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실수
* * *
새로 부착한 기계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돌린 안톤은 다시 용접을 이어나갔다.
멀리서 그런 안톤을 지켜보던 리암은 용접기를 들고 그의 옆에 다가갔다.
“간단한 작업은 나도 할 줄 아니까 다른 수호자들 좀 봐 줘. 너만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
그럼에도 안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장갑판을 용접하고 난 뒤, 손으로 몇 번 두드려 확인하고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보안경을 올렸다.
“원하는 게 뭐야?”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자연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리암은 안톤의 앞에 용접기를 흔들어보였다. 안톤은 자신의 손을 털며 약간 떨어진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누나에게 들었어. 위폐라는 걸 눈치 챘었다며?”
“다른 사람이라면 속았겠지만, 나는 그 정도 돈을 만져본 적이 있으니까 무게가 다른 걸 눈치 챘지. 조금 걸리긴 했어도 너희가 사람을 잘못 잡은 거야.”
“그러면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말 하지 않은 거지?”
파손당한 발레리안의 장갑 사이에 파묻혀 기계 팔로 이것저것 만지고 있던 안톤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잠시 팔을 멈췄다.
“난 기사 새끼들이 싫거든. 내 것을 빼앗아갔으니 그 녀석들이 수호자를 빼앗기며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절망하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나 이런 회상을 얼마 가지 않았고, 이내 용접 불빛과 함께 안톤의 기계 팔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런 표정을 짓지도 않더라. 오히려 그 기사들하고 로샨을 씹창내 버리고는 유유하게 5억 일리아스를 들고 왔지. 아무리 가짜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5억의 가치는 했으니까. 그리고......”
안톤의 기계 팔 중 하나가 틈에서 빠져나와 깔끔하게 정리된 부품들을 가리켰다.
“그 위폐를 유통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으니까 가짜라도 상관없던 거야. 이제 좀 이해 됐냐?”
“다 이해되긴 하는데, 하나가 이상해서.”
용접을 마친 리암은 장갑을 나무망치로 두드려 고정된 것을 확인하곤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기사가 싫다면서, 누구보다 기사를 도와야하는 의사가 된 이유는 뭐야?”
그러자 폭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부신 섬광과 함께 안톤이 장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 리암을 노려보았다.
“거기까지만 하자 씨발 새끼야. 하나하나 캐묻는 거 존나 소름끼치니까 아가리 닫고 용접이나 할래? 손이 떨려서 좆같은 곳을 지져버릴 것 같거든?”
“네가 우리에게 숨기는 것만 없다면 상관없어. 이번 일로 나도 조금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알아봐야 했으니까.”
“주둥이. 조이고. 용접. 이나. 해.”
안톤이 이를 꽉 물고 대답하자 리암은 더는 캐묻지 않았고 용접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이샤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안톤! 혹시 샤하나즈 어디로 갔는지 봤어?”
“아직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건지 또 숲 안으로 들어가던데, 그 새끼는 왜?”
무릎에 손을 얹고 헐떡이는 아이샤는 손을 들어 자신이 온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다른 문이 있어, 이번에는 닫혀 있어. 여기를 출발하기 전에 이 아카이브 안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해야 돼.”
“누굴 찾는 거라면 에라실을 데려가면 될 거야. 그런 쪽에 있어서는 우리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니까.”
여전히 용접을 이어가는 리암이 대답했지만, 누워서 쉬던 사일러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근데 에라실은 스펜서에 들어가서 아직도 안 나왔어. 나라도 대신 갈까?”
“그럼 내가 갈게.”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일러스의 옆에서 아직도 약간 아장거리는 티페레트가 손을 들며 걸어 나왔다.
“거기에 아카이브에 관련된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어. 나 세피로트 였으니까.”
육성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티페레트의 말은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고, 걸음걸이 또한 매 걸음마다 조금씩 나아졌다.
“이 몸도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으니까.”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자신만만한 티페레트의 모습과는 달리 레티시아는 여전히 불안한 것인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티페레트를 지켜보았다.
“이제 혼자 충분히 걸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수호자가 자신의 기사도 혼자 못 챙기면 어쩌겠어?”
활짝 웃으며 대답한 티페레트는 자신 있는 걸음으로 숲 속으로 향했고, 아이샤가 그 뒤를 따르자 굳은 몸을 풀던 사일러스가 뒤를 이었다.
티페레트가 먼저 출발했지만 좁은 보폭과 아직은 조금 어색한 걸음걸이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아이샤가 눈으로 보일 정도로 쫓아왔다.
