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009 저 간첩 아닌데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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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마나?
그 말에 나는 절로 눈쌀을 찌푸렸다.
“마나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건가?”
“흥,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건 희귀한 재능이다.
아니, 희귀를 넘어 불합리하기까지 하다.
기사의 단련으로는 닿을 수 없고 마법의 연구가 극한에 닿아야 흉내라도 내 볼 수 있는 영역을, 날 때부터 지닌다는 것이니.
하지만 그 말을 곧바로 거짓이라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아가, 그것 외에는 지금의 나를 간파할 만한 수단이 없는 것 또한 이유의 하나였다.
일반인은 마나를 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수련을 쌓으면 그것의 존재를 느끼는 건 가능하다.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 어느 정도의 수련을 쌓았는지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 마나를 감추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가 그런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는,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강자만이 나를 간파할 수 있으리라.
물론 좀 약해져서… 나보다 좀 아랫 급들 한테도 보일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줍잖은 얼간이들에게는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보일 테지.’
가령 예를 들자면— 위병들에게도 보였으니 나를 이리 평범한 감옥에 가둔 게 아니겠는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숙이 내려진 로브의 너머로, 옅게 빛나는 비취색의 눈동자가 엿비쳤다.
‘그래, 거짓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거짓은 아니지만, 말은 틀렸다.
변장이냐고?
빌어먹을. 변장이면 얼마나 좋겠냐?
“네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이야. 세상은 넓고 네가 모르는 지식의 이면은 무한히 존재한다.”
“모순이네요. 엉터리 논리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이 변장한 게 아니라면 당연히 내가 연장자일 거고, 변장한 거라면 내 말이 사실일 테니까.”
“……….”
그건 그렇게 되네.
아니, 하지만 나더러 어쩌라고.
그렇다고 구구절절 내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 사정이 있어.”
“그러시겠죠. 뭐, 스파이도 다 사정이 있어서 다른 나라에 잠입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도 첩자는 아니야! 너 임마. 나 없으면 이 나라는 진작에 망했어. 알어?”
“얼마나 대단한 이중 스파이시길래?”
“간첩 아니라니까!”
요즘 애들은 정말이지…….
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짓눌렀다.
이딴 어이없는 일에 휘말려 목적지 바로 앞에서 엎어지다니.
‘여길 어떻게 벗어난다?’
저 뻔뻔한 년이 당당한 걸 보니 뭔가 계책이 있는 모양인데, 그걸 마냥 믿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가령 예를 들어— 나는 덩그러니 두고 혼자 탈옥해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뭘 어떻게 돼 시발.
닭 쫓던 개 신세도 아니고, 그냥 닭 쫓던 개 옆에서 울던 고양이로 끓이는 나비탕 신세 되는 거지.
그러니까, 저년이 뭔짓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만 했다.
나는 일단 마나를 끌어올려 사슬을 잡아당겨 보았다.
—끼기긱…….
약간의 소음과 함께 사슬이 천천히 구부러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주 천천히였지만, 그 균열은 분명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겠군.’
하지만 사슬을 끊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저 철창 너머에서, 방금까지만 해도 온갖 시건방을 떨고 있던 년이 금새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넌 왜 또 그런 표정이냐? 뭘 꼴아봐?”
“자, 자, 잠깐만요. 그걸 끊을 수 있어요?”
“방금 네 입으로 변장한 거라며. 내가 힘을 숨기고 있으면 당연히 이쯤은 가능하지 않겠나?”
“무슨 그런 괴물같은…… 다, 당신 진짜 스파이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없었으면 이 나라는 진즉에 망했어.”
“세상에, 진짜 유능한 스파이인 모양이네……. 왜 진짜지?”
허허 젠장.
왜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 대화가 성립이 안 되는 걸까?
참으로 기묘한 부분이다.
왜 진짜냐니, 뭐 그런 거지 같은 질문이 다 있어.
심지어 끝까지 안 믿는 모양인지—기대도 안 했지만— 그녀는 뻔뻔하게 입을 닥친 채 손가락을 놀렸다.
