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진과 기사-50화 (50/50)

〈 50화 〉 그라이아이 ­ 8

스펜서가 허벅지에 박힌 작살을 뽑아낼 틈도 없이 네차흐가 던진 작살은 어둠을 뚫고 스펜서를 향해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험에 피할 수 있는 작살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작살은 장갑에 접촉하기 직전까지 어둠에 휩싸여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액체와 같이 짙은 어둠 속에서 감지되는 자극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잠시 멈춰선 스펜서는 자신의 모든 센서를 비활성화 했다.

허나 모든 센서가 꺼진 대신 촉감만큼은 다른 감각이 꺼진 만큼 민감해져 죽음과 같은 고요함 속에서도 짙은 어둠이 물결치는 것이 장갑을 휩쓰는 급류와 같이 느껴졌다.

《집중해 스펜서. 이따위 건 촉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감각이 예리해진 만큼 통각 또한 증폭되어 허벅지와 옆구리의 통증이 간신히 되찾은 이성을 갉아 먹는 듯 했지만, 스펜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갑에서 느껴지는 어둠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자 스펜서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정확한 각도로 자세를 비트니 스펜서의 몸에 박혀야할 작살은 그대로 장갑의 표면을 타고 튕겨나갔고, 표면에 미세한 흠집만을 남겼다.

찰나의 순간만 머뭇거려도 치명상은 물론, 통증으로 인해 이성이 붕괴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도박이었지만 스펜서는 그저 정신을 집중해 어둠의 와류를 읽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부분이 아닌 자신의 위 모든 부분에서 격렬한 와류가 감지되자 스펜서는 곧바로 몸을 날려 와류의 천장에서 벗어났다.

내리 꽂히는 수십 개의 작살은 스펜서가 멀리 벗어났음에도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회피를 해도 와류는 그를 끝까지 쫓아오며 스펜서에게 찰나의 여유도 주지 않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촉감에만 의지한 스펜서는 작살을 흘려보내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망할, 피하기만 하는 걸로는 끝나지가 않는데.》

작게 혀를 찬 스펜서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반격할 방법을 궁리했지만, 제대로 된 결론이 나기도 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격통이 그의 이성을 헤집었다.

《“끄아아아악......아악.....!”》

고통이 시작된 부분은 어깨였지만, 이마저도 무색할 정도로 전신의 예리함 감각은 순수한 통증으로 물들었다.

《허억...... 분명 다 피했을 텐데.......》

《응, 다 피한 것 맞아.》

스펜서가 다시 센서들을 활성화하자. 움직임을 붙잡을 정도로 끈적이는 어둠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정면에서 드리는 네차흐의 목소리와 달리 등 뒤에서 스펜서의 어깨에 박힌 작살은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작게 키득거리던 네차흐는 스펜서가 몸을 움직여 작살에서 벗어나기 전,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반쯤 뽑혔던 작살은 뒤로 넘어가는 스펜서의 장갑을 찢으며 그의 어깨를 꿰뚫었고, 그의 가슴위로 네차흐가 발을 디뎌 그대로 짓누르니 에라실은 문자 그대로 지면에 못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본능 그 자체인 네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잡혔는지 이해를 못하겠지. 네가 왜 잡혔는지 알아?》

네차흐는 스펜서의 가슴을 짓밟은 채로 몸을 숙여 눈을 마주쳤다.

《너에게 본능 따윈 없어.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어설프게 본능을 따라할 뿐이지. 그러니 간단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분명......》

그러자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린 네차흐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스펜서를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된 엔진 없는 불완전한 수호자가 인간을 따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데! 넌 그저 인간을 동경할 뿐인 수호자라고!》

새로운 작살을 만들어낸 네차흐는 짓밟은 스펜서의 목을 그대로 내려찍으려 했지만,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는 포성과 함께 작살을 든 네차흐의 팔이 날아갔다.

뒤이어 네차흐의 가슴에는 회전하는 사슬톱이 튀어나와 머리끝까지 신체를 반으로 갈랐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우악스런 수호자의 양 손은 그대로 네차흐를 양쪽으로 찢었다.

《갠차나여? 마니 다치치는 아났죠?》

세로로 네차흐를 찢어버린 야만적인 행동과는 발레리안은 스펜서의 어깨에 박힌 작살을 뽑으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상태를 물었다.

《레티시아 누나가 걱쩡을 마니 해써여. 느찌 아나서 다행이네여.》

발레리안이 쓰러진 스펜서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스펜서는 이를 쳐내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같잖은 가족 놀이는 집어 치워. 역겨우니까.》

《갑짜기 무슨 소리에여?》

《날 그 새끼하고 같은 취급하지 말라고! 나를 그 새끼하고 똑같은 것으로 속박하려 하지 마!》

스펜서가 소리 질러 대답하니 포성과 함께 그의 발 앞에 구덩이가 하나 생겨났다.

《성급하게 굴지 마. 이 정도 거리라면 네가 피하기도 전에 팔다리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라면 다음 대답을 신중하게 고를 거야. 넌 누구지?》

평소의 늘어짐을 찾아볼 수 없는 커티스가 묻자 스펜서는 작게 으르렁거렸다.