뒤를 흘깃 보고 아이샤가 쫓아온 것을 확인한 티페레트는 다리에 힘을 풀고는 자연스럽게 넘어졌고, 다리를 쓰지 않고 몸을 일으켜 나무 아래로 몸을 기댔다.
원래 흉터가 가득한 몸이었지만, 방금 전 넘어져 생긴 상처에서는 선명한 진홍빛의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아?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가까이 다가온 아이샤가 묻자 훌쩍이던 티페레트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다리에 힘이 약간 풀렸을 뿐이야. 그보다 샤하나즈가.......”
까져 피가 흐르는 다리를 끌어안은 티페레트는 여전히 훌쩍이며 먼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빨리 가봐......”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티페레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겠어?”
아이샤를 따라가려던 사일러스는 잠시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물었지만, 티페레트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다리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던 사일러스까지 아이샤의 뒤를 따라가자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티페레트는 훌쩍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방향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이브의 벽에 몸을 기댄 샤하나즈의 앞에 섰다.
티페레트가 가까이 온 것을 보자마자 샤하나즈는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티페레트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가.”
“대체 왜 날 피하는 거냐고! 내가 뭐 잘못 한 거라도 있어?”
샤하나즈는 그 손을 뿌리칠 수도, 그렇다고 그냥 잡고 있을 수도 없는 교착 상태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티페레트는 그의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아 당겼다.
“무시하지 마! 날 똑바로 보고 대답하라고!”
“놔 줘.”
“대체 왜! 뭐가 문제인 건데!”
티페레트는 조금씩 울먹이기 시작했다.
“네가 말 해줬잖아! 세상 모두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너는 왜 날 봐 주지 않는 건데!”
금속으로 된 샤하나즈의 팔을 아무리 당겨도 샤하나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티페레트의 몸에 봉합된 부분이 조금씩 벌어지며 피가 배어나왔다.
그럼에도 티페레트는 여전히 샤하나즈의 팔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말 해준 네가 그러면 나는 뭘 믿어야 하는데! 누굴 믿어야 하는데!”
샤하나즈는 간신히 눈을 돌려 티페레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티페레트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
“어째서?”
“난 용서 받을 자격도 없는 무능한 살인자니까......”
“고작 나를 죽여서 그런 거야......? 그럼 여기 있는 건 누군데?”
울먹이는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의 손을 놓고 자신의 앞섬을 열어 봉합 자국이 선명한 가슴을 드러냈다.
“네가 준 심장이 여기 뛰고 있잖아. 네가 나를 목숨을 걸고 살려 줬잖아. 네가 나를 자유롭게 해 줬잖아! 지금도 네가 엔진이 되어서 나를 움직이고 있잖아!”
티페레트의 눈물이 상처가 가득한 얼굴에서 배어나온 피와 섞여 흐린 붉은 자국을 남겼다.
“내가 너를 용서 해 줄게! 뭐가 되었든 다 용서해 줄게! 그러니까 날 봐줘! 눈을 돌리지 말아줘! 네가 먼저 손을 잡아 달란 말이야 제발.......!”
절박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티페레트였지만, 샤하나즈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결국 울먹이던 티페레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다른 길로 갔던 사일러스와 아이샤가 달려왔고, 울부짖는 티페레트를 두고 다시 자리를 뜨는 샤하나즈를 쫓아가 붙잡았다.
“이거 놔줘.”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전까지는 안 돼.”
사일러스는 샤하나즈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티페레트가 잡았을 때와는 달리 샤하나즈는 그 손을 털어내려 했지만, 손목을 쥔 사일러스의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방금 일어났을 때부터, 너 뭔가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모르겠어......”
샤하나즈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머리를 짓눌렀다.
“분명 지킬 수 있는 건 모두 지키겠다고 했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게 그 지켜야 할 것을 내 손으로 부순 거잖아. 호드 같은 적을 불러오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나 자신마저도 위협이라고.”
“네 의지로 한 게 아니잖아. 레티시아 누나도 말 했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걸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때는 내가 아예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오늘같이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피를 토하며 절규하듯, 있는 대로 소리 지르며 대답한 샤하나즈는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모르겠어. 분명 수호자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너희를 위해선 내가 떠나야 하잖아. 본분에서 도망쳐야 본분을 다할 수 있는데,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샤하나즈.”
“티페레트도 마찬가지야. 한 순간에 정신을 잃고 그대로 죽여 버렸어.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안 할 자신이 없다고! 나 스스로가 무섭다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샤하나즈!”
사일러스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샤하나즈의 말을 끊자 샤하나즈는 고개를 들었고, 그와 함께 사일러스의 무릎이 샤하나즈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물론 쇳소리와 함께 샤하나즈가 약간 밀려났을 뿐, 정작 비명을 지르며 날뛴 것은 사일러스였다.
