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거미줄 4
* * *
만신창이의 두 사람이 매달려 있던 케이블에는 이제 거대한 기갑이 매달려 있었다.
아무리 얇더라도 두 사람의 체중 정도는 우습게 지탱할 수 있었지만, 7m가 넘는 기갑이 매달리니 견인용 케이블은 순식간에 끊어지며 티페레트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허로 떨어졌다.
그러나 티페레트가 공중에서 능숙하게 자세를 바꾸는 것과 동시에 떨어지기만 하던 티페레트는 순식간에 궤도가 바뀌었다.
다리의 장갑은 넝마처럼 일그러지고 파손되어 있었고, 왼팔은 아예 남은 장갑이라고 할 만한 부분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궤도가 바뀐 티페레트는 근처의 파편에 사뿐히 착지했다.
“티페레트, 내가 정말.......”
교수대의 밧줄과 같은 죄책감이 조르는 기도의 틈을 간신히 빠져나오는 문장이었지만, 티페레트는 마치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 기체의 헬름 아래쪽을 검지로 가로질렀다.
《그만. 말 안 해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티페레트는 샤하나즈의 변명을 일갈하며 자신이 떨어진 방향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들을 쫓았던 수호자는 다시 수백 개의 구체로 분해되어 아틀락의 장갑 사이로 들어갔고, 그와 함께 내부로 수납했던 8개의 다리를 다시 꺼낸 아틀락이 증기를 뿜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샤하나즈는 여전히 기체의 제어권한을 받지 않았다.
“못하겠어.......”
《내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피하는 거야?》
“너를 죽인 걸로 난 자격을 잃었어! 수호자를 하나 잃은 것도 모자라서, 다른 하나는 직접 죽였다고! 이런 내가 기사로서 수호자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샤하나즈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도 아틀락은 점차 거리를 좁혀왔고, 티페레트는 하는 수 없이 어색한 움직임으로 혼자 기체를 움직였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건 심장이지만, 심장도 잠시 멈추기만 하면 그 인간을 죽일 수 있잖아. 그렇다고 심장이 뛸 자격이 없는 거야?》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뻣뻣한 걸음으로는 얼마 움직일 수 없었고, 티페레트는 파편의 반도 가로지르지 못하고 넘어졌다.
《“너는 나를 완성시키는 존재”라고 네가 말 했잖아. 수호자가 없는 기사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네가 없다면 나는 그저 외롭게 갇힌 아이일 뿐이야. 나를 수호자로 완성시키는 건 기사인 너, 샤하나즈라고.》
넘어진 티페레트가 일어나지 못하니 아틀락은 티페레트가 있는 파편에 견인 케이블들을 박아 서서히 끌어오기 시작했고, 입 부분의 분쇄기가 서서히 회전을 더해갔다.
《그러니까 내 엔진이 되어줘! 어서 나를 똑바로 보고 내 마지막 기사가 되어달란 말이야!》
일어나지 못하니 필사적으로 기어가며 아틀락의 분쇄기에서 도망치는 티페레트는 절박한 목소리로 샤하나즈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아틀락의 분쇄기가 티페레트가 있는 곳 까지 도달하자, 일그러진 티페레트의 장갑 아래 톱니바퀴들이 눈부신 푸른빛을 발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기는 것 마저 제대로 할 수 없던 티페레트는 오른팔에서 포신을 꺼내 지면을 쏘곤, 그 반동으로 몸을 뒤집어 아틀락의 분쇄기의 중앙을 향해 철갑탄을 날렸다.
90mm철갑탄은 아틀락의 크기에 비하면 미세한 수준이었지만, 이미 가속을 마친 티페레트가 빠져나올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정말 나를 믿을 수 있겠어?”
파편에서 뛰어내리며 조심스럽게 물어본 샤하나즈의 질문에 티페레트는 작게 웃었다.
《너는 자기 심장을 의심해 본 적 있어?》
“나는 너를 죽였어. 그래도?”
《그리고 너는 너를 죽이려 했던 나를 믿어줬지. 똑같은 거잖아.》
샤하나즈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티페레트 홀로 움직였을 때 움직임에 진하게 남아있던 어색함과 뻣뻣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속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밀함이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크고 작은 파편과 파편 사이에 푸른 잔상을 남기며 아틀락과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티페레트는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는 큰 지면을 발견하자 지면에 작은 크레이터를 남기며 거칠게 착지했다.
허나 샤하나즈가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는 아틀락의 다리 중 하나가 지면에 그 끝을 디뎠다.
