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46화 (46/50)

〈 46화 〉 그라이아이 ­ 4

* * *

로샨을 중심으로 스탈로의 이동경로와 위성도시들의 위치를 디오라마로 만들어둔 전술 테이블을 살피던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는지 눈을 찌푸리며 안톤을 돌아보았다.

“스탈로의 진로를 우누로 돌리라고?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너희에게도 이득이라고.”

그의 말을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였지만, 수긍할 생각은 없었는지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은 아리아드네는 다시 디오라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이 도시에 몇 명이 있는 줄 알아?”

“세질 않아서 모르는데.”

“3729명이야. 이건 전투원의 숫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에 어린애들까지 포함해서 3500명이 넘는다고. 그런데 너희 억지에 이 사람들의 목숨을 다 걸자는 거야?”

그러나 안톤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안 세어봐서 모른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도 솔직히 수호자라는 전력을 잃고 싶지는 않을 텐데.”

“지금 기용 가능한 수호자가 없는 것은 아니니 급하지 않아. 그리고 수호자가 필요한 건 이 곳의 사람들을 위해서야. 그 수호자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건 본말전도지.”

굳건히 대답하는 아리아드네와는 별개로 디오라마에 다가간 에라실은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수호자 모형을 집어 들었다.

“스펜서, 발레리안, 커티스, 아서, 티페레트. 우리 8번 전대의 수호자를 모두 제외하면 너희들의 수호자는 얼마나 있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거기에 우리 전력을 노출할 생각도 없고.”

그러자 피식 웃은 에라실은 수호자 모형을 디오라마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스탈로 모형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내가 한 번 맞춰 볼게. 10기정도 있지?”

에라실의 말에 정곡을 찔린 것인지 아리아드네의 눈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리아드네가 뭐라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를 눈치 챈 에라실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진짜 그 정도 밖에 없었어? 나는 대충 감으로 찍은 것뿐인데.”

비아냥거림이 섞인 에라실의 대답에 조금씩 타오르는 그녀가 손을 움직이기 전, 에라실이 가볍게 손목을 튕기자 그의 소매 안쪽에 기계 장치로 연결된 소구경 단발 권총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왔다.

“빵. 내가 이겼네.”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소구경 권총을 겨눈 에라실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도 않고 입으로만 총소리를 내곤 총을 놓았고, 소구경 권총은 다시 그의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한 척은 적당히 하지. 너한테는 그런 냄새가 나질 않으니까.”

“지금 뭘 하자는 거지?”

“고집을 적당히 부리라는 경고.”

에라실은 자신이 스탈로 위에 올려둔 수호자 모형을 들고 아리아드네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영혼도 없는 구세대 수호자 10기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아리아드네가 대답하기 전 에라실이 먼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마. 네가 직접 티페레트가 해방군의 유일한 수호자라고 했잖아. 티페레트가 유일한 수호자라면 자연스럽게 네가 말한 10기의 수호자는 전부 영혼이 없는 것이지. 거기에 퍼시빌은 영혼 정착기를 해방군에 전력을 증강할 핵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로샨에 있는 수호자는 150기가 넘어. 전대장들은 제외하고 수호자를 전문으로 사냥하는 0번 전대까지 있지. 아니, 그 이전에 발레리안 하나도 제대로 못 이길 걸? 그런데도 수호자를 포기하겠다는 배부른 소리를 할 거야?”

탁자 위에 세운 수호자 모형을 검지로 튕겨 넘어트린 에라실은 거의 도발에 가까운 말을 던지며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완고했다.

“그래. 포기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에라실이 튕긴 수호자 모형을 집어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나는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을 거야. 그러기 위해 만든 해방군이니까.”

의외의 대답에 조소가 얼굴에 가득하던 에라실은 살짝 표정을 굳히며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아이샤를 용서 할 수 없는 줄 알아? 그 녀석의 순진해 빠진 면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야.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그 태도를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어.”

아리아드네는 탁자 아래의 서랍을 열어 이곳저곳에 그을린 부분이 남아있는 오래된 편지들을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한 번도 이를 건드린 적이 없는 지, 종이가 서로 맞닿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산화가 진행된 정도가 달라 종이를 살짝 들췄을 때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이샤는 로샨의 의원이 되기 위해 도시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었어. 그걸 위해 그 녀석은 우리가 로샨에 심어둔 첩자를 고발하기 시작했지. 내가 철수 명령을 내리자 아예 본인이 직접 이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어. 단순히 신뢰를 얻기 위해.”