자신의 무릎을 쥐고 한참을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던 사일러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샤하나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수호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수호자 이전에 네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너 원래 이런 놈 아니었잖아. 우리가 아는 샤하나즈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넌 직접 경험하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샤하나즈는 주먹으로 자신의 복부를 가볍게 쳤고, 그와 함께 인간의 몸에서는 날 리가 없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나도 지금 내가 이전의 나와 똑같은지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우리도 몰라.”
사일러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렇지만 다르더라도 믿어주는 게 가족 아니겠어?”
표정에 근심만이 가득한 샤하나즈와는 달리 사일러스는 밝게 웃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 이럴 때 일수록 우리를 조금은 믿어보라고. 우리도 약한 건 아니니까.”
“뭔가 감성적인 순간에 끼어들어서 조금은 미안한데.”
대화가 끊긴 두 명이 끼어든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티페레트를 간신히 업은 아이샤가 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어서 여기 온 거잖아.”
“급한 일?”
샤하나즈가 살짝 눈을 찌푸리니 사일러스는 무언가 잊은 것이 떠오른 것인지 박수를 치며 아이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맞다. 그때 이 아카이브에 닫힌 문을 확인하러 가야 한다고 했지?”
“그래, 티페레트가 거짓말을 한 바람에 조금 일정보다 늦었잖아. 상황을 보니까 티페레트에게 뭐라 하지는 못하겠는데, 덕분에 시간이 더 촉박해진 건 사실이니까.”
“그럼 이 아카이브에 에버니저 전대장이 찾던 것이 있다는 거야?”
사일러스에게 티페레트를 부탁한 아이샤는 허리를 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열어보기 전까지 몰라. 여기도 수많은 아카이브 중 하나일 뿐이니까. 할 수 있는 건 여기 보관된 물건을 확인하고, 다른 아카이브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뿐 이야.”
“뭐야. 너희 보관소를 열 생각이었어?”
“애당초 그게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거기에 봉인된 또 다른 태양을 찾는 것. 그걸로 이 밤을 끝내는 것.”
그러나 사일러스의 등에서 몸부림쳐 빠져나온 티페레트는 허겁지겁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갑자기 뭐하자는 거야? 방금까지는 아카이브에 있어서는 뭐든 도와준다고 했잖아?”
“이상할 것도 없지. 세피로트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부터가 아카이브를 수호하는 것이니까. 만들어진 목적을 따를 뿐이잖아.”
여전히 시선을 돌리는 샤하나즈는 나지막히 대답하며 다시 자리를 뜨려 했지만, 아이샤가 주먹을 쥐자 샤하나즈의 몸에 불길이 타고 오르며 그의 몸을 속박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샤하나즈의 장갑 사이로 불길이 빨려 들어갔지만 샤하나즈의 발길을 멈추는 것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네가 필요한 거야. 세피로트의 목적이 어찌 되었건 그 문을 열어야 하니까. 지금 이런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세피로트에 가장 가까운 건 너잖아?”
그러나 티페레트는 여전히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단순히 아카이브를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야! 너희들 모두를 위해 이렇게 말 하는 거라고!”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아카이브에는 방어 장치가 있어! 강제로 열었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아카이브는 단순한 보물 창고가 아니라 감옥이기도 하다는 말 못 들었어?”
작은 몸을 큰 소리와 팔로 부풀리려는 새끼 고양이 마냥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있는대로 뻗은 팔을 휘두르는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에게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러나 여전히 티페레트를 바라보지 않는 샤하나즈는 단호하게 티페레트의 호소를 일갈했고, 망연자실한 티페레트는 팔을 멈추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게 물리적으로 우릴 막을 수 없는 네가 우리를 막기 위한 절박한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티페레트가 한 순간에 조용해지자 샤하나즈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지 슬쩍 눈만 돌려 확인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상호작용은 없었다.
“일단은 내가 문을 열어볼게. 네 말대로 꼴은 이래도 세피로트의 나무가 있는 수호자나 다름이 없는 몸이니까 뭔가 할 수 있겠지. 먼저 앞서줘.”
“으....응. 알았어.”
무언가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순간 말을 더듬은 아이샤는 곧바로 자리를 옮겼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샤하나즈가 그의 뒤를 따랐다.
정작 관련이 없는 사일러스만이 둘을 쫓아가려다 멈춰 서서 주저 앉은 티페레트에게 향했다.
“괜찮아?”
