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그라이아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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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팔이 교차될 정도로 손을 불멸자 안으로 깊이 찔러 넣은 스펜서는 그대로 양 팔을 잡아당기며 문자 그대로 불멸자의 흉곽을 찢어 발겼다.
겉이 찢겨나가며 내부에서 살점과 금속처럼 보이는 알 수 없는 물질이 쏟아져 내렸고, 다시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스펜서는 중심을 유지시키는 뼈대를 비틀어 끊었다.
신체를 유지시키는 뼈대가 사라지자 불멸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누나! 리암! 수호자에 안 타고 뭐하는 거야?》
하지만 스펜서에게서 울리는 목소리는 평소의 스펜서의 광기 넘치는 문장이나 낮선 목소리가 아닌, 평소에 듣던 에라실의 목소리였다.
“에라실? 스펜서는 어디 간 거야?”
“설명하면 복잡해! 그렇지만 혼자서는 뭘 하기 힘드니까 좀 도와줘! 열차를 움직여야지!”
에라실의 호소에 리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커티스를 향해 달렸지만, 레티시아는 여전히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인지 스펜서를 올려다보았다.
“가족을 해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 거지?”
여전히 냉정한 레티시아의 대답에 스펜서는 자리에서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는 불멸자의 머리를 내리쳐 짓이겼다.
《우린 기사잖아. 에버니저 전대장님이 우리에게 수호자를 남겨줬던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그걸 증명하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기사 이전에 너희의 보호자야.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너희에게 간접적으로라도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어.”
이미 리암이 탑승한 커티스가 기동을 시작했음에도 레티시아는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나를 위해서 해달라고 부탁해도 안 되는 걸까?》
평소라면 자신의 직감을 내세우거나 비꼬았을 에라실이 감정에 호소하는 모습에 레티시아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너 답지가 않잖아.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도와주면 얘기 할게! 그러니까 제발 도와 줘!》
절박한 에라실의 외침에 잠시 고민하던 레티시아는 자신의 팔을 감싼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거래를 하나 하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나를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 상황이라면 나도 따질 상황이 아니라서. 말 해봐.”
이미 피 칠갑된 손으로 상처를 붙잡는 아리아드네는 간신히 호흡을 안정시키며 대답했다.
“샤하나즈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을 모두 풀어줄 것, 그리고 잠재적인 위험으로도 가정하지 말 것.”
“받아들이지.”
대답을 듣자마자 레티시아는 바로 발레리안을 향해 발을 옮겼지만, 이어진 아리아드네의 말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하지만 샤하나즈와 티페레트는 포함시킬 수 없어. 단순히 너희 가족이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거든.”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발레리안에 탑승하려던 레티시아는 다시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레티시아의 발걸음이 멈추자마자 에라실은 곧바로 격납고 문을 비틀어 열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라실이 문을 여는 순간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솟구치는 어둠에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균열에서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 그 틈을 틀어막았다.
피가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리아드네는 손을 내려놓지 않았고, 격납고의 문이 다시 닫혀 어둠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멈추자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쏟은 피 웅덩이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에라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아리아드네는 곧바로 발레리안에 탑승해 에라실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그 앞을 커티스가 가로막았다.
《머하는 거에여! 스펜서를 도와야져!》
그러나 이에 대답하는 대신 리암은 발레리안의 앞을 가로막은 그대로 커티스에서 내렸다.
“저 문을 다시 열 수는 없어. 그랬다간 이 열차가 붕괴해 버릴 거야.”
자신의 상처도 제대로 감싸지 못하는 아리아드네를, 리암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내려다보았다.
“맞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리아드네는 희미한 숨을 이어가며 리암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그걸......”
“간단한 추론이야. 불길을 일으킬 때 마다 평소에는 손을 움직이지 않던 네가 밤이 되니 아이샤처럼 손을 움직였으니까. 게다가 네가 네차흐와 싸우는 순간 격납고가 순간 압력으로 인해 비틀리려고 했고, 얼마 싸우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한계가 온 것처럼 몸에 손상이 갔지.”