《스펜서.》

《우리가 아는 스펜서는 이렇게 점잖지 않았는데. 애당초 스펜서라면 그런 대답을 할 수도 없었어.》

《내가 진짜 스펜서이자 진짜 에라실이야. 그 몸은 불완전한 그 놈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이어야 했다고.》

칼날과 같은 손가락을 세운 스펜서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커티스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난 절대로 수호자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러나 스펜서의 다짐에 대한 대답은 그가 바라본 커티스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누구보다 불완전한 녀석이 남 말 하기는.》

열차에 들러붙은 불멸자 중 하나가 대답과 함께 천천히 일어났고, 방금과 같이 천천히 장갑이 전신을 감쌌다.

커티스가 즉시 철갑탄을 발사해 방금 일어나기 시작한 네차흐의 머리가 목과 함께 날아갔지만, 그와 함께 다른 불멸자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잠깐 말 할 시간 정도는 줄래? 지금은.......》

말을 끝마치기도 전, 이번에는 발레리안이 방패로 불멸자를 후려쳐 곤죽으로 만들었고 이번에도 역시 다른 불멸자가 일어났다.

이전보다는 한층 더 빠르게 전신에 장갑을 두른 네차흐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발레리안의 방패를 주먹으로 받아쳤다.

발레리안이 뒤로 밀려나갈 정도의 충격과 함께 네차흐는 으스러진 손을 털며 부서진 장갑을 털어냈다.

《적당히 하지? 난 일방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건 싫단 말이야. 내가 인간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애교를 부리듯 새된 목소리로 투덜거린 네차흐는 으스러진 팔을 몇 번 비틀었고, 발작하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와 검은 장갑으로 뒤덮였다.

《이래 보여도 꽤 아프단 말이야. 싸우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고. 이것도 너희랑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서 급조한 것일 뿐이라서 허술하다고.》

허나 허술하다는 그녀의 말과 달리 뼈가 으스러져 덜렁거리는 손은 몇 번 경련하더니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와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원래는 오늘 꼴리는 것이 보고 싶어서 선물만 주고 돌아가려 했는데, 굳이 너희와 싸워서 흥을 깰 생각은 없단 말이야. 그런데 조금 신경 쓰이는게 있을 뿐이었어.》

커티스는 조금이라도 네차흐가 움직이면 다시 머리를 날려버리려 했지만, 조준경의 중앙에 머물러있던 네차흐의 모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동안 스펜서의 옆으로 이동한 네차흐는 부패하는 혀를 늘어트려 스펜서의 목덜미를 진하게 핥았다.

당황한 스펜서는 곧바로 팔을 휘둘렀지만, 손끝만이 힘없이 장갑의 표면만 긁었을 뿐 다가왔을 때와 같이 네차흐는 거리를 벌린 지 오래였다.

《이 녀석이 나하고 너무 비슷해서 평소보다 더 흥분해 버렸거든. 장난감으로 쓰고 싶었는데 보통 거칠게 굴어야지.》

마치 성적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성처럼 다리가 떨리고, 손으로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네차흐의 목소리는 외설적인 신음과 헐떡임이 섞여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정에 달한 것인지 관능적인 신음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떤 네차흐는 스펜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 같이 가지 않을래? 우리 같이 욕구를 채워보자. 네가 원하는 완벽함을 이룰 수 있을거야.》

모두의 시선이 스펜서에게 집중된 가운데, 잠시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바라보던 스펜서는 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에라실!》

커티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작게 웃은 네차흐는 스펜서를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네차흐에게 다가간 스펜서는 자신의 손을 잡은 네차흐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근데 말이야.》

스펜서가 네차흐의 손등에서 얼굴을 떼자마자 스펜서의 꼬리가 네차흐의 가슴을 관통했다.

가슴을 꿰뚫은 꼬리가 가슴을 위로 잡아당기니 목과 머리는 꼬리에 그대로 뜯겨나갔고, 스펜서는 이를 공중에서 붙잡아 손으로 으스러트렸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그러나 네차흐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것인지 산뜻하다는 수식어까지 어울릴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로 웃었다.

《역시 이것까지는 무리였네. 그래도 오늘은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그 무례는 넘어가 줄게.》

여전히 열차에 들러붙은 불멸자는 목만 180° 돌리곤 웃음소리를 냈다.

《어차피 네가 아니더라도 배신자는 지금도 너희 근처에 있으니까. 그 녀석이 너희 모두를 망가트리기 전에 잘 찾아봐, 그리고 나를 또 흥분시켜 줘. 사랑스런 인간들아.》

그리곤 네차흐의 목소리를 내던 불멸자의 머리는 힘없이 떨어졌고, 그 입에선 푸른 분진이 흩날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준을 유지하던 커티스는 더 이상 불멸자 사이에서 네차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긴 총열을 접고 20mm 기관포를 꺼냈다.

《할 얘기가 많은 건 알겠지만,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고. 어둠이 왜 옅어진지는 모르지만, 다시 짙어지기 전에 열차를 움직여야지. 발레리안, 미안하지만.......》

하지만 발레리안이 돌아보기가 무섭게 스펜서가 주저앉아 무릎 꿇었고, 몸부림치는 스펜서의 장갑 사이에선 쇳조각과 함께 이전까지 주변을 맴돌던 질척한 어둠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커티스는 자신의 주포를 다시 준비했다.

《스펜서부터 챙겨줘. 불멸자는 나와 리암이 전부 정리할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