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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15화 (15/47)

〈 15화 〉 #014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고(3)

* * *

14화.

“처음 보는 영애였다고?”

“그렇습니다. 남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 귀족의 여식이었습니다. 은빛 머리칼이 특징적이더군요.”

“은빛……?”

솔디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상화로 보았던 아이카반 영애는 분명 아이보리 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은색은 염색하기는 어려운 색이니, 보통은 자연적으로 지니는 머리색인데…….

‘그런데 은발을 지닌 가문이 있었던가?’

솔디어는 후작으로서 제국의 여러 가문과 긴밀한 사이로 지내오고 있었지만, 은발은 특히나 희귀한 머리색이었다.

그야 늙어서 하얗게 샌 경우라면 모를까, 은발이라는 것이 쉬이 나오는 머리칼이 아님은 자명하지 않던가.

그가 기억하기로 은색을 유전 형질로 지니는 가문은— 최소한 이곳 아르칸티아 제국에는 없었다.

‘서제국… 포이보스의 황가가 은발이었던가.’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올 이유는 없다.

그러잖아도 거대한 산맥으로 가로막힌 상태로 대륙의 서쪽과 동쪽을 나누어, 서로가 진짜 제국이라고 우기는 앙숙 같은 관계다.

그럼에도 은발의 영애라면— 억지로라도 염색을 의심해 봐야 할 터였다.

솔디어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유전되는 머리색은 가문의 상징 중 하나다. 일부러 바꾸는 귀족은 많지 않아.’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바꾸는 경우라면 역시…….

‘정체를 숨겨야만 할 때’다.

그러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데 굳이 눈에 띄는 은발로 염색한다고?

‘무엇 하나 아귀에 맞지 않아. 대체 누구냐, 너는?’

솔디어는 접견실의 문 앞에 섰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없는 약속을 꾸며내면서까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 자신과 분명 연이 있는 자이니, 하인들이 길을 내 주었을 터.

솔디어는 숨을 깊게 들이쉰 채 문을 열었다.

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이성적으로 대처해야만 할 것이라고—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왔느냐?”

“……?”

그러나, 처음 보는 소녀의 저 태도에 무어라 해야 할 말도 잊어버린 채 굳어버렸다.

“어… 음…….”

솔디어는 첫 인사를 언제나처럼 내뱉을 생각이었다.

안녕하시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하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등으로 시작하는, 초면에 예의를 지키는 첫 인사를 말이다.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솔디어는 저 ‘왔느냐?’라는, 어처구니 없는 첫 한마디에 대답할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뭘 그리 얼빠져 있느냐. 와서 앉거라.”

“저, 저 무슨…….”

무례를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소녀의 언행에 로메인은 허탈하기까지 한 숨을 내쉬었다.

아까 자신에게 하던 태도는 마치 연극이었다고 비웃는 것처럼, 소녀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와인 글라스를—어째서인지 안에 든 것은 커피 같았다— 휘적이는 소녀는, 도저히 아까의 공손했던 귀족 영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되었다. 로메인.”

“하지만…!”

“잠시 나가 있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종장 로메인은 영 탐탁치 않은 심정이었지만 주군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곧 호화로운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고, 솔디어는 소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흥미롭군.”

“무엇이?”

“처음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경우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스승은 솔디어를 그렇게 가르쳤었더랬다.

‘세상은 소거법이다.’

아무리 등신같고 쓰레기 같은 발상이어도, 다른 모든 것을 제하고 남은 것이 하나뿐이라면 답은 분명히 그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그 이유 외에는 이리 억지로 나를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 거래나 협상, 그 외 어떠한 이유라도 나를 만날 합리적인 명분이 있었다면 약속을 잡았을 테지.”

“계속해 보거라.”

“허나 자네는 이리 불현듯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도움을 원한다면, 그리 오만한 태도일 리는 없지…….”

이리 말을 계속하는데도, 소녀는 다리를 꼰 채로 피식 웃고 있었다.

정말로 도움을 요청하는 자라면, 설령 도발하기 위해 잠깐 연기를 했더라도 지금쯤에는 꼬리를 내렸어야 함이 옳았다.

솔디어는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퍽 당황하여 있었다.

‘베르트랑 후작’이라 불리우는 자신 앞에서 이리도 거만한 태도를 보였던 이가 얼마나 있었던가?

그래— 오늘 진짜 약속이 있었던 아이카반 공작조차도, 이리 오만하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작위는 그쪽이 높다곤 하나 그는 예절과 명분을 아는 사나이니까.

헌데도, 그 무엇도 아닐 소녀는 이리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식 피식 웃으며, 더 말해 보라는 양 고개를 까딱인다.

솔디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자네가 그리도 거만하게 언행을 반복하는데도… 이 내가 자네를 도우리라는 확신이나 이유라도 있었는가?

“당연하지.”

“하! 한번 들어나 보고 싶군.”

“내가 네 스승이기 때문이다. 솔디어.”

“미안하지만, 내가 잘못 들었나? 누구라고?”

“많이 컸구나, 솔디어. 말대답도 하고. 네 스승님이시다!”

새끼, 빠져가지고는!

옛날 같았으면 말대답한 죄로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서 기어 올라오게 했을 텐데, 아직 납득을 못할 테니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라, 솔디어! 어떤 질문이라도 좋다. 뭐든 대답해 주마!”

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뭘 질문해도 대답해 줄 수 있다.

저놈의 버릇, 저놈의 생각, 저놈의 행동 원리까지!

그야 그 모든 걸 가르치고 주입한 게 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야 그렇지 않은가!

스승과 제자의 유대일진데, 만나기만 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뭐든 물어보기만 하면, 내가 ‘나’라는 사실쯤은 얼마든지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있었는데…….

“이제 보니 미친 년이군.”

