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43화 (43/50)

〈 43화 〉 그라이아이 ­ 1

* * *

“뭔 일이야? 폭발음이 들렸는데?”

다급히 뛰어온 레티시아 눈에는 아이샤가 푸른 불꽃으로 문을 틀어막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인지, 자리에 굳어 주변을 살피던 레티시아는 이내 아이샤의 어깨를 붙잡았다.

“샤하나즈는 어디 있어?”

그러나 아이샤는 대답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침묵만 유지하니 레티시아는 그녀를 잡아당겨 눈을 마주쳤다.

“샤하나즈는 어디 있냐고! 어디로 보낸 거야?!”

레티시아가 양쪽 어깨를 쥐어짜는 것 마냥 붙잡으니, 아이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만 간신히 새어 나왔다.

“난 너를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를 이렇게 배신하는 거야? 이러려고 샤하나즈에게 접근한 거였어?”

이성을 잃어가는 것인지 레티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수축하자, 기억 속에 묻으려던 피에 젖은 레티시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인지 얼굴이 창백해진 아이샤는 그대로 얼어붙어 입도 뻥끗거리지 못했다.

아카이브 안에 있는 올드 원이라는 압도적인 우위가 있음에도 공포에 완전히 압도당한 아이샤가 무력하게 떨고 있으니 사일러스가 레티시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누나, 그만해! 샤하나즈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였어! 아이샤가 샤하나즈를 공격한 게 아니라고!”

사일러스의 설명을 듣고도 끓어오른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은 것인지 레티시아는 아이샤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반대로 고개를 들이밀어 아이샤와 더욱 노골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럼 샤하나즈는 어디로 간 건데. 너라면 알 것 아니야.”

“나.....나도 몰라.....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극도에 공포에 아이샤의 발밑에는 지린내가 풍기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고, 결국 사일러스가 억지로 레티시아의 손을 잡아 당겨 아이샤를 놓게 만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말 했잖아. 아카이브는 귀중한 것을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라 재앙이 잠든 감옥일 수도 있다고. 아무런 대비 없이 열어버린 우리 잘못이야. 아이샤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샤하나즈는 어쩌자는 거야?”

방금 전 아이샤에게 보였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레티시아는 사일러스를 마주보자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이 말을 흐렸다.

“샤하나즈는 괜찮을 거야. 티페레트가 같이 있었으니까. 세피로트의 나무가 뭘 할 수 있는지는 누나도 봤잖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아이샤의 위로 티페레트가 나타났고, 해치가 열리며 기계 팔이 녹아내려 티페레트와 연결이 끊어진 샤하나즈가 떨어져 내렸다.

“이건 뭔......”

“샤하나즈!”

거대한 장갑을 두른 오른팔은 둘째 치더라도, 갑작스레 허공에서 나타난 수호자에 모두가 놀라 자리에 멈춰서는 동안 레티시아는 곧바로 달려가 떨어지는 샤하나즈를 받아냈다.

문자 그대로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샤하나즈를 맨살로 받아낸 레티시아의 팔에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그녀는 끝까지 샤하나즈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사일러스! 지금 당장 식힐 수 있는 걸 가져와줘! 냉각수든 뭐든 좋으니까 빨리!”

샤하나즈를 앞에 두고 자신의 상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지 그를 내려놓은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상의를 벗어 부채질하며 샤하나즈의 몸을 식혔다.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자리에 멈춰서긴 했지만, 레티시아의 지시에 사일러스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고 아이샤 또한 무언가를 눈치 챈 것인지 다시 한 번 손을 치켜들었다.

콕핏트에서 샤하나즈가 떨어진 순간부터 조금씩 푸른 분진으로 흩어지던 티페레트는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붕괴했고, 그 사이에선 인간의 모습을 한 티페레트가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바닥에 닿기 전, 아이샤가 푸른 화염으로 만들어낸 발판이 티페레트를 받아내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런 티페레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이샤가 황급히 달려가자, 티페레트는 입을 다시며 몸을 살짝 뒤척였다.

“으음...... 시끄러워......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오랜만이니까......”

살아있는지 의문의 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 샤하나즈와 달리 몇 마디 중얼거린 티페레트는 새근거리며 다시 잠들었다.

티페레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아이샤는 곧바로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레티시아는 아이샤가 발을 떼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어딜 가는 거야?”

레티시아의 말에 아이샤는 순식간에 굳었고, 여전히 샤하나즈만을 바라보는 레티시아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너와는 볼 일이 안 끝났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사일러스가 말 했잖아...... 거기에 샤하나즈도 돌아왔고......”

“그건 샤하나즈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 모르지. 그때까지는 거기 가만히 있어.”

극도의 공포로 인해 자신이 올드원인라는 사실마저 잊은 것인지, 도약할 생각마저 하지 못한 아이샤는 사일러스와 안톤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흙과 비행선에서 뽑아낸 냉각수를 가져올 때 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미친, 너 팔은 괜찮은 것 맞아?”

최소 2도 화상은 입은 것인지 이미 피부가 벗겨져 진물과 피가 흐르는 팔을 보고 안톤은 바로 레티시아에게 향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샤하나즈! 난 괜찮으니까!”

“아니, 너 처돌았냐? 씨발 그딴 화상을 달고 괜찮다는 말이 아가리에서 나와?”

“의사라면 누가 더 위중한지 정도는 구별해야 할 것 아니야! 네가 그러고도 의사야?”

도발이나 다름없는 외침에 안톤은 잠시 얼굴을 구겼지만. 그녀의 말에 따라 곧바로 샤하나즈 옆에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는 듯, 레티시아의 화상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좆됐는데. 이거 운이 나쁘면 뇌가 익어버렸겠어.”

