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019 아카데미, 1차 입학시험(3)
* * *
아르칸티아 아카데미.
모두가 통칭하여 이르기를— 동(?)아카데미.
이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 가장 강성하고, 명망 높은 교육기관 중 하나다.
전 대륙에서 입학 지원자가 모여들며, 그 숫자는 가히 수만에 이른다.
매년 사고 사망자가 수백 명은 나올 정도로 치열한 시험이 이어지지만 응시자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입학은 재능의 증명이며, 졸업은 성공의 담보.’
그러한 말이 있을 정도로 동아카데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기 때문이었다.
‘동아카데미의 졸업자는 반드시 부와 명예를 약속받는다’ 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긴 하나—
그런 말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유라기도 부끄러운 당연한 일일 테다.
수만 명의 지원자 중 합격자는 단 삼백 명.
그 정도로 거르고 거른 보석이 빛나지 않을 턱이 없지 않은가…….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뭔 병신 같은 책이야. 이건.”
나는 솔디어가 임시방편으로 건낸 동아카데미의 팜플렛을 던져 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네들 자랑을 참 장황하고 재미없게 하는 재능이 있는 놈들인 모양이다.
입학이 어려워?
‘니미, 애들 시험이 어려워 봤자지.’
내게 중요한 건 입학 시험 꿀팁이나 족보 따위가 아니다.
내가 여기를 가야 할 이유.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이유를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
뱀 놈들이야 뭐… 적당히 조질 방법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있다.
이 몸에 적응하는 쪽이든, 원래 몸을 되찾는 쪽이든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나는 당장 움직이기로 했다.
목표가 확실해졌다면 남은 것은 움직이는 것 뿐, 그것을 미적거리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세상에,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신이 저와 함께 동행할 줄이야!”
“……?”
저택의 정문 앞에서, 로렌스가 정말로 반갑다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 솔디어에게 속삭였다.
“얘는 왜 따라오는 거냐?”
“원래 보낼 예정이었거든요. 스승님은 시험 응시 신청을 안 하셔서… 같이 가셔야 할 겁니다.”
“네 빽으로 어떻게 안 되냐?”
“권력을 사사로이 쓰지 말라 가르치신 건 스승님이십니다…….”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랬대?
그러지 말 걸.
이제 와서 모양빠지게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는 급하게 화두를 돌렸다.
“쟤 약혼 얘기 있었다며. 그건 어떻게 된 거냐?”
“그건 종종 있는 일입니다. 약혼자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일도 상당히 자주 있죠.”
한쪽이 떨어지면 생이별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만, 괜히 묻지는 않았다.
지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는 방법이 있겠지.
이후, 로렌스가 허리를 숙여 내게 속삭여 왔다.
“제 아들이지만, 꽤 유능한 놈입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심부름꾼으로 쓰십시오.”
“……아비가 그런 말 해도 되는 거냐?”
“곁에 있는 것만으로 배울 게 있을 테니까요. 반항하면 좀 패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환영이지.”
거절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한 십년인가 이십년인가 전에 나한테도 아카데미 교직 제의가 왔었는데, 당연히 싫다고 했다.
이유? 애들 패면 안 된다더라.
요즘 애들은 뭐 시발 금을 먹고 자라는지, 손찌검도 하면 안 된단다.
'칼쟁이들은 좀 패서 길을 들여 놔야 말을 듣는 법인데 말이야.'
뭐 어쨌든 간에.
로렌스는 너무나도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딱 내가 십대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저런 얼굴이었다.
‘불쌍한 놈.’
아직은 결국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 이거다.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이 앞날에는 빛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얼굴.
저 마인드는 귀족이건 평민이건 간에 다를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로렌스는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로렌스 베르트랑이라 합니다. 부디 로렌스라 불러주시길.”
“그래. 로렌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알겠습니다. 실베니아.”
대충 솔디어에게 듣기로, 1차 시험은 어차피 당일치기라 굳이 준비도 필요 없다고 했다.
로렌스가 모든 안내를 도맡을 테니, 자기는 축하 파티 준비나 하고 있겠다나.
해는 대충 중천에 떠 있었고……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시간은 넉넉하다.
적당히 합격하고 적당히 돌아와서, 느긋한 휴식이나 즐기면 알맞을 테다.
시험장은 북쪽 성벽 근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일견 보기에 그것은— 이를테면 투기장이었다.
마법으로 쌓은 거대한 흑색의 벽과, 강철의 문 대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슬, 그리고 만약의 위험을 대비한 기사와 마법사들까지.
“으아아아악!!”
“크어어억!!”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상큼한 비명소리까지.
미래의 씨앗들을 선별하기 위한 장소라기에는 썩 살풍경한 모습이었지만, 내 마음에는 쏙 들었다.
역시 이 정도는 되야 뭘 변별하든 말든 하지!
저 안엔 뭐가 있을까.
와이번?
하다못해 드레이크?
“흐음…….”
흥분을 참지 못한 내 얼굴에는 곧 흥미로운 미소가 걸쳐졌다.
