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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30화 (30/47)

〈 30화 〉 #029 규칙과 정의는 결국 쓰기 마련(4)

* * *

29.

“흐음.”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판잣집들이 늘어진 간격과, 그 규칙성이었다.

광장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2m정도의 텀을 두고 둥글게 몇 겹의 원을 그리듯이 늘어져 있다.

내 63번방은 서쪽, 로렌스 녀석의 방은 동쪽.

하지만 서쪽으로 걸음을 아무리 옮겨도, 판잣집 근처를 돌아다니는 녀석들의 성비가 바뀌지는 않았다.

방을 나눈 기준이 남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성적인가?’

아니, 그건 좀 애매할 테다.

그 트롤을 쳐죽이는 시험에 있어, 성적을 수치적으로 매기기는 퍽 곤란한 일일 테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무작위성 배분이 맞을 테지.

그렇다면… 구태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해 가면서까지 굳이 이곳에 응시자들을 머물게 만들 이유는 뭘까.

막연히 떠오르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시험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기야 하겠다만, 그 시험의 내용을 모르는 지금에야 그런 추측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리라.

그렇게 상념과 함께 걸으며 63번 방을 찾던 와중, 시야 한 켠에서 서성이는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부호 혹은 귀족으로 이루어진 무리다.

“망할! 나더러 이딴 곳에 머물라고? ”

“그러게 말입니다. 폴로 도련님과 저런 서민 년놈들이 같은 방을 써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당장 아버지께 연락해서 항의해야겠어. 망할 시험관 놈, 날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무리의 중심으로 보이는 성질 나빠 보이는 놈팽이 하나와, 그에게 아부하는 병신 둘.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로 교복 개조가 자유구나 싶다.

교복의 반이 금사와 황금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휘황찬란한 제복.

그 곳곳이 루비나 다이아몬드 따위의 각종 보석으로 치장되어 눈부실 정도로 빛을 반사해대고 있었다.

심지어 망토는 전체를 금사로 짠 모양인지,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눈부시게 빛을 토해냈다.

‘무슨 금박을 저 따위로… 창피해서라도 못 입고 다니겠다.’

저것에 비하면 내 바지는 양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일순 들었다.

어차피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 동일하기는 했겠다만…….

‘저길 봐 병신이야!’ 와 ‘저길 봐 치녀야!’ 중에 고르라면, 병신 쪽이 미세하게나마 낫지 않겠는가.

실제로 난 그리 생각했고, 아무래도 길 가던 다른 이도 내게 동의하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동의하는 바에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라면 저딴 건 안 입죠.”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그렇겠…….”

“역시 그렇죠?”

“………?”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지만, 나는 곧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퍽 키가 큰 여자아이가 있었다.

물결 같은 머리칼과 자수정 색의 눈동자를 지닌 긴 귀의 여자.

하지만 엘프라 보기에는 꽤 짧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프엘프.’

엘프는 성장이 느린 종족이니, 저 외견까지 자라려면 수십 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프엘프는 인간과 성장 속도가 별반 다르지 않고, 엘프가 아닌 인간 쪽에서 자랐다면 어찌어찌 아카데미까지 흘러와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하프엘프의 특징이라면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마나에 대한 친화력과 뛰어난 오감.

그 중에서도— 시각과 청각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내가 생각을 입으로 말했던가?”

“보다시피, 내가 귀가 좀 좋아서요!”

“누구?”

“음, 룸메이트?”

그녀는 내 손을 가리킴과 동시에 품에서 작은 푯말을 꺼내들었다.

63번. 나와 같은 숫자.

나는 그제서야 어느새 내가 63번 집 근처까지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3번은 주변의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작은 판잣집이었다.

안에 가구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대자로 뻗으면 더 이상 공간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와 나 뿐인가?”

“일단은 그런 것 같소. 아주 즐겁겠구려.”

“…왜 목소리 깔고 말하나?”

“네 흉내를 내 본 거에요. 너야말로 왜 그렇게 말해요? 남장을 한 것도 아니고. 복장은… 어우! 엄청 시원시원한데 말이에요. 말투는 무슨 아저씨같네요!”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돠~”

“……….”

이 뒷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나는 감각.

최근에 느낀 적 있는 것 같은데…….