바닥에 떨어진 탄환을 주운 리암은 탄두를 물어 분리하곤, 장약을 커티스의 장갑 위로 얇게 털어냈다.
화약에 불을 붙이니 천천히 타들어가며 천천히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와 함께 연기 사이에서 푸른 불길로 만들어진 가느다란 수백의 선들이 나타났다.
“아리아드네는 이 열차가 어둠에 들어온 순간부터 열차를 지탱하고 있던 거야. 그리고 이제 거의 한계에 달한 거지.”
《그러타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발레리안의 목소리에 리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제 에라실과 스펜서를 믿을 수밖에.”
“으억.......!”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그런 에라실을 맞이한 것은 액체와 같이 짙은 어둠이었다.
물 아래로 잠긴 것 같이 모든 움직임에 저항이 뒤따랐고, 수호자가 내뿜는 빛은 역으로 어둠에 삼켜져 뻗어나가지도 못했다.
수호자와 자신의 경계가 흐려진 것인지, 수호자의 몸임에도 에라실은 막혀오는 숨에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수, 숨이......”
《언제까지 나한테 의지하려고 하는 거야?》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에라실의 목소리와는 달리 스펜서는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불멸자를 뛰어넘곤 간단히 머리를 으스러트렸다.
“닥쳐...... 아직도 기사는 나야...... 이 몸은 내 것이라고...... 이제 말을 할 수 있다고..... 우쭐대지 마.......”
《기사 주제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해서 매 순간 내게 부탁하는 주제에 그딴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애당초 네가 왜 점점 몸의 주도권을 잃어 가는지 잊었어?》
스펜서가 가볍게 팔을 튕기자 하완이 확장하며 거대한 발톱이 손가락을 대신해 튀어나왔다.
그러나 안면장갑은 미세한 틈만 보일뿐, 벌어지지 않았고 확장한 하완 또한 강제로 접혀 본래의 모습으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나서지 마...... 너 없이 혼자 싸울 거야.......”
《한심한 너를 대신해 내가 싸워주는 거잖아. 중재자 녀석이 없다면 진즉에 내게 몸을 뺏겼을 놈이 알량한 자존심 세우기는.》
점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팔 끝에는 손이 수납되고 달궈진 칼날이 솟아나왔다.
막히는 호흡과 전신을 짓누르는 어둠의 압력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에라실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 어둠속에서 달려든 불멸자가 그를 덮쳐 제대로 중심이 잡히지 않은 에라실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망할......!”
뒤로 넘어가 완전히 제압당황 상황에서마저 눈앞에 있는 불멸자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에라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불멸자가 있을 법한 곳에 칼날을 휘적거릴 뿐이었다.
허나 칼날은 허공만 스치는 것인지 칼날에는 베는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고, 그와 함께 불멸자의 발톱이 파고들며 점점 장갑을 찢어나갔다.
《비켜, 이러다가 나도 죽을 것 같으니까.》
“나서지 말라고 했지?”
《비키라고!》
스펜서의 외침과 함께 제어 권한이 완전히 넘어가, 에라실의 의지는 더 이상 수호자에 전해지지 않았다.
안면 장갑은 순식간에 갈라지며 날카로운 치열의 형태가 드러났고, 조금씩 접혀 들어가던 하완은 폭발적으로 전개되며 발톱이 아직 완전히 전개되지 않은 장갑마저도 찢고 나왔다.
《기어오르지 말라고, 이 어둠의 찌꺼기들아!》
자신의 흉부 장갑을 파고들려는 불멸자의 목덜미를 물어 머리를 뜯어낸 스펜서는 머리를 잃어 비틀거리는 불멸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대한 발톱이 불멸자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난도질이 이어지며 불멸자의 몸은 거의 곤죽이나 다름없는 육편들로 다져져 흩뿌려졌다.
