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36화 (36/50)

〈 36화 〉 현실

* * *

“다시 설명해줘. 무슨 일이 있었다고?”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샤하나즈의 질문에 질린 것인지 안톤은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너 새끼가 세피로트의 나무로.....”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씨발 거짓말 치지 말라고! 대체 무슨 적이 들어온 거냐고! 똑바로 말해!”

“야 이 개좆새끼야. 누구는 씨발 욕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냐? 니미럴 면상에 아가리 대신 걸레마냥 펄럭거리는 후장이 처 달린 건가, 왜 씹창난 그 주둥이에서 말이 아니라 똥을 싸지르는 건데 씨발년아.”

샤하나즈를 한 대 치고 싶었는지 안톤은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이전에 금속으로 된 샤하나즈의 몸을 걷어차고 오히려 자신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작은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내렸다.

“네 탓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 우리도 그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고, 너도 무사히 우리가 아는 샤하나즈로 돌아왔잖아?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잠든 티페레트를 등에 업은 레티시아는 약간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샤하나즈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눈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숙일 뿐 이었다.

“미안해 누나..... 나 때문에......”

“어허, 방금 내 말은 들은 거야? 네가 사과할 건 없다니까. 너도 마지막 순간에는 원래대로 돌아 왔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 아니겠어?”

“사과는 나한테 해야지 니미 씹새끼야. 너 때문에 내 일이 몇 배로 늘었는데.”

안톤은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여전히 스펜서에 탑승한 에라실을 제외하면 다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고, 그에 더해 수호자는 처참하다는 단어 말고는 묘사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샤하나즈는 이제 얼굴을 들 수도 없는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얼굴을 가렸다.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참아내려 했지만, 금속으로 변한 몸 중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살아있는 부위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숨길 수 없었는지 얼굴을 가린 손아래로 검붉은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다 내 잘못이야. 무엇하나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샤하나즈는 피가 흥건하게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구토를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티페레트도 그랬어. 지키지도 못하고 직접 죽여 버리고, 이제는 가족까지 죽이려 했다고. 무슨 의미를 찾아.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 유일한 존재 의의잖아.....”

“그런 말. 하지 마......”

얼핏 보면 눈을 파낸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샤하나즈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레티시아의 등에서 자책을 듣고 있던 티페레트가 입을 열었다.

“결국 전부. 바로 잡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여기 있잖아. 너 덕분에. 진짜 자유로워. 졌어.”

아직 육성으로 긴 문장을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말이 조금씩 끊기는 티페레트는 레티시아의 등에서 내려왔다.

혼자서 걸으려 한 것 같았지만, 걷는 것도 역시 다를 것이 없는지 몇 걸음 가지도 못해 다리가 꼬였고, 이러한 티페레트가 넘어지기 전 레티시아가 잡아주었다.

그럼에도 티페레트는 해맑게 웃었다.

“직접 움직이는 건. 어렵네. 말하는 것도. 진짜 내 몸을. 가진 것은 처음. 이라서 이상한. 기분이야.”

걸음마를 하는 갓난아기마냥 레티시아의 도움을 받는 티페레트는 조금씩 샤하나즈에게 다가갔지만 샤하나즈는 오히려 자리에서 일어나 숲의 안으로 더욱 깊이 향했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검붉은 흔적이 그의 발걸음 마다 푸른 잔디 위에 선명히 남았지만, 그 누구도 그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이게 뭐냐고....... 대체 난 뭘 한 거냐고......”

“뭘 하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한 거지.”

신체가 바뀐 탓인지 억누르는 것을 멈추더라도 울음은 터지지 않아 한없이 검붉은 액체만 쏟아내는 샤하나즈의 혼잣말에 누군가 대답했다.

황급하게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쓸어낸 샤하나즈가 위로 시선을 올리자,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살색의 향연에 곧바로 눈을 돌렸다.

“안녕. 상태가 재밌어 보이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로샤나크는 공중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샤하나즈에게 손으로 인사했고, 눈을 가린 샤하나즈는 고개를 저었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우리 일은 저번 그걸로 끝난 것 아니야?”

“너하고는 끝났지. 근데 안톤 하고는 아직도 계약을 유지하는 중이거든.”

“뭐?”

다른 사람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사뿐히 땅에 내려온 로샤나크는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다.

“로샨을 파괴하는 건 미뤄두는 걸로 결정 났어. 아이샤가 빠진 자리에 내 사람을 심어둔 것도 있고, 네가 말했던 대로 모든 잘못은 네가 뒤집어쓰게 됐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25번 구역의 복구 작업을 하는 중이야.”

그 말에 샤하나즈가 자신을 바라보니 로샤나크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뭐? 네가 그렇게 하라며?”

