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012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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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지나가는 누군가가 지금 내 표정을 본다면, 대체 무엇이 그리 고민이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어린 놈이 세상사 대체 무슨 고민이 있길래 표정이 그렇게 짜증과 분노로 가득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상당히 큰 오류가 있다.
일단 그 질문을 하는 새끼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 고민하는 건 차치해 두더라도—
‘뭐가 문제냐’고 묻는 게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는 게 있기는 하냐’고 물어야 맞을 테다.
그 편이 세기 훨씬 편하고 빠를 테니까.
“조졌네…….”
뭐가 조졌느냐?
그 이야기를 꺼내려면, 일단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느냐를 먼저 말해야만 한다.
'가장 처음.'
당장의 생존 외에 다른 것에 시야를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그 무엇보다 먼저 고민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을 누구로 정해야 하는가.’
내가 그래도 인생을 헛산 것은 아닌지라, 이런 꼴이 되어도 도움을 청할 만한 인간은 몇 있었다.
가장 처음 생각나는 것은 내 동료들이다.
아마 대부분은 언제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반갑게’의 기준이나 방식은 좀 많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 줄 테지.
‘하지만 안 돼. 그들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들은 나처럼 은둔하지도 않은데다 여전히 전성기처럼 활동중이다.
분명 지금도 어디 한 자리 차지해서 떵떵거리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주변에 사람도 많고, 애당초 쉽게 만날 수 있지도 않다.
‘아니, 만나려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그 자체로 의심을 살 거야.’
그 지체 높은 인간들이 갑작스레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의심의 소지가 된다.
그러니 그들은 안 된다.
언젠가 만나더라도 내가 조금 더 힘을 회복한 후에—
즉, 조금 더 만나도 괜찮을 만한 개연성과 명성을 쌓은 뒤에야 만나야 할 테다.
그렇기에 나는 눈을 돌렸다.
‘동료들이 아니라면, 다음은 역시 내 제자들.’
가르침의 과정에서 조금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가끔씩 나를 죽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오기는 했는데, 아마 직접 만나면 눈 녹든 풀어질 마음이리라.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다지 않은가?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정말로 혹시 모르니까, 나는 그나마 나를 가장 잘 따르던 녀석의 저택으로 향하기로 했다.
쫄아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냥 설득과 납득의 과정이 가장 빠를 것 같아서다.
내 넷째 제자, 솔디어 베르트랑.
마지막으로 본 건 십 년쯤 전인 것 같지만, 그래도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나를 잘 따르던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이건 예상치 못했다.
“안 된다. 돌아가.”
“그, 한 마디 말이라도 전해 주면 안 되겠나?”
“자작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실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시다.”
고작 십년 만에, 만남을 청하는 것도 어려워질 대귀족이 되어 있을 줄이야.
“흐으으으으음…….”
대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당한 나는, 길거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굳게 닫힌 정문을 바라보았다.
더욱 정확히는, 여전히 그 앞에서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와 눈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여보내 줄 눈치는 아니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리라.
‘그나저나… 후작, 후작이라…….’
베르트랑 가는 본디 백작가였을 터다.
10년 전에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했으니, 10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능히 짐작해 볼 만 하다.
백작이 후작이 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으니…….
어지간히도 일에 미쳐 살았겠지.
무(?)로든 문(文)으로든,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야 그만한 작위가 보장되는 직위에 오를 수 있을 테다.
‘뭐, 그게 다 내가 잘 키운 덕이지만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되니까 조금만 덜 잘 키울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나.
이왕 손님의 신분이니,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건만.
‘이리 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정문의 경비와 손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사 사람은 언제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는 법이다.
여기에 덧붙여 ‘쳐맞기 전까지는’같은 사족을 다는 부류도 있지만—
그런 논리라면 나는 누구한테 맞고 다니질 않으니, 언제나 계획이 있는 셈이 아니겠는가.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어 볼까.’
본디 옷 가게라는 것은, 언제나 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위치한다.
작은 도시라면 의류만을 취급하는 가게가 아예 존재하질 않고, 큰 도시라도 빈궁한 자들이 들락거릴 만한 장소가 아니니 대부분은 그러할 것이다.
당연히, 이 도시 베일렌 또한 그렇다.
메인 스트리트에 들어서자 각종 다양한 사치품 가게가 줄을 이어 있었고, 옛날에는 보지 못한 다양한 면면들의 가게도 잔뜩 들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모습을 꼽자면, 귀부인 둘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나누는 모습을 꼽고 싶었다.
'저게 아마… 말로만 듣던 카페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커피를 판다면 한 번쯤 들르고는 싶지만, 지금 내게 있는 돈은 고작 13금.
고급 의류를 살 수 있을까 없을까도 걱정되는 판에,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향락을 즐길 돈은 없다.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견디며 적당한 가게를 살폈다.
워낙 수상해보이는 행색 탓에 로브는 벗었지만, 어른 코트를 입고 홀로 거리를 행보하는 여자아이는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것일까.
거리를 다니는 사람, 혹은 가게에 앉아있는 사람들마저도 나를 향해 힐끗 힐끗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할. 그만큼 차림이 이상한가.’
적당히 감출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곧 위병한테 신고라도 당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적당한 가게를 하나 골라 잡아 들어갔다.
