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거미줄 1
* * *
섬광이 눈을 떠나자 샤하나즈는 순식간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상하전후좌우 어디를 살펴보아도 모든 것을 삼길 것만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지만, 주변에 떠다니는 거대한 암석이나 수호자의 잔해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귀나 피부에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주변에 떠다니는 물체들도 제멋대로 이동하여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떨어지는 지, 얼마나 빠르게 떨어지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당초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부유 중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샤하나즈는 품에 안은 티페레트를 단단히 끌어안고 종아리의 배기구를 이용해 희미하게 느껴지는 중력에 따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 말을 듣는 거였는데!”
자세를 바로 잡은 뒤 주변을 둘러보던 샤하나즈는 아래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거대한 암석을 발견했다.
그 위에 거주지로 보이는 건물과 아직도 생기를 유지하는 나무들도 있었기에 단순히 거대한 암석보단 도시의 일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파편이 접근하자 샤하나즈는 이를 악물고 티페레트를 끌어안았다.
“수호자로도 안 하는 짓을 맨몸으로 하다니 미친 것도 정도가 있지......!”
파편과 접근 각을 미세하게 조절한 샤하나즈가 눈을 감자 샤하나즈의 등이 한때 포장된 도로였던 부분과 접촉했다.
곧바로 샤하나즈의 등과 도로가 거칠게 마찰하며 요란한 소음과 스파크를 쏟아냈고, 한참동안 길에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티페레트를 안은 샤하나즈가 정지했다.
착지 당시의 속도를 보여주듯 바닥에 끌린 장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그보다 먼저 티페레트의 맥이 뛰는 것부터 확인한 샤하나즈는 조심스레 그녀를 옆에 눕혔다.
“대체 여기는 어디야......”
지금껏 눈을 떴을 때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던 적은 왕왕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상황이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도 바닥에 누워 있지만, 허공에 떠다니는 거대한 파편들마다 각자의 중력이라도 작용하는 것인지 물이 고여 있거나 조약돌들이 표면에 굴러 다녔다.
여기서 벗어나 일행하고 다시 합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샤하나즈가 탄식하고 있으니 먼지를 들이쉰 탓인지 티페레트가 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샤...... 하나즈......?”
여전히 티페레트를 바라보지 않는 샤하나즈는 끝없이 파편들이 늘어진 위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있어. 네가 경고한대로 뭔가 보안 장치가 발동한 것 같지만.”
티페레트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샤하나즈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보며 다른 파편을 향해 뛸 준비를 했다.
“일단 여기 있어봐. 이 주변을 좀 탐색해 봐야 하니까.”
눈대중으로 착지 지점을 정한 샤하나즈는 전신의 배기구를 열고, 뛰어오르려 했지만 발목에 느껴지는 미약한 악력에 눈을 내렸다.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손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샤하나즈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놔. 너 버리고 가는 것 아니니까. 지금 목숨을 공유하는 사이에 널 버리고 갈 리가 없잖아.”
간략하게 티페레트를 안심시킨 샤하나즈는 다시 도약을 준비했지만, 티페레트의 손은 여전히 샤하나즈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샤하나즈.”
“그래, 이 모두 내 실수야. 됐지? 이제 좀 놔 줄래?”
“샤하나즈.”
“널 안 믿고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이제 만족해?”
“샤하나즈.”
끝까지 티페레트가 발목을 놓지 않고 자신의 이름만 부르니 샤하나즈는 눈을 돌려 티페레트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가 돼서야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의 발목을 놓고는 누더기 같은 얼굴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정말로 싫은 게 아니지? 그렇지?”
그 미소에 당황한 샤하나즈는 자신이 할 말도 잊은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리를 벌리는 게 서로에게 안전하니까.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너를 또.......”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본 샤하나즈는 순간 티페레트를 죽였던 순간이 겹쳐 보였던 것인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지끈 거리는지 관자놀이를 짚은 샤하나즈의 눈에서는 검붉은 눈물이 흘러 나왔지만, 이내 티페레트와 다시 거리를 벌리곤 위를 향해 뛰어 올랐다.
그런 샤하나즈를 배기구에서 푸른 증기가 폭발하듯 배출되며 용수철처럼 뛰어 오른 다시 한 번 가속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왔던 착지 지점에 닿기 전,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샤하나즈의 궤도는 순식간에 뒤틀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방향이 전환되며 자연스럽게 전해져야 할 중력가속도가 느껴지지 않으니 당황한 샤하나즈는 전신의 배기구를 다시 가동시켰다.