《똑바로 보라고 에라실! 어둠 따위에 붙잡히지 않는 본능이라는 걸 말이야!》
아무리 스펜서라도 손으로 만져질 정도로 짙은 어둠을 꿰뚫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스펜서는 주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불멸자의 괴성을 맡을 수 있었고, 불멸자가 움직이며 요동치는 어둠을 맛볼 수 있었다.
불멸자의 부패하는 악취가 들리고, 자신이 물어뜯었던 썩어가는 살점의 맛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감각들을 뛰어넘는 본능이 그의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으르렁 거리는 울음과 함께 스펜서는 바닥에 발톱을 박곤 자세를 낮췄다.
어떠한 객관적 증거 따윈 없었지만, 스펜서는 자신의 모든 추진력을 쏟아 부어 열차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가 세운 발톱은 달려가는 길을 따라 어둠과 살점들을 베어나갔다.
“그만해......”
《그만두라고? 그건 네가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주제넘게 명령이나 해대기는!》
분노에 찬 스펜서의 대답과 함께 스펜서의 기체가 또 다시 경련하며 변형하기 시작했다.
팔꿈치는 뒤로 긴 칼날이 튀어나왔고, 정강이 부분이 꺾이며 새로운 관절이 생겨났다.
등의 장갑이 전개되어 척추가 굽고, 동시에 새로운 마디들이 조립되며 거대한 꼬리를 만들어 냈다.
구속에서 벗어난 짐승처럼 괴성을 지른 스펜서의 안면 장갑은 아예 분리되어 양쪽으로 갈라진 하악이 노출되어, 이제 인간의 형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네가 눈을 돌리던 진짜 스펜서야! 같잖은 억압은 때려치우라고!》
“스펜서......!”
에라실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제어 권한을 되찾으려 했지만,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라실의 영향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열차를 움직인다는 본래의 목적마저 잊어가는 것인지 스펜서는 그저 손에 닿는 불멸자를 찢어발길 뿐, 어떠한 방향성도 없었다.
“그만 날뛰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수호자는 무기야. 그런데 수호자의 본문을 이행하는 순간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네게 무슨 자격으로 내게 명령을 내리지?》
에라실의 말과 함께 잠시 스펜서의 손가락이 경련했지만, 이마저도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허나 스펜서가 잠시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린 순간은 어둠속에서 날아온 작살이 스펜서의 몸에 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작살이 장갑에 닿는 순간 스펜서는 즉각적으로 몸을 비틀었고, 작살은 가슴을 관통하는 대신 측면 늑골을 얕게 꿰뚫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스펜서에게 작살을 던진 이는 작살에 연결된 사슬을 잡아당기며 넌지시 읊조렸다.
작살이 자신의 몸을 끌어당기기 전, 몸을 꿰뚫은 작살을 잡아당겨 완전히 몸을 관통시킨 스펜서는 그 끝을 부러트렸다.
약간의 손상을 각오한 덕에 작살은 장갑을 찢으며 스펜서를 끌어당기는 대신 기체에서 그대로 빠져 나왔다.
《수호자는 무기가 아닌,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가르침이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여러 가닥의 사슬을 치렁거리며 불멸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둠속에서도 썩어가는 살점의 냄새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하고 예리한 맛이 촉감을 자극했다.
사슬을 치렁거리는 불멸자의 주변으론 끈적거리는 어둠이 서서히 스며들었고, 이내 단단하게 굳어 썩어가는 몸을 덮는 장갑이 되었다.
《넌 대체 뭐냐?》
《네가 무엇인지에 달렸지.》
네차흐는 사슬이 연결된 작살 중 하나를 잡고 가볍게 돌렸다.
《네가 기사라면 나는 불멸자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의 나는........》
네차흐는 말꼬리를 흐리기가 무섭게 작살을 집어던졌다.
두 개의 작살은 간단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미세한 거리의 간격과 던진 작살의 시간차로 3번째 작살은 스펜서의 허벅지에 박혔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박힌 작살은 그대로 스펜서의 장갑을 찢으며 그를 끌어당겼고, 네차흐는 작게 웃는 소리를 내며 어둠을 끌어들여 다른 작살을 뽑아냈다.
《사냥꾼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