“어떻게 할 수 없겠어?”

“난 의사지 마법사가 아니라고.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

기계 팔을 이용해 샤하나즈의 팔다리를 최대한 뻗어 표면적을 넓힌 안톤은 그의 목덜미와 가슴쪽에 냉각수를 부었고, 물기를 머금은 흙으로 샤하나즈의 머리를 감쌌다.

지금까지 머금었던 열기로 인해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진한 증기가 자욱하게 올라왔고, 열기가 조금 식으니 증기 사이에서 손이 뚫고 나와 안톤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지만, 접촉부에서 느껴지는 금속 질감에 조금도 놀라지 않은 안톤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만 까딱였다.

“그렇지만 뒈지진 않았나 보네. 목숨 참 질기기도 하지.”

“티페레트는........?”

“일어나자마자 찾는 게 그거야? 뭐, 너보다는 상태가 좋으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약간의 조롱이 섞인 안톤의 다그침에도 샤하나즈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티페레트를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곤 그녀의 앞에서 힘이 다 빠진 것인지 거의 무너지는 것 마냥 무릎을 꿇고 잠든 티페레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런 샤하나즈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티시아는 샤하나즈의 옆으로 다가가 살며시 몸을 낮췄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나도 모르겠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카이브에 보관된 것 때문에 어디론가 전송되었다는 것 정도.”

“보관된 물건 때문에 전송 되었다고? 아이샤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티페레트의 손을 붙잡은 샤하나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넘어 다닐 수 있는 통로 그 자체야. 그게 제어되지 않아서 이상한 곳으로 전송된 거지. 아이샤는 그 물건의 영향이 더 퍼지지 않도록 격리시킨거고.”

“잠깐만, 시간을 넘어 다닐 수 있다고? 그러면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살아계시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 아니야?”

목소리에서 흥분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일러스가 샤하나즈의 근처로 다가왔지만, 샤하나즈는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저 물건을 제어하는 건 단순히 시계 바늘을 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시간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만 있는 일직선이 아니야. 매 순간 유동적으로 변하는 공간이라고. 나도 세피로트의 나무를 사용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 연산을 해낼 수 있었어”

돌아오는 순간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던 수식과 고통이 되살아난 것인지 샤하나즈가 머리를 부여잡자 잠자코 샤하나즈의 이야기를 듣던 사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태양을 찾으려면 앞으로도 아카이브를 열어봐야 할 텐데, 그럴 때 마다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포기하자고?”

샤하나즈는 걱정이 가득한 말을 꺼낸 사일러스를 노려보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너야말로 이번 일로 죽을 뻔 했잖아! 만약 다음번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되겠어? 에버니저 전대장님은 우리가 전대장님의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우리 모두 살기를 바라실 거라고!”

“그래서 전대장님이 구하려 했던 로샨의 사람들을 버리자고? 네가 그러고도 수호자에 타는 기사라고 할 수 있어?”

“나도 로샨의 사람들은 중요해! 그렇지만 기사 이전에 우리는 사람이잖아! 가족이 있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점점 둘 사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기 전 레티시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티시아가 두 명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내보이자 높아지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잠시 시간이 지나 두 명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니 레티시아는 손을 내렸다.

“샤하나즈. 이런 일이 있을수록 신중해져야해. 네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을 보면 앞으로는 그것도 통하지 않을 일이 벌어질 수 있어.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는 중요한 존재지만, 우리에게 서로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아줘.”

레티시아의 훈계에 샤하나즈는 말없이 고개를 내려 티페레트를 바라보았고, 레티시아는 사일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일러스. 네 마음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만,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어. 우리와 같이 도시를 적에 두고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말이야. 아버지는 우리가 살기를 바랐겠지만, 동시에 무작정 도망치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셨을 거야. 그러니 수호자를 함께 남겨준 것이잖아.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야.”

나긋나긋한 레티시아의 훈계에 두 명 모두 조용히 고개를 숙이니 이번에 레티시아는 아이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아이샤, 그래서 해방군과 랑데부 지점은 어디야?”

“그....그러니까....”

《이 곳으로부터 약 70km 떨어진 지점.》

익숙한 동시에 낮선 목소리가 아이샤 대신 대답하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에라실?”

사일러스가 묻자 스펜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스펜서. 지금 조금 문제가 생겼거든.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각하지만.》

“너 제대로 말 할 수 있었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황하는 얼굴이었지만, 샤하나즈 만큼은 살짝 눈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전에 말 한 적이 있었어. 한 마디 정도였지만. 그렇지만 그때는 시간이 없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있다는 거야?”

《에라실을 못 찾겠어.》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기사 없이 수호자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에라실이 분명 네 안에 타는 걸 봤었는데.”

《안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야.》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안톤이 찰나의 지체도 없이 즉답하자, 스펜서는 몸을 숙여 안톤에게만 들리도록 그를 손으로 감싸고는 출력되는 소리의 크기를 한껏 낮췄다.

《그라이아이.》

작게 한 단어를 속삭인 스펜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안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펜서를 올려다보았다.

“구라지? 너 지금 내가 예전에 너 가지고 죽이려고 해서 구라치는 거지?”

《심각한 상황에서 너에게 거짓말을 해봤자 에라실에게 위험만 갈 뿐인데, 그럴 이유가 있을까?》

그러자 안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허탈하게 헛웃음 칠뿐이었다.

“좆됐네.”

안톤의 반응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안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쁜 소식하고 더 나쁜 소식이 있어. 나쁜 소식은 에라실의 자아가 사라질 위기라는 거고, 더나쁜 소식은 내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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