 속으로 향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안톤은 리암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곧바로 샤하나즈의 몸에 절단기를 가져다 댔다.
“뭐야?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니었어?”
모든 것에 신경을 끄고 눈을 감은 아리아드네와 달리 안톤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이샤는 곧바로 손을 틀었고, 그와 함께 절단기의 작동이 멈췄다.
“아니 씨발년아. 너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말이 다르잖아.”
“니미, 여는 건 처음부터 혼자 할 수 있었어. 원래 수술에 있어서 환자 관계자는 수술실에 들어오지도 못해. 알겠냐 씨발년아. 시간 없으니까 빨리 손 치워.”
안톤은 아이샤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절단기의 전원을 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단기가 움직이자 안톤은 조금이 머뭇거림도 없이 샤하나즈에 가슴에 가져다댔다.
피부를 대신한 장갑을 절단해 양쪽으로 뜯어내자 동맥을 대신한 파이프들이 폐를 대신한 펌프를 감싸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을 금속으로 만들어진 늑골이 감싸고 있었다.
마치 기계와 금속으로 인간의 장기를 섬세하게 따라한 작품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는 안톤은 다시 절단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톱니바퀴가 박힌 흉골에 절단기가 닿은 순간 푸른색 스파크가 튀며 절단기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애미 씨발!”
“뭔데? 또 무슨 일이야?”
안톤이 소리를 지르자 아이샤가 즉각 반응했다.
절단기가 고장난 충격 때문인지 안톤은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았고, 그녀에게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샤하나즈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샤와 아리아드네가 샤하나즈의 시간을 멈춰 출혈 같은 것은 없었지만, 지금의 상태라면 흐를 혈액이 한 방울이라도 남아있을지 의문이 드는 모습에 안톤은 얼굴을 구겼다.
“아리아드네라고 했냐? 잠깐 이리 와봐.”
“나는 너에게 볼 일 없는데.”
여전히 눈을 감은 아리아드네가 무관심하게 대답하자, 안톤은 땅에 절단기를 집어 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씨발년아! 내가 볼 일 있으니까 오라고 하는 거잖아. 후장을 포함한 네 모든 구멍에 이 좆같은 절단기를 처박아버리기 전에 빨리 오라고!”
그럼에도 아리아드네가 반응이 없자 안톤은 방금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고장난 절단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아리아드네의 입을 노리고 절단기를 우겨넣으려하니 멀리서 네 발로 뛰어온 에라실이 안톤의 팔에 달려들어 으르렁거렸다.
“진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네. 너한테는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하냐?”
거의 개를 다루는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에라실을 안톤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은 리암은 경멸 섞인 눈으로 안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안톤은 헛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는 것 같은데.”
“뭐가, 네 양심?”
“아니, 저 새끼 심장 말 하는 데.”
안톤은 아리아드네의 어딘가에 우겨넣으려던 절단기를 대강 땅에 떨어뜨렸다.
그의 발언에 으르렁거리던 에라실은 조금씩 경련하는 몸을 이끌고 누워있는 샤하나즈에게 향했다.
이제는 이족보행마저 포기한 것인지 손으로 땅을 짚고 있었지만, 샤하나즈에게 도달한 에라실은 열린 샤하나즈의 가슴팍에 단단히 붙어 유심히 살폈다.
“아가악..... 아익..... 아이익..... 으익......”
샤하나즈의 가슴에서 떨어진 에라실은 간신히 입을 움직이며 무엇을 말하려 했지만 나오는 것은 제대로 되먹지 못한 옹아리뿐이었다.
본인도 답답한 것인지 손으로 억지로 움직이는 에라실을 바라보던 안톤은 설명을 바라는 것인지 리암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알 것 없어. 그보다 심장이 없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병신이야? 심장을 꺼낼 방법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심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 답답한 것인지 에라실은 유인원마냥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한 바탕 요란한 소리가 숲속을 맴돌고 나서야 서로를 노려보단 두 명이 에라실에게 시선을 돌렸고, 손으로 턱과 윗 입을 붙잡은 에라실은 천천히 입을 놀렸다.
