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그라이아이 5
* * *
“그래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수갑이 쓸린 자국이 쓰린 것인지 손목을 만지는 사일러스가 물었다.
“가장 먼저 우리 수호자를 찾아야지.”
각자의 손목에서 푼 수갑을 서로 이어 긴 사슬로 만든 리암은 이를 레티시아에게 건넸다.
“3번 차량의 10번 격납고에 가서 한 명이라도 수호자에 탄다면 그걸로 끝이야. 아무리 해방군이 숨겨둔 수호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열차를 손상시키면서 우리와 싸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이건 왜 나에게 주는 거야?”
레티시아는 리암이 자시에게 준 사슬을 들어보였다.
“그야 우리 중에서는 6번 전대 출신인 누나가 제일 잘 싸울 테니까. 나는 사격이 특기고, 사일러스는......”
잠시 사일러스를 바라보면 고민하던 리암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사일러스고.”
“야, 나 듣고 있다?”
“아무튼 지금 샤하나즈와 아이샤가 사실상 인질로 잡힌 상태니, 해방군 쪽에서 샤하나즈와 아이샤로 우리를 협박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수호자를 확보하는 게 목표야.”
대충 얼버무리며 사일러스를 무시한 리암은 철창을 다시 닫고 열쇠로 문을 다시 잠갔다.
“여긴 경비가 그리 삼엄한 편이 아니라서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것 말곤 감시가 없어. 그러니까 순찰을 도는 간격인 5분 안에 모든 걸 처리해야 돼.”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5분 안에 다른 열차에 있는 격납고까지 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레티시아의 질문에 리암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로지르며 눈을 감았다.
수갑이 풀린 손을 자연스럽게 등 뒤로 넘겨 숨기자, 나머지 두 명도 리암을 따라 손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에게 수갑을 채웠던 사람 중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가며 가볍게 철창을 흔들어 잠긴 것과 유치장의 이들을 확인하며 지나갔다.
그가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하자, 리암은 곧바로 열쇠로 철창을 열었다.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할게. 일단 지금은 바로 달려!”
밖으로 뛰는 리암을 사일러스와 레티시아가 뒤따랐고, 그들의 발이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들이 문을 박차고 나오자 스탈로의 엔진 소리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음이 그들을 반겼다.
약 15m에 달하는 내부는 비어있는 중앙을 기준으로 각각 4개의 층으로 나뉘어 민간인들을 수용하고 있었고, 망치나 도끼, 삽과 같은 공구로 무장한 이들은 어둠을 밝히는 미약한 빛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중앙에는 이러한 층에 빛을 공급할 수 있도록 빈 통로에 전구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반 이상은 꺼져있었고 나머지도 금방 꺼질 것 같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이런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일러스와 레티시아와는 달리 리암은 바쁘게 눈을 돌리며 경비들을 찾았다.
“어차피 우리가 들키더라도 막을 방법은 충분히 있으니까 정신 차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
손가락을 튕겨 두 명의 시선을 집중시킨 리암은 조금씩 속도를 높이며 천장에 직선으로 설치된 황동 파이프를 가리켰다.
“저 관 보이지? 내가 이 곳에 오기 전에 확인했는데, 저 안에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있었어. 동시에 중간 중간 뻗어 나와 경비 초소로 보이는 구조물에 연결되어 있지. 다시 말해 열차 내부의 통신은 저 관을 통해 이뤄지는 거야.”
“그러니 들키더라도 그걸 발각한 경비병이 전달하지 못하게 막으면 된다는 거지?”
사일러스의 대답에 리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 누구도 죽여선 안 돼. 그 순간 우린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는 거니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호자의 탈환이지 해방군과 적대하는 것이 아니야.”
누구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에 레티시아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사슬을 단단히 쥐고 사람들의 사이를 해쳐나갔다.
그런 와중 경비병을 발견한 리암은 사람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 달리는 속도 그대로 팔을 휘둘러 경비병의 울대를 후려쳤다.
리암은 그대로 목을 붙잡은 경비병의 무릎을 밟았고, 순간 그의 관절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굽어져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굽었다.
쓰러지는 그의 소지품을 뒤져 총열을 짧게 자른 복열 산탄총을 탈취한 리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경비병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미안한데, 잠깐만 빌릴게.”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그런 모습에 사일러스는 눈을 찌푸렸지만, 리암은 아무렇지도 않게 총열을 꺾어 약실을 확인했다.