이미 가속할 대로 가속한 몸을 멈추기 위해 배기구에선 푸른 불길마저 섞인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샤하나즈의 몸을 덮은 장갑을 달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방향이 틀어진 샤하나즈는 과격한 속도로 다른 파편의 표면에 수직으로 처박혔다.
“이건 대체 뭐야? 추가 가속은 하지 않았고, 어디에 부딪힌 것도 아닌데......”
낙하의 충격에 더해 살이 타는 냄새와 작열통으로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샤하나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뛰어 오른 파편은 처박힌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었고, 보이는 표면 또한 뛰어오를 때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일단 정상적인 곳이 아닌 것은 확실하네.”
충격으로 인해 장갑이 일그러진 것인지 조금씩 삐걱 이는 시작한 몸을 일으킨 샤하나즈는 다시 한 번 뛸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외력으로 인해 방향이 바뀌는 일이 없도록 있는 대로 힘을 모았고, 마치 로크로 해왔던 것처럼 전신을 희붉게 달구며 가속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뛰어 올랐지만, 일직선으로 유지되어야 할 궤도는 순식간에 틀어졌고 샤하나즈는 파편에 남은 건물을 산산조각 내며 표면에 처박혔다.
“이건 또 뭔 지랄인데......”
속도가 속도였던 만큼 지면에 박힌 샤하나즈는 잔해 사이에 끼인 팔을 빼냈고, 한층 더 일그러진 장갑은 움직일 때 마다 삐걱거리며 예리한 통증을 신경에 전달했다.
그리고 샤하나즈가 다시 몸을 일으킨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본 순간은 단순히 거대한 철근처럼 보였지만, 이내 하나, 둘 개수를 늘려가며 그 용도를 명확히 과시했다.
4개의 거대한 금속 다리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경계선을 줄을 타는 것처럼 조심스레 발을 올렸고, 공간에 가려졌던 육중한 반신을 드러냈다.
“거미......?”
전체적인 외형은 거미였지만, 요소를 하나하나 따지자면 그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이었다.
수호자.
몸과 다리를 이어놓는 관절마다 설치된 동력기관은 다리가 움직일 때 마다 증기를 뿜어댔고, 독니가 자리 할 자리에는 푸른빛을 띠는 분쇄기를 중심으로 3줄의 톱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했다.
공간의 틈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머리는 장난이라는 듯, 나머지 네 다리도 모습을 보이자 머리보다 몇 배는 큰,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동력원과 장치가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히 움직이는 크랭크와 피스톤 사이에서 불길과 증기를 뿜어내는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만들어진 경계를 거미줄처럼 타는 그 거미는 배에 늘어진 강철 케이블을 거대한 파편 하나에 늘어트렸고,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보다 3~4배는 되어 보이는 파편을 견인해 갔다.
그리고 유독 긴 두 앞다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니 파편에 앞다리를 박고 주둥이에 자리 잡은 분쇄기를 표면에 처박았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 거대한 파편을 흡수해 갔다.
분쇄기의 톱날은 회전 속도를 높였지만 바위가 갈려나가거나 강철이 마모되는 소음도 없었고, 몸통의 피스톤과 크랭크가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며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내뿜을 뿐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파편을 흔적도 없이 흡수한 거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공간의 틈새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당장 본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티페레트가 있는 파편으로 거미가 이동하기 시작하니 샤하나즈는 생각하지도 않고 몸을 움직였다.
“생각해라.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하라고. 분명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또 지켜보고만 있을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제멋대로 궤도가 튕겨나간 것은 잊었는지 티페레트가 있는 곳으로 도움닫기를 하는 샤하나즈는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잠시 멈춰 잔해에 깔려 찌그러진 팔뚝의 장갑을 강제로 뜯어냈다.
끈적이는 검붉은 액체를 늘어뜨리며 뜯겨나간 장갑의 아래엔 파이프와 인대를 대신한 케이블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검붉은 반고체가 감싸고 있었다.
그 반고체에 손가락이 닿기가 무섭게 낯익은 통증이 몰려왔지만, 샤하나즈는 그 안에 손가락을 우겨 넣었고 그 안에서 유일하게 신축성이 있는 튜브를 끄집어냈다.