“?”

“조금의 흥미가 동해 이야기나 들어 보려 했는데, 그냥 정신나간 여자일 뿐이었어.”

어라?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

나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솔디어의 표정을 감지하곤,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화는 타이밍이다.

“저기, 잠깐만… 솔디어. 얘기를 들어 봐라.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느냐.”

“들을 필요도 없다. 사기꾼.”

에이 시발 잠시만요.

솔디어는 내게 하나의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로 테이블 위의 종을 울렸다.

그리고 직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로메인이 문을 박차고 쳐들어왔다.

인내심은 옆집 개새끼한테 던져준 모양이었다.

“잠깐, 잠깐만. 궁금하지 않으냐? 아무 질문이나 해보라니까?”

“뱀의 혓놀림을 일부러 듣고 싶어하는 이가 어디 있겠나.”

나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솔디어는 그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이건 예상 밖이다.

사람은 지성이 있고, 지성이 있으면 대화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냥 쫓겨나는 것은 상정한 계획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바뀌어 봤자 얼마나 바뀌었다고 스승을 못 알아보냐, 개자식아!"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군. 얼마나 바뀌었느냐고? 무엇이 같으냐고 묻고 싶구나."

그…….

솔직히 좀…….

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스승인데!

나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온 힘을 다해 눈을 부릅떴다.

“그럼 이 눈은 어떠냐? 내 눈을 봐라. 보란 듯한 여명식의 증거가 아니냐.”

“……날 우습게 보는가? 몇 년 전에 마탑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았다. 이제는 홍채까지도 바꿀 수 있는 폴리모프 기술을 개발했다더군.”

“그, 그래……?”

세상이 많이 발전했네.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설령 그 눈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명식 수련의 증거가 될 뿐. 네가 내 스승님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

맞는 말이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라도 갑자기 생판 처음 보는 여자애가 찾아와서 내 제자라고 우기면 안 믿을 테니까.

솔디어는 내가 마시다 남긴 와인 글라스를 휘저었지만, 내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빈 방에 가둬 놓고 감시해라. 그래도 뭔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냄새가 나는군. 저것의 목적을 알아야 겠다.”

“분부대로.”

“어? 야, 자, 잠깐만. 솔디어? 솔디어! 이, 이 자식아!!”

망할, 로메인 이 자식 악력이 보통이 아니다.

옛날엔 그냥 하인 겸 종자일 뿐이었는데, 과연 서당 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가.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시지요. 사기꾼 아가씨."

"사기꾼은 누가 사기꾼이야!"

"어허. 쓰읍. 더 하면 정말로 분노하실 겝니다."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냐?! 이 개새끼야!!”

“시끄러운 놈이군.”

복도 너머에서 대리석이 질질 끌리는 소리와, 시끄러운 소녀의 비명이 교차해서 들려왔다.

솔디어는 혀를 한 번 가볍게 찼다.

드물게도 자신의 흥미를 끈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다면 들어줄 의향도 있었건만.

‘감히 스승님을 사칭하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열 여덟 살 때부터 수련을 받기 시작하여, 검성 실베스터 론하르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자그마치 십 년.

그 긴 세월 동안 끔찍한 훈련과 핍박을 견뎌낸 그였다.

미운 정 고운 정 가릴 것 없이— 십년이나 쌓이다 보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가 쌓이기 마련.

이제 와서는 사실상, 솔디어에게 실베스터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검을, 명예를, 심장을—

살아간다는 것을, 그 모든 정의를 영혼에 새겨준 사내가 바로 실베스터였으므로.

‘스승님.’

그러나, 솔디어는 어떤 소식을 오늘 아침에 들었더랬다.

‘검성, 실베스터 소니에르의 실종.’

그 단순한 한 줄로 시작하는 대략 한 페이지의 보고서가, 오늘 아침에 그의 저택에 도착했었다.

그의 아들이 오늘 약혼이라는 중요한 만남이 파탄나서 슬픔 속에 잠겨 있음에도, 그를 위로하지 않고 이리도 업무에 매여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당장에 뭔가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당장 모든 것을 놓고 그를 찾아 떠나버릴 것 같았기에.

‘스승님… 어디 계십니까?’

마력 폭발로 추정되는 테러와, 시신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검성의 오두막.

아무리 최강이라 한다 하더라도, 직경 30m의 폭발 흔적이 남았다면 걱정이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근심과 걱정을 잊기 위해 업무를 반복하고 있었거늘.’

그것을. 저 소녀가 건방지게도 깨부순 것이다.

어쩌면 악질적으로 기회를 노린 것일까?

검성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거하게 등쳐먹기 위해?

킥. 솔디어는 코웃음쳤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자신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설령 젊을 적의 모습으로 회춘에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순식간에 납득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검성의 다섯 제자 중, 그에게 가장 충성하는 것은 분명 자신일 테니 말이다.

“건방진 년. 다른 제자도 아니고 내 앞에서 스승님을 사칭하다니.”

솔디어는 소녀가 남기고 간 와인잔을 들어올려 흔들었다.

감히 자신의 컬렉션 중 하나를 사기꾼이 음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었지만—

—다음 순간.

빛깔과 향을 음미하려던 그는, 와인이 어딘가 기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

그것도 아주 익숙한 향의 커피였다.

싸고, 질 낮고, 어디서나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북부 산맥을 원산지로 한 보급품 커피의 향.

자신은 마시지 않았으나—

언젠가 올 손님의 접대를 위해 마련만은 해 두고 있던 커피였다.

그래.

솔디어 자신의 스승, 실베스터가 즐기던 커피였기에.

솔디어는 그것을 보고는 고개를 몇 번 주억였다.

일순간, 미친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치밀하게 준비한 모양이군.”

아주, 아주아주 치밀한 미친년인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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