“당연하지. 죽음은 치료할 수 없지만, 좀 심하게 다친 건 안톤이 어떻게 해 줄 테니까.”
“내가 보기에는 이미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약실을 원래대로 되돌린 리암은 이를 사일러스에게 던졌다.
동시에 소란을 들은 경비병이 건너편 2층에서 내려다 본 것을 발견한 레티시아는 곧바로 깍지를 끼고 자세를 낮췄다.
“리암!”
더 자세한 설명을 할 것도 없이 레티시아의 외침에 리암은 그녀의 손을 밟았고, 리암이 뛰는 정확한 순간에 레티시아의 도움닫기를 받은 리암은 그대로 2층까지 뛰어 올랐다.
잠시 뒤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난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리암은 중앙에 늘어진 천막을 잡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진자처럼 원 궤도를 그리며 떨어진 리암은 그 속도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며 초소의 문을 어깨로 들이 박았다.
초소에서 소식을 전하려는 경비가 침입자를 확인하고 돌아서기도 전, 사일러스가 먼저 그의 머리에 산탄총을 겨눴다.
“자리 좀 비켜 줄래?”
경비의 손이 등에 맨 산탄총으로 향했지만, 사일러스가 코앞에 들이민 총열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양손을 들고 초소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경비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킨 레티시아는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대 대서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동생들 몰래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기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확인 할 테니까 둘이 먼저 격납고에서 수호자를 탈취 해줘. 이런 환경에서는 아서보다는 발레리안이 확실히 유리하니까.”
“그건 용납 못해. 아무리 무기가 있더라도 여기 널 혼자 남겨둘 수는 없어.”
레티시아의 거절에도 문을 닫은 사일러스는 등으로 문을 밀어 막았다.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시간 없으니까 빨리!”
“사일러스!”
그의 억지에 레티시아가 강제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리암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누나, 일단 움직이자.”
“하지만......”
리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다툴 시간 없어. 남은 시간은 겨우 2분 내외라고.”
반쯤 레티시아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던 다른 객차로 넘어가는 통로의 문을 열었고, 레티시아의 손에서 사슬을 가로채 몇 번 돌리고 그대로 던졌다.
경비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간 수갑은 볼라처럼 다리에 휘감겼고, 넘어지는 경비병을 레티시아가 몸으로 들이 받아 벽에 처박았다.
레티시아가 벽으로 처박아 쓰러진 경비병의 산탄총을 집어든 리암은 격납고로 향하는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곤 걸쇠 부분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아이샤와 관련된 일이니까 사일러스도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거겠지. 지금까지 하는 것 보면 대충 눈치 챌 수는 있잖아?”
“그래도 동생을 위험에 방치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었는데.”
리암은 방아쇠를 당기며 레티시아의 문장에 강제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럴 땐 누나보다는 기사로서 믿어줘야 한다고. 그리고 누나가 없으면 발레리안을 기동할 수도 없으니까. 게다가 이미 와버렸으니 사일러스의 안전을 위해서도 꼭 성공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선 리암은 총에 맞아 걸쇠가 날아간 문에 발을 올리곤 레티시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하자. 누나의 목적은 발레리안에 다시 탑승하는 것. 10번 격납고라고 한 걸 보면 발레리안을 찾을 때 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내가 시간을 벌게.”
“네가 커티스를 타는 건?”
“이런 밀폐 공간에서는 포신이 거슬리기만 할 뿐이야. 무엇보다 발레리안은 다른 수호자들보다 크니까 찾기도 쉬울 것 아니야. 거기에 근접 전투에서 발레리안을 이길 수 있는 수호자는 로샨에서도 손에 꼽았고.”
“콕핏트가 닫혀 있을 텐데, 탑승할 방법은?”
“격납고라면 기본적으로 수호자를 정비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플랫폼이 있을 거야, 비행선이 있는 격납고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으니 수호자를 보관하는 격납고도 다를 것이 없겠지. 다만 콬핏트에 접근하려면 추락의 위험을 좀 감수해야 하긴 할 거야.”
“그렇다면 탑승한 다음, 커티스를 최우선으로 확보할게. 거기서 합류하자고.”
그 이후로는 서로 눈빛만 주고받은 레티시아와 리암은 무언의 신호에 맞춰 동시에 문을 걷어찼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이들이 나눴던 대화는 모든 의미를 잃었다.