[좋아요.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제가 알 필요가 뭐 있겠어요? 그냥 잠깐 협력하죠. 이 감옥을 같이 벗어나기 위해서요. 어때요?]
어떠냐니, 무슨 그런 질문을 하나?
방금까지는 그냥 우습게 보다가도, 방금 그걸 보고 탈출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이 선 모양이다.
나는 말 대신에 오른손을 들어 산(山)을 표현하는 수화로 대답했다.
“너, 너는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는 게 취향인가요?”
“위함한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전쟁 중에도 고문은 잘 안해. 성국 새끼들이 지랄하거든. 그리고 간첩 아니라니까?”
그건 몰랐던 사실인지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양 이마를 탁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절박해져서는 철창에 매달려왔다.
“그, 그래도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발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냥 있어도 우리 사람이 오기는 하겠지만, 나는 도망쳐야 한단 말이에요!”
“좋아. 읊어 봐라.”
“뭐, 뭘요?”
“내가 널 도와줘야 하는 이유.”
“그건…….”
나는 그렇게 박정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내가 먼저 나서서 오지랖을 부릴 만큼 선하지는 않지만, 살려달라며 매달리는 인간을 내칠 정도로 악인도 아니란 말이다.
하물며, 사내새끼도 아니고 여자아이의 부탁임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좀 괘씸하기는 하지만.’
어린아이의 미숙함 정도로 생각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결국은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으며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말 안 할래요.”
“괜찮겠나? 도망쳐야 한다며?”
“그래도요. 누가 날 알게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네가 다 불어 버리면 끝인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시길래.”
“대단하진 않아요. 다 사정이 있는 거죠.”
그녀는 몇 발자국 물러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살짝 로브가 흔들려, 그 아래에 감춰진 백금발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래도 이름은 말해 줄게요. 소네트. 그냥 소네트에요.”
“’그냥’ 소네트라.”
척 보기에도 귀족인 아이가 성을 감추고, 그저 이름만을 말해 준다라.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그냥 정체를 숨기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마법사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마법사는 한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되면, 성을 버리고 하나의 칭호를 받는다.
예를 들자면 가령— ‘월계수’의 로우렐이 그런 예시일 테다.
사사로운 연을 끊고, 오로지 한 명의 연구자로서 서겠다는 결심의 각오.
그녀가 귀족의 영애고, 가문에게서 도망친 것이라면…
그런 해석을 덧붙여도 과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넘겨짚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만, 글쎄.
내가 그토록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는 이유는, 저 아이에게서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소네트, 소네트…….’
흐음.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사람 이름은 못 외우는 편인데, 요즘 건망증이 심해져서 이거.
나는 몇 초 정도 더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그러다가, 문득.
‘잠깐… 소네트?’
순간 먼 옛날의 무언가가 뇌리의 한 켠을 스쳐갔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고, 딱히 떠올릴 이유도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 두고 있었던 추억의 한 장면이 똑똑히 존재했다.
잊고 살았던 편린의 하나, 옛 부하와 나누었던 한담의 한 조각이.
'젠장, 생각해 보지 말걸.'
젊은 몸의 성능이 생각보다 굉장하다.
옛날이었으면 그저 잊고 살았을 쓸모없는 과거조차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좆 같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요?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이봐, 아가.”
“네?”
—까앙!!
나는 온 몸의 마나를 끌어올려 손목에 집중시켰고, 곧 거친 소리를 내며 수갑이 반으로 쪼개졌다.
상당히 큰 소리였기에, 뭔지 확인하려고라도 위병이 올 것이다.
그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한다.
"흐읍…!!"
온 힘을 다해 근육을 수축시켰고, 창살을 가로로 우그러뜨린다.
별다른 처리도 되지 않은 강철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창살을 빠져나온 뒤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는 소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가자.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 갑자기 왜요? 싫다면서요.”
“……….”
그녀는 몹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솔직히 나로서도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
솔직히, 나도 네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이년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답하자면.
“조상님이 덕을 많이 쌓았어.”
“……네?”
“그냥 그런 줄 알아.”
뭐.
왜 그렇게 쳐다봐.
진짜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