“아악! 힌.....당......! 어.....익.....!”
“심장 여기?”
리암이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되묻자 에라실은 과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대......! 두........보...다.....!”
“전개......? 수호자.......?”
“그러니까, 네 말은 사람을 수호자를 다루는 것처럼 전개시키자고?”
안톤이 문장을 완성시키자 에라실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톤은 헛웃음만 쳤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라고? 사람이 타는 수호자라면 몰라도 이건 수호자에 잠식된 인간이야. 전혀 다른 문제라고.”
“그건 내가 해볼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아리아드네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너는 왜 나서려는 거야?”
“한낱 의사가 올드원보다 세피로트에 대해 잘 안다는 거야?”
“아니 씨발, 그게 아니라 왜 뒤진 새끼마냥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대려는 거냐고 개년아.”
아카이브 안에서만큼은 시간도 정지시킬 수 있는 올드 원이었지만, 안톤은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그는 아리아드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아리아드네 또한 그런 안톤의 태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지 그를 비켜 지나 샤하나즈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샤하나즈를 멈추는데 조금 더 집중해. 지금부터 나는 다른 작업에 들어갈 거니까.”
“으, 응.......!”
“이 개좆새끼야! 뭐 하자는 거냐고!”
잔뜩 흥분한 안톤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잡아당기려했지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펼치자 허공에는 불씨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바늘이 생겨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에게는 그냥 환자겠지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야.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한테 맡긴다는 것부터가 실수였네.”
공중에 고정된 바늘들은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걸어 나온다면 급소에 파고드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하는 수 없이 안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안톤이 한 발 뒤로 물러난 뒤로 약간 시간이 지나자 아리아드네는 바늘을 샤하나즈의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씨발 뭘 하겠다고? 절단기 박살난 것 안 보여?”
아리아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수십 개의 바늘을 샤하나즈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 주변에 찔러 넣고, 꼭두각시 인형을 움직이는 것처럼 열 개의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푸른색 섬광과 함께 바늘 몇 개가 부서져 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늘의 움직임이 안정되며 서서히 톱니바퀴를 회전시켰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세 손가락을 움직이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선 땀방울이 조금씩 떨어졌고, 불길이 타오르는 그녀의 팔에는 살이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언니......”
“네 일에나 집중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이샤를 무시한 아리아드네는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툭 당겨지자 손목을 천천히 돌렸고, 몇 분 동안 반의반도 돌아가지 않은 톱니바퀴는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았다.
톱니바퀴가 돌아가자 금속으로 만들어진 샤하나즈의 늑골이 양 옆으로 천천히 열렸다.
심장이 있을지 확신이 없다는 안톤의 걱정과는 달리, 폐를 대신했던 펌프를 양쪽으로 분리시키자 샤하나즈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 여전히 붉은 심장을 중심으로 아직 금속으로 변하지 않은 혈관과 기관들이 위치했고, 무엇보다 톱니바퀴 아래의 원뿔에서 진홍빛 나무뿌리가 자라나 심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내 분야니까 내가 할게.”
화상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지고 피가 배어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본 안톤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나머지는 아이샤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반쯤 안톤의 말을 무시한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불길이 천천히 가라 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했는데도 티페레트가 무사하지 못하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차가운 시선으로 안톤을 노려본 아리아드네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물과 피가 타고 내려 그녀가 지팡이를 짚은 자리에는 작지만 비참한 웅덩이가 만들어졌고, 숲 속으로 향하는 그녀를 사일러스가 뒤따랐다.
“저기 괜찮아.....요?”
상처의 고통을 참아내는 라이아드네에게 다가간 사일러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날이선 그녀의 시선에 기가 눌린 것인지 눈이 마주치자 사일러스는 굳은 채로 살짝 뒤로 물러났고, 땅에서 풀을 뽑아 상처의 열기를 식히는 아리아드네는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무슨 일이지. 가서 네 가족이 위험하지 않은지 감시해.”
