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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16화 (16/47)

〈 16화 〉 #015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고(4)

* * *

15화.

“빠져나올 생각 마십시오. 경비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말 좀 들어 달라고…….”

“말 같은 소리를 하셔야 들어 드리죠. 사기도 말이 되야 듣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로메인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방 안에 버리고 나가 버렸다.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당겨 봤지만, 당연하게도 잠긴 채였다.

“망할. 내 말이 뭐 어때서.”

아무리 60대 노인이 열다섯 살 소녀로 변했기로소니!

하늘을 우러러 거짓말 한 번 안하고 살아온 나인데, 내가 이딴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조금 진실을 왜곡한 적은 있어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로우렐이 ‘양심도 없는 새끼’라고 속삭이는 기분도 들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는다.

‘외통수군…….’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나가는 게 아니냐. 이 망할 제자야.

솔직히 이 눈 말고는 믿고 있었던 게 없었기에, 몹시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니, 미련한 게 아니라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고작 10년만에 세상이 그만큼 발전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무슨 상황이 있더라도 이 눈 하나만 보여주면 믿어주겠지 싶었다.

나라도, 누군가 나를 찾아와 새벽색 눈을 보여주며 제자입니다! 하면, 내 제자는 아닌 것 같아도 일단 말은 들어 볼 것이다.

내 제자의 제자일 수도 있고… 뭐 여러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게 동문이라는 것이고, 사제지간이라는 것인데…….

햐, 요건 몰랐지.

“뭐어? 폴리모프? 니미럴, 칼잡이가 칼질만 잘하면 됐지 무슨 마법이야!”

라고 하던 게 대략 삼십년 전.

세상 발전이 내 인식보다도 빠를 줄이야.

“이제 어떻게 한다냐…….”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방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꼴에 외견이 여자애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나를 창고나 마구간에 쳐박아 놓지는 않았다.

가구는 온통 고급에 커다란 침대까지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마도 지금은 쓰지 않는 손님방 중 하나.

이런 대저택에는 이런 방 한둘쯤은 언제나 있는 법이니 이상할 것도 없기는 하다.

나는 슬쩍 창문을 열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탈출은 무리겠고.”

대충 3층 높이.

강화하고 뛰어내리면 못 뛰어내릴 것도 없는 높이지만, 이 육체로 뛰어내리면 어디 하나는 반드시 부러진다.

마력 강화는 순간적인 출력이 강해지는 것이지, 내구도나 지구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에휴…….”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목표가 어긋나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간의 고생 끝에 다다른 침대는 무엇보다도 달콤해 보였다.

옛날에는 이만큼 침대가 간절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영 푹신한 베개와 이불이 땡기는 게…….

아무래도 이 또한 몸이 바뀐 영향인 것 같았다.

“망할~”

나는 주저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설마 그 놈 성격상 나를 고문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고, 지금은 마음 놓고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허나, 다음 순간 나를 맞이한 것은 솜과 매트리스의 푹신함이 아닌— 영문 모를 딱딱함.

“어억!”

“……?”

그리고 단발적인 누군가의 신음이었다.

이불을 거두자 그곳에는 반쯤 억지로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누, 누구……?”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와, 솔디어와 같은 황금색 눈동자.

그리고, 아직 조금이지만 여명의 기운을 몸에 품고 있는 청년.

“이건 또 뭐야.”

즉, 불청객이다.

난감하다.

그것이 청년, 로렌스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첫째로— 고작 한 번의 만남이 파토난 것 따위로 감정이 울컥여 이곳으로 숨어들었으나, 베르트랑 가의 적자 되는 몸으로서 그 사실이 들킨 것이 난감했다.

이곳은 그가 종종 울적한 일이 생길 때마다 찾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남에게 보이지 못할 표정을 흘려보내고, 마음이 안정될 즈음이면 홀로 빠져나오곤 했다.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은 언제나 겉으로나마 ‘완벽한’ 모습을 유지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들켜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의 슬픔은 조금 컸던지라 침대에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다.

둘째로, 눈 앞의 소녀에 대한 대응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난감했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그러나 저택의 손님이라는 것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만약 사용인이라면, 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으므로.

그러나 무슨 손님일까.

누구의 손님일까.

아니, 어찌 되었든 간에—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난감했다.

손님방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이 먼지 쌓인 곳을 사용할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로렌스는 무어라 입을 열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여자를 대하는 데에 몹시 서툴렀다.