“알았으니까 그보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로샤나크를 바라보려 했지만 여전히 무리인지 샤하나즈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얼굴은 조금도 붉어지지 않았지만, 어디에 둘지 모르고 떨리는 시선에 로샤나크는 영악하게 웃으며 샤하나즈에게 몸을 들이 밀었다.

“안톤이 구해달라는 물건이 있어서 선금을 좀 받아가야 하거든. 그런데 이제 인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도 여전히 숙맥이네?”

“제발 좀 닥쳐.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니까. 일은 다 봤으면 나가.”

“아직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그냥 네가 있어서 가장 먼저 너한테 와 본 것 뿐 이야. 돈도 돈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날 놀리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는 몰랐는데.”

그러나 얼굴에 웃음기를 거둔 로샤나크는 그런 샤하나즈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그의 투덜거림을 일갈했다.

“릴리스.”

둘 사이 순간적으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샤하나즈는 다른 의미로 로샤나크의 눈을 피했다.

“네가 돈을 주고 샀잖아. 그럼 끝까지 책임져야지. 그게 창관의 규칙이거든. 그래서 릴리스는 어떻게 됐어?”

샤하나즈는 끝까지 대답을 피하려 했지만, 로샤나크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듯 허공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주는 압박을 이기지 못한 샤하나즈는 혀끝에 맴돌던 말을 뱉으려 했지만, 티페레트의 목소리가 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거기. 있었구나. 찾느라. 힘들었다고.”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기마냥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샤하나즈가 있는 곳 까지 도착한 티페레트는 그의 근처에 주저앉았고, 로샤나크는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게 안톤이 시체를 구해달라는 이유였구나.”

티페레트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지만, 샤하나즈는 티페레트와 거리를 벌렸다.

수호자처럼 변한 손으로 온 몸에 상처가 가득한 티페레트를 만졌다가는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아 두려웠고, 샤하나즈는 자신의 눈을 가렸다.

“미안해.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내가 보기에는 그걸로 충분 한데?”

티페레트와 거리를 벌리는 샤하나즈 대신 로샤나크는 그런 티페레트의 머리를 약간 헝클어질 정도로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지만, 티페레트는 그런 손길이 싫지는 않았는지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너 알아. 샤하나즈 기억에서. 본 적 있어.”

“재미있네. 기억까지 공유한다니, 역시 세피로트는 알면서도 모르겠다니까.”

“이름은 로샤나크. 변태라고.”

티페레트의 대답에 샤하나즈를 살짝 돌려본 로샤나크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를 듣고 주변을 살피던 레티시아와 안톤이 달려왔다.

“갑자기 가면 어쩌자는 거야.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

“뭐야. 물건은 밖에 있는데 여기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야?”

티페레트를 걱정하는 레티시아와는 달리 로샤나크와 마주친 안톤은 표정을 구기며 레티시아의 말을 잘랐다.

“나는 저 멍청이 기사가 뭘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서 들어왔을 뿐이야. 그리고 아카이브 안인데 딱히 물건 위치가 중요할까?”

레티시아가 티페레트를 다시 업기도 전, 로샤나크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가볍게 원을 그리자 불꽃으로 사람 머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공에 구멍이 뚫렸고, 로샤나크는 그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루를 잡아당겼다.

입구를 묶은 끈을 풀자 안쪽에선 동전이 쏟아져 나왔고, 로샤나크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동전 한 닢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작게 헛웃음을 치며 동전을 튕겼다.

“어쩐지, 이러니까 선뜻 돈을 지불한다고 한 거였구나?”

“문제라도 있어?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위폐잖아. 내가 이 정도도 못 알아볼지 알았어?”

“아.....!”

다급한 레티시아가 대화를 끊기도 전에 로샤나크는 땅에 수북하게 쌓인 동전을 발로 밀어내며 8번 전대 전원이 숨겨왔던 사실을 꺼냈다.

“너도 많이 무뎌진 것 같다? 이 정도 위폐로 날 속여 넘기려하다니.”

그러나 안톤은 무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한두 푼이면 몰라도 이렇게 많다면 대충 만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무게 차이가 있으니까. 근데 그게 중요한가?”

안톤은 로샤나크가 튕긴 동전을 집어 들었다.

“중요한 건 위폐라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유통시키는 거지. 유통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진짜야. 그리고 창관에서 기사들을 통해 유통한다면 눈치를 챈다고 해도 밝힐 수 있겠어?”

마치 어울릴 것이냐고 묻는 것처럼, 안톤은 동전을 튕겼다.

아직도 고민을 하는 것인지 로샤나크가 눈가에 살짝 힘을 주니 안톤이 튕긴 동전이 공중에 멈췄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동전이 움직이며 로샤나크가 동전을 받았다.