“사일러스는 리암하고 에라실이 있으니 괜찮지만, 당신은 아무도 없잖아요? 누군가는 도와야죠.”
“아이샤 때문이지?”
아리아드네의 상처를 보려던 사일러스는 정곡을 찔려 눈만 굴릴 뿐이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사일러스에게 손을 들어 상처를 보였다.
여전히 말없이 아서의 안에서 꺼내온 응급약품 상자를 꺼낸
“뭐해, 뭔가 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약품 상자 안에서 술을 꺼내 아리아드네의 상처를 씻은 사일러스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니까...... 아이샤씨의 언니가 맞는 건가요?”
“아니. 그냥 오래 알고 지냈을 뿐이야. 저 녀석이 멋대로 나간 이후로는 연을 끊었지만.”
“멋대로요?”
멀리서도 술냄새가 날 정도로 독한 증류주로 피와 진물을 씻어내고 있었지만,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어할 수 없는 아이였어. 그러니 우리 해방군과 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로샨에 잠입해 있던 거지.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도우려면 안에 있어야 한다면서.”
“그래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우리도 구해줬고, 적대적이지 않은 수호자와 기사들도 있으니 이득 아닌가요?”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상처를 씻은 사일러스가 붕대를 꺼내자 자신의 손에 남은 술과 핏물을 털어냈다.
“지금이니 그런 말이 나왔겠지. 만약 밤의 전쟁 때 저런 식으로 나왔다면 개죽음을 피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했는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아드네의 손에 붕대를 감던 사일러스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손이 멈췄다.
“잠깐만요. 밤의 전쟁 때는 얌전했다니요? 꼭 그때 계셨던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들리는 게 아니라 진짜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나도, 아이샤도 그 전쟁을 겪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사일러스는 그녀의 손에 감아주던 붕대마저 떨어트리곤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그, 그러니까 밤의 전쟁이 지금으로 따지면 12만 번 정도 밤낮이 바뀔 정도로 오래 전에 일어났으니까......”
“최소 네 녀석 보다는 20배 이상 살았다는 거지.”
“농담하시는 거죠? 설마 그게 진짜일 리가..... 아무리 봐도 저하고 비슷해 보이는데......”
그런 사일러스에게 아리아드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붕대가 반쯤 감긴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올드 원들이 개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지 않는 이유가 있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봐야 하니까. 그게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의 비극이지.”
아직도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당황하는 사일러스 대신 붕대를 마저 감은 아리아드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아이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네가 가깝게 지내면 지낼수록, 아이샤가 받을 상처는 점점 깊어질 테니까.”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표정을 구기며 혀를 찼다.
“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네, 하여간 습관이란.”
“그러면 연을 끊은 건.......”
“루모르가 죽은 이후. 그 이후로 처음으로 로샨의 뒤틀림을 보았으니까. 그때 나는 내부에선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고 로샨을 나와 해방군을 모았지만, 아이샤는 여전히 도시에 희망을 가졌지. 그 무지한 순진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무언가를 쥐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티페레트를 처음 발견하곤......”
“잠깐만.... 어떤 루모르요?”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사일러스는 잠시 혼동이 온 것인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어떤 루모르 말고 너희가 아는 첫 번째 루모르. 그때 당시에는 성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까.”
말을 이어가던 아리아드네는 사일러스가 눈을 피하니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를 자세히 살폈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너를 보니까 그때 죽었던 루모르가 생각나네.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
“전혀요.”
조금은 잘라서 대답한 사일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 안 그래?”
“애당초 제 이름부터 사일러스 모토르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루모르님이 죽고 난 이후로 얼마나 지나고 나오신지 모르겠지만, 지금 루모르 가문의 일원은 머큐리 대장을 제외하면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거든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기사일 리가 없잖아요?”
사일러스는 손사래 치며 대답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사일러스의 얼굴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사일러스는 급하게 자리를 떴고, 아리아드네는 고통이 서서히 밀려오는 손을 조금씩 움직여보며 그 뒷모습을 지긋이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