고작 한 번의 약속이 파토난 것으로 이리도 슬퍼할 이유가 달리 무엇이 있을까.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로렌스는 스스로 ‘완벽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이 있는 사나이였다.

문예면 문예, 무술이면 무술, 음악이면 음악!

그야말로 모자란 것 하나 없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열 아홉 평생 여자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모든 것들을 익히는 데에 시간을 쏟은 까닭인 것을.

‘어차피 정략혼 할 텐데 연애따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로렌스는 후회하고 있었다.

연애의 차원을 넘어 그냥 여자아이와 대화한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고,

이 끔찍하리만치 고요한 침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으니까.

소녀가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리자로렌스는 아직 남아있는 졸음기를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로의 시선이 어색하게 엇갈린다.

결국, 싸늘함과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로렌스였다.

“그…… 안녕하십니까.”

잠시 후.

로렌스는 우여곡절 끝에 소녀에게 자초지종을 해명했다.

솔직히 집 주인은 자신이고 소녀는 손님일 뿐인데—심지어 로렌스가 먼저 와 있었음에도— 왜 자신이 변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신경질적인 소녀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기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예쁘다면 예쁘고, 귀엽다면 분명히 귀여운 얼굴이지만…….

뭐랄까.

본능적인 두려움?

영혼에 새겨진 공포?

로렌스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뼈에 사무친 것만 같았다.

‘대체 뭐지?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고 자신했는데…….’

불길함… 은 아닌데, 본능적인 경계심이 일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서도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이 경계심 탓이리라.

“……그래서, 상실감에 평소에 종종 찾던 이곳으로 숨었는데… 누가 올 줄은 몰랐다?”

“그렇습니다. 메이드들도 새벽녘의 청소 시간이 아니면 발 들일 일 없는 방이니까요.”

“흐음.”

소녀는 턱을 괴고 앉은 채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목을 울렸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아마도 평민으로 위장한 것일 터.

‘그것도 남장…….’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히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것일 테다.

정체를 숨기고 이 가문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로렌스는 결국 의문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나는, 흠…….”

소녀는 대답할 것이 궁색한지 말을 끌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입술 끝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애교라도 부리는 것인가 싶었다만.

그 말투와 표정은 가히 전쟁을 앞둔 장군과도 같아 보였기에, 로렌스는 차마 무어라 지적할 용기가 없었다.

“가주의 손님이라고 해 둘까.”

“그럼 왜 응접실에 가지 않고 이곳에?”

“이런저런… 사정이 좀 있어서.”

“흐음.”

로렌스는 더 이상 깊게 묻지 않았다.

대충 생김새만 딱 봐도 귀족의 여식이니 다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있는 것이리라.

로렌스는 그리 이해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여자아이와 이 다음의 대화를 끌고 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다시 그 끔찍한 적막이 흐를 것이 분명한 상황.

‘사정이 좀 있다는데 어떻게 하지? 뭐라도 물어봐야 하나?’

좋아하는 색깔이라도 물어볼까?

‘아니, 너무 등신 호구 아다새끼 같잖아.’

사내란 무릇 여자 앞에서는 지기 싫어하는 생물이라—

등신 호구 아다새끼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적절하다고 해도, 그것을 최대한 감추고픈 본능이 일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뭘 물어보지? 이상형?’

아니, 그것도 좀 그런데!

안타깝게도 로렌스는 콩 심은 밭에서 수박이 나오지는 못한다는 진리를 아직 개우치지 못했다.

소녀가 알면 ‘병신이냐?’라고 한 마디 쏘아줄 법한 생각이 순식간에 수십가지 지나갔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다행히도.

소녀가 먼저 다음의 말을 내뱉었다.

“혹시, 편지지랑 펜 있을까?”

“없을 이유가 없지요. 모든 손님방에 구비해 두는 편이니 말입니다.”

로렌스는 이 적막이 깨졌다는 사실 자체에 너무나도 안도했다.

그가 서랍을 열어 소녀가 요청한 것들을 꺼내었고, 소녀는 처음으로 그 찌푸려진 미간을 풀고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헌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소녀는 로렌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앉아 그 작은 손으로 열심히 펜을 휘갈길 뿐이었다.

너무나도 악필이라 만사가 정갈했던 로렌스는 차마 그 글씨를 읽을 수 없었으나—

소녀는 분명 그 진심을 담아서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으리라.

저 얼굴만큼이나 환상적인 마음을 담은 편지를 말이다.

‘분명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개 씹… 새끼야…… 나… 아직 살아있다……. 흠. 다음은 뭘 써야 믿을까.’

……뭐, 소녀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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