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008 저 간첩 아닌데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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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저기, 혹시 종이랑 펜 있습니까?”
“뭐? 종이? 그야 있기는 하다만…….”
갑작스러운 요청에 사내는 눈쌀을 찌푸리는 듯 했지만, 곧 품에서 노트와 펜 하나를 꺼내 보였다.
상인이라면 당연히 작성하는 수기나 장부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저걸론 곤란하다. 조금 더 크고 그럴싸한…….
그런 게 필요한데.
“그거 말고 좀 큰 종이는 없습니까? 가령 편지지 같은.”
“나는 가죽 행상이란다 얘야. 그런 게 어디 있겠니?”
"도움이 안 되네."
제길. 나 젊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상인은 뭐 이렇게 준비성이 없어?
'귀족도 아니고 행상 중인 상인이 편지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건 무리였나.'
하지만 노트에서 뜯어낸 종이에 휘갈겨서 뭔가를 만들어 봤자 누가 그걸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뭐라 흥분하여 지껄이는 상인의 말을 깔쌈하게 무시하고, 나는 줄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볼까?’
아니.
경비병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 와서 그럴 시간은 없었다.
그럼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그렇게 고민할 즈음, 저 멀리서 의문의 소음이 들려왔다.
—삐이이이이익!!
성문의 바로 앞, 경비병이 들고 있는 막대기처럼 생긴 물건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
저건 또 뭐하는 물건이냐 싶었다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
“……!!”
“가, 가짜다!!”
뭔진 모르겠지만 가짜인 모양이다.
정황상 신분패가 가짜였나?
‘세상 참 좋아졌어. 저런 것도 구별하고.’
옛날에는 신분패 위조가 참 성행했었는데, 그거 구별하는 게 위병의 역할이었다.
당연히 육안이었고, 당연히 동체시력이었다!
뭐 위병은 아무나 하나.
옛날에는 잘나가던 용병이 무릎에 화살을 맞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게 위병이었다 이 말이다.
아무튼.
‘역시 내가 아니었구만. 하긴 뱀 놈들도 나름 일류인데… 그렇게 일을 등신같이 처리할 리가.’
이상하기는 했다.
‘뱀 굴’의 명성이 있을진데, 고작 한 명 이동했다고 그게 경계망에 걸릴 수준일 리는 없지 않은가.
텔레포트 감지는 마력 감지에서 파생되는 아주 기초적인 기술이지만, 오히려 기초적이기에 감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도 얼마든지 연구되었다.
그럼에도 감지되었다는 건, 처음부터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어떤 수단도 강구하지 않았다는 소리.
즉!
나 말고, 마침 다른 빡대가리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나는 아니다!
마침 다가오던 위병도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빡대가리 첩자가 잡혔다면 검문은 다시 풀어질 테니, 편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구만!’
여기까지 와서 다른 트러블에 휘말리는 건 극구 사양하고 싶다.
나는 애초에 은퇴한 몸이고, 이미 떨거지들과 한 판 하느라 피곤한 몸이시란 말이다.
‘그냥 빨리 놈을 찾아서… 뜨거운 물로 목욕 한 번 조지고… 아 사우나도 괜찮겠군…….’
그래, 넷째 제자놈이 바시프론의 문화랍시고 내게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저 북방의 나라에서 이용하는… 목욕 문화의 일종이랬던가.
방 전체를 수증기로 가득 채워서 그것으로 찜질을 하는 것인데, 그 시원함이 아주 그냥 뼈 마디마디까지 녹아들어서…….
“크으.”
생각만 해도 죽여 주는군.
솔직히 행복에 겨운 생각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조금의 방심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상인 사내가 ‘미친년인가…….’하고 속삭이는 것이 들려왔지만, 지금의 나는 저 정도는 용서해 줄 만한 아량을 지닌 상태다.
이 정도 자비 정도는 베풀어 주마.
그렇고 말고.
그런데 문득, 저 멀리서 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아!!”
“음?”