투명한 튜브의 내부에 아이샤와 로샤나크의 몸에서 타오른 것과 똑같은 푸른 불길이 흐르는 것을 확인한 샤하나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고민하지 마. 지금 당장 움직여야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불길이 흐르는 튜브를 끊은 샤하나즈는 고통을 참으며 파이프들을 감싸는 검붉은 반고체에 이 튜브를 찔러 넣고는 뜯어낸 장갑을 다시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의 장갑 아래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고, 전신의 배기구는 물론 입에서까지 연기를 내뿜는 샤하나즈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았다.
지면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샤하나즈가 박차 오르자 또다시 궤도가 틀어진 샤하나즈는 끝도 보이지 않는 공허로 튕겨 나갔다.
“로샤나크는 도약이라고 했어. 도약. 그러면 나도 할 수 있는 거야. 처음으로 로크를 움직였을 때처럼.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강하게, 조금만 더 정확하게. 조금만 더 절박하게.”
아직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은 파편을 향해 손을 뻗자 샤하나즈의 장갑 아래에서 은은하게 발하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번만큼은.......!”
그리고 강해진 빛은 순식간에 불길로 타올라 장갑 아래에서 맹렬히 타올랐고, 장갑 아래에서 솟구친 불길은 그의 몸을 불태웠다.
그렇게 타오른 푸른 불길은 그의 장갑을 녹이고 검은 장갑을 연기로 천천히 증발시켰다.
하지만 그의 몸이 불길로 인해 점차 녹아내리고, 증발하는 사이 그가 손을 뻗은 곳에는 연기가 천천히 응집되며 순식간에 불기둥을 형성했다.
아이샤는 물론 다른 올드 원들이 만들어내는 불기둥과 비교했을 때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불안정했지만 남은 샤하나즈의 팔까지 모두 불타 사라지자 조금 더 선명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불기둥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샤하나즈가 기둥의 중앙에서 나타났다.
멀리서 봤을 때, 티페레트가 있는 파편으로 점점 다가오던 거미는 이제 몸에 늘어진 강철 케이블을 파편에 박아 입으로 견인하는 중이었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샤하나즈는 녹아내린 금속과 불타는 점액을 토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티페레트를 안아들고는 파편의 끝으로 뛰었다.
“ㅈ...... 저건 대체 뭐야!”
“나도 몰라! 지금 아는 건 피해야 한다는 것뿐이야!”
입에 달린 분쇄기가 파편에 닿자 녹아내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속도로 지면이 갈려나갔고, 작게 분쇄된 파편들은 순식간에 붉게 빛나는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꽉 잡아!”
시시각각 줄어드는 파편에 경악할 틈도 없이, 티페레트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은 샤하나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파편의 밖으로 뛰었다.
갑작스레 궤도가 틀어졌지만, 종아리의 배기구로 중심을 잡은 샤하나즈는 조금 거칠지만 다른 파편의 지면에 두 발로 착지했다.
아무리 수호자와 같은 몸이라도 충격이 전신을 울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는지 무릎을 꿇고 쓰러진 샤하나즈는 끊길 것 같은 숨을 간신히 들이쉬며 티페레트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샤하나즈가 다시 뛰려하자 티페레트가 샤하나즈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는 거야?”
“널 버릴 생각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하나즈는 티페레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내가 용서한다고 했잖아. 나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잖아.”
“그것 때문이 아니야. 여기서 빠져 나갈 방법이 생각나서 그런 거라고.”
여전히 티페레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샤하나즈는 고개를 들어 거미가 있었던 방향 쪽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수호자가 움직이려면 아침의 파편이 필요한데, 이곳에는 방금 전 그 거미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아침의 파편은 없어. 그 말은 그 거미 안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분명 그 안에 탈출의 실마리가 있을 거야.”
“그렇다고 그걸 혼자 할 필요는......”
티페레트는 여전히 샤하나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의 몸이 점점 달아오르자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내 잘못이야. 네가 그렇게 된 것도, 여기에 갇힌 것도 전부 내 잘못이라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불러들일 수는 없어.”
그리고 잠시 침묵한 샤하나즈는 고개를 돌려 티페레트와 눈을 마주쳤다.
“무엇보다 너는 더더욱 그렇고. 더 이상 누군가 내 눈 앞에서 부서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티페레트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미약한 외침은 샤하나즈가 지면을 박차는 소리에 묻혀 공허 속에 메아리마저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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