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35화 (35/50)

〈 35화 〉 등가 교환 ­ 4

* * *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어둠 속, 빛나는 나무 한 그루.

샤하나즈에게는 낯익은 풍경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홀로 서있던 이전과는 달리 그의 발밑에는 목에 선명한 검붉은 손자국이 남은 티페레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를 보고 샤하나즈는 손을 뻗었지만, 검은 장갑이 피부를 대신한 그의 손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무심코 뻗은 손에서 흘러내린 선혈은 티페레트의 얼굴에 떨어지며 잔혹할 정도로 선명한 혈흔을 남겼고, 잠시나마 잊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는 샤하나즈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무릎 꿇었다.

“......!”

입을 열어도 죄책감이 목을 틀어막아 소리 없이 오열하는 샤하나즈의 앞에 나시르가 다가왔다.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너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줘.”

“뭐?”

끊길 것 같은 숨으로 간신히 말을 꺼낸 샤하나즈는 나시르의 발밑에 머리를 숙였다.

“도와줘.......”

“내가 왜?”

나시르는 이전의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아닌,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샤하나즈의 부탁을 일갈했다.

그가 발밑에 머리를 숙인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 티페레트의 시신을 안아든 그는 그녀의 얼굴에 떨어진 피를 닦아 냈다.

“이제 네 얼굴은 보기도 싫으니, 그냥 나무의 양분이나 되라고.”

티페레트를 안아든 나시르가 뒤를 돌자, 빛나는 나무의 껍질이 열리며 사슬이 그의 손과 발을 묶었다.

그러나 무력하게 끌려가던 이전과는 달리 사슬에 묶여있음에도 샤하나즈는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며 나시르를 따라 잡았다.

“제발....... 도와줘.”

“꺼져.”

나시르는 샤하나즈를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사슬을 당기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럼에도 억지로 자신을 따라온 샤하나즈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니 나시르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멈춰섰다.

“내가 널 도와줘야 할 이유가 뭔데?”

“티페레트...... 티페레트를 위해서.......”

“말은 좋은데 하나만 물어보자.”

그 말을 신호로 더욱 두꺼운 사슬이 샤하나즈의 팔과 다리에 감겼고, 샤하나즈가 여전히 저항하니 아예 팔다리를 뜯어버릴 생각인지 몸에서는 점점 금속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울러 퍼졌다.

“대체 내 딸을 죽인 놈의 부탁을 내가 왜 들어줘야 하는 건데.”

뒤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잔뜩 힘이 들어가 부들거리는 손만 보더라도 그가 느끼는 감정을 쉽사리 엿볼 수 있었다.

“티페레트를 위한다는 말은 쉽겠지. 근데 내 딸을 다시 살린다 해도 뭘 하려고. 그걸 위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분을 참을 수 없는지 호흡이 점점 빨라지는 나시르는 티페레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잠시 숨을 골랐다.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내 딸을 죽인 살인자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바로 잡으려고 하는 거잖아......”

“바로잡아?! 네가 바로 잡는다고!”

순간 목소리를 높인 나시르가 주먹을 쥐자 샤하나즈의 오른팔에 묶인 사슬이 순식간에 잡아당겨지며 그의 팔을 뜯어냈다.

“아아악!”

“네가 뭔데! 티페레트에게 선택받은 부품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냥 부품이 아니야......”

문자 그대로 사지를 뜯어내는 고통에도 샤하나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나는 티페레트를 움직이는 엔진이자, 티페레트에게 인정받은 기사라고.....”

그러곤 남은 오른팔로 자신의 가슴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기사인 내가 가진 마지막 걸 티페레트에게 줬어. 나에게는 아직 가족이 있지만, 티페레트에게 남은 건 기사이자 엔진인 나 뿐 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시르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이내 그의 왼다리가 뜯겨 나갔다,

“오답. 질문과 관련도 없잖아.”

뒤이어 그의 오른 다리까지 뜯겨 나가자 샤하나즈에게 남은 것은 오른팔 뿐 이었지만, 그는 지면에 손가락을 박으면서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내가 왜 내 딸은 죽인 놈을 도와야 하는 건데. 빨리 대답해 보라고.”

“너도 나와 다를 게 없으니까.”

샤하나즈의 대답에 나시르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샤하나즈를 내려다보았다.

“너......”

“처음으로 티페레트를 그렇게 만든 건 너였잖아. 그런 사람이 살인자를 왜 도와야 하냐고 물어볼 자격이 있어?”

“내가....... 무슨........ 각오로...... 티페레트를......”

한 손으로 티페레트를 더욱 끌어안은 나시르는 한쪽 팔로 버티는 샤하나즈를 집어 들어 눈을 마주쳤다.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어찌 되었건 너도 티페레트를 똑같이 이용한 거잖아.”