《설마 거미줄 안에서 거미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 다리를 시작으로 아틀락은 파편의 아래를 타고 천천히 지면을 향해 올라와 티페레트를 정면으로 마주했고, 조소가 가득한 목소리의 페레슈테는 아틀락의 외부 장갑을 열어 구체들을 쏟아냈다.
구체들이 외장을 열어 서로 연결될 케이블들을 늘어트리기가 무섭게 티페레트는 포신을 꺼낸 팔을 치켜들었다.
“티페레트! 철갑탄!”
《처.....철갑탄!》
약실을 교체하며 오른팔에 얼마 남지 않은 찌그러진 장갑들이 뜯겨 나갔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는 샤하나즈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철갑탄을 발사했다.
그럼에도 수백 개의 구체들은 철갑탄에 맞아 정지하거나 파괴되는 구체가 생길 때 마다 또 다른 구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티페레트의 탄막을 맞아가면서도 결속을 이어갔다.
“무슨 끝도 없네!”
포신이 달아올라 철갑탄에 찢겨 나갈 때 까지 사격을 이어가도 구체들이 수호자로 합쳐지는 것을 약간 지연시켰을 뿐,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전 샤하나즈가 돔에서 보았던 것 보다 약간 더 큰 형태를 이룬 수호자가 오른팔이 만들어지자 그대로 티페레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티페레트나 다른 수호자와 같이 팔뚝이 변형되진 않았지만, 구체들이 서로 위치를 바꾸며 이를 대신했고 꿈틀거리며 변형된 손바닥에는 구체 중 하나의 장갑 절반이 오목하게 자리 잡았다.
《뭐야, 무기가 아니었잖아? 저건 뭐.......》
의문을 품는 티페레트와는 달리 샤하나즈는 이를 보자마자 몸을 움직여 손바닥과 일직선상에서 벗어났고, 폭발과 함께 변형된 장갑이 투사체가 되어 지면을 강타했다.
“폭발성형관통탄이야. 철갑탄으로 피해를 주기 힘든 불멸자를 상대할 때 1번 전대에서 자주 쓰는 무기지.”
《저게 무기라고?》
“사람 손바닥 크기로 만든 것도 수호자의 장갑을 뚫는데, 저 정도 크기면 말 할 것도 없지. 죽기 싫다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러나 샤하나즈가 티페레트의 몸을 낮추기도 전, 아틀락의 다리 중 하나가 티페레트가 있는 위치를 내리찍었다.
물론 다리 하나를 피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찰나의 간격도 없이 또 다른 다리가 티페레트를 덮쳤다.
4번 정도 이어진 다리를 피하니 처음에 공격했던 다리가 다시 내려찍을 준비를 마쳤고, 그와 동시에 적 수호자는 다리가 샤하나즈를 몰아가는 방향으로 조준을 마쳤다.
《샤하나즈!》
거의 탄막이나 다름없이 하늘에서 내려찍는 다리를 피해 움직여 이를 눈치채지 못한 샤하나즈를 대신해 티페레트는 잠시 몸을 멈추곤 정면으로 아틀락의 다리를 받아냈다.
이를 정면으로 받아낸 충격으로 인해 다리의 피스톤이 깨지며 피스톤 내부의 유체가 새어 나왔지만, 샤하나즈는 고통을 참는 소리만 냈을 뿐, 티페레트를 조금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샤하나즈는 장갑이 완전히 벗겨진 왼팔에서 칼날을 꺼내 다리의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샤하나즈에게 계속해서 하중을 가하던 아틀락의 다리는 샤하나즈가 잘라낸 사선을 따라 미끄러져 지면에 내리꽂혔고, 티페레트는 곧바로 적 수호자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샤하나즈가 티페레트를 움직여 정면으로 뛰어드는 와중, 티페레트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아틀락의 다리를 회피했다.
《너도 날 믿지?》
“의심한다면 애당초 심장을 주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폭발과 함께 변형된 장갑이 탄환이 되어 날아오자 티페레트는 앞으로 디딘 발을 회전축 삼아 전신을 회전시켜 정면에서 이를 베어냈다.
적 수호자가 다시 팔 구조를 변형시켜 새로운 탄을 장전시키기 전, 이미 팔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한 티페레트는 그대로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적 수호자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는 듯, 티페레트의 손목을 잡아 이를 강제로 뽑아냈다.
《나시르의 수호자의 문제점이 그거지. 인간과 같이 단 한 번의 치명상으로 무력화 되는 것. 그래서 나는 그런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어.》
손목을 붙잡은 수호자는 그대로 티페레트의 가슴에 폭발성형관통탄이 준비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 이런 상황도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티페레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손목을 스스로 비틀며 수호자의 뒤로 향해 등을 맞댔지만, 적 수호자는 전신의 구조를 조금씩 변형시키며, 땅에서 발을 떼지도 않고 전신의 앞뒤를 바꿨다.