진짜로 어디선가 한 번 느낀 적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을 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다리에 꽂혀오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광장에 들어서고 나서는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이 꽤 줄은 편이었고—다들 복장이 예상 이상으로 휘황찬란했다— 이 근처부터는 저 황금 멍청이의 복장 덕에 나를 향한 시선은 극적으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주 노골적인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세 개.

“그래도 역시 명망 높은 아카데미라 그런지 계집들의 수준도 괜찮군요.”

힐끗 뒤를 바라보자, 내 다리를 향해 삿대질하는 아까의 놈팽이들 무리가 보였다.

“그러게 말이야. 창관의 매춘부들이랑은 역시 때깔이 다르군.”

“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니는 것이… 저건 그야말로 품어 달라고 교태부리는 것 아닙니까?”

“큭큭, 원한다면 그리 해 주는 것이 도리겠지.”

숨길 생각도 없는지, 소곤거리지도 않고 그저 당당하게 그리 지껄이는 모양새였다.

들을테면 들어 봐라. 따지고 싶으면 따지러 와 봐라.

그리 말하는 듯한 태도다.

그런데 문득,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다시금 내 어깨를 잡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작자들이에요.”

“나도 안다.”

“앗, 안 때려요? 막아도 갈 줄 알았는데.”

“……날 대체 뭘로 보는 거냐? 우리 초면 아닌가?”

“초, 초면이죠. 물론!”

“뒷담을 일삼는 놈들은 마주할 가치도 없어.”

눈앞에서의 모욕은 참지 않겠지만, 뒷담화 하나하나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면 신경이 남아나질 않는다.

오랜 황실 생활으로부터 얻은 한 가지 깨달음이었다.

소싯적에는 깝치는 놈 하나하나 잡아다가 주리를 틀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도 나이를 먹으니까 슬슬 귀찮아졌을 따름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 이 없다.

옛날에야 내가 윗사람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곳은 아카데미.

그것도 입학 시험을 치르는 시험장이다.

녀석들이 눈앞에서 나를 모욕하지 않았고, 그것을 증명할 증인도 없으니….

지금 족치는 건 그저 일방적인 폭행이 될 뿐이다.

녀석들에게 ‘구실’이라는 또 다른 명분을 쥐여주는 폭행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차피 곧 기회가 있겠지. 신경 쓸 것 없다.”

녀석들은 여전히 내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웃고 있었다.

저런 놈들은 결국 점차 과감해지고 눈앞에서까지 깝치며 깐죽대기 마련이다.

그 때 족치면 된다.

나는 끈적한 시선을 뿌리치며 판잣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은 생각보다 깨끗하군.”

있는 것은 조촐한 침대 하나와 의자 하나. 딱 그것 뿐이다.

하긴, 이 대충 지은 판잣집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일 테다.

먼지고 나발이고 쌓일 시간이 없었을 테니, 생활감 없이 깨끗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침대와 의자 중 의자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옛날부터 누워서 자는 때보다는 앉아서 긴장하며 숨을 죽이는 일이 많았기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자면 반사적으로 의자를 택하고는 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 들어온 하프엘프는 방의 전경을 한 번 훑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우물쭈물거렸다.

뭔 말을 하려는지, 몸까지 베베 꼬며 입을 열지 못하던 그녀는 결국 용기를 냈는지 침대를 툭 손으로 치며 말문을 텄다.

“저기요. 너, 네가 이 침대 쓰세요.”

“…왜?”

“그냥요. 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나는 힐끗 침대를 살폈지만,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좀 푸석푸석한 간이 침대이긴 해도 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비하면 충분히 편하리라.

나는 이유 없는 호의는 받지 않는 주의다.

“됐다. 난 이게 편해.”

“그래서 쉴 수 있겠어요?”

“못 쉴 이유가 없지. 당장 머리 위에 운석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해일이 덮쳐오는 것도 아니고, 폭발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정말 편한 거라는 내 참 조언을 몇 초 정도 듣던 그녀는, 결국 됐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에 몸을 던져 버렸다.

‘잔소리 좀 그만 해라. 우리 엄마도 아니고’ 라는 투정은 덤이었다.

“잔소리라니? 이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아, 알겠다고요! 앉으세요. 마아아않이 앉으세요! 됐죠!”

“근데 나도 침대 좋아해.”

“어쩌라는 거예요?!”

그녀는 고함을 빼액 내지르고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침대 시트 밑에서 뭔가 이물감이 느껴졌는지 몸을 세우고는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었다.

“어라, 이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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