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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17화 (17/47)

〈 17화 〉 #016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고(5)

* * *

16화.

“좋아. 끝! 너, 이거 좀 전해줄 수 있겠냐?”

“아버지에게 말입니까?”

“달리 누구겠나.”

소녀는 어께를 으쓱이며 반쯤 강제로 편지를 떠밀었다.

로렌스에게 ‘거부한다’ 라는 선택지는 아예 주지 않겠다는 듯이 편지에서 손을 때 버렸고, 로렌스는 결국 탐탁찮으면서도 편지를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다시 한번 그 침묵을 겪을 바에는 편지를 전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고 말이다.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그거면 된다. 열어보진 말고.”

“남의 편지를 열어보는 것만큼 교양 없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소녀는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또 뻘쭘한 고요가 찾아올 것 같았으므로, 로렌스는 창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고는 주변을 살폈다.

뒷마당에 있는 이는 없었고, 이쪽을 향하는 시선도 없었다.

정원사는 일을 마쳤을 시간일 테고… 메이드들은 지금쯤 식사를 준비 중에 있으리라.

로렌스는 빠르게 행동했다.

창문을 딛고 올라, 착지할 장소를 살폈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이쪽이 빠릅니다. 문으로 나가면 제가 이곳에 숨는다는 걸 들키기도 하구요.”

로렌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뛰어내렸다.

소녀가 허리에 팔을 두르며 위험하다고 막아 주지는 않을까 순간 기대하기는 했지만, 뭐.

‘현실에서 동화책 같은 일은 역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군.’

연애를 동화로 배운 로렌스로서는 그 이상의 경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방에 남은 소녀— 실베스터는.

“흐음.”

방 한켠에 걸린 어떤 장식을 보고서, 흥미롭다는 듯 목을 울렸다.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

“허.”

솔디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책상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는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는데, 계속하여 그 흐름이 움직여 일정한 형태를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그 모양에 이름을 붙이자면— 까마귀의 얼굴을 한 사람의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퍽 흥미로운 형상이었지만, 솔디어는 그림자에 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이미 십수 년 동안 관계를 맺은 자들 중 하나이고, 그는 그저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가 오늘 가져온 소식에 관해서는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솔레이가 가진 감정은 이미 흥미를 넘어선 집착에 가까웠다.

그림자는 말을 이었다.

“검성은 살아있다. 도주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죽지는 않았어.”

“어떻게 확신하지?”

말한 직후, 솔레이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들은 ‘까마귀’.

정보에 관한 한 이 대륙에서 그들보다 전문적인 이는 없으며, 그 진위를 묻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

그들이 입에 담은 것은 반드시 진실이니까.

설령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도, 그 입에 담는다면 진실이 된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그 기분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담담히 대꾸할 뿐이었다.

마치— 예전에도 그런 사람을 봤다는 것처럼 말이다.

“여왕께서 직접 그림자의 기억을 읽었다.”

“그건…… 믿을 수밖에 없겠군.”

솔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 똑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시선이 문장의 좌우를 여섯 번쯤 반복했을 즈음, 그림자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정보가 있으면 곧바로 찾아오지.”

“부디 부탁하겠네.”

솔디어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그림자의 형체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마치 물기둥이 순식간에 흘러내리듯 하는 모양새였지만, 그 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스승님. 어디에 계십니까.’

아직 검성의 실종이 정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며, 목표, 그리고 신앙과도 같은 존재.

그가 갑작스러운 테러로 인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공표된다면, 그것의 파장은 상상도 못한 곳까지 퍼지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솔디어를 비롯한,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지위와 명성을 지닌 자들은 대부분 그 소식을 접한 이후였다.

제국의 귀족들이 그러했으며, 성국의 주교들이 그러했고, 해양왕국의 의원들이 그러할 테다.

나아가, 실베스터의 옛 동료들 또한 지금쯤이면 소식을 접했으리라.

후우.

솔디어는 한 번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고민을 반복한다고 한들 해결되는 것은 없다.

실베스터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모든 열과 성을 다하여 맞이하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의 뜻이 아니던가.

……그러다 문득,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로렌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경첩음이 울리고 로렌스가 솔디어의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에 대화를 하지 않는 부자지간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껄끄러움이 있었다.

어느 쪽이고 간에 결코 기쁜 날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있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냐?”

“편지를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편지?”

솔디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편지가 올 곳이 없는데?’

아니, 보다 정확히는— 아들을 통해서 편지가 올 만한 곳이 없었다.

가문으로 보내지는 편지는 전부 시종장인 로메인이 관리하고, 그 수가 너무 많기에 분류된 것들 것 자신의 손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로렌스도 마찬가지였으니, 로렌스에게로 가는 편지 또한 로메인을 통할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건낸다라.

무슨 내용이길래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여기 있습니다.”

“흐음.”

솔디어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지만, 일단은 편지를 건네어 받았다.

로렌스가 사용인도 아니고, 아들이 건내는 편지의 출처를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일 테다.