아직 목이 막혀 답을 못하는 것인지 훌쩍이는 티페레트는 상처가 가득한 팔로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내가 먼저 잘못 한 거니까 괜찮아......”
“그게 아니라 네가 괜찮은지 물어본 거잖아.”
그러자 티페레트는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았고, 훌쩍이느라 제대로 숨 쉬지 못한 탓에 힘겹게 기침을 하며 호흡을 대신했다.
“아니...... 그래도 다시 전할 거야.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샤하나즈를 도와 줄 때니까.”
자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일러스가 내민 손을 사양하고 티페레트는 샤하나즈를 쫓아 다시 어색한 걸음을 내딛었다.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
숲을 해쳐가는 아이샤가 던진 말에 샤하나즈는 가지를 쳐내던 손을 잠시 멈췄다.
“티페레트 말하는 거야. 아무리 이전에 있던 일이 있다고 해도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해서.”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너와 관련된 일도 아니고.”
“그렇기는 하지만...... 어린 애에게 너무한 건 맞잖아. 어떤 면으로 보자면 지금은 너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인데.”
잠시 머뭇거린 아이샤는 샤하나즈의 눈치를 살피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나 말고 다른 의지할 곳을 찾았으면 해서야. 나는 믿을만한 놈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 같던데.”
여전히 샤하나즈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샤는 샤하나즈의 눈빛이 살짝 예리해지자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샤하나즈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이샤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서둘렀고 목적지에 도착해 살짝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땀을 훔치던 아이샤가 고개를 돌리자 닫힌 문 앞을 숨을 헐떡이는 티페레트가 막아 서고 있었다.
자신도 꽤나 서두른 편이었는데, 티페레트는 그 어색한 걸음으로 얼마나 서두른 것인지 무릎과 종아리는 성한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까진 상처가 가득했다.
수많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천천히 떨어지는 다리는 간신히 티페레트의 체중을 유지하는 중이었고, 이식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샤하나즈의 심장이 한계까지 뛰는 것인지 고통스런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발....... 열지....... 말아 줘.......”
“또 이러는 거냐.”
샤하나즈는 그런 티페레트를 차가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나는 목적이 있다고 말 했어. 너를 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비켜줘.”
“내..... 말을...... 들어....달라....고! 거...짓.....말이.....아니.......야......!”
가슴을 부여잡은 티페레트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며 천천히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샤하나즈는 티페레트를 조금도 바라보지 않고 쓰러진 그녀를 지나쳐 문 앞에 섰다.
티페레트가 간신히 샤하나즈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아이샤를 돌아보았다.
“아카이브 안이라서 힘이 강해진다며. 문을 열지 않고, 이 안쪽으로 이동할 수는 없는 거야?”
“그건 아직...... 로샤나크 정도라면 가능하겠지만 나는 못해.”
“그럼 다른 방법은........”
샤하나즈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오기 전에는 자신이 수호자이니 어떻게든 문을 열어보겠다고 했지만, 정작 문 앞에 서니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가 문과 공명하듯 푸르게 빛을 발했고, 작게 중얼거린 샤하나즈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연한 거였잖아. 이미 수호자가 다 되었는데.”
“그 문 잠겨있을 텐...... 어.......?”
아이샤의 말과는 달리 샤하나즈가 가볍게 문을 밀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문 내부는 어떠한 빛도 없었지만, 그 중앙에는 순백색 빛이 밝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감을 발했다.
그 광원의 중심에는 열 개 남짓한, 빛이 응집된 것 같은 직육면체 결정들이 뭉쳐 만들어진 부정형의 응집체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빛을 발하고 있었고, 샤하나즈는 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너도 뭔지 모르는 거야?”
샤하나즈와 같이 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아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둠의 중앙에서 빛을 발하는 부정형 결정체는 점점 격렬하게 진동했고, 눈에 보일 정도로 결정이 불안정해진 것이 보이자 푸르게 빛나던 샤하나즈 가슴의 톱니바퀴가 붉게 색을 바꿨다.
무언가 불길함을 직감한 샤하나즈는 문을 닫으려 했으나, 열렸을 때와는 반대로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샤! 여길 봉쇄해! 시간이고공간이고 뭐고 전부 다! 나를 포함해서 이 문 앞까지 모든 걸 전부 격리해 버리라고!”
“갑자기 무슨.....!”
“지금 당장! 죽기 싫다면!”
아이샤의 팔에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확인하자 샤하나즈는 발목에 매달린 티페레트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희미한 푸른 불꽃이 샤하나즈를 격리하는 돔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결정체가 눈부신 빛과 함께 폭발했고, 샤하나즈와 티페레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