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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4화 (4/47)

〈 4화 〉 #003 나약하디 나약한 육신(3)

* * *

3화

그 뒤로 하루가 흘렀다.

추격은 없었고, 이렇다 할 사고도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르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밤이슬과 새벽의 햇살을 맞아가며 가도 곁의 숲길을 걸었다.

어찌 되었든 홀로 다니는 십대의 소녀라는 것은 이목을 끌기 마련이고,어떤 방식으로든 목격의 이야기가 생기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닐 테다.

걷고, 쓰라린 발바닥을 살피고, 걷고, 금방 지쳐 버리는 몸을 치료하고…….

그리고 다시 걷고, 굶어 죽지는 않기 위해 산열매를 찾아 해맨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하룻밤 지나고 나니 온몸이 찢어질 것 같던 고통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몸이 나약한 채인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신경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 육체를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근육이나 신장, 흉터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들보다 좀 더 근본적인, 더욱이 중요한 것을 돌아볼 기회를 말이다.

‘이 눈은…여명식을 수련했다는 증거.’

론하르트의 방식, 여명식은 평범한 검술이 아니다.

특수한 기술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조작하여 전투를 조율하는— 따지자면 마법의 일종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렇기에 다른 검식들보다도 크게 마나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마나를 쌓는 방법부터, 그것을 발현하는 방식까지.

그것은 검사보다는 차라리 마법사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이었다.

다른 검식들은 마나 자체를 육신에 녹여 더욱이 높은 출력을 꾀하지만, 여명식은 마나를 심장에 녹여 마법사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론상 배우기만 한다면 마법 또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그만큼 마나의 용적이 크지 않아 그럴싸한 마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 ‘새벽빛 눈동자’는, 심장에 그러한 마나를 많이 축적할 수록 조금씩 새어 나오는 일종의 전리품 같은 것이다.

여명식을 익혔다는 수련의 증거이며— 동시에 숙련의 증거.

흘러 넘칠 만큼 심장에 마나가 쌓여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떨까.

이 몸에는 마나가 남아 있을까?

나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몸에 적응하려면 그것을 확실히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가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아직 완벽히 안심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약간의 휴식 정도 사치는 부려도 좋겠지.

"……이쯤이면 괜찮으려나."

차분하게 숨을 가라앉히며 기댄 등에 힘을 빼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신경을 이완시킨다.

그러자 곧, 심장의 박동과 함께 혈류가 전신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뛴다.

피가 내달리고, 전신의 모든 곳에 빠지지 않는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순간 암흑이 찾아왔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곳에 마치 어젯밤의 사고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평화로운 안식을 전달한다.

새벽, 모든 것이 잠들고 새로운 여명이 피어오르는 부활의 시간.

그 이름을 붙인 검식의 마나는 여전히 그곳에 흐르고 있었다.

‘심장의 마나는 그대로다.’

아니… 그대로는 아닌가.

조금 달라진 마나의 기운에,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그것을 느꼈다.

마나가 흐르는 길은 더욱 넓어졌고, 그것을 따라 마나는 더욱이 막힘없이 흐르고 있었다.

‘오히려 발전했나? 놀랍군. 이건… 부드러워.’

마나를 익히기에 어린아이의 몸이 적합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마탑의 미친 늙은이들이 어린아이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군.'

하긴, 기사든 마법사든 어릴 때부터 수련하는 게 효율이 좋다는 풍문이 도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

말로는 수없이 들은 사실이긴 하지만, 몸으로 몸소 체감하니 그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이 몸이 특별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내게 여전히 마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마나만 있다면, 몸이 이토록 쇠퇴했더라도 어느 정도는 커버할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나를 압축하여 근육에 흘려보내고, 그것으로 육신을 강화한다.'

모든 기사들의 검식은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검식을 익히느냐에 따라 효율이 갈리고, 여명식은 그 효율이 결코 좋은 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뭐가 됐든 가릴 처지가 아니지.'

나는 주먹을 쥐고 팔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몸이 작은 만큼 수용량도 작고, 강화할 수 있는 한계치도 적다.

지금의 한계 역시 기대할 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콰앙!!

나는 전력으로 나무 기둥을 강타했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손목으로.물 흐르듯 이어지는 힘의 전달은, 이윽고 나무 기둥에 그대로 전해졌다.

조금 약한 진동과 함께 아름드리 나무가 흔들리고—

그곳에는, 정확하게 주먹 모양으로 새겨진 상흔이 남았다.

주먹은 아프지 않았다. 조금 저릿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강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육체의 연약함 탓이지 기술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음…….

