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소녀검성-31화 (31/47)

〈 31화 〉 #030 규칙과 정의는 결국 쓰기 마련(5)

* * *

30.

그녀가 꺼낸 것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두께를 지닌 책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책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익숙한 물건인지, 표지를 보자마자 웃으며 내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동화책이네요. 히히, 어릴 땐 많이 읽었었는데!”

“무슨 책인데?”

“검성 실베스터 이야기요.”

“니미럴, 갖다 태워.”

나는 그것을 빼앗아 벽 한켠으로 던져 버렸다.

곧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주워 오기는 했지만, 저것을 차마 제정신으로 바라보고 있을 자신은 없다.

듣기만 해도 술이 땡기는 책 제목이 아닌가.

“동화책도 아니고, 그냥 소설책이군.”

“따지자면 역사서죠. 아니면 위인전?”

“뭐가 됐든 간에. 그냥 소설이야. 결국 싹 다 구라잖냐.”

단언컨데, 저 200페이지쯤 되어 보이는 책 내용 중에 진실은 열 장도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저 책 내용에 단 1%도 관여하지 않았고, 대체로 떠벌리기 좋아하는 카를로스와 에일랴가 온갖 무용담을 흩뿌리고 다닌 결과가 저 책일 것이다.

카를로스는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은총의 결과’ 운운하면서 직접 지랄했을 것이고, 에일랴는 옆에서 ‘산을 갈랐다면서요?’라는 질문이나 ‘하늘의 구름이 반조각이 됐다던데요.’ 라는 질문에 조금의 주저도 없이 ‘음! 그랬지!’로 일관했을 테니 저딴 소설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성왕의 헛소리를 산맥의 대전사가 보증 서 주면, 결국 영웅 둘이 그게 사실이라고 증언한 꼴이다.

그런데 지들도 좀 개소리라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지, 지들 이름 붙이기는 부끄러워서 내 이름을 붙인 것이고!

‘개새끼들…….’

지금까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곳, 듣지 못하는 곳에서 나에 대한 평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저 빌어쳐먹을 소설이 내 눈앞에서 뒹구는 꼴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거짓말이라뇨! 진짜거든요?! 당신이 영웅들에 대해 뭘 안다고!”

“……….”

…소설이 만들어낸 내 신앙에 푹 빠져든 소녀가, 눈앞에서 나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모습의 앞에서는 더욱이 그러했다.

“너보다는 많이 알 걸….”

“흥,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하프엘프 소녀는 고개를 홱 돌려 버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곧 독서에 열중했다.

하지만 곧 책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들켰다고 생각하는지 책을 들어 이마까지 책으로 덮어 가려 버리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하프엘프 소녀는 책 너머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인사나 할까요? 당신, 이름이 뭐예요?”

“실베니아.”

“성은요?”

“그냥 실베니아.”

“흐응, 끝까지 말 안하겠다는 거네요…….”

대충 표정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나를 귀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귀족 행세를 하라면 할 수야 있겠다만…….

‘난 그 놈들 생리랑 안 맞는단 말이지.’

뭐만 하면 명예, 뭐만 하면 명분…….

…뭐, 지금까지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외견만으로 나를 귀족으로 알던 인간들이 한둘이었던가.

어차피 이 모습으로 있는 동안 ‘론하르트’라는 가문명을 내 입으로 말하는 일은 없을 테다.

나는 못 들은 척 자연스레 대꾸했다.

“너는?”

“저는 소… 소…… 어, 소니아에요.”

“소소소니아?”

“소니아요.”

소니아가 단호하게 정정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멍청한 소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름을 안 것으로 만족했는지 이번에는 더 이상 힐끗힐끗 쳐다보지 않고 책에 열중했다.

어쩌면, 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이 방금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숨이야 절로 푹푹 내쉬어졌지만…….

저걸 당장 빼앗아 찢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그냥 명상이나 하기로 했다.

명상­ 마법쟁이들이 이르기를, 메디테이션.

몸 안의 마나를 가다듬고 흐름을 가속하여, 그 질을 더욱이 높이는 수련법 중 하나였다.

‘내 지금의 몸은 근육은 뭣도 없지만 아직 어린 육신.’

마나의 흐름에 있어 방해되는 노폐물이나 잡스러운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마나 수련에 최적화된 육체다.

기사든 마법사든, 괜히 어린 재목(??)을 찾아 길러내는 것이 노인네들의 소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내 마나는 막힘없이 몸 안을 질주했다.

마나 서클의 형태를 이루어 한 바퀴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를 돈다.

그리고 한 바퀴를 더하여 돌 때마다 그 속도가 가속하고, 주변에서 끌어들이는 마나의 양 또한 많아졌다.

그렇게 이룬 마나 서클의 숫자는 총 세 개.

‘여전히 내 심장에 깃든 마나에는 여유가 있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였다.

이 이상 마나를 끌어모아 몸에 집약시키면 근육과 혈관이 버티지 못해 산산히 부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마법사들은 이 서클의 숫자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위계를 나눈다.

서클은 곧 ‘마나를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나의 가용 용량이 많아질수록 더 큰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보통 그 시간을 수련하는 동안 지식 또한 축적되기에 더 고등한 마법을 익힐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마법사의 싸움은 높은 확률로 서클이 많은 쪽이 승리한다.

하나 많다면 60%정도, 둘이 많다면 80% 정도.

그리고 셋이 많다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승리한다.

더 많은 마법, 더 강력한 마법, 더 고등한 마법.

그 수준의 차이로 거의 모든 승부가 결정 지어지기 때문이다.

‘뭐. 기사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

더 많은 마나라는 것은, 곧 그만큼 더 오래 수련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검술은 마법과 다르게 육감과 경험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사선을 넘다들며 개화하는 전투의 재능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기사에게 있어 서클의 숫자는 ‘근력’의 척도가 될지언정 강함의 척도는 되지 않는다.