그리고 다음 순간, 성문에서부터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몸 전체를 가리는 로브를 눈 아래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것이 참, 온몸으로 ‘나 수상한 사람이오’ 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 너머에서는 당황한 얼굴들의 위병들이 그 뒤를 쫓고 있었는데— 정황상, 저 수상한 인간이 방금의 소음을 낸 범인이겠지.
‘엮이지 말아야겠군.’
난 말없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의 나는 딱히 정의의 사도도 아닐 뿐더러, 괜한 소란에 말려들어 주목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의?
엿이나 먹으라지!
그딴 건 입영 1년차 신입 기사들이나 지껄이는 말일 뿐이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전쟁터에서 구르다 보면 명예라는 단어가 얼마나 좆박는 소리인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등신 같은 첩자와 위병들이 나를 지나쳐 가기를 기다렸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어라.
“이, 이봐! 너! 이거 가짜잖아! 어떻게 된 거야!!”
“???”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이쪽으로 달려오던 등신은 갑자기 내게로 날아들더니, 내 자켓을 붙잡고는 갑자기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 손에 든 종이쪼가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내게 밀어붙였다.
“아니, 대체 무슨…….”
“빨리 대답해! 수틀리면 우리 둘 다 죽는 거야!!”
“이거 놔라! 무고한 사람 하나 엮어 들어간다고 네 죄가 사라지진 않아!”
“모른 척 하기야?! 이렇게 나를 버릴 셈이지! 이럴 줄 알았어!!”
놈은 나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고, 그새 위병은 나와 그놈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붙잡히는 것도 상관없으니 일단 나를 붙잡겠다는 악의가 참으로 잘 느껴진다.
내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앞에는 나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위병이 다가와 있었다.
“잠깐, 잠깐만…… 아니, 위병 제군들. 수고하는 사실 잘 아네만…….”
“변명은 철창 안에서 듣도록 하지.”
“잠시만. 이건 오해일세. 나와 이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리가 있냐! 네가 시킨 거잖아!!”
이 씹새끼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코트를 붙잡은 놈은 고개를 쳐들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위병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아니 제군들, 첩자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거짓말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그건 그야!”
“시끄럽다. 죄가 없다면 밝혀지겠지. 같이 가 줘야겠어.”
“………!”
이야…….
좆 됐네.
—철컹.
“취조 준비가 끝나면 데리러 오지. 얌전히 있어라.”
“………….”
눈 앞에서 감옥의 철문이 강렬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요즘 참 새로운 경험을 자주 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누가 나이를 환갑 넘게 쳐먹고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겠는가? 그것도 여자아이의 몸으로.
‘애미…….’
좆 같은 점이 정확히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어떻게 감옥 설비는 수십 년 전이랑 비교해서 바뀐 게 없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동네가 얼마나 평화로우면 이 감옥에 나를 포함해서 사람이 딱 두 명 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당연히, 저 반대쪽 철창에 갇혀 있는 씹새끼의 존재 그 자체고 말이다.
나는 절그럭거리는 수갑의 사슬을 대충 정리하며 철창 너머의 개자식을 바라보았다.
철창에 갇혀서도 태연한 꼴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지 않나 싶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형으로 보면 아마도 여성.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여자였나.’
아니, 여자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앳된 목소리였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혹은 조금 더 많은 정도의 소녀일 것이다.
‘웃기는 일이군.’
당연한 말이지만, 세작질 따위를 하기에는 맞지 않는 나이의 소녀다.
나아가 저 옷, 로브, 셔츠와 바지에 이르기까지— 그 전부가 소녀가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로브는 고급 원단을 사용했지만 최대한 수수하게 하려 노력했어. 바지는 안 맞는 것을 일부러 줄인 티가 나고… 셔츠는 평소 입던 물건인가? 아니, 빌린 거겠군.’
웃기는 일이지만, 기사 짓거리도 몇 년 하다 보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기사의 전장은 전쟁터만이 아닌지라— 귀족의 양식이나 예법 따위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말하건데, 감옥에 아무렇게나 앉은 것 같은 저 소녀의 몸가짐에는 귀족의 그것이 이미 여실하게 몸에 베어 있었다.