“그래서 나를 이용하겠다는 거냐?”

“그렇다고 3억 일리아스를 거절할 생각이야?”

“부족하지.”

“그러면 어쩌라고? 나도 5억까지 밖에 없어.”

로샤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금액을 늘리는 게 아니라 만든 사람을 연결해줘.”

“잘 됐네. 안 그래도 그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그 말에 안톤이 말을 더 이어가기 전,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기다려봐, 내가 한 번 맞춰 볼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눈을 감은 로샤나크의 옆으로 불기둥이 솟구치며 지팡이를 짚은 아리아드네가 나타났고,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로샤나크를 발견한 그녀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스승님. 그간 안녕하셨나요?”

“너도 많이 컸네. 꼬꼬마였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벌써 한 집단에 수장이 되었잖아.”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미소 짓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을 보인 로샤나크는 안톤이 자신에게 튕겼던 동전을 아리아드네에게 튕겼다.

“인사치례는 넘어가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이거 네가 만든 거지?”

아리아드네는 동전을 받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따라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이샤와 거래를 통해 로샨 내부에서 사용 중인 거푸집을 확보 했으니까요.”

“좋네. 그러면 우리하고 손잡아 볼 생각은 없어? 이쪽은 복구 작업을 해야 되서 돈이 좀 모자라거든.”

“싫습니다.”

순조롭게 이어질 것 같던 대화는 아리아드네의 단호한 거절과 함께 끊겼고, 허공에 옆으로 늘어져있던 로샤나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지?”

“왜 안 하겠는지 물어보기 전, 제가 해야 할 이유를 주시죠. 제가 어째서 로샨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죠?”

분노로 떨리기 시작한 아리아드네의 손에 감긴 붕대 아래에선 푸른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일고, 조절하지 못하는 열기로 인해 주변의 풀들이 서서히 늘어지며 말라비틀어졌다.

“다시 묻겠습니다. 제가 어째서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들의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죠? 당신이 뭐라고 하던, 그 인간들은 로샨의 인간입니다. 우리에게 그걸 상쇄할 수 있는 이득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저는 도울 생각이 없습니다.”

“너도 많이 컸네. 나에게 내놓고 발톱을 드러낼 줄도 알고.”

로샤나크가 아리아드네에게 처음 인사와 같은 문장이었지만, 담겨있는 의도는 명백하게 달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오묘한 자세로 중요 부위를 자연스럽게 가리던 로샤나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 전신에 푸른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대기마저 태워버릴 것 같이 타오르는 불꽃은 순식간에 압축되어 빛나는 판금과 같이 변형되어 로샤나크의 전신을 감싸는 갑옷이 되었다.

“그런데 크기만 했지, 성장하지는 않았네. 아무리 아카이브 안이라고 해도 똑같은 올드 원인 나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직접 가르친 나를?”

둘 사이에 살의마저 흐르기 시작하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 직전 샤하나즈가 손을 뻗자 그의 장갑 사이로 두 명의 불길이 모두 빨려 들어갔고, 잠시 불길이 빨려 들어간 자신의 손을 살핀 샤하나즈는 고개를 들었다.

“둘 다 적당히 해. 주변에 말려 들 사람이 한 둘인 것 같아?”

얼굴에 핏자국이 가득한 샤하나즈는 두 사람으로 인해 발이 묶인 안톤과 레티시아 쪽을 바라보았다.

레티시아의 등에 업혀있는 티페레트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눈을 돌린 샤하나즈는 장갑 아래로 푸른빛이 맴도는 손을 움직이며 천천히 걸어 두 명 사이에 끼어들었다.

“만약 진짜 싸울 생각이라면 나까지 끼워보던가. 지금 이 기분을 누구에게 풀어내지 못하면 미칠 것 같거든.”

“그건 사양해야지.”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눈과 마주친 로샤나크는 곧바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고, 고개를 살짝 젖혀 샤하나즈 넘어 있는 아리아드네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폐를 만들 수 있는 거푸집을 달라는 것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우리 25번 구역에 위폐를 공급해 주는 것이지. 또 로샨에서 들키지 않으려면 통화량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닐걸?”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로샤나크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걸 위해서 내가 있잖아. 위폐의 유통은 물론 출처까지 숨길 수 있고, 통화량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는 의원급 인물. 어때, 이제 좀 입맛에 들어?”

“그것만으로는 제게 득이라고 할 수 없는데요.”

레티시아의 열띤 설득에도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제가 8번 전대의 인원을 도왔던 것은 그들이 로샨과 적대하는 수호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에게 확실한 이득이 있었죠. 그렇다면 스승님의 제안을 받아 로샨의 인간을 도왔을 때, 저희에게 돌아오는 메리트가 뭔가요?”