'귀부인들의 살롱들은 좀 많이 부담스럽지.'
내가 고른 것은 겉보기에 기성복을 파는 양장점 같은 장소였다.
어차피 내가 미쳤다고 드레스를 입을 것도 아니고, 적당히 깔끔한 옷 정도면 그걸로 괜찮을 테니 어디든 상관없기는 했다.
게다가 살롱에 들어가면 드레스 뿐일 텐데, 가서 바지를 내놓으라고 난장판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지난번 주문 들어온 건 마감했어?”
“아, 아뇨! 방금도 엘노이 백작부인께서—”
“빌어먹을! 주문 그만 받으랬잖아! 나흘 전에 들어온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 쪽은 단추만 마무리를 하면 될 겁니다!”
“그럼 놀지 말고 빨리 일해! 망할, 학부모들 열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양장점 안쪽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각종 옷감과 재료들이 온 천지에 널부러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고, 직원들은 재주도 좋게 그것들을 곧잘 찾아내어 손을 놀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옷들은, 대체로 하얀색과 밝은 청회색을 베이스로 한 양복들.
아니, 양복이라기에는 조금 어색함이 있었다.
하얀 양복에 황금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일은 좀처럼 없고, 그딴 걸 입는 것을 좋아하는 별종도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촌스럽게 가슴 정중앙에 박혀 있는 저 창 모양의 로고는…….’
나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저 문양이 무엇이었는지 겨우 기억한 까닭이었다.
아카데미의 교복이다.
저 흉물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마크를 박아 넣는 양복은 그것 밖에는 없다.
‘감옥의 경비병들도 그런 소리를 했었지. 동아카데미의 입학시험… 이랬나.’
지금이 입학 시즌이라면 이렇듯 분주한 것도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랑 상관도 없는 교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옷감과 도구들을 조심스레 넘어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옆에 다가섰다.
“실례하겠소.”
“으음? 뭐야, 꼬마 손님이로군.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
사장은 대놓고 표정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으려 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몇 번 돌려 내 옷차림과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은 제스쳐를 취했다.
“잠깐만. 아니지. 당신은…….”
“……?”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원채 바빠서 말입니다. 뭐가 필요하십니까요?”
이 새끼 왜 이래 이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사장은 방금 전까지 인상을 지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비굴하게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바쁜 것 아니었나?”
“그래도 귀한 분을 위한 시간은 내어 드려얍죠. 헤헤.”
‘귀한 분…?’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지는 모르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닐 테지.
뭐, 나를 귀족으로 착각해 준다면 오히려 좋기는 하다.
속고 속이는 관계에서의 머저리는 언제나 속은 놈인 법이니까.
‘그래도 이 차림 어디에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지는 모르겠군. 나와 닮은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그럼 들어가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가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실례한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귀족의 언행, 귀족의 방식이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사니, 응당 상응하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마인드다.
거들먹거리는 것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지만 나름의 귀족 행세라면 꽤 경험이 있는 편이었다.
언제나 말하듯, 기사의 전장은 전쟁터만이 아니기에.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적당한 기성품 정복이 필요하네. 코트는 없어도 상관없어. 바지와 셔츠 정도만 있으면 족해.”
“음…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또 그런 쪽으로는 완벽합죠.”
사장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자신이 없어졌다.
대체 뭐가 완벽하다는 것인지 이제는 불길함마저 들었지만, 생각 외로 사장이 안쪽에서 가져온 옷들은 멀쩡한 것들이었다.
바지, 셔츠, 조끼… 넥타이와 모자까지.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긴 리본끈 하나였다.
“……이건 뭐지?”
“아, 머리끈입니다. 아무래도 변장이니, 묶어 올려 모자로 머리를 숨기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자르면 그만인데.”
“무, 무, 무슨 소리십니까! 그리 아름다운 머리칼을 자른다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십니다.”
“……….”
이해가 되지 않는 생리였지만, 어차피 단검 한 자루로 머리칼을 자르려 했다간 머리가 산발로 엉망이 될 테니 지금 당장 자를 생각도 없다.
나는 ‘묶어 주겠다’는 그의 말대로 얌전히 뒤를 돌았고, 사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려 그 위에 모자 하나를 얹어 주었다.
그는 곧 나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고, 그 앞에는 여전히 예쁘장한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남장을 한다고 노력해 보았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은 티끌만큼도 감춰지지 않은 소녀가.
‘씨발, 좆같이 예쁘잖아.’
턱 아래부터 이어지는 쇄골에 작은 흉터가 몇 개 남아 있었지만, 그딴 것으로는 이 외모에 조그마한 타격도 입힐 수가 없다.
아마 이 아이가 당장 나를 찾아와 뭔가를 부탁했다면, 그야말로 할아버지 미소를 지으며 당장 도와주려 했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무렵, 사장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래도 한 가지 첨언해 드리자면, 그 복장을 제안한 디자이너는 당장 해고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요. 대충 빈민 정도의 모습으로 꾸미신 것 같지만, 사실… 조금만 옷에 대해 알아도 금방 알아챌 테니까 말입니다요. 솔직히 간언하자면 진짜 구렸습니다.”
니미.
사내새끼가 몸만 가리면 됐지, 예쁘장해서 어디다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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