샤하나즈 또한 그와 같이 단호하게 말을 끊자 나시르 또한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쌓이는 분을 참지 못해 손이 계속 떨렸지만, 정작 이를 샤하나즈에게 쏟아낼 수 없었다.

“난 최소한 달라. 너와 똑같을 실수를 했지만, 너처럼 도망가는 대신 내 목숨을 걸고 바로 잡으려고 한다고. 목숨에는 목숨을. 가장 명료하고 단순한 등가교환이잖아.”

나시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샤하나즈를 내려놓자 그를 잡아당기는 사슬도 멈췄다.

“만약 말이야..... 만약......”

마지막으로 티페레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나시르는 망설이는 손길로 샤하나즈의 앞에 티페레트를 내려놓았다.

“만약 네가 내가 저지른 실수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실수?”

“내가 이전에 수호자의 본분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나?”

“지키는 것이라고 했잖아.”

여전히 티페레트에게서 눈을 떼지 하는 나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키는 것, 그런데 단 한 순간 내가 그 본분을 어긴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 단 한 순간.......”

목이 막히는지 말이 끊긴 나시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 한 순간으로 끝이었지. 그걸로 더는 되돌릴 수 없었어.”

“대체 뭘 한 거야?”

“티페레트를 죽였어. 내게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고통스런 신음을 낸 나시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짚었다.

“너도 그 순간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 그렇지 않다면 티페레트를 위해 네 목숨을 걸었을 리가 없으니까. 결국 나와 똑같은 거야......”

말을 이어가지 못한 나시르는 무언가를 조작하는 것 같이 손가락을 움직였고, 그와 함께 새로운 쇠사슬들이 나타나 샤하나즈의 몸을 감았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그를 나무의 안쪽으로 끌고 가는 대신, 뜯겨나간 그의 팔다리를 가져와 아무렇지도 않게 뜯겨나간 부위에 붙였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가느다란 사슬은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슴 속 깊이 사슬이 파고들며, 점점 체내에서 뭉쳐갔지만, 샤하나즈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이를 참아내며 나시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도 너에게 도박을 거는 거야. 나와 똑같은 네가, 내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실수를 되돌리는 것을 바라고.”

마지막으로 샤하나즈의 가슴에서 이어진 사슬의 반대쪽 끝이 티페레트의 시신의 가슴으로 파고들자 미세한 고통이 사슬을 타고 샤하나즈에게 전해졌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는 어떻게 나가야 하는 거야?”

이미 뒤돌아 나무로 향하던 나시르는 샤하나즈르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여기서 나가는 것은 네가 세피로트의 나무가 가진 의지를 넘어서는 것에 있어. 지금 너와 티페레트의 몸은 세피로트의 나무가 가진 의지만으로 움직일 테니까.”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샤하나즈는 이제는 신체의 일부처럼 변한 톱니바퀴를 쥐었다.

“끄아악....!”

그러나 샤하나즈가 톱니바퀴를 돌리려는 순간 전신을 쥐어짜는 격통에 그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와 함께 티페레트의 시신도 경련하며 피를 토해냈다.

“쉽지는 않을 거야. 내가 만들어낸 최고의 무기니까.”

잠시 멈춰선 나시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 주저하더니 고개를 돌려 바닥의 티페레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만약 정말로 네가 티페레트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아이의 곁에 있어줘. 삶의 마지막까지, 그 이후까지도 티페레트를 불행하게 만든 나는 하지 못한 일이니까.”

“미안해. 그건 나도 장담은 못 하겠어.”

숨을 고른 샤하나즈는 다시 가슴의 톱니바퀴를 잡았다.

“그렇지만 내가 손에 쥔 것은 무조건 지켜낼게. 이 반쪽짜리 목숨을 버리는 일이 있어도.”

그리고 숨을 참은 샤하나즈는 한 순간에 톱니바퀴를 돌렸고, 전신을 갈아내는 격통과 함께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다리에는 힘이 풀리고 숨은 점점 막혀왔지만, 마지막 순간 샤하나즈는 손을 뻗어 티페레트의 손을 붙잡았고, 완전히 어두워진 그의 시야가 다시 밝아진 순간 보인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푸르른 초원이었다.

“샤....하.....나즈.......”

자신을 부르는 익숙하지만, 육성으로는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에 샤하나즈가 고개를 돌리니, 힘이 빠져 늘어진 그의 손을 싶은 상처가 가득한 아이의 손이 붙잡고 있었다.

릴리스의 몸을 한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와 눈이 마주치자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전신을 울리는 격통으로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반가운 목소리들이 웅성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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