샤하나즈는 당황하지 않고 티페레트를 움직여 그대로 수호자를 업어 쳤지만, 손목은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티페레트, 미안해!”
결국 샤하나즈는 스스로 자신의 왼팔을 쏴서 간신히 구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틀락의 다리는 끝없이 그들을 노렸고, 티페레트는 하는 수 없이 잘린 왼쪽 손목을 부여잡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철갑탄으로 안 되고, 근접으로도 안 되고, 손상을 입혀도 그 부분만 교체하면 되고. 뒤를 잡을 수도 없고. 그러면 남은 방법은.......”
남은 방법은 딱 하나. 세피로트의 나무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에 박힌 톱니바퀴를 잡은 샤하나즈의 손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티페레트를 불러내는 것은 지금의 티페레트를 이전에 자신이 그녀를 죽였던 공간에 다시 가둬버리는 것 같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페로트의 나무를 꺼내면 티페레트를 잃을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을 읽은 것인지 앓는 소리를 내던 티페레트는 작게 웃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정말로?”
《정말로. 우리 같이 해보자고 했잖아. 네가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잡아준다면 나는 어디로도 안 갈 거야.》
미소가 엿보이는 듯, 헤실거리는 티페레트의 대답에 샤하나즈는 망설이던 손을 움직였다.
티페레트의 등의 장갑이 열리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순식간에 자라났고, 나무의 껍질과 같은 금속이 천천히 티페레트의 장갑의 파손된 부분을 복구했다.
《세피로트의 나무 전개. 기체의 손상을 최우선으로 처리할게.》
지금까지 듣던,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아닌 이전과 다를 것이 없이 밝고 헤실거리는 티페레트의 목소리에 샤하나즈는 조금 당황한 것인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톱니바퀴는 확실히 돌아가 있었고, 기체의 손상도 점차 복구되며 고통도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티페레트의 태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티페레트?”
《갑자기 왜? 아직도 내가 너를 믿는지 의심스러워?》
“아니, 이전과는 다르게 네가 여전히 이 곳에 있어서.......”
그러자 티페레트는 꺄르륵 웃으며 샤하나즈의 시야에 수많은 정보들을 순식간에 나열시켰다.
기체의 손상 상태, 남은 동력과 가동할 수 있는 시간, 가속 한계, 적의 무장, 지금까지 알아낸 아틀락과 적의 정보까지.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감으로 느끼던 것들이 선명한 시각정보로 정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예상 공격 위치와 같이 인간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정보까지 표시되었다.
《엔진을 가진 수호자라면 세피로트의 나무의 의지가 수호자를 움직이지, 하지만 기사가 있는 수호자라면 세피로트의 나무가 끼어들 이유가 없잖아.》
그와 함께 잘려나간 왼팔이 깔끔하게 분리되며, 등 뒤의 나무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팔이 내려와 왼팔이 분리된 어깨에 장착되었다.
호드와 싸웠을 때와 같이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거대한 팔 대신 조금 장갑이 장착되었을 뿐, 오른팔과 똑같은 크기의 팔의 하완에는 등과 튜브로 직접 연결된 작은 금속 원기둥이 달려 있었다.
90mm포 보다 약간 작고 짧아 화력에 대한 확신이 들기 힘든 크기였지만, 샤하나즈는 어떠한 의구심이나 의심 없이 곧바로 팔을 치켜들어 적 수호자를 조준했다.
《대 요새용 섬멸포 출력 완료. 기사의 발사 명령을 대기하는 중이야.》
“발사.”
티페레트의 장갑 아래, 전신에서 발하던 빛은 순식간에 가슴으로 모여 튜브를 따라 포신으로 모여들었고, 그에 맞서 적 수호자는 새로 준비된 성형관통탄을 들이밀었다.
양측의 폭발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티페레트의 원기둥이 폭발하자 반경 10m에 달하는 초고속의 희푸른 색의 금속 제트가 뿜어져 나오며 적 수호자의 투사체는 물론 수호자를 이루는 구체 하나까지 문자 그대로 증발시켰다.
상식을 벗어나는 화력에 샤하나즈는 물론 페레슈테까지 할 말을 잃어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흐르는 상황에서 티페레트의 팔뚝이 열리며 새로운 원기둥이 팔에 장착되었다.
《발사 완료, 다음 발사 가능 시간까지 3분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