…조금의 참고 정도는 되지만 말이다.

‘괜히 기사들이 근육을 단련하는 게 아니지.’

마나로 행하는 근육의 강화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몸의 강인함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나에 한계가 있고, 익힌 검술의 방식에 따라 그 효율에도 한계가 정해진다.

지금의 내 몸은— 내 테크닉과 깨달음의 경지로도 고작 세 개의 서클이 한계인 것이다.

보통 제국에서 임명하는 평기사의 수준이 5서클.

그리고 명성높은 ‘제국 기사’의 수준이 7서클 이상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딱 ‘아카데미 신입생 수준’인 셈이다.

우월한 것도, 특출난 것도 아닌 딱 그 정도 수준.

옛날—그러니까 한 사십년쯤 전에— 기준이라 요즘의 수준은 모르겠지만, 어린애들이 발전해봐야 어린애이니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수련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단순한 육체의 수련.

내 여분의 마나를 전부 받아들여, 다른 서클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근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나아가, 조금 더 많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다시금 검기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어린 몸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지.’

어린 육신은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뛰어나다.

속된 말로 이르자면, 아직 사회의 어두운 면에 때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순수하고, 여전히 하얗기에, 자연 그 자체인 마나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몸 안에 마나를 빠르게 축적한다.

성인이 되서 하는 십 년의 수련이 어릴 때의 일년과 비견될 수준.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설마 정말로 그 정도라고 믿지는 않겠다만, 최소한 효율이 우월하다는 말의 방증 정도는 되어줄 것이다.

명상, 명상, 그리고 명상.

마나를 늘리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각자 익힌 검법에 맞는 명상법을 통해, 마나를 몸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심장에 축적하는 것…….

그저 그 뿐.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비약 같은 형편 좋은 물건을 바랄 때가 아니니까 말이지.’

솔디어한테 언질 해 두면 어찌어찌 하나쯤 구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솔디어로서도 마나를 늘려주는 영약이나 비약의 수급은 어려울 것이다.

사실상 개인으로서는 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황실이 개최하는 제전의 우승자 정도는 되어야 하나쯤 받아먹을까 말까한 물건들이니까.

‘뭐, 내 생전에 그런 거 먹어본 적이 없기도 하고.’

헛된 바람과 소망은 일찌감치 버려 두는 것이 나았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 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목표를 향해 꼴사납게 발버둥치는 생물이니까.

닿을 수 없는 소망을 향해 손을 뻗으면, 버티지 못하고 곧 익사해 버리는 것이 기사라는 족속이다…….

……….

………….

“아!”

그렇게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숨을 내쉬기를 반복한 내 명상을, 짧은 탄성이 귓가를 때리며 깨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창밖으로 비쳐오던 푸른 하늘빛이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 못해도 몇 시간은 지났을 것이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움츠린 어깨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탄성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소니아는 활짝 웃으며 내게 책의 한 페이지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거!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레드 드래곤 에이라오스를 상대로 다 같이 싸우는 장면이요!”

에이라오스?

누구더라.

그동안 모가지 따고 다닌 녀석이 하도 많아서 하나하나 기억해 두지는 않는다.

쫌 강한 녀석이면 기억하고 있을 텐데….

드래곤 에이라오스라.

조금 곰곰히 생각해 보던 나는, 며칠 전에 베일렌에서 보았던 인형극을 떠올리는 데에 생각했다.

그래, 거기서도 그 우스꽝스러운 드래곤이 등장했었더랬다.

아! 생각났다.

“로우렐 운석 한 방에 대가리 깨져서 삼도천 건넌 걔?”

대화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뒈져 버려서 떠올리는 것이 늦었다.

그 녀석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드래곤 꼬리 고기는 존나 맛있구나!’하는 감상 정도 뿐이라서 말이다.

하지만 소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 아뇨. 무슨 드레이크랑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에이라오스는 중반부에 나오는 최강의 적이라구요.”

“아… 그런 설정이었나.”

“설정이 아니라니까요.”

미안하다 소녀.

내가 아는 에이라오스는 드래곤 꼬치구이가 된 삼백년 산 도마뱀 뿐이라서.

하지만 저 절실하고 구구절절한 신앙심을 보아하니, 내가 뭐라고 해도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회상에 비참하게 동심이 깨져 버리는 것보다야 저게 나을 테지.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창밖으로 내비치는 거리는 이미 거의 비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별도의 지시라도 내려진 것일까.

‘시험은 언제 시작이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때쯤, 아주 절묘한 순간에 눈앞의 공간이 푸르게 번뜩였다.

—번쩍!

그리고 다음 순간, 푸르게 점멸한 공간에서 나타난 것은 몇 장의 종이였다.

양면이 빼곡하게 검은 글씨로 무어라 쓰여진 종이 뭉치.

‘편지는 아니고… 계약서도 아닌데?’

세상 어떤 멍청한 작자가 종이를 양면으로 사용한단 말인가.

내가 눈쌀을 찌푸리며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 종이를 넘길 때쯤, 이미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소네트의 의문이 내 귓가를 때렸다.

“시험지? 2차 시험은 필기 시험인 모양인데요?”

시험지라는 물건인 모양이다.

시험지가 대체… 뭐지?

요즘 젊은 것들은 종이를 그런 데에 낭비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건가?

나는 자연스럽게 눈쌀을 찌푸리며 글씨를 읽어갔다.

돋보기가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건 뭐야. 전투… 필기?”

“음.”

그리고 내가 돋보기도 눈 찌푸리기도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소네트의 그 말이 방 안에 공허하게 울릴 즈음이었다.

젊은 몸이 좋긴 좋아. 허리도 안 아프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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