“쯧, 이제는 안 통하네.”

“당신에게 배웠으니까요.”

미소를 거둔 로샤나크는 곤란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면 공급이 아니라 거래는 어때?”

“거래 품목은요?”

“아침의 파편.”

“순수한 아침의 파편 그 자체인 이 아카이브가 있는데 그걸로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로샤나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채취해서 가져가는 건 전혀 다른 일이잖아? 그 거대한 녀석의 운행 궤도를 바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

정곡을 찔린 아리아드네가 살짝 눈을 찌푸리니 로샤나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 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초 기지 작동도 제대로 못 시키는 중이라며? 거기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좋습니다. 거래하죠.”

로샤나크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리아드네는 거래를 수락했다.

“거래 장소는 8번 전대가 탈취한 비행선. 5번 밤이 지나가고 나서 낮이 되었을 때 도약을 통해서 보낼 테니까 알아서 잘 받아봐.”

로샤나크가 살짝 손을 펼치자 불기둥과 함께 그녀의 손 안에 파이프 하나가 놓였고, 이를 비틀어서 연 그녀는 주변의 흙을 대강 담았다.

파이프를 닫고 입에 물자 로샤나크의 입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짙고 선명한 색을 띤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라고 불평하지 마. 거래에 응한 건 너니까. 알겠으면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잘 상의해 보라고.”

“잠깐만요!”

동공이 약간 풀린 눈이 푸르게 빛나는 로샤나크는 그대로 사라지려 했지만, 레티시아의 외침에 샤하나즈가 그녀의 몸을 휘감을 불길을 빨아들였다.

“갑자기 왜?”

“왜 저희를 끌어들이시는 거죠? 저희는 그저.......”

“도우려고 하는 거니까 얌전히 따르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야. 나도 너희는 싫지 않거든.”

로샤나크는 파이프를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이며 연기를 뱉어냈다.

“나도 로샨은 별로지만, 그 멍청한 기사 녀석은 마음에 들었거든. 비현실적인 꿈도 그렇고, 그 비현실적인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 행동력도 그렇고. 그리고...... 그때 동정치고 꽤 만족스럽기도 했으니까.”

심기가 불편해진 샤하나즈는 로샤나크에게 손을 뻗었지만. 예전 생각이라도 하는 것인지 살짝 시선을 든 로샤나크는 미소를 넘어 작게 웃으며 샤하나즈와 레티시아를 살펴보았다.

“너희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지만 손댈 수도 없는 괴물들을 가족이란 족쇄로 묶고, 기사로 만들어낸 그 녀석도 대단하지. 그러니 너희가 기대되는 거야. 재미있으니까.”

“제 동생들이 괴물이라니 좀 말이 심하신 것 아닌가요.”

레티시아는 인상을 쓰며 로샤나크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네가 숨기는 것이 있는 만큼 동생들도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것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으니 에버니저가 대단했다는 거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샤하나즈가 레티시아를 돌아보니 살짝 인상이 창백해진 그녀는 슬쩍 샤하나즈의 시선을 피했고, 이를 본 로샤나크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걱정 마. 괜히 그걸 밝혀서 재미를 깰 생각은 없으니까. 어찌되었건, 당분간은 해방군하고 같이 협력 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럼 랑데부 지점은 아이샤에게 전하지.”

그런 로샤나크의 태도가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할 말이 없던 아리아드네는 작게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아리아드네가 자리를 떠나자 안톤이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어 잠긴 목을 풀며 입울 열었다.

“그보다 내가 주문한 부품은 어디 있지?”

“그건 대화하고 있는 동안 내가 아카이브 안으로 다 옮겨놨어. 내가 이걸 왜 가져왔겠어?”

로샤나크는 파이프를 빨아들이며 샤하나즈의 얼굴에 푸른 연기를 뿜어냈고, 이를 맞은 샤하나즈는 장갑 아래에 푸른빛이 돌며 순간 비틀거렸다.

“컥.....커억......!”

목을 붙잡은 샤하나즈가 기침을 할 때마다 푸른 연기를 토해냈고, 티페레트를 안톤에게 맡긴 레티시아는 곧바로 샤하나즈에게 달려갔다.

“샤하나즈 괜찮아? 왜 그래?”

“걱정 할 것 없어. 아침의 파편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니까. 사람으로 치면 사례 들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리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연기를 빨아들인 로샤나크는 음흉하게 웃으며 천천히 불길에 휩싸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너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되네. 너희를 하나로 묶은 에버니저가 없어진 지금, 다음에 볼 때는 몇 명이나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나.”

도발에 가까운 발언에 샤하나즈가 로샤나크를 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미소만 남긴 채 사라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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