안톤이 탁자 위의 편지 중 하나를 집어 편지를 밀랍을 떼려하니 밀랍은 그대로 바스러졌다.

편지에는 로샨 정찰대의 예정된 이동 경로와 물자들의 운송 시기와 경로 그리고 각 위성 도시의 경비를 담당하는 수호자의 소속과 기사까지, 의원이 된 아이샤가 보낸 정보들이 한 가득 적혀있었다.

만약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로샨을 무너트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완수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아이샤가 보낸 편지들은 조금도 손 댄 흔적이 없었다.

“난 아이샤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타협하지도 않을 거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 하지도 않을 거야.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 한 명도 뒤에 남겨두지 않을 거야. 너희가 뭐라 하더라도 말이야.”

“미련하네.”

“그게 내가 선택한 길이야. 싫다면 너희가 빠져.”

아리아드네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에라실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얼굴에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진 에라실은 마치 그녀를 뜯어 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을 눈으로 핥으며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런 와중에 안톤은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퍼시빌이 그린 설계도를 펼치곤 손바닥으로 큰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러면 이거는 어때?”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 했을 텐데?”

“그리고 난 아직 제대로 설명 시작도 못했고 이 씨발년아. 네 니미럴 신념은 알겠는데 최소한 좆같은 대화 예절은 지켜야 하지 않아?”

아리아드네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톤은 짜증이 노골적으로 섞인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참았던 욕설을 뱉어냈다.

이에 아리아드네가 침묵으로 대답하니 다시 설계도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톤은 설계도를 손가락으로 대충 훑었다.

“지금 퍼시빌이 우리에게 필요한 영혼 정착기를 설계하고 있어. 너희 상황으로 봤을 때, 내가 보기에 완성 까지는 몇 년이 걸릴 것 같은데, 그걸 며칠 안으로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봐.”

그러니 안톤은 설계도 중앙에 있는 엔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영혼 정착기의 기술은 이 엔진에 집약되어 있어. 우누를 노골적으로 공격할 필요 없이 그 곳에서 이 엔진만 훔쳐온다면 나와 퍼시빌이 며칠 안으로 영혼 정착기를 만들 수 있어.”

“고작 그거 하나가 있다고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거지?”

그러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안톤은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이걸 영혼 정착기라고 해보자. 그러면 이 설계도가 나타내는 부분은 고작 이 정도야.”

안톤은 파이프가 입에 닿는 부분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딱 수호자에 정착시킬 영혼을 전달하는 역할. 엔진은 이 나머지 모든 부분이야. 그리고 우린 그 부분을 훔쳐 오겠다는 거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위해 스탈로의 진로를 바꿀 생각은 없어. 자살이나 가까운 계획에 인원을 배치할 생각도 없고.”

그러자 설계도를 다시 둘둘 만 안톤을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여기 있는 인원만으로 충분하니까.”

안톤은 손가락으로 에라실을 가리켰다.

“전투를 담당할 기사.”

다음으로 안톤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1번 도시의 내부까지 간 적이 있고, 영혼 정착기의 엔진을 뽑아낼 의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손가락은 아리아드네에게 향했다.

“스탈로의 진로를 돌릴 필요 없이 1번 도시로 갈 수 있고, 엔진을 훔치고 즉시 돌아올 수 있는 올드 원. 그 이상 인원이 필요할 거라곤 생각 안하는데.”

그러곤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아침의 파편 하나를 아리아드네에게 던졌다.

“......”

아침의 파편을 받은 아리아드네는 한참동안 두 명을 번갈아보다 무언가 대답하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방 안을 시끄럽게 채우는 경적 소리에 묻혔다.

경적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아리아드네는 벽면에 설치된 황동 깔때기들을 향해 발을 옮겼고, 깔때기 위에 설치된 닉시관이 빛나는 깔때기의 덮개를 열었다.

“3번 차량 듣고 있다. 무슨 일이지?”

황동관에선 열차의 소음이 섞인 난잡한 소리가 메아리쳤지만, 그 사이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나왔다.

“8번 전대의 기사들이 도망쳤습니다! 지금 즉시 10번 격납고에 지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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