'이 정도라.'

전보단 낫다.

확실히, 여자아이가 낼 법한 힘은 아니긴 한데…….

"습격이라도 당하면 꼼짝 없이 죽겠군."

기사로서는 삼류.

용병으로서도 기준 미달이다.

심지어 의식해서 강화해야만 하고, 마나의 총량도 한계가 있으니 무한하지도 않다.

방금 그 주먹 한 번으로 소모한 마나가 대략 3퍼센트 정도다.

실전에서는 이런 텔레폰 펀치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고, 전신에 마나를 전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기껏해야 십분.

십분 정도가 내가 하루에 싸울 수 있는 최대 시간일 것이다.

"……그래도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나."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고통과 비탄 섞인 한숨이다.

나는 다리에 마나를 흘려 보냈고, 즉시 바닥을 박찼다.

하루에 십 분.

뭐가 되었든, 알차게 활용해야 할 테다.

'……미안하다. 황제.'

정말로 미안하다.

대체 도로 개간 사업 같은 걸 왜 하느냐고, 면전에 대고 지랄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것은 부덕의 소치였으며, 변방의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 나의 허물이다.

변방에 도로 따윌 깔아 봤자, 타국이 침공할 때 교두보만 될 뿐일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반대했었는데.

문명의 이기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구나.

아, 마차가 그립다.

포장 도로가 그립다!!

아. 옛날에 말 몇 필 준다고 할 때 그냥 받을걸……!

……지난 사흘, 내가 느낀 것은 대충 그러한 것이었다.

“거지 같네…….”

나는 기어코 도시에 다다랐지만, 정말좆같은 여정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가끔씩 가도를 달리는 마차가 보일 때마다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참은 게 몇 번이던가.

마나로 몸을 강화하면 뭐하나.

심폐지구력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데.

인정한다. 이건 맹점이었다.

다리는 부르트고, 이 나약한 몸은 고작 십 분 뛰는 것조차도 힘겨워했다.

당장 숲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있었다만, 마치 그 반동처럼 무리한 대가를 치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보폭이 늘어나지만, 그럴 수록 몸에 가해지는 부하도 늘어난다.

그야말로 무력함의 총체나 다름없었더랬다.

시발.

'…뭐,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지.'

여기까지 왔으니 나름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변방의 도시, 셈포어.

추격자가 아무리 우수하다 한들, 군중 속에 숨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추적자가 붙기는 한 건가?’

이리도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서였다. 전장에서의 기본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나의 뼛속 깊숙이 새겨진 본능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기에 할 수 있는 배부른 가정일지도 모른다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이 일의 배후는 첫 폭발로 내가 죽었으리라고 확신한 것은 아닐까.

'배부른 고민이다. 고려할 가치도 없는 방심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살아남은 것은 일단 좋아할 일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폭발이었다면 나는 분명 즉사해야 함이 옳았다.

검성? 소드마스터?

그딴 칭호가 다 무슨 소용인가?

눈앞에서 직경 수십 미터의 구덩이가 생길 만한 폭발이 일어나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걸 막아낼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가 아는 바로는 그랬다…….

“크아아아아!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의 레드드래곤이 울부짖었어요. 레드드래곤은 졸라짱쎄서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었습니다…….”

“우와아아! 다음! 다음은요?”

“이거나 받아라! 월계수의 마녀, 로우렐의 유성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레드드래곤은 외쳤어요! 큭큭큭큭큭, 고작 그런 것에 나의 비늘에 흠집이라도 갈 것 같으냐아아아!!”

……이 도시의 가극꾼이나 인형사들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니미럴.

도시의 거리 한구석에서, 작은 무대 위에서 몇 개의 인형을 움직여 공연하는 인형사는 지금 막, 내가 드래곤 한 마리를 물리쳤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파티’가 물리쳤던 이야기였다.

뭐, 이제 와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미 십 수년도 전부터 저런 행위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때에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시야 내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거니와, 노쇠한 몸으로서 아이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으니 썩 이견도 없다.

조금의 불만이 있다면, 좀 사실에 기반했으면 좋겠다는 점 정도일까.

"어휴."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당연히 이것도 오는 길에 훔쳤다—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도시까지 다다랐더니 처음 보는 게 저런 꽁트라니.

좀 봐 달라고.

아이들은 열광하고 있었고 인형사의 돈바구니도 점점 배를 불려가는 게 보였다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이왕이면 있는 그대로를 말해 줬으면 싶기도 하다.