격납고에 들어온 순간 리암은 8번 전대의 수호자들을 한 눈에 찾을 수 있었다.
애당초 격납고에 제대로 된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기체는 8번 전대의 수호자들 뿐 이었고, 수호자가 격납되어야 할 자리에는 수호자의 잔해처럼 보이는 고철들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형태를 갖추고 있는 수호자가 10기 있었지만, 이들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문을 걷어차고 나오자마자 시선을 끌려 했던 리암은 그대로 멈춰 서서 장갑이 반도 남아있지 않는 수호자 한 대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격납고가 아니라 박물관이잖아. 이거 움직이긴 하는 거야?”
“시간이 없다며? 지금 뭐하자는 거야?”
급하게 뛰어가던 레티시아는 멈춰 선 리암을 발견하고는 그를 재촉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은 리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이면 발레리안을 탈 이유도 없겠어. 애당초 발레리안을 확보하는 이유가 격납고 내부의 수호자를 고려한 것이었는데 이건......”
“저 수호자가 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수호자에 다가가 천천히 시선을 들며 외장을 살핀 리암은 헛웃음을 쳤다.
“지금 우리가 타는 커티스나 발레리안이 몇 세대 수호자인지 알아?”
“4세대 아니었던가? 나는 이런 걸 잘 몰라서 확신은 없는데.”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여기 있는 수호자는 자체적으로 무장도, 수호자를 보조하는 영혼도, 기사에게 주는 피드백도,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서 걷는 것도 불안정한 1세대 수호자라고.”
“설마. 그런 물건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내 말이 그거야. 이런 유물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발레리안 이전에 이 수호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대체 무슨 싸움을 해 온 거야?”
아직도 1세대 수호자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지 리암이 수호자에 가까이 다가가 살피고 있으니 격납고 위쪽에 설치된 통로에서 이들을 발견한 어니스트가 난간에 후크를 걸어 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어라? 두 분은 여기 무슨 일이세요?”
“어니스트였던가? 너 여기서 일하는 거야?”
레티시아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긁어 검은 기름때가 얼굴에 묻은 어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죠. 해방군이 보통 일손이 부족해야죠. 저만하더라도 하는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라니까요? 수호자를 정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탈로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도 보수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밖에 나가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정비 한다는 건, 이 수호자가 움직인다는 뜻이야?”
리암이 수호자의 장갑을 노크하듯 가볍게 치자 어니스트는 머쓱하게 웃었다.
“4세대 수호자에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하지만, 이제 저희가 가진 수호자는 이것들 뿐 이니까요. 3세대 수호자는 기사가 받는 위험이 너무 커서 아리아드네님이 사용을 반대했으니 기용 가능한 건 1세대와 2세대 수호자들 뿐 이죠.”
“이제?”
“이전에는 티페레트가 있었는데, 랜돌프가 마지막으로 탄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거든요. 얼마 전에 제가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티페레트가 다른 기사를 가지고 있었어??”
레티시아가 물었지만, 어니스트가 대답하기 전에 무언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 챈 리암은 더 이상 말 하지 말라는 듯 손을 치켜들어 그녀의 입을 가렸다.
그의 예측대로 레티시아의 입에서 티페레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어니스트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레티시아씨가 티페레트를 어떻게 알아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 이전에......”
그러나 이를 얼버무리려는 리암의 노력을 비웃듯, 그들의 뒤로 푸른 불기둥이 솟구치며 아리아드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티페레트의 기사가 스탈로에 타고 있으니까.”
“네?”
“문자 그대로야. 8번 전대의 기사인 샤하나즈가 지금 티페레트의 기사야. 정확히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지만. 아마 랜돌프가 넘겨준 것이겠지.”
“그럼 랜돌프는......”
아리아드네가 침묵을 유지하자 다리에 힘이 풀린 어니스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어니스트를 뒤로하고 레티시아와 리암의 앞으로 다가간 아리아드네의 몸에는 미세하게 푸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잠시 눈을 감자 이는 금세 사그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 둘 다 죽이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상황이라니, 무슨 상황?”
그리고 리암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열차가 크게 흔들리며, 격납고에 붉은 조명이 켜졌다.
“밤이 왔어. 그리고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어둠으로 들어갈 예정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