앉는 자세부터 발끝의 위치, 손을 두는 장소나 시선의 처리까지 말이다.
첩자 따위가 하루이틀의 연습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기품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몸짓 하나하나에 거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반복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게 저것이니까.
‘잘 쳐줘 봐야 도망친 귀족의 자녀인가?’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려 놓은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 뭐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너 도대체 뭐예요?!”
“……뭐, 뭣?”
하지만 상당히 예상 외로, 그녀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대꾸했다.
마치 자신은 잘못한 게 전혀, 정말로 전혀 없다는 투였다.
‘이 자식, 거짓말 치고는 쌧바닥 놀리는 솜씨가 너무 자연스러운데…….’
설마 정말로 나를 누군가와 착각한 건가?
뭔가 고도의 계획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골 때리네.’
언제나 그렇듯, 가장 피곤한 상황은 똑똑하고 계획 있는 놈을 상대할 때가 아니다.
멍청한데 계획만 거창한 새끼를 상대할 때가 제일 피곤하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뭔가를 착각한 것 같은데 말이다. 얼간아, 우리는…….”
“아니! 나는 착각하지 않았어요. 정확히 봤단 말이에요!”
“우리는 방금 처음 만났—”
—파직.
내 말을 끊은 것은 허공에서 울린 강렬한 전격음이었다.
저년의 손끝에서부터 찬연하게 반짝이는 파란색 뇌전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움직이는 궤적대로 허공에 몇 초 간의 흔적을 남겼다.
마법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필기 마법이다.
그녀는 묶인 손을 애써 휘둘러가며 허공에 글씨를 적어냈다.
[당연하잖아요, 멍청아!]
“뭐라고?”
[너한테 했던 말? 그야 당연히 다 뻥이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니, 진짜로 미친 년 아니야. 이거?”
그 와중에 위병한테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마법까지 쓰고 있는 건가?
어이가 없다.
그러면,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엿 한 번 먹으라고 그랬다는 건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가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저 년은 도리어 지가 분해하며 격정적으로 손을 놀렸다.
[하지만 너 쎄잖아요! 경비들 정도는 간단히 처리하고 도망칠 수 있었잖아요! 왜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
뭐 그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단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이 년이 지랄한 시점부터, 그냥 도망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수십 번은 시뮬레이션해 봤으니까.
하지만 대답은 ‘NO’다.
단순한 이유였다.
“멍청이가. 성벽 밖의 위병을 건드리는 건 중죄다. 국가 전복 도모죄라고.”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건 그냥 어중간한 훈계나 유치장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결 처형부터 평생 따라다니는 현상금까지도 걸릴 수 있는 문제였다.
더하여— 당연하게도, 한껏 방심한 불량배 놈들과는 다르게 중무장하고 경계하는 위병 여럿을 제압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고 말이다.
차라리 잡히고 나서 빠져나갈 구색을 찾는 쪽이 더 온건한 해결책이었으니, 내가 이리 잡혀들어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저년은 여전히 뻔뻔한 채였다.
[흥, 무슨 상관인가요. 도망치면 그만이지.]
“그런 마인드가 범죄를 끊이지 않게 만들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웃기는 소리를 하네? 너는 진짜로 범죄자잖아요.]
“……?”
[실수했어요. 제 발 저려서라도 싸울 것 같았는데… 순순히 잡혀 들어올 줄이야.]
저년은 손톱을 깨작거리며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태도를 보니, 진심으로 ‘실수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범죄자라고 확신한 채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게 달려들었다는 소리다.
그야말로 완전한 계획범죄다.
그러나…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다 보여요. 나, 꽤 유능하거든요.”
그녀는 묶인 팔을 낑낑대며 들면서 내게 삿대질했다.
어어디 으린놈의 새끼가 어른한테 삿대질을 하느냐고 소리치며 손가락을 분질러 버릴 행위였다만, 안타깝게도 내 손이 저기까지 닿지는 않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 그거 변장한 거죠? 알고 있다고요. 너 같은 꼬맹이가 그렇게 많은 마나를 지닐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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