편지 봉투는 없다. 그저 곱게 접힌 편지지와, 그 안에 휘갈겨진 잉크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찌나 부주의한지 편지의 뒷면에는 잉크가 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편지의 주인은 교양있는 귀족은 아니리라…….

접힌 편지를 펼치며 솔디어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편지를 전부 펼쳐, 첫 문장을 읽기도 전.

그 모든 문자와 문장이 한 눈에 들어온 그 순간에, 편지를 쥔 솔디어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

잘못 본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하다.

비록 거진 수년 만에 보는 것이라지만, 자신이 이것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그리 확신하고서 솔디어는 천천히 부릅뜬 눈을 아래로 내려갔다.

끔찍하게 알아보기 힘든 형체의 필체.

공들여 쓰는 것 따위는 사치라는 양, 잘못 쓴 글자는 성의 없이 검은 줄로 지워 버리는 행태.

그리고, 누가 보냈는지 적당히 알아쳐먹으라는 양— 인장도 지장도, 서명조차도 없는 마지막 문단.

‘세상에.’

순간,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솔디어는 순간 숨을 멈추고, 몇 번이고 다시 편지를 읽었다.

‘착각했을 리는 없다.’

‘꾸며냈을 리도 없다.’

스승은 편지를 쓰는 것을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도 귀찮아 하는 인간이다.

평생에 쓴 편지가 열 개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의 필체를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열도 존재하지 않거늘, 어찌 그것을 꾸며낼 수 있을까.

그러나— 먼 옛날, 솔디어 자신의 결혼식 때에 단 한 번.

그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드르륵!

솔디어는 신경질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 그 맨 위의 종이를 꺼내었다.

몇 번이고 접히고 펼쳐 닳은 흔적이 눈에 띄는 편지가 그의 손에 들렸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펼쳐 올려놓았을 때에.

“아, 아버지?”

“……….”

“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솔디어는 이미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에 문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벌써 읽었나?”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그 놈 정도의 수준이면 발소리를 감추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저런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어지간히도 감정이 넘쳐 흐르고 있다는 의미다.

“편지를 너무 험하게 썼나…….”

이래서 어릴 때 주변 환경을 잘 가꿔야 하는 모양이다.

그 욕쟁이 마녀 로우렐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욕을 달고 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러다 진짜로 피 보겠어.”

격렬한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져 온다.

수틀리면 당장에 나를 포박하고 고문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솔디어가 그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은 아님을, 나는 믿고 있다.

결국 발소리는 문 앞에까지 다다랐고, 다음 순간.

——콰앙!!

문은 터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격렬하게 열렸다.

젠장, 생각보다 많이 빡친 모양이다.

믿으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분노한 얼굴을 보면 할 말도 다 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대신 벽으로 다가가 아까 보았던 장식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늦었구나. 솔디어.”

“……….”

다행히도, 그동안 솔디어는 침묵한 채로 기다려 주었다.

내가 손을 뻗은 것은 벽에 걸린 교차한 장검 두 자루.

장식용으로 걸린— 검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조악한 쇳덩어리였지만, 상관없다.

“나뭇가지면 어떻고, 쇳덩어리면 또 어떠랴.”

나는 그 검 하나를 내려 손에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기사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니라 의지인즉, 그 뜻 하나로 베지 못할 것이 천하에 없으니.”

그는 잔뜩 그늘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한바탕 할 생각으로, 어쩌면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망할 제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괜찮다.’

나는 검을 들어 솔디어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언젠가 반대편에서 이루어졌던 이 행동은, 내가 놈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다시금 반복되고 있었다.

“검을 뽑아라, 솔디어. 검사의 정의가 서로 다르고 뜻이 엇갈렸으니, 검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야기를 나누랴?”

저벅.

놈이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검은 뽑지 않은 채다.

저벅.

두 걸음을 내딛었다.

여전히, 검은 뽑지 않은 채였다.

“아… 아아……!!”

여실히 감정이 실린 발걸음이다.

소리에 실린 감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

다음 순간, 놈은 한순간에 바닥을 박차 내게 달려들었다.

“………!!”

그러나, 시간이 가속한다.

찰나를 천 조각으로 나누어 그 모든 조각의 순간이 새벽빛 눈동자에 내비쳤다.

여명식. 론하르트의 방식.

나를 증명하기에 이만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여명식은 이능의 검술.

시간을 쪼개고, 미래의 장막을 들추어, 그 공간을 장악하는 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녀석이 검을 뽑는 모습이 비쳤다면 칼을 들어 막았겠지만, 나는 그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솔디어가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보다 정확히는.

'그런 미래가 보였으니까.'

솔디어는 정확히 두 걸음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그래.”

“진실로, 진실로 스승님이십니까?”

“망할 녀석.”

나는 꿇어앉은 놈의 정강이를 한 번 찼다.

극한까지 단련된 몸뚱어리는 이 정도로는 고통조차 느끼지 않겠지만,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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