대마녀, 월계수의 로우렐.

구세의 성왕, 벤 카를로스.

산맥의 전사, 발크론의 딸 에일랴.

창세의 연금술사, 엘리온 마제스티.

……그리고 나를 포함한 두 명 더.

세간에서 ‘전설’이다 뭐다 십 년이 넘게 떠들어대고 있는 파티였다만, 솔직히 실상을 까 보면 별 대단한 것도 없는 파티였다.

별 대단할 것도 없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운석을 아무렇지 않게 튕겨내는 드래곤이라니.

‘세상에 그딴 게 어딨어.’

운석을 튕겨내는 비늘이면 칼이 박히기는 하나?

현실성이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크하하하하!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짱쎈 레드드래곤은 꼬리로 운석을 튕겨냈습니다…. 운석은 수만 갈래로 쪼개져 땅을 뒤덮었지만, 신실한 성왕 카를로스가 외쳤습니다! 내 뒤로 오시게! 신께서 그대에게 가호를!”

못 튕겨낸다. 꼬리가 으깨질 거다.

그건 그거고, 그 미친 사이비 새끼가 힐 한 번 해줄 때마다 신앙의 증거랍시고 강제로 헌금을 삥뜯었던 건 아무도 모르는 건가?

“크윽! 이제 어떻게 하지? 용맹한 산맥의 전사, 에일랴가 도끼를 움켜쥐었습니다.”

에일랴? 크윽 이지랄….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도끼로 대가리 깨러 달려들겠지.

‘계책’이나 ‘상황 판단’은 그년과 썩 가까운 단어가 아니다.

“내가 시선을 끌게! 그 틈에 머리를 공격해! 위대한 대연금술사, 엘리온이 가장 먼저 날아올랐어요!”

제일 먼저? 그 방구석 백수 새끼가?

‘너희 죽으면 니네 무기는 내가 갖다가 팔아도 되지?’ 라고 지껄이던 놈이?

더 못 들어주겠군.

‘할 일이 많아.’

나는 자리를 뜨려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도시는 당장의 안전을 위한 장소일 뿐이니, 앞으로의 일 또한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직전, 인형사의 마지막 한 문장이 내 가슴을 거칠게 후벼팠다.

“하지만, 결국 드래곤의 목숨을 거둔 것은 실베스터의 대검이었답니다. 그는 마지막 칼을 내려치기 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의의 검을 받아라!!”

……….

………….

아……….

살인 마렵다.

“주여…….”

나는 억지로 억지로 더 내려지지도 않는 후드를 끌어내렸다.

분명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차마, 차마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는 노릇이다.

누가 지금의 나를 신경이나 쓰겠느냐만, 나는 지금 그것을 지나칠 정도로 신경쓰고 있었다.

생각으로는 분명 ‘별 것 아닌 어린애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이것도 이 몸의 영향인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지나치게 즉흥적이다.

…마치 사춘기 여자아이처럼 말이다.

“후우.”

심호흡.

한 번 더… 심호흡.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저것은 거의 반쯤—아니 사실 거의 전부—픽션이라 해도 무방한 인형극 아닌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 폭발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 도시, 셈포어는 변방의 도시 치고는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편이다.

사흘이나 쉬지 않고 걸어 도착한 곳이니 만큼, 조금은 숨을 돌려도 좋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말이다.

‘내게 필요한 것.’

앞으로 해야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

“……….”

쉽사리 답이 나오지는 않는 질문들이었다.

알고 있는 것도 적거니와, 나는 최근 수십 년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소문에 밝던 실베스터 론하르트도 이젠 옛날 사람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거리를 보았다.

지금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도 드문드문 보였고, 도시의 풍광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평화’ 그 자체였다.

어지간한 소란이 있다 해도 잠깐의 해프닝으로 취급될 뿐, 그들은 여전히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리라.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전부 알고 있다.

어쩌면 저들 모두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풍광은 동전의 앞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일 뿐이고, 언제나 그 뒤를 차지하는 ‘뒷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비밀, 장막 뒤에 감추고 싶은 치부.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골목 뒤의 어둠세계.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앞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들이 있음을 말이다.

“……후우.”

나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가진 것은 훔친 옷가지 몇 벌, 숲에서 주운 나무열매 몇 개.

돈 한 푼 없이 그 ‘가치’들을 빌릴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 그 뒷세계의 힘이 필요했다.

“’뱀’을 찾아야겠어.”

몇 가지, 내게 필요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동전의 앞면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만에, 옛 인연을 빌려야 할 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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