그런데 로렌스 이놈은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대뜸 말을 걸어왔다.
“걱장 마십시오 영애. 괜찮을 겁니다.”
“뭐가 말이냐?”
“제가 알기로, 이 베일렌의 시험장은 기사학과의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학과 배정은 최종 시험에서 할 테니, 어떤 일차 시험을 치르든 상관은 없겠지만… 영애께는 조금 불리한 환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함께니까요!
로렌스는 그런 개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했지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주먹 대신 질문이 나가는 시점에서, 내가 제자의 아들인 이놈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솔디어는 당연하다는 양 대답했다.
“그야… 영애는 마법사지 않습니까?”
“그리 보이나? 아니면 어쩌려고.”
“소거법입니다. 기사로는 보이지 않고, 행정학과라면 저희 가문을 찾지 않았을 테니까요.”
솔디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답 따위는 없고, 무조건 그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뭐… 말 전체로 보면 썩 틀린 말도 아니니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이 병신 같은 몸은 기사를 지망한다고 말하고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또 나약했으니.
내가 뭐라뭐라 지껄여 봤자 하등 쓸모없는 의문만 이어질 테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뭐, 좋아. 잘해 보라고.”
“맡겨만 주십시오.”
“게다가 시간도 없다면서?”
“그건… 그렇지요. 오늘이 일정의 마지막 날입니다.”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시험을 볼 수 있으니 좋다고 해야 하나.
“근데, 그럼 너는 그걸 차일피일 미룬 거냐?”
“혼담이 오갔던 그녀와 같이 볼 예정이었어서…….”
“쯧.”
안타까운 놈.
‘애비를 닮아서 연애운은 뒤지게 없는 모양이구만.’
나는 갑자기 침울해진 로렌스를 대충 버려두고 접수처로 다가갔다.
시험도 슬슬 끝물이었는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저,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굴러다니는 종이 쓰레기와 수없이 많이 찍힌 발자국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로렌스 베르트랑의 이름으로 접수했네.”
“……베르트랑?”
접수처에 앉아 있던 노인은 주름살 진 눈으로 나를 험악하게 쏘아보았다.
차트를 넘길 필요도 없다는 듯, 뒤편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가져왔지만—
영 의심스럽다는 눈치였다.
노인은 끝끝내 투덜거리며 몇 가지의 종이를 더 꺼내었다.
“후작님께 연락을 받긴 했지. 접수 인원을 하나 늘리겠다고……. 하지만 이리 가녀린 아가씨가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뭔가 착각한 것 아니오?”
“글쎄.”
나는 그저 ‘짖어 봐라’라고 말해 주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매번 개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것도 지겨울 따름이니 말이다.
눈치를 보던 노인은 곧 혀를 차며 내 접수원서도 앞으로 가져왔지만, 역시 영 탐탁찮은지 계속 무어라 궁시렁거렸다.
“다치거나 죽어도 아카데미를 탓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시험 응시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서약서, 그리고 이건…….”
그렇게 궁시렁대며 내 앞으로 내민 종이가 총 세 개였다.
응시원서 하나, 그리고 뭐 탓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둘.
보통은 이런 건 잘 읽고 날인하라고 가르치긴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군."
난 필요 없다.
무슨 사내새끼가 걱정이 이따위로 쳐 많아.
“칼.”
“예?”
“칼 달라고.”
“그, 여기 편지칼이 있긴 하오만…….”
나는 칼끝으로 엄지손가락을 베어, 그대로 서약서들 위에 하나씩 꾹 내리찍었다.
몽글하게 모인 핏방울은 곧 종이 위에 내려앉아 선명하게 지문의 모양을 찍어냈고, 나는 세 개의 서약서를 노인 앞으로 내밀었다.
로렌스는 기겁하며 내 옆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이미 엄지손가락의 핏방울을 빨아내는 중이었다.
“시, 실베니아 영애. 사인이나 인장은……?”
“그딴 거 가진 적 없다.”
앞으로 가질 예정도 없고 말이다.
나는 노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봐, 영감! 혈장은 안 되는 거냐?”
“아, 안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어차피 뒤질 일이 없을 건데, 무슨 서약서를 어떻게 쓰든 무슨 문제란 말인가.
‘좀 아쉽군. 하루만 시간이 있었으면…….’
그랬으면 솔디어가 아들 교육을 좀 시켰을 텐데.
내가 뭘 하든 딴지 걸지 말고, 시키면 말대꾸하지 말고, 그냥 믿고 따르라고.
그게 오래 사는 길이고 잘 사는 길인데…… 참.
‘요즘 젊은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어른 말을 좀 믿을 줄을 몰라.
나는 뒤에서 솔디어가 종이에 사인하는 동안 시험장의 전경을 살폈다.
저 돌벽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겠지만, 뭐가 있더라도 퍽 재미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딴 걸 어떻게 통과하라고 만든 거야!!”
“어머니…….”
돌벽 너머에서 도망쳐 나온 패배자들이 지껄이는 